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선택의 결실 앞에서 (8)
“놈들의 목적을 확실히 알았네. 그들은 이곳에 역병의 저주를 내릴 심산이었어.”
선을 다시 그음으로써 완전히 비즈니스적 태도로 일변한 마법사가 내게 설명했다.
“해당 의식 자체는 그다지 쓰이지 않네. 들이는 수고에 비해 완성되기 전 들킬 가능성이 높고, 병에는 피아 구분이 없어 본인들도 죽을 수 있기 때문이지. 의식을 준비하는 것보다 병에 걸린 쥐새끼들을 푸는 게 더 빠르고 말일세.”
그건 그나마 나은 이야기였다. 역병을 얕보는 건 아니지만, 내가 상상했던 건 대규모 즉살 같은 부류였으니까.
본인들도 당할 수 있다면 페스트(흑사병)나 천연두 같은 것도 안 쓸 테고.
“함에도 역병 의식이 펼쳐지는 건, 역병의 저주에 걸린 이가 제물의 조건을 충족하기 때문일세.”
오…… 그건 좀 섬뜩한 이야기였다. 결국 이 소동이 중간 절차 중 하나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된 거니까.
나 언제 쉬냐.
“진짜 목적했던 의식은 도시 바깥에 있을 가능성이 높네. 어느 쪽이든 지하도는 눈속임을 위한 것이었을 테고.”
글쎄. 꼭 눈속임만은 아닐 듯하다. 그 속박. 용사를 위해 준비했다고 하니까. 시간 끌기도 있겠지만 용사 자체를 노렸던 것도 있겠지.
“문제는…… 역병의 의식이 한번 시작되거든 마법진의 축 하나를 부순다고 끝나지 않는단 점일세. 중심이 되는 5개의 축 전부를 없애야 효과가 완전히 사라질 걸세.”
어, 그러니까. 역병의 저주가 만약 완성된 후에야 저렇게 부서진 거면 우리 망할 수 있다는 거지……?
머리가 멍해서 이게 확실한지 판단할 수가 없다. 나는 머리를 살짝 털다가 이게 과연 메인퀘 시작 난이도로 합당한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몬스터 레벨이 문제가 아니라 초반에 나오기엔 스케일이 너무 과했다. 나중에 가선 어떻게 하려고.
“역병의 의식이 시작조차 안 됐더라도 문제네. 놈들의 악의라면 쓰이지 않은 제물로 소환 의식을 벌일지도 모르니.”
어쨌건 무조건 5개 다 찾으란 건 알았다. 그래, 플레이어가 심부름꾼이지 뭐.
「❖ 뒷면에 숨은 것]
∎ 악마숭배자들의 계획 저지하기
∎ 의식의 축 찾기 1 / 5」
퀘스트가 갱신되고, 돌연 어떤 생각 하나가 뇌를 스쳐 지나갔다. 내 걸음이 멎었다.
“반대로 가지.”
“……?”
“서쪽 거리에 축이 있다면, 거긴 그쪽으로 향한 무리가 해결할 테니.”
이것도 다섯 개의 축이 정오각형일 때 한정이지만……? 지금까지 마법 쓰는 거 보면 죄다 원형진에 축 잡고 있으니까 맞지 않을까.
“…자네 말이 맞네. 다만, 할 수 있나?”
“네놈이 헛짓거리만 하지 않는다면.”
아, 그럼 다시 돌아가야 해? 으아아악. 부상 페널티 빨리 삭제 좀.
* * *
“이번에도 맞았군.”
인퀴지터는 어김없이 악마숭배자로 밝혀진 민간인들을 무릎 꿇린 채 메이스를 바닥에 꽂았다.
작열한 열기가 살갗 아래를 꽉 메우면 곧 휘황찬란한 광휘가 지상에 남은 마기를 녹여 버렸다. 부정에 절여졌던 시신도 정화되어 안식을 되찾았다.
“못 알아보는 게 머저리겠죠.”
으스대는 꼴이 실로 꼴불견이었으나, 이번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적들의 수작에 넘어가 지하도를 해메는 동안 이치는 지상에서 이뤄지던 의식을 방해했다.
심지어 상황을 확인하러 온 이들의 존재를 확인해 두었을뿐더러, 그들을 잡은 뒤엔 추가 의식 장소까지 찾아냈다.
그에게 주어진 힌트가 이게 역병 의식─5개의 축이 있으며 축은 정오각형으로 위치한다는─이란 정보뿐이었음을 고려하면 굉장한 쾌거였다.
“아니면 댁이 무능한 거거나.”
“……!”
그렇지만 저 말은 도저히 넘길 수 없다.
이게 역병 의식이라는 것조차 해당 교구의 이단심문관이 합류하고 나서야 알았지만. 저치가 눈썰미 하나로 숨겨진 진실을 밝혀 내는 동안 그녀는 아무것도 못 하긴 했지만……! 그래도!
“됐고, 빨리 하나 더 찾죠? 거긴 이미 다 튀었을 것 같긴 한데.”
방금 찾아낸 장소마저 의식의 흔적만 남아 있었을 뿐, 치르던 자들은 없었다.
다행히 주변을 수색한 끝에 셋 정도 잡아들이긴 했지만…… 다음 장소까지 그것을 기대할 순 없을 터였다.
“…그래.”
그렇다고 안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분함을 씹어 삼키며 방향을 어림잡았다. 정오각형으로 축이 존재하고, 3개의 위치를 알아낸 이상 나머지 것의 위치를 셈하는 건 어렵지 않다.
대략적인 위치를 구하는 거지 정밀하게 계산하는 건 아니라 발로 뛰는 건 계속되겠지만.
“가지.”
그녀는 사람들을 다독이며 서둘러 발을 재촉했다. 악마기사가 생각날 만큼, 아니 그보다 날렵한 도적을 따라가려면 걸음을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콰앙!
“……?!”
한데 추측해 낸 일대에 다다른 순간, 인퀴지터는 익숙한 기운을 인지했다. 폭발음은 덤이었다.
“이건…….”
악마기사인가? 그렇다기엔 평소보다 더 짙은 것 같은데…… 아니, 애초에 그는 아직 지하도에 있을 테다.
아니면, 설마 그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온건가? 혹 그와 비견되는 강자가 상대 측에 있었거나?
어느 쪽이든 반길 만한 이야기는 못 된다. 그녀는 약간의 불길함을 가슴 어림에 둔 채 다리에 힘을 싣었다.
무도한 도적 녀석도 저 소란을 감지했는지 건물 위를 통통 튀어다니던 몸의 진로를 틀고 있다.
“기사 나리!”
“악마기사!”
하여 밝혀진 결론은, 그녀의 예감이 둘다 틀리지 않음을 말하니.
폭음의 주인은 악마기사가 맞았다. 회색과 검정색이 대립을 이루는 머리칼의 주인은 오직 그뿐일 것이므로, 악마기사일 수밖에 없다.
“인퀴지터……?”
“잘됐군.”
크어어!!
그리고 적측에 무시 못 할 강자가 있는 것도 맞았다.
“정화해라.”
쿠어어어!!!
세상의 모든 악마를 외운 그녀조차도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악마가 악마기사를 반쯤 삼키고 있었다.
* * *
시간을 돌려, 인퀴지터가 도달하기 전.
나는 일련의 사건과 그 최종 결과물을 두고 눈을 비스듬히 떴다.
“흐, 흐하하하! 계획은 실패했어도, 네놈만은 데리고 가겠다!”
시행은 되었으나 그 직후 바로 발각되며 성공의 의미가 없어진 역병 의식. 발악이라도 하고 싶었던 건지 저리 외치며 죽은 술자. 그리고 그 술자들의 목숨을 토대로 시행된 무언가.
“배신자, 네놈만은 절대로…….”
마법진의 중심에 있던 이유가 있는지, 마지막까지 살아 있던 악마계약자가 그 말을 남기고 쓰러졌다. 구멍이란 구멍에서 전부 토해진 핏물은 이내 오수가 되어 그 육신을 집어삼킨다.
꼭 모 유명 애니메이션 영화의 오물신을 보는 것 같았다. 이제 거기에 코즈믹 호러를 더해야겠지만.
「???│???」
근데 몹 정보 실화냐. 이럴 거면 띄우지 말든가.
“늦었나……!”
어쨌거나 아크메이지는 간발의 차이로 막아 내지 못했단 게 퍽 통탄스러운 모양이다.
나? 나는 사실 그저 그랬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닌데, 그것보단 내 이럴 줄 알았지 싶은 마음이 더 크달까.
그도 그럴 게, 앞선 모든 퀘스트가 이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암시했다. 그만큼 규모가 큰 퀘스트란 이야기다. 실제로 도시 하나의 명운이 달려 있기도 하고.
그런데 이렇게 길게 끌어온 퀘스트에서 보스가 안 나온다? RPG 특성상 그런 일은 없다. 결국 이 상황이 새삼스러울 이유는 하나도 없단 소리다.
거기에 계속 간발의 차로 보스를 소환하는 것 보면 애초에 막을 수 없도록 설계한 성싶다. 이러니저러니 필요 이상 안타까워할 이유도 없다.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별개로 피곤함을 억눌러 가며 억지로 합류하길 잘했지.
보스전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특정 게임은 민간인NPC를 못 지켰단 이유로 GAME OVER를 띄울 때가 있다.
막으라고 경고는 해주는데…… 여기 거리가 보통 넓어야지. 막으러 달려오다가 끝날 거다.
거기에 이 장소, 다른 데와 달리 건물이 유달리 좁고 내구도가 영 부실하다.
빈민가라 어쩔 수 없다지만 이러면 민간인 피해 나기 딱 좋다. 더불어 이놈, 코즈믹 호러 오물신 아니랄까 봐 부글부글 끓면서 몸체를 늘리기까지 한다.
아무리 봐도 광역공격기 가진 보스다.
“저걸 혼자 상대할 셈인가?!”
평소라면 미쳤냐, 라고 대답하겠만 이 게임이라면 가능할지도?
여기 잡몹들 난이도 생각하면 보스전도 의외로 싱겁게 끝날지 모른다. 부상 페널티가 아직도 있는 걸 고려하면 아닐 수도 있고.
“두 번 말해야 하나?”
나는 거의 지팡이처럼 쓰던 롱소드를 고쳐 쥐었다.
목이 영 칼칼한 게 물 좀 마시고 싶으나 그럴 시간이 없다. 오물신이 아직 미완성 상태일 때 딜을 조금이라도 더 넣어야 했다.
브레이커. 가장 익숙한 형태의 공격이 첫출발로 나아갔다. 나무판자로 만든 집 절반을 채운 오물덩어리 일부가 깊게 갈라졌다.
“빌어먹을, 자네는……!”
아크메이지가 방금 욕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나 저 양반 욕하는 거 처음 들어.
우우우.
그사이, 반으로 갈라진 오물이 내게로 팔을 뻗었다. 그걸 팔이라도 해도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거기에 점성이 있을지언정 액체는 액체라. 반으로 갈렸던 것도 다시 메워지며 합쳐졌다.
이놈. 아무래도 나랑 상성이 잘 안 맞는 것 같다.
가뜩이나 HP 표기가 안 돼서 겉모습으로만 가늠해야 하는데. 이러면 부상 정도를 알 수가 없다.
퍼억!
그래도 싸우긴 싸워야지.
나는 검으로 다가오던 팔들을 쳐냈다. 진흙 날아가듯 날아간 오물덩어리가 벽면에 닿아 주르륵 흘러내렸다.
별로 효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정말 다른 의미로 보스다운 놈이었다.
“쿨럭!”
그러다가 피가 울컥 쏟아졌다. 아프진 않은데 몸에 힘이 빠지며 넘어질 뻔한 건 덤이다.
빌어먹을 부상 페널티였다.
“조금만 버티게!”
뒤에서 무언갈 하고 있는 아크메이지가 외쳤다. 다른 때였으면 필요 없다고 받아치겠는데, 지금은 그 말이 외려 반가웠다.
“…를 전하소서!”
곧 귀에 무언가가 웅웅 울렸다. 악마가 나타났으니 집밖으로 나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부터 멀어져라. 말투는 조금 달랐는데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브레이커……!”
사람들 대비시켰으니 지금부턴 딜 넣어 주시겠지. 아. 제발. 화끈한 거 한 방만.
나는 그런 바람을 담아 힘겹게 검을 내려찍었다.
쿠어어어어!
역시나, 효과는 그닥이었다.
“악마 새끼가…….”
콜록, 콜록. 피 섞인 기침을 토해 내며 일단 뒷걸음질 쳤다. 오물덩어리가 공격하려는 기미를 보인 것도 있고, 집 대부분이 저놈의 몸뚱이로 가득 차 후퇴해야만 했다.
“나가라.”
“억.”
주문을 외우던 아크메이지의 목덜미를 잡고 뒤로 던졌다. 던진다고 해봤자 현관문 바깥이었지만.
쾅!
때마침 내가 있었던 자리에 오물덩이의 거대한 팔─차라리 대가리를 들이박는 게 아닌가 싶은 굵기였다─이 박혔다.
간신히 현관문 쪽 벽까진 휘말리지 않았지만, 그래 봤자다. 곧 터져 나올 게 분명했다.
“커헉.”
그래도 한숨 돌릴 틈은 되겠지. 나는 거리 밖으로 좀 더 물러난 후 억지로 버티던 토혈을 풀어 주었다.
반동으로 내 무릎이 꿇리고 흙바닥에 피가 왈칵 엎어졌다. 아프진 않은데 진짜 기분 별로다.
“괜찮은가?”
이게 괜찮아 보여? 나는 다신 피로도 100을 채운 채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억지로 일어섰다.
부상 페널티도 그래. 서러워서 내가 안 다치고 만다.
콰앙!
정면 벽이 부서지며 오물슬라임이 기어코 거리에 풀려났다.
“으아아악!”
“저 괴물은 뭐야!”
“악마다!!”
마법에 휘말려 어리둥절 집 밖으로 나왔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주했다. 왜 이제 가냐는 심정과 지금이라도 가니 됐다란 마음이 교차했다.
“네놈이…… 할 일을 해라.”
아니 근데 생각해 보니까 열받네.
내가 피로도 100을 채우긴 했지만. 등에 한 방, 어깨에 한 방, 복부에 한 방 크게 상처를 입긴 했지만.
이렇게 힘들도록 구현한 건 너무한 거 아니냐? 현실이었다면 이렇게 골골대며 싸울 수라도 있는 게 기적이긴 한데……!
휘익!
나는 불만을 욱여넣으며 검을 휘둘렀다. 놈에게 닿았다간 썩 좋은 꼴 보진 못할 것 같아서 검기라도 날릴 요량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베어도 죄 메워지니 힘만 풀린다. 저거 HP 깎이고 있기는 한가.
“불꽃이여, 내 적을 불태워다오!”
그때 아크메이지가 드디어 딜을 넣었다. 첫 만남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파이어볼이었다.
콰앙!
우어어어!
불공에 얻어맞은 오물신이 오그라들었다가, 후속타로 솟구치는 불기둥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런류 의 몬스터가 다 그렇듯, 저놈도 불이 약점인가 했다. 아니었어도 이쪽보단 나았겠지만.
좋아. 그러면 내 역할은 뱅글뱅글 돌며 주차하는 거랑 어그로 관리다. 딜러 주제에 탱 역할을 하자니 뭔가 좀 웃기지만 까짓것 못 할 건 또 뭐냐. 이미 전적도 많은데!
쿠으으!
하나 그렇게 순조롭게 흘러가기만 하면 저게 보스겠나. 샌드백이지.
불에 타던 오물덩어리가 속부터 뒤집어지는 것으로 불을 껐다. 그러니까, 속알맹이를 뒤에서 꺼내 파도처럼 제몸을 덮쳤단 소리다.
“으아아악!”
심지어 놈은 그 직후 녹아내리듯 넓게 퍼졌다. 한여름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처럼 엄청난 속도였다.
굼뜨게 도망치던─그들 입장에선 세간살이라도 가져가고 싶었던 거겠지만─인간들이 기겁했다.
“피해라……!”
“무슨─?”
탱은 처맞는 게 맞지만 딜러는 안 돼. 나는 캐스팅에 들어갔던 아크메이지를 또 한 번 뒤로 던졌다.
아크메이지뿐 아니라 몇몇 사람이 속도가 안 돼 휘말렸으나, 거기까진 내 여력밖이다. 달리려고 한 순간 몸에서 힘이 빠지는데 내가 그들을 어찌 구하겠나. 애초에 나조차도 발목은 내주기로 한 상황인데.
“큭.”
다행히 오물슬라임의 체액에 닿는다고 HP가 깎이거나 하진 않았다.
“흐아아아!”
“커헉!”
뭐, 나는 그랬다. 다른 이들은 안 그랬다.
그들의 몸이 오물에 닿은 지점부터 새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넘어지거든 체액과 닿는 면적이 넓어지며 더 빠르게 잠식되는 건 덤이었다.
“……! 역병덩어리, 역병덩어리였군!”
허리 건강을 내주는 대신 목숨을 부지한 아크메이지가 곧바로 외쳤다.
“저 액체에 살갗이 닿으면 안 되네!”
“으아악!”
아무리 충고를 해준다 한들 몸이 안 따라 주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검기를 날렸다. 일직선으로 뻗어 간 참격이 땅을 긁으며 오물을 막아섰다. 얕고 빠르게 퍼지는 만큼, 참격이 동반한 돌풍에도 쉽게 밀려난 것이다.
“흐악, 흐아악!”
다행히 방금 따라잡힐 뻔한 양반은 넘어지지 않고 잘 도망쳤다. 그러나 이대론 안 됐다. 검이 주류인 나는 이런 식의 보스에 대응할 수 없다.
하다못해 기름이라도 있다면 그 위에 불을 붙일 텐데, 그마저도 가지고 있는 게 없고. 움직이기도 힘들고.
“커어억!”
불우하게도 나는 생각할 틈조차 받지 못했다. 아까 휘말렸던 이들이 단말마와 함께 눈을 까뒤집고, 그 위를 오물덩어리가 삼켰다.
집에서 거의 다 나온 상태의 그것은 반경 6m의 거리를 제 체액으로 물들인 상태임에도 본체가 2m는 훌쩍 넘겼다.
“신께 가로되, 부정을 정화하고 악을 멸하라!”
놀고만 있지 않은 아크메이지가 또 한 번 공격을 시도했다. 파이어볼보다 더 광범위하고 어쩐지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희고 노란 불꽃이 오물을 불태웠다.
본체가 불타오르기 시작하자 사방으로 뻗었던 체액 또한 일시적으로 모여든다.
“죽…… 어라!”
통하지 않는단 이유로 놀 수만은 없다. 어그로 유지를 위해서라도 나 또한 추가 공격을 넣었다. 닿으면 망한다는 걸 알았기에 멀리서 검기만 날리는 식이다.
본체가 쩍 갈라졌다가 이내 그 속부터 분수처럼 오물이 분출되었다. 사방으로 퍼지면 망할 뻔했는데 다행히 본인 몸만 덮고 끝났다.
우어어어어
아니, 끝이 아니었다. 부글부글하고 덩어리 표면이 조금 끓었다. 하필 아크메이지가 있던 방향이라 조금 불길해졌다.
퐁!
불안은 언제나 들어맞아서. 마치 물총처럼 무언가가 쏘아졌다.
“어딜, 보는 거냐……!”
“악마기사!”
법사 죽으면 레이드 망한다! 나는 그 마인드로 악착같이 달려 나가 쏘아진 오물을 대신 맞았다. 가능하면 검면으로 쳐내고 싶었는데, 다리에 힘이 빠진 까닭에 그건 실패했다.
코트와 그 안쪽 옷가지, 그리고 뺨에 오물이 일부 튀었다. 악취가 가장 먼저 코를 꿰뚫고, 간질간질한 느낌이 살갗 위로 퍼져 나갔다.
「저주!」
HP가 쭉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네놈이, 맡은 일이나 해라!”
그 딜에 말이 나와? 당장 딜이나 더 넣어! 딜을 넣는 게 나를 살리는 길이야!
나는 겨우 균형을 잡은 채 검기를 날렸다. 어그로를 끌기 위한 최선이었다.
다행히 앞에서 깔짝거리는 게 신경 쓰였는지, 오물덩이의 다음 표적은 내가 되었다. 울룩불룩하던 오물덩어리의 몸 일부가 내게로 왁 쏟아졌다.
“기사 나리!”
“악마기사!”
아, 근데 피하려던 찰나 다리에 힘 풀렸다. 망했다.
이거 못 피하겠는데?
“인퀴지터……?”
“잘됐군.”
크어어!!
운이 좋았달지, 타이밍이 내 손을 들어주었다고 해야 할지. 나는 쏟아지는 오물에 반쯤 잠긴 채, 달려오는 이에게 외쳤다.
“정화해라.”
쿠어어어!!!
으아악 저 좀 살려 주세요!!
“저, 무슨─.”
인퀴지터가 머뭇거리는 게 사고회로에 잠시 로딩에라도 걸린 모양이다. 그래선 안 됐다.
“그것은 역병덩어리입니다!”
나를 대신해 아크메이지가 한발 앞서 저것의 정체를 외치고, 인퀴지터가 퍼득 깨달은 양 표정을 바꾸었다.
“하지만, 악마기사가─.”
아니 나 뭐. 나 뭐. 알아들었으면 빨리빨리 이거 죽이란 말이야. 프렌들리 쉴드 없긴 하지만 한 번은 죽음을 무효로 할 수 있다고, 나! 불굴의 정신 쿨타임 돌았다고!
물론 그 후엔 저주 때문에 죽을 것 같긴 하지만!
“네가 할 일은.”
나는 순식간에 바닥을 치려하는 HP를 두고 검을 어떻게든 움직였다.
“악마를 죽이는 것이다.”
그라운드 크래쉬. 속으로 뇌까린 스킬이 반쯤 억지로 발동되며 대지를 울렸다. 구 형태로 퍼진 힘이 나를 둘러쌌던 오물을 떨쳐 냈다.
“지금, 당장!”
다행히 인퀴지터는 그 이상 시간을 끌지 않았다. 흔들리던 녹안이 결심을 한 듯 굳건해졌다.
“신이시여, 저와 함께하소서.”
찬란한 광휘가 김치만두에게 내리꽂혔다.
“하여, 이 땅의 삿된 것들을 전부 불태우소서.”
그리고, 하얀 빛이 밀물처럼 몰려와 내 시야를 전부 메웠다. 간당간당하던 HP가 기어코 바닥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