◈42화 보다 나은 다음을 (7)
안내를 자청한 사내는 정말 엄청난 수다쟁이였다.
그뤼 텔츠가 내 고향이라는 둥, 원래 해적이었는데 손 털고 모험가가 됐다는 둥, 타타라 사건 이후 모험가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왔다는 둥, 지금은 동생의 주점을 돕고 있다는 둥. 한시도 쉬지 않고 떠든 거다.
“참으십쇼.”
문제는 데브였다. 나만 있었으면 귀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고 넘길 수 있는데, 데브가 착각하고 있는 나는 이걸 넘기지 못했다.
즉, 데브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서라도 빡침을 연기해야 했단 소리다.
“…네놈 스스로나 돌아보지.”
아니, 내 컨셉이 저런 수다쟁이 안 좋아하는 건 맞지만, 대놓고 참으라니.
내가 칼이라도 뽑을 거라 생각한 건가? 그 정도로 막 나가는 컨셉은 안 잡았는데.
데브가 오해하는 내 이미지를 도통 모르겠다.
“여길세.”
「그뤼 텔츠: 모험가 길드」
어쨌거나 모험가 길드에 도착했다. 나는 다른 도시에 비해 유난히 큰 건물의 문을 열었다. 밤임에도 불구하고 안쪽은 전등 몇 개가 켜져 있었다.
“예, 모험가 길드 그뤼 텔츠 지부입니다.”
사무관은 다른 의자에 발을 올린, 다소 거만한 자세로 우리를 반겼다. 손톱을 손보고 있었던지 고개가 반 박자 늦게 들어올려졌다.
“뭐야. 은퇴한다더니?”
“볼일은 내가 아니라 이쪽.”
바닷가 사람들 특유의 탄 피부와 밝은 갈색 눈동자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른한 건지 태만한 건지 알 수 없는 눈매가 금발과 만나니 다소 양아치 같은 인상을 주었다.
“어이쿠, 새 얼굴이시네. 야밤에 무슨 일로 오셨는지?”
그래도 일을 완전히 놓진 않은 듯하다. 우릴 보자마자 다리를 내리고 상체를 곧추세웠다.
“해룡에 관한 의뢰, 이야기.”
나는 사무관이 요구하기 전에 모험가 패를 창구 쪽으로 던졌다. 사전 동작을 가리지 않고 보여 줘서 그런지 사무관은 쉽게 패를 잡았다.
“인증은 됐습니다만…… 해룡님이요?”
“그렇게 말하면 저쪽이 못 알아듣잖습니까.”
다행히 내겐 컨셉의 실종된 말주변을 대신해 줄 혀가 있었다. 데브가 나서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 무슨.”
“그런 큰일이 벌어졌다니!”
얼떨결에 안 가고 같이 듣게 된 모험가가 분개하고, 사무관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영 뜬금없는 소리를 듣겠단 표정은 아닌데, 그렇다고 믿음 넘치는 낯도 아니었다.
“확실히 요즘 날씨가 변덕스럽고 어획량이 준 건 사실입니다만…… 별달리 발견된 정황은 없습니다. 이 도시엔 신전에 더해 마탑도 자리하고 있으니만큼 악마 숭배가 벌어졌다면 진즉 눈치챘을 겁니다.”
“그거야 두고 볼 일이죠. 그리고 원인이 무엇이든 해룡이 부정에 먹힌 건 확실합니다.”
“그래도 섣불리 믿기엔 사건이…….”
“아냐. 진짜일 거야.”
“얌마, 너.”
“타타라에서 수훈장까지 받은 양반이 뭐 하러 거짓을 말해.”
“잠깐, 뭐? 수훈장?”
사무관이 갑작스레 눈 크기를 키우더니, 저를 빤히 보았다. 이어지는 건 떨리는 목소리의 간청이다.
“저, 혹시 보여 주실 수 있는지…….”
“그것과 이것이 무슨 상관이지.”
“수훈장을 받은 모험가의 발언은 길드에서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증거가 뒷받침된다 해도 사실 확인을 위해 시간을 다소 소모하게 될 텐데…… 수훈장 모험가의 발언이 더해진다면 그 시간이 많이 단축되겠죠.”
역시 세상은 돈이나 명성이나 그런 게 있어야만 받아 주는구나. 나는 새삼스레 진리를 깨달으며 인벤토리를 뒤졌다.
훈장이 포물선을 그리며 사무관의 손바닥에 안착했다. 본인이 받다가 호들갑 떠는 바람에 몇 번 더 튕기긴 했지만.
“…나리는 저게 아깝지도 않습니까?”
“의미 없는 형식일 뿐이다.”
아까울 이유가 뭐 있나. 부와 명예도 마다하고 복수에 매달리는 게 악마기사인데. 나는 신경질적인 얼굴을 가장했다.
“정말로…….”
그사이, 훈장 진위 여부를 판별한 사무관이 입을 떼었다. 마른 혀가 아랫입술을 쓱 훑었다.
“정말로 해룡님에게 문제가 생긴 겁니까?”
“모른다.”
“문제가 생겼다면서요?”
“직접 보지도 않고 판단하는 취미는 없다. 가능성만 살 뿐이지.”
내 말에 사무관은 또 한 번 입술을 핥았다. 그러더니 훈장을 반납하며 하는 말이.
“당장 사안을 위쪽에 올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그리고 야, 너 모험가들에게 소식 좀 돌려. 긴급 의뢰가 떨어질 수 있다고.”
“알았어.”
어찌저찌, 내가 모험가 길드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이 달성된 느낌이었다.
* * *
“늦어서 미안함세.”
아크메이지는 가장 늦게 합류했다. 신전이야 원인이 뭐든 부정이 나타난 이상 그네들 문제라며 마땅히 나섰지만, 마탑은 또 다르기 때문이다.
아크메이지 본인의 말을 따르면 신전과 달리 마탑은 실리로 돌아간다나 뭐라나.
도의적인 문제─대부분 악마 관련이라지만─는 나름 나서는데. 이런 류의 문제는 으레 손해를 감수해야 하다 보니 자린고비처럼 굉장히 깐깐하게 검토한단다. 증거를 검토하다가 늦은 지금처럼.
“대현자면 나름 마탑에서도 고위 인사 아닙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까다롭게 굽니까?”
쌓아 둔 상자에 양반다리 하고 앉은 데브가 물었다. 아크메이지의 어깨가 으쓱였다.
“대현자라고 해서 전부 실권을 가지고 있진 않네.”
본인에게 권력이 없음을 시인하는 투였다. 그것이 부끄럽진 않으나 사실임을 인정하는, 더없이 담백한 목소리기도 했다.
“그렇군요.”
“그런 셈이지. 그보다 듣자하니 기대 이상의 협조를 이끌어 주었다는데. 자네 덕에 시간을 아끼겠어.”
“시간을 아낀다 함은…….”
“말 그대로입니다. 인퀴지터 덕에 성주에게도 소식이 일찍 닿았을 테고, 모험가 길드까지 이리 나오면…… 못해도 모레 안에는 조사대가 꾸려지겠지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아련한 심정이 되었다.
그래. 내일이나 모레 안에 배를 타야 한다는 거지. 잘 알았다. 또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구나.
“그럼 이틀 안에 출정한다고 생각하면 됩니까?”
“그건 아닙니다. 조사대가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본대를 보낼 테니까요. 저희는 아마 본대에 포함될 테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그건 첨병과 본대의 차이라. 그렇다는 건 해룡 레이드가 이뤄지는 날짜 자체는 기약도 하지 못하는 셈이다.
승선할 날이 멀어진 게 좋다가도 그동안 뭐 하냐는 고민이 들어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또 해룡과 싸워야 할 확률이 큰 이상 해룡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에 대항할 방법도 짜내야 할 뿐더러, 해룡에게서 버텨 낼 배도 구해야 하니…….”
“엄청 오래 걸리겠네요. 그러면 그동안 우린 뭐 합니까?”
“정해진 일은 없네. 다만 언제나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순 있겠지.”
이 말은 즉, 결국 다른 거나 하면서 시간 때우란 소리디. 보편적인 게임의 흔한 패턴이었다.
물론 그런 게임들은 플레이어가 말 걸면 ‘오! 준비됐나! 그럼 출발하지!’라면서 사전준비를 스킵해 주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어쨌든.
각설하고 그동안 뭐 한담. 여기서 할 수 있는 의뢰라도 털어야 하나. 안 그래도 돈 쓰기만 하고 수입이 없어서 문제긴 했는데.
“그렇다면…….”
스윽.
다짐이 서고 조건이 마련됐다면 바로 움직여야지.
나는 인퀴지터의 말이 끝나기 전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똑바로 허리를 세움에 따라 등에 맨 투헨더의 감촉이 무디게 전해져 왔다.
“어딜 가십니까?”
시간 낭비는 질색이다. 여기 의뢰들은 하나같이 오래 걸리니까 지금 되는 대로 받아 놔야지.
무엇보다 내가 의뢰 안 받고 빈둥빈둥거리면 악마다! 하면서 대가리 깰 인간들이 셋이었다. 나는 쉬고 싶어도 움직여야만 했다.
그런데 아, 여기도 받을 수 있는 퀘스트 개수 제한 같은 게 있으려나? 그럼 곤란…… 하진 않겠군. 내가 할 만한 의뢰가 많아 보이진 않았으니까.
걸리는 시간도 뭐, 레이드 준비까지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일주일 선까진 안전하지 않을까.
“어…… 모험가님?”
“의뢰.”
날이 밝으며 부산스러워진 길드지만, 사무원도 그만큼 늘었다. 나는 그중 한 명에게 당당히 추천 의뢰를 요구했다.
참고로 여기까지 안내해 준 모험가나, 우릴 응대해 줬던 양아치상의 사무관은 이 자리에 없다. 각자 할 일 하러 갔다.
“나리 사실 용의 자손이거나 철로 만들어진 골렘이라거나 하는 건 아니죠?”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데브 쟤는 뭐라는 거야. 인퀴지터는 평소처럼 해맑으니 그냥 그렇지만.
나는 원인 제공 만두들을 흘겨보다가 사무관을 채근해 의뢰서를 받아 보았다. 악마에 관한 의뢰는 바라지도 않았고, 지금 바라는 건 시간을 때울 수 있되 컨셉이 허용할 만한 임무였다.
“당장 하실 만한 건…….”
그러나 저번처럼 이런저런 조건을 내거니,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정도뿐일 것 같네요. 한번 보시겠습니까?”
정확히는 딱 하나였다.
“남쪽 연안에서 난리치던 해적들이, 슬슬 저희 쪽에도 올라와서요. 대대적으로 토벌에 나서려 하는데 그에 관한 구인 의뢰입니다. 앞으로 두 시간 안에 모집이 끝나고요. 나머지도 전부 현상금 사냥입니다. 제시된 해적의 목을 베어 오면 되죠. 오늘 대대적인 소탕이 있는 만큼 의미 없어질 가능성이 크지만요.”
혹은 한 분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즉, 어느 쪽이든 내가 결국 배에 타야 함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쯤 되면 운명이었다.
“…….”
“괜찮겠나? 자네 뱃멀미 심해 보이던데…….”
“예? 나리 멀미하십니까?”
침묵 좀 지키고 있으니 아크메이지가 쓸데없이 입을 놀렸다. 안 그래도 그 대목을 두고 고민 중이었는데, 방금 들은 발언으로 결정이 내려졌다.
내 입가가 파르르 떨리고 왼쪽 눈가 근육이 살풋 찡그려졌다.
“이걸로, 하겠다.”
흐아아악. 자존심 건드리면 안 되도 되게 만드는 거 알면서 왜 묻는 거냐고! 사실 나 괴롭히는 거지?! 그런 거지!?
“정말 괜찮은 거 맞나?”
으득.
나는 징징대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표정을 가장한 채 이를 갈았다.
전부 연기입니다, 라고 하고 싶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있나. 눈물이 나도 참아야 하는 순간이 지금이었다. 지금 감성질하면 캐붕이다.
“네놈들이,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다.”
나는 토막토막 잘라 말하며 눈에 힘을 줬다.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내 안에 차오른 울분을 그대로 눈에 담으면 그만이니까.
다행히 남들 눈에 비친 내 눈매는 썩 나쁘지 않은 형상이었다.
“무리하지 말게.”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무리하고 있었으니까 적용할 필요 없는 말 아닐까?
나는 병 주고 약 주고인 마법사를 노려보곤 의뢰서에 서명했다. 눈치 보던 사무원이 조용히 계약 성립되었노라 고했다.
“확인하셨겠지만, 적힌 장소로 가셔서 도시군과 합류하셔야 합니다. 오늘 8시까지입니다.”
대대적인 소탕이라고 해보았자 상당한 규모의 선단이 해적의 주된 활동 장소를 순회하는 정도다. 시간 때우기 용이니까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이긴 하지만.
보수는 두당 만 갈씩이라 하는데, 해적이 얼마나 된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돈이라도 탈 수 있으면 다행인 거 아닐까.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그, 그렇다면 모험가 패를 제시해 주셔야…….”
거의 멋대로 체결한 계약이나마 일행은 따라와 주려 했다. 그다지 기쁘진 않았다.
애초에 저 양반들만 아니면…….
아, 잠깐. 생각할수록 화만 나네.
“아, 이 늙은이는 이곳에 남는 것이 좋겠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감시할 사람은 하나 있어야 하는 법이니 말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전 모험가 패가 없는데.”
“이참에 새로 만드는 건 어떤가?”
나는 부글부글 끓는 억울함을 억누르며 몸을 휙 돌렸다. 세 갈래의 밑단이 새의 꽁지깃처럼 한차례 펄럭였다.
“앗, 기다려 주십시오!”
“으앗, 모험가 패 만들려면 시험도 봐야 합니까?!”
“아무나 모험가로 받지는 않습니다.”
“으으.”
참자, 참자. 세상엔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란 말도 있는 마당인데. 이것도 나름 기회인지도 몰라.
이참에 뱃멀미 한번 단련한다는 식의 기회. 뱃멀미가 과연 익숙함으로 덮어질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악마기사!”
“보수 없이 움직이는 건 딱 질색인데…….”
“그럼 이곳에 남겠나?”
“됐습니다. 저도 배는 경험해 봐야 하니까…….”
나는 의뢰서에 적혀 있던 장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젖혔다.
아크메이지도 빠지는 것 같은데, 내가 이 만두 두 마리를 이끌고 뱃멀미까지 견뎌 내는 게 가능할까?
갑자기 불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