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보다 나은 다음을 (1)
식당을 벗어난 후, 나는 아예 신전에서 나왔다.
그게 맞는 반응일 것 같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못 다한 식사를 마저 할 필요가 있었다. 나 포만감이 아직 다 안 찼다.
“어서옵쇼!”
거기에 하수도─2주 전─에서 소비했던 물자도 아직 보충을 못 해서리. 이번에야말로 넉넉한 시간 속에서 쇼핑을 하고 말 것이다.
“한참 찾았습니다?”
한데 그렇게 한 시간쯤 돌아다녔을까. 데브가 은근슬쩍 다가왔다. 살 건 다 산 상태라 상관은 없지만, 벌써 다음 퀘스트가 도착하려는 건가 싶었다.
“다음으로 갈 도시는 ‘그뤼 텔츠’랍니다.”
…난 아크메이지나 인퀴지터의 전언을 전달할 줄 알았지, 본인이 내줄 거라곤 생각 안 했는데.
「❖ 포르젠 지방으로
∎ 그뤼 텔츠로 이동」
“…가실 거죠?”
퀘스트고 나발이고, 아무래도 내가 없는 사이 현자가 데브를 기어코 꼬셔 냈나 보다.
* * *
“오셨군요!”
표정을 지운 채 데브의 안내를 따라 합류 지점으로 향했더니 들은 첫마디였다. 아무래도 김치만두는 내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근데 그거 아마 쓸데없는 걱정이니까.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컨셉상으로도 그렇다.
아무렴 악마가 일시적으로 몸을 차…… 지하는 데 성공한 이상, 앞으로도 그런 일이 반복될 수 있지 않은가. 몸을 점령한 악마가 주변에 피해를 입히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
반면 인퀴지터와 아크메이지는 그런 자신에게 즉각 대처할 수 있다. 쉽게 당해 줄 인력도 아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응해 줄 보험으로 삼기 딱 좋단 이야기다. 화가 머리까지 치솟아도 쉽게 떨어지지 못할 만큼.
“안 오실 줄 알았─.”
물론 그 어느때보다 심적 거리는 더 멀어졌다. 그러니 내게 말도 걸지 마라, 인퀴지터!
나는 찬바람이 쌩하니 불도록 그녀를 지나쳤다. 앗. 뒤에서 인퀴지터가 외마디 소리를 내었다.
“으와…….”
본인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내 무시 대상에 포함된 데브도 탄식했다. 참고로 쟤 여기 오는 내내 몇 번이고 말 걸었지만 내가 전부 씹었다. 으하학.
“이거 괜찮은 겁니까, 법사 나리?”
“내 목은 안 베였지 않은가?”
아크메이지가 슬슬 날 대하는 법을 알아낸 것 같다면 그건 기분 탓일까?
만약 그런 거라면 썩 좋은 일이다. 컨셉 입장에선 열받겠지만, 별개로 나는 아크메이지 위장이 걱정됐거든. 트롤만 잔뜩 있는 팀의 팀장 보는 것 같아서.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각설하고, 조금 시무룩해진 김치만두가 출발을 선포했다.
말들이 투레질과 함께 나아갔다. 올 때 탔던 아이들은 본래 주인에게 돌아갈 준비를 하는지라 지금 탄 건 신전에서 따로 준비해 준 말들이다.
배웅도 없었다. 이번엔 상행과 함께 출발하는 것도 아니고 신전에서 따로 사람을 보내지도 않아서.
“이봐, 잠깐!”
저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그랬다.
“저들은…….”
“모험가들이 여긴 웬일이람.”
뒤돌아볼 생각도 안 한 나와 다르게, 주변에 관심 많은 빨강·녹색 만두는 말을 멈추더니 허리를 틀어 가며 뒤를 보았다.
덕분에 나는 상황을 굳이 두 눈에 담지 않아도 지금 소리 지른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기다려!”
“잠시만요!”
모험가들이 우릴 부르는가 본데. 내 알바는 아니지. 나는 멈춰선 세 사람과 다르게 계속해서 평보로 나아갔다.
또그닥, 또그닥 하는 말발굽 소리가 귀를 즐겁게 만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안녕하세요, 사제님. 현자님.”
“악마기사에게 줄 것이 있어 부리나케 달려왔수다. 나참, 조금만 늦었어도 헛짓거리가 될 뻔했군.”
“아하하.”
“그보다, 이봐. 잠깐 기다려 달라니까?”
근데 왜 내 이름이 언급되는 거람.
“우린 자넬 찾아온 거라고.”
어째 본 적 있는 듯한 곰 형상의 샤기족이 내 앞길을 막아섰다. 나는 그것에 차분히 인상을 구겼다. 대충 내 앞길을 막은 것에 합당한 이유가 있지 않다면 날려 버리겠다는 표정이다.
그러자 샤기족 모험가와 적십자 문양을 단 이가 푸흐흐 웃었다.
“길게 붙잡지 않겠습니다. 받아만 주세요.”
적십자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아들어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훈장임을 알 수 있다.
까만 계열의 금속에 파란 원석을 박아 넣고, 한가운데는 모험가 길드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타타라 모험가 길드 전속 치료사, 아가트가 타타라 모험가 길드를 대표해 모험가님께 무한한 감사를 전합니다.”
어, 뭔가 간지 나긴 하는데 조금 뜬금없다.
설마 퀘스트 보상인가? 안 준다더니 이런 훈장 하나로 퉁치는 거야?
“그건 모험가 길드에서 주는 거고, 이건 네가 나눠 준 약 덕에 목숨을 건진 녀석들이 주는 거다.”
내가 ‘그래도 보상을 주긴 하는구나’와 ‘이걸 받는 게 맞나’ 사이를 오갈 때, 샤기족도 무언갈 내밀었다.
내 얼굴보다 큰 보따리였다. 입구가 꽉 닫힌 덕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쓸데없는.”
“하하…….”
“목숨 빚을 모른 체하는 모험가는 없어. 병사도 몇 명 끼긴 했지만.”
“이번 사건에 대한 보상이라기엔 보잘것없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감사를 표하고 싶었노라 여겨 주세요. 보수도 무엇도 바라지 않고 헌신해 준 모험가님께 최소한의 명예라도 드리는 게 마땅치 않겠어요.”
아무래도 퀘스트 보상은 맞는 것 같다. 단지 컨셉상 받기는 좀 애매할 뿐.
해서 도로 내밀까 하니 모험가들이 잽싸게 물러났다. 눈치 하난 아주 기똥찼다.
“거절은 사절이야.”
심지어 샤기족 모험가는 보따리를 내게 던져 주기까지 했다. 반사적으로 받고 나서야 아차했다.
“부디 모험가님께 행운이 따르기를.”
나는 결국 혀를 차며 그것들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보따리야 내용물을 모르니 넘기고, 훈장은 진짜 어쩌냐. 달고다닐 성격은 아니니 인벤토리행인데.
악성 재고 싫어어어. 좋은 의미로 준 거라 기분이 마냥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나리는 또 언제 약을 나눠 주셨대.”
“하수도에 혼자 들어갔을 때일 걸세. 역시 선의는 돌아오는구만.”
“한데 그전에 악마기사께서 받은 건 무엇입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훈장 같기는 했는데…… 자네는 아는가?”
“…공훈을 세운 모험가에게 주는 모험가 길드만의 명예 훈장일 겁니다요. 보통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의뢰를 해결하거나, 한 지방에 명성을 떨칠 만큼의 업적을 세운 이에게만 주는데…….”
모험가들이 실실 웃으며 물러나는 사이, 뒤쪽에서 데브가 설명을 내놓았다. 아이템 정보가 안 뜨는 지금 아주 좋은 설명이었다.
“기사 나리라면 받을 만하죠. 단신으로 하수도를 돌파하며 기백의 악마를 죽이다 못해 악마계약자만 열몇을 참살하지 않았습니까.”
별개로 그게 납득이 가냐면 글쎄. 하수도를 혼자 돌파한 게 그렇게 강렬한 업적이었어……? 차라리 역병귀를 해치운 인퀴지터가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컨셉만 아니었어도 관련해서 물어봤을 텐데, 그것 하나가 괜히 아쉽다.
“역시……!”
와중에 보스몹을 때려잡았을 인퀴지터는 질시 한 점 없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소리를 내어서.
나는 괜히 말을 보채어 속도를 올렸다. 남이 받을 상 대신 탄 것 같아서 조금 양심에 찔렸다.
* * *
목적지인 그뤼 텔츠는 소몬과 타타라 사이의 거리보다 배는 멀었다. 아무렴 산맥 하나를 지나야 하는데 가까울 리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점은 산등성이를 따라 관통하는 게 아니라 수직으로 횡단하는 거라는 점?
또, 우린 마법사 덕에 길 잃을 걱정도, 캠프 차릴 때마다 불침번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지형지물을 이용한 은폐와 함정 설치에 일가견 있는 데브가 합류한 뒤론 더 그랬다.
번을 세우지 않아도 맥없이 습격당할 걱정은 없단 이야기다.
그렇지만 나는 괜히 번을 서듯 일찍 일어났다. 백조가 우아해 보이는 건 아무도 보지 못하는 물밑에서 치열히 발장구 치기 때문이듯, 컨셉의 체면도 남 모르는 곳에서 노력해야 세워졌다.
뭐, 다른 이유로는 6시간 이상이라면, 7시간을 자든 12시간을 자든 피로도 깎이는 양이 엇비슷하단 게 있겠지만.
타닥타닥
그런 이유로 나는 동 트기 전에 기상해, 모닥불을 친구 삼아 검을 사각사각 갈았다.
예기가 잘 하락하지 않는 트루 투헨더와 달리, 롱소드는 수시로 예기가 하락해서 이렇게 매일같이 관리를 해줘야 했다.
그마저도 내구도가 70 아래로 내려가서 슬슬 수리하거나 바꿔 줘야 할 때가 된 듯하지만 말이다.
나는 손가락으로 흠집이 가득한 도신을 튕겨 보다가 이내 검집에 갈무리해 넣었다.
다음으로 확인할 건 며칠간 뒤적거렸음에도 다 파악이 안 된 선물 보따리다.
“이건 또 뭔지…….”
부적 같은 장신구 종류는 그나마 낫다. 그건 알기라도 쉬우니.
소금, 설탕 같은 향신료도 괜찮다. 가격이 어마어마한데 비해 사용처가 많으니까.
그렇지만 산초처럼 까맣게 생긴 알갱이라든가, 말린 풀이라든가, 반짝거리는 돌멩이는 대체 뭔지.
일부는 아이템 설명이라도 떴지, 아닌 것도 많아서 정체 파악하기가 고역이다. 더불어 내 인벤칸도 아슬아슬하고.
다음 도시에 가면 죄다 팔아 버리고 말겠다. 산맥도 다 넘어온 참인지라 오래 끌 일도 아니었다.
탁탁.
보따리 정리가 끝나기 무섭게, 좁게 파낸 구덩이 안쪽의 모닥불이 불통을 튀겼다. 보면 불씨가 다소 약해진 상태다.
툭.
하여 장작을 더 집어넣으며 불의 세기나 유지하기로 했다. 할 일이 없을 땐 불 지키는 게 제일 시간 때우기 좋았다.
홧홧거리는 불길과 고즈넉한 밤이 특유의 감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로그아웃.”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무의식적으로 꺼내 본 소원은 역시나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떠오른 창을 손짓으로 치웠다. 기대도 걸지 않았던지라 실망도 더는 없다.
워우우우우!
그런데 난데없이 갯과 동물 특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늑대 같은데, 어언 일로 이 주변에서 하울링하는지.
밤중에 늑대의 습격을 받는 건 또 처음이다.
푸르르.
흔한 잡몹인 만큼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만, 그래도 완전히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나는 결국 일어서, 늑대 울음소리에 깬 말을 다독였다. 그 순간에도 늑대 울음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
꼭 신호를 주고받든 우짖는 게 영 감이 안 좋단 말이지.
나는 힐끗 잠든 일행을 보았다.
알람마법도 있고 데브가 따로 함정을 설치한 것도 있으니 늑대가 본인 목덜미를 물기 전에 알아서 기상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렇게 일행들을 내버리고, 전등을 꺼내 들었다. 내가 쓸 건 아니고 말들이 매인 나무에 묶어 줄 요량이었다.
어두워도 기척을 읽을 순 있지마는 그래도 보이는 게 편하니까.
바스락.
「적의를 품은 대상이 반경 30m 이내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끝내 바라지 않던 밤손님이 도착했다. 따르르르. 알람이 울었다.
“적인가!”
“이런…….”
“뭐, 뭐야!”
“시발, 이래서 기사는 건드리면……!”
깨어난 일행의 목소리 사이로 낯선 사람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이걸로 단순한 습격이 아님은 밝혀졌다.
나는 어둠 속으로 몸을 내던지며 단검을 꺼내 들었다. 레벨을 올림에 따라 2개 제공된 표적마크 중 하나가 마침 내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양쪽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가니 거리 걱정은 없고. 오히려 염려해야 할 건 움직이는 표적을 단검으로 맞출 수 있는가, 인데.
깨갱!
다행히 맞았다.
“화살을 쏴……!”
야밤의 습격자들은 이런 식의 전개를 대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허둥대는 게 시야를 넘어서 전해져 왔다. 별로 동정할 마음은 안 들지만.
컹!
그때 또 하나의 늑대가 순식간에 접근해 내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표적마크가 아니었더라도 저렇게 선명한 존재감을 자랑하면, 내가 도저히 놓칠 수 없지 않은가.
뒤통수 부분부터 가슴팍까지 관통당한 늑대가 순식간에 피를 쏟고 내던져졌다.
“나를 보호하소서!”
비슷한 시점에 금빛 막이 반구 형태로 파악 퍼져 나왔다. 들린 소리로만 정황을 파악한다면, 인퀴지터가 달려들던 늑대를 처치한 직후 스킬을 펼친 듯하다.
화악!
어쨌거나 금빛 막이 부피를 불리며 아크메이지와 도적을 품에 가둔 것도 모자라 나와 말까지 영역에 넣었다.
“뭐, 뭐야 이건!”
“마, 마법?”
“기, 기사가 일어났어! 당장 도망…….”
“해룡이시여, 저흴 가호하소서…….”
그러나 습격해 오던 이들은 외려 금빛 막에 밀려나 뒤로 나동그라졌다.
타닥탁탁!
화살도 마찬가지였다. 조악한 화살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옅은 금빛 사이로 언뜻 보였다.
“시발, 안 일어나?!”
“해룡이시여, 제발 저흴 가엽게 여기시어…….”
아니, 그보다 이거 방어스킬인데 왜 내 HP를 떨구는 거야.
나는 하락한 HP를 두고 얄팍한 불쾌감을 느끼며 일단 자리를 박찼다. 마침 도망가는 표적마크가 바로 근처에 있었다.
“보내 줄 성싶으냐……!”
움직이지 않고 웅크리고 있던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나중에 잡아도 늦지 않을 터.
나는 컨셉에 심취한 채 외쳤다. 두어 개의 비명이 귀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속은 내가 제일 빨라서.
나는 도주하던 이 둘을 베어 내고, 가장 먼저 도망 갔던 이마저 쫓아가 등을 베었다. 검에 흐르는 핏물이 괜히 섬뜩했다.
‘이건 필요한 일이었어.’
그래, 이건 필요한 일이었다. 필요한 일이었지만…….
“아이고. 여행자 터는 산적놈 주제에 들개도 기르고. 근데 어쩝니까? 이리 운이 없어서.”
반대쪽에선 데브가 단검과 쿠크리로 습격자들을 학살하는 듯하다. 아주 유능한 몸놀림이었다. 말소리를 내는데도 그 기척 잡기가 제법 어렵다.
또한 아크메이지는 가장 늦게 일어났으나 상황을 파악하곤 주문을 외는 중이다. 인퀴지터는 가만히 있으되 방어막 유지라는 가장 큰일을 하고 있고.
촤르르륵.
곧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허연 사슬 따위가 솟아나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