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선택의 결실 앞에서 (10)
지친 몸으로도 무리 없이 돌파했던 하수도다. 한데 지금은 부상 페널티도 없고 피로도도 삭제된 마당이니.
심지어 레벨이 오르며 능력치도 일정 부분 상승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비록 스킬로 인한 전투력 상승은 기대할 수 없겠지만─다신 부상으로 고생하기 싫어서 치료를 우선해 찍었다─이 정도로도 충분하긴 매한가지다.
나는 손쉽게 하수도 내부를 전진했다.
“인간인가…….”
“저게 악마기사…….”
“철패는 다 저런 건가?”
별개로 내가 좀 강하다곤 하지만, 이건 너무 쉬운 거 아닌가. 인력이 없어서 질질 끌어왔다더니 얼마나 인력이 없던 거야.
이쯤 되면 플레이어를 부려 먹기 위해 내버려 둔 것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어떤 게임이 아니 그렇겠냐마는.
“으, 냄새.”
그때, 하수도까지 촐랑촐랑 따라온 데브가 코를 막았다. 지금껏 불만 한 번 토로하지 않더니, 일 끝난 후에나 불평하는 게 제법 프로답다.
별개로 이럴 줄 알았으면서 왜 따라왔는지는 이유 불명이지만.
“나리는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리가 있나. 데브는 그나마 후방에 있기라도 했지, 나는 앞장서서 싸우느라 오물이 옷에 다 튀겼다. 옷에 자동 세탁 기능이 아니었으면 제법 몸서리쳤을 거다.
“한 것도 없으면서 고작 냄새를 두고 투정하는가? 우습군.”
“그런 본인은 뭐 한 거 있답니까?”
“지금 뭐라 했지?”
너흰 싸워라. 나는 갈 테니.
내색 않고 견딜 수 있는 것과 있고 싶은 공간은 다르기에,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 남은 악마가 하나도 없음을 확정 지은 후라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오물이 묻었다가 다시 깨끗해진 옷자락이 펄럭 나부꼈다.
“그렇지, 매번 궁금했는데 그 옷들은 어디서 얻은 겐가? 아,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되네. 자동 복원이라는 고위 마법이 걸려 있는 게 신기해서 물어본 것이니.”
나는 그 물음에 무심코 시선을 주었다. 그냥 디럭스 에디션 덕에 얻은 아이템인데, 이게 고위 마법? 이게?
“그러고보면 자네는 참 기이한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지. 공간 확장 가방도 그렇고…….”
시작 장비 옵션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고, 컨셉 이미지 살린다고 유지해 온 참이다. 나중에 옷빨 괜찮고 상위 옵션인 장비가 나오면 갈아탈 예정이었고.
근데 말투만 보면 어째 시작 아이템에만 자동 세탁·수복 옵션이 달려 있는 듯해서. 아니, 최소한 상점제 아이템엔 그런 기능이 없을 것 같아서.
“…내게 신경 끄란 말을 몇 번이나 해야 하지?”
나는 입으로 사납게 으르렁대면서도 속으론 머리를 부여잡았다.
만약 그게 진짜라면 절대 못 갈아탄다. 자동 빨래는 간지를 넘어서 편의성의 1순위를 담당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그만 가세.”
내게 폭탄을 떨군 주제에 아크메이지는 총총 바깥으로 향했다.
모르고 나중에 된통 당하는 것보단 나으나, 함에도 그 뒷모습이 얄밉게만 느껴졌다. 너무한 사실을 알려 준 주체가 된 대가였다.
“…러나 함께하는 건 나다. 네놈이 아니라.”
“그건……!”
와중에 쟤네는 아직도 싸우네. 용사를 향한 사제들의 존경심이 사라지는 거 안 보이냐.
“애초에 이해할 수 없군. 왜 하수도까지 따라온 거지?”
하지만 그 분쟁이 영 쓸모없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을 인퀴지터가 대신 해주었다.
“…….”
데브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수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 그러고보니 인퀴지터. 제가 이 말씀을 안 드렸군요.”
아니다. 앞서 걷던 아크메이지가 다시 돌아봄에 따라 적막이 깨졌다. 등불에 은은히 비치던 그녀의 은빛 갈기가 유달리 반짝반짝 빛났다.
“다음 동료로 저 청년은 어떻습니까?”
“예?!”
데브가 아무리 봐도 합류하기 애매해서 어떻게 되나 했더니, 이걸 이렇게 푼다고?
“무, 무, 무슨.”
“저, 절 말한 겁니까 지금?”
한데 아크메이지의 제안에 인퀴지터와 데브가 둘 다 고장 났다. 둘다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지라 표정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제 귀를 의심하고 있음을 알겠다.
“그렇다네. 자네가 응한다면, 에 한해서지만.”
“전 반대입니다! 이자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댁보단 도움이 되겠죠.”
“네놈!”
“왜요, 내가 틀린 말 했습니까?”
“이, 이익……!”
나는 그쯤 되서 예지에 가까운 직감을 느꼈다.
저거, 저거. 저러다 욱하는 바람에 휘말리듯 어영부영 합류하게 될 것 같은데. 창작물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자주 본 케이스였다.
“인퀴지터. 사감을 빼고 생각하시지요. 이번에 그 덕분에 해결된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의 활약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말입니다.”
“그, 그건…….”
별개로 내가 신경 쓸 부분까진 아니라, 난 그냥 걸음 속도나 높였다.
데브가 팀에 들어오든 들어오지 않든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합류해 봤자 컨셉 때문에 잘 대해 주지도 못하고.
“자네에게 제의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세. 우리는 악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되, 그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하니. 진실을 꿰뚫는 눈과 숨겨진 것을 찾아낼 줄 아는 자네가 함께한다면 분명 많은 도움이 될 걸세.”
“그, 그렇게 띄워 주셔도 좀 곤란합니다만.”
“물론 안전은커녕 목숨조차 보장할 수 없는 여정이니만큼 자네에게 강요하진 않을 걸세. 다만 우리가 자네와 같은 인재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진 않네. 하니, 부디 이 늙은이를 봐서라도 숙고해 주지 않겠나?”
나는 능구렁이 같은 현자가 말로 데브를 살살 꾀는 걸 귀로 들으며 하수도를 나아갔다. 탐색한 시간이 무색하게 출구는 금방 다가왔다.
“…악마기사께서도, 저치가 필요하다 생각하십니까?”
다만 하수도의 끝 지점에 다다를 무렵. 다가온 인퀴지터가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난처한 질문이었다.
누가 합류하든 내 컨셉상 신경 안 쓸 텐데. 물론 과하게 호감을 표하는 너희 두 놈을 성가시게 여길 타이밍은 됐다. 엄밀히는, 밀어내도 물러나지 않는 것에 초조해질 타이밍이.
“관심 없다.”
나는 뒤쪽에서 데브가 귀 기울이고 있음을 인지한 채 컨셉에 맞는 대사를 골라냈다.
“악마를 죽이는 데 방해가 되면, 버릴 뿐이다.”
쓰으으읍. 이번 즉흥 대사 망했다. 너무 구리다.
* * *
우리는 정화를 마친 후, 다시 신전으로 돌아와 잠깐의 휴식을 가졌다. 휴식이라고 해봤자 오물 묻은 거 씻으라는 소리였지만 아무튼.
“참, 인퀴지터. 전에 휘오스타 지방으로 가자 하셨지요. 제가 생각하기엔, 휘오스타보다 포르젠 지방이 나을 것 같습니다.”
씻고 난 다음 차례는 조금 늦은 점심 식사라. 나는 샐러드를 입에 밀어 넣으며 아크메이지의 발언을 가만히 들었다.
“포르젠이라면…… 서남쪽 말입니까?”
“예.”
우리 중 가장 먼저 식사를 마친 아크메이지가─샤기족인지라 식사량이 그리 적은 편이 아니었음에도─천천히 제 발언의 근거를 내밀었다.
“그쪽에서 심상치 않은 소문이 돌고 있는 것도 그렇고…… 동료도 더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저 청년이 합류해 준다고 해도 넷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전 아직 결정 안 했습니다만.”
“하면 더더욱 필요하겠군요.”
인퀴지터가 데브를 한번 째려 보았다. 데브는 귓등으로도 그 시선을 받아 내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상태로선 휘오스타는 너무 위험하단 판단이 들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바로 이번 일 때문입니다. 인퀴지터. 비열한 악마숭배자들이 도시 하나 몰락시키자고 이번 일을 벌였으리 생각하십니까?”
“……!”
판단의 이유야 난 아까 들었으니 의미 없고. 휘오스타는 어디고 또 왜 위험하담.
가물가물한 원작 설정을 더듬어 봐도 영 짐작 가는 게 없다. 난 몇십 년 전 게임의 지도를 기억할 만큼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다.
“인퀴지터가 휘오스타로 가고자 함은, 결국 그곳에 있는 북부전선에 손을 보태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러나 북부전선은 사탄이 기거하는 마왕성과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지금 그곳에 갔다간 또다시 노림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북부전선은 또 뭐고, 마왕성은 또 어딘데.
나는 눈치껏 그들이 내놓은 지도를 살펴보았다. 안개에 휩싸인 월드맵과 달리 대략적이나마 세상의 형태가 그려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동그란 형태의 대륙과, 그 중앙에 까맣게 칠해져 표기된 마역魔域이 유독 눈에 띈다.
마역을 둘러싼 경계선과, 그 경계선에 붙여진 ‘최전선’이란 이름도.
그중 휘오스타는 마역 바로 위, 포르젠은 딱 서쪽에 있는 지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치면 다른 지방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전선에 다가간다면 어딘들 위험하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사탄이 직접적으로 군대를 보낼 거리와 아닌 거리는 큰 차이가 있는 법입니다. 하물며 금번 일로 대륙에 퍼져 있던 사탄숭배자가 많이 줄었을 터. 마왕이 직접 손쓸 만한 곳까지 가지 않는 이상 저흴 노릴 여력은 없을 겁니다.”
“그런…….”
“놈들에게 여력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더욱 서쪽으로 가야 합니다. 여차하면 대신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
아크메이지의 발언은 제법 짜임새 있게 타당한지라. 인퀴지터가 아쉬워하는 만큼 나도 많은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거 결국 서부-남부-동부-북부, 마지막 마역 순으로 대륙 뺑뺑히 돌리기 위한 빌드업 아닌가?
“대신전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다소 꺼려질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인퀴지터, 이번 일로 깨닫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에겐 좀 더 많은 경험과 지혜를 갖출 필요가 있음을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요. 네. 현자님 말이 맞습니다. 저는…… 아직 많은 게 부족합니다. 지금 상태로 북부전선에 가봐야 제대로 된 도움을 드리지 못하겠지요.”
다만 지금 하나 큰일 난 게 있다.
이 설정을 알아 버린 지금, 내 컨셉에 중대한 오류가 났음도 알아 버렸다.
「※마왕 토벌을 위한 두 걸음※」
인퀴지터의 수긍을 따라 메인 퀘스트가 갱신되든 말든, 나는 심각해졌다.
아무렴 악마를 증오해서 목숨도 도외시하는 놈이, 마역의 존재를 알고 안 가는 것도 이상했다!
아니, 이미 안 간 시점에서 이미 망했다!
“이건 자네를 위한 것이기도 하네.”
이, 이걸 어떻게 커버하지. 이 오류를 덮을 만한 설정이 뭐가 있지!
그렇게 심각히 고민하려던 차, 아크메이지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 말이 예민한 부분을 건드릴 수 있음은 아네. 다만, 확실히 매듭짓고 가는 게 우리 모두에게 나을 테지.”
그건 어쩐지 나를 구원할 것 같기도 하고, 나락으로 처박을 것 같기도 한 어투라.
나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이번 목적지를 고민하던 와중, 그런 의문이 들더군. 악마를 그리도 증오하는 자네는 어째서 북부전선으로 가지 않았는가. 아니, 꼭 북부전선만이 아니네. 어떤 곳이든 최전방이라면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 자네지 않나.”
여기서? 이렇게? 컨셉 오류를 꼬집어 버린다고? 이건 게임 특유의 어쩔 수 없는 전개와 내 설정이 꼬이면서 벌어진 일일 뿐인데……!
“함에도 변경을 떠도는 건…….”
설마 여기서 캐릭터붕괴 났다며 또 악마라 의심받는 건 아니겠─.
“자네가 그레첸이기 때문이겠지.”
응?
“내가 왜 그것을 아는지 궁금해할 필욘 없네. 소몬에서 악마계약자가 자네를 그레첸이라 부르지 않았나.”
나는 뜬금없는 단어의 등장에 얼굴을 더욱 일그러트렸다. 동시에 머릿속은 팽팽히 돌아가는 중이다.
뭔진 모르겠지만 내 설정 오류를 덮을 만한 정보가 나올 것 같다……!
“자네가 잠든 2주 동안 마탑에 연락해 관련 자료를 받아 보았네. 그 결과, 고대 문헌에서 같은 이름이 나오는 걸 알아낼 수 있었지.”
나는 오른팔로 무기를 잡고, 왼팔로 오른팔을 쥐었다. 저 뒤에 어떤 말이 이어지는지에 따라 내 명운이 갈렸다.
“일곱 대악마중 ‘분노’에게 공물로 바쳐진 자, 혹은 ‘분노’를 소유한 자, 그레트헨.”
“……!”
“그, 무슨…….”
내 일인데 왜 만두 두 놈이 더 놀란 얼굴을 하느냐마는, 나는 다음 말에 집중했다.
필사적으로 살핀 아크메이지의 태도는 적의가 묻어 나오지 않았다. 하면 다음에 나올 말도 제게 유리할 터였다.
“대악마는 사탄의 직속 수하나 다름없지. 아, 걱정 말게. 자네가 악마의 하수인이라 여기지 않으니. 다만…… 자네가 경계한 건 그 지점이 아닌가? 사탄의 영역에 들어서면 그 존재의 영향이 더해져, 억누르고 있던 악마의 힘이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음을. 오른팔의 악마가 날뛸 가능성이 높아짐을 말일세.”
그건 설정 오류를 덮기 딱 좋은 변명거리라.
나는 원수와 은인을 둘다 해내는 양반을 보며 울컥했다.
당신네들이 처음부터 컨셉을 강요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일희일비할 일 없었을 텐데……!
“…그걸, 입밖으로 낸 저의가 뭐지?”
그래도 연기는 이어져야만 한다. 팀킬 당하긴 싫으니까. 흑흑.
“날 죽여야 한다는 판단이라도 섰나?”
“오해 말게. 그럴 리가 있겠나.”
그래도 아크메이지의 말투를 보면 상황은 꽤 좋게 돌아갈 것 같은─.
“단지 이런 걸세. 어차피 우린 당장 전선에 들어갈 수 없으니, 그 시간을 이용해 자네 팔의 악마를 봉인할 수단을 마련해 본다든가 하는. 어떤가, 이 가능성은?”
─수준이 아니라 이거 원작 전직 갈래 얘기잖아. 원작에서 악마기사의 전직은 봉인 여부를 두고 두 개로 갈리니까.
전직 시스템 없어졌다더니 스토리에 편입됐나?
“만일 불쾌했다면 사과함세. 하지만 악마기사. 언제까지 그렇게 다닐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러나 그 지점에 몰두하여 이것저것 궁리해 보기엔 상황이 좋지 않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가장 적합하다 생각하는 반응을 보였다.
“감히, 뚫린 입이라고……!”
아, 내 컨셉은 스스로를 너무 혐오해서 나아질 기회가 주어져도 안 좋아한다고.
콰앙!
나는 검을 뽑았고, 식탁을 가르다 못해 참격을 내질렀다. 아크메이지의 옆자리를 검은 기운이 긁고 지나갔다.
소음이 할퀴곤 자리에 옅은 숨소리만이 남았다.
“나리…….”
근데 여기서 뭐라 말을 잇자니 딱히 생각나는 대사가 없다. 저번 거 또 써먹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말을 꼭 해야 하는 부분이냐면 해석하기에 따라 또 다른지라.
쾅!
그래서 그냥 식당을 나가기로 했다.
아무렴 과거로부터 이름도 버리고 도망친 설정 아닌가? 이번에도 도망칠 수 있는 거지 뭐.
이 설정이 제일 용납할 수 없는 건, 자기자신의 행복일 테니까.
* * *
쾅!
데스브링거는 충격적인 대화가 오간 끝에, 기어코 식당을 박차고 나간 악마기사의 빈 자리를 응시했다.
“왜 그리 유난인가 했더니…….”
소몬에서 타타라에 오던 날의 아침, 악마니 뭐니한 발언도. 검에 두르는 기운이 유난히 불길한 검정색인 이유도. 모두에게 자비로운 신성력에 오히려 피만 쏟던 까닭도. 저 샌님이 간호를 전담하다시피하며 악마기사의 오른팔에만 붕대를 칭칭 감아 주었던 것도.
이제 알 것 같다. 아니, 완전히 깨달았다.
“팔에 악마가 있었던 거냐고…….”
그런 이유였다면 누군들 아니 그러겠나.
“그는 강인한 사람이다.”
“…뭐요?”
“악마가 그 팔에 담겨 있다곤 하나, 그분을 악마라 취급하지 말란 거다.”
“뭔 개소릴…….”
데스브링거는 무의식적으로 반문을 던지려다가, 이내 말끝을 흐렸다. 악마기사의 팔에 악마가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정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나?
“…….”
동시에 2주 전, 악마에게 삼켜지던 순간까지도 자신의 목숨보단 악마의 구제를 우선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저 세계를 갉아먹는 해충들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을 뿐이다.』
들을 땐 단순히 감명받았던,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뼈가 있던 그 말도.
“아, 씨…….”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내뱉은 건지 가늠할 수도 없다. 다만 몰이해 뒤에는 경멸과 거부감 대신 탄복과 가탄만이 들이찰 뿐이다.
그가 악마기사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절대 저처럼 굴지 못했을 것이므로.
“…이봐요.”
하여 데스브링거는 반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후회될 선택임을 알아도 어쩔 수 없었다.
“거, 제가 정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까?”
치기 어린 결정은 젊은 사람의 특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