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선택의 결실 앞에서 (7)
지도를 받아와 길을 표기하며 온 건 신의 한 수였다.
나는 아크메이지의 헤이스트 보조를 받아─처음 받아 보는 버프기였다!─절뚝이되 빠른 걸음으로 지하도를 나왔다.
악마라도 나오면 귀찮아졌을 텐데, 리젠이 아직 안 된 건지 뭔지 몹이 하나도 보이는 게 없더라.
거기에 목적지 자체를 특정하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했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정해진 곳을 향해 움직이기만 하면 됐다. 지도까지 있는 이상 최단거리를 찾을 수 있단 소리다.
덕분에 나는 생각보다 이르게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고, 그 결과 한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정도 굵기의 연기는 건물에 화재가 일었을 때밖에 본 적 없다. 그렇다고 이 타이밍에 갑자기 불이 나는 것도 좀 이상하지.
무엇보다 일반화재라면 붉은색과 녹색이 섞여 있을 리 없잖아. 저거 무조건 퀘스트 단서다.
“저것은…….”
“앗, 마법사님!”
“그 옆의 저분은…….”
일단 저곳에 가고 싶어도 강둑부터 탈출해야 한다.
나는 다리를 조금 절으며 비탈길로 향했다. 강둑 위, 방어진을 형성하던 이들이 우릴 발견하고 내려온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도움은 고맙네. 다만 나보다 그를 먼저 도와주게나.”
“필요 없다.”
HP는 거의 다 찼다.
어째서인지 70%에 접어든 후로부턴 올라가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긴 했는데…… 뭐 70%로도 충분은 하니까.
부상과 피로도로 인한 행동 페널티가 문제지.
“상처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다 했을 텐데.”
사실 엄청 필요 있지만, 컨셉은 지켜져야만 한다.
아무렴, 나 여기서 악마가 잠식했다 오해받으면 반항도 못 한다고.
그런 이유로 나는 속으로 눈물을 머금은 채 완강히 혼자 걸었다. 미처 마르지 못한 핏물이 걸음걸음마다 자국을 남겼다.
“고집부리지 말게. 내장까지 갉아 먹힌 몸으로 여까지 왔으면 충분히 무리했으니.”
“예에?!”
근데 아크메이지가 기어코─고맙게도─초쳤다. 곰 형상의 샤기족 모험가의 손이 나를 덥썩 들어 올렸다.
“……!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이봐, 강한 건 알지만 목숨은 좀 아껴 두라고.”
평소 같았으면 잽싸게 피했을 것이나 이 몸 상태로는 저항하는 것마저 힘들다. 애초에 그런 상태인 걸 아니까 아크메이지가 다른 이들 시켜 먹은 거겠지만.
“네놈 알 바 아니─!”
“아직 싸움이 남았잖수.”
“……!”
뒤에 아크메이지가 뒷목 잡는 거 안 보이냐. 하기야 뒤통수에 눈깔이 없는데 당연히 안 보이겠지.
애초에 그런 말을 하면 내가 휴식 포기하고 달려갈 컨셉인 것도 모를 테고.
덕분에 나도 못 쉬게 생겼다. 크아악.
나는 붕대로 한쪽 눈을 칭칭 감은 샤기를 노려보다가 쉐엑쉐엑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편하긴 편하다. 포댓자루 들듯 널찍한 어깨에 걸쳐진 거라 모양새도 덜 빠지고.
“쿨럭.”
“……!”
상처가 터졌는지 입밖으로 피가 좀 토해진 건 좀 문제긴 했다. HP가 다시 떨어진다.
“당신 모험가 맞아?! 무식하게 그런 식으로 들면 어떡해!?”
방어진 너머에서 후다닥 달려온 치료사─적십자 문양이 있으니 아마도?─가 날 들쳐 멘 모험가를 타박했다.
강둑을 올라온 시점에서 이미 받을 도움은 다 받았기에 별 필요 없는 타박이었다.
“바로 치료를─.”
“저 연기.”
나는 바닥에 내려짐과 동시에 앞으로 꼬꾸라지는 걸 겨우 버텼다. 사실 버텼다기보단 내려 주던 샤기족 모험가가 부축으로 형태를 바꿔 준 것이겠지만, 어쨌든.
“뭐지?”
“그건 우리도 모르는데.”
“인퀴지터가 보이지 않는데, 혹 저쪽으로 갔는가?”
“아, 예, 마법사님. 수상하다며 그쪽으로 가셨어요. 아마 앞서 출발한 사람들과 있지 않을까요? 저흰 혹시 몰라 여기에 남아 있지만.”
나는 울컥 올라온 마지막 핏덩이를 퉤 뱉었다. 내장 조각과 함께 핏덩이가 바닥에 쫙 뿌려졌다.
“잠깐, 피를 이렇게나……! 일단 병원으로 이송─.”
병원은 무슨. 나는 지금껏 악착같이 쥐고 있던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진짜 내가 게임을 하는 건지 수행을 하는 건지. 너무 지치고 힘들었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컨셉도 컨셉이지만, 생각해 보니까 플레이어가 빠진 채로 퀘스트가 진행이 될 리 없었다……!
물론 일부 게임은 NPC가 대신 진행할 수도 있긴 한데…… NPC들이 플레이어 대신 작업하거든 완성물의 품질이 떨어지는 건 모든 게임의 국룰이었다.
“내가 가겠네. 자네는 이곳에서 쉬게.”
“현자라도 다 사람 말만 하진 않는군.”
“그 몸으로 가서 뭘하겠단 말인가!”
아냐. 나 HP 그래도 70퍼 근처야. 싸우라면 싸울 수 있을걸. 머리가 멍한 것도 이제 익숙해졌어. 아마도?
“하지 못할 것도 없지.”
「❖ 뒷면에 숨은 것
∎ 악마숭배자들의 계획 저지하기
∎ 보너스: 악마 제거 221 / ??」
퀘스트도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저거 띄웠을 거 아냐. 그러니까 가야지.
“이봐요.”
근데 갑자기 목소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뒷목에서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런 양반들은 말로 안 된다…… 고……?”
아프진 않은데, 기분엔 썩 좋지 않아서.
나는 앞으로 조금 튀어나간 고개를 천천히 들어, 그대로 틀었다.
“어…….”
방금 네가 쳤냐?
“…….”
“…….”
나는 데브와 같은 종족─큐어티─모험가를 노려보았다. 몰입도 안 했는데 목에 절로 핏대가 섰다. 정작 내 시선을 받은 이는 뻘쭘한지 눈동자를 옆으로 피했지만.
“그 말이 맞군.”
근데 아크메이지 이 양반은 내 편을 못들어줄지언정 저런 소리나 지껄이고 앉았다. 심지어 그 다음 행동은 방금 큐어티족 모험가가 한 것과 비슷했다.
촤르르륵!
“좀 쉬고 있게.”
…아까 나 사슬에 묶여서 험한 꼴 본 거 기억 못 하는 거냐고!! 바인딩으로 나 묶지 마아아악!!
“감히, 나를 방해하는 거냐……!”
“자네를 위한 일일세.”
그럴 거면 제대로 기절을 시키든가, 이 망할 NPC야……!
“그건 네가 정할 게 아니다!”
맨몸에 스킬 두르는 요령은 이미 터득했다. 빠드득. 나는 간질간질한 오른팔이 어쩐지 후련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기어코 바인딩을 박살 냈다.
“……! 자네, 지금─!”
동시에 새삼 빡쳤다. 내가 지금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나는 뭐 혼자 들어가고 싶어서 혼자 들어간 줄 아냐고!
아니, 꼭 컨셉만이 아니야. 애초에 이 게임 같은 거, 이따위로 만들어진 게임 같은 거 나도 더이상은……!
촤르륵!
AI라서 그런가. 학습이 안 되는 모양이다.
나는 바닥에서 솟구치는 사슬을 오른손으로 뿌리치듯 쪼개었다. 허공에 별안간 검은 잔흔이 남았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죽일까?’
진짜 짜증나.
콰앙!
나는 들고 있던 롱소드를 바닥에 박았다. 계속 들고 있으면 휘두르진 않아도 던지긴 할 것 같았다.
그리고 2kg쯤 될 철근에 얻어맞으면 분명 멍들겠지.
“마법사! 날 더이상 시험하지 마라……! 이 이상은 나도 날 제어할 자신 없으니까……!”
컨셉을 떠나서 이건 진심이다.
차라리 김치만두처럼 명치빵 크게 넣든가, 목에 사슬까지 묶였던 사람한테 바인딩을 쓰는 건 정말 너무했다. NPC에게 그런 섬세함 바라는 것 자체가 과한 요구긴 해도, 그래도!
“……!”
빌어먹을. 진짜 기분 더럽네. 물론 이 짜증의 근원은 바인딩이 아니라 사무치도록 쌓인 피로겠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감상이 달라지진 않았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고단함을 덜어야 정당한 사고가 가능한데, 그럴 처지가 못 된다는게.
“…비켜라.”
이건 뭐 해결할 방법이 없다. 퀘스트 얼른 끝내고 자는 수밖에는.
나는 공포에 질린 얼굴들이 슬금슬금 멀어지는 걸 대충 넘기며 연기가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저기까진 또 언제 가냐. 갈길이 구만리였다.
* * *
데스브링거는 시체 더미 앞에서 무릎을 굽혔다. 쪼그려 앉은 그의 앞에는 목에 칼이 박힌 사람이 하나 있다.
“…악마숭배자들도 별거 아니네.”
하 수상하여 뒤를 밟았던 대상이 설마 악마숭배자들일 줄 누가 알았을까.
하물며 그들을 따라갔다가, 상회를 가장한 그들의 은신처에 도달한 것도 우연과 우연이 겹친 행운이었다.
그들이 진행하고 있던 의식을 목격한 것도, 차마 내버려 둘 수 없어 일단 불부터 질러 본 것도, 그게 마법진과 제물을 건드려 의식을 완전히 망쳐 버린 것마저도 그랬다.
더불어 이들이 외따로 악마를 소환해 두지 않았던 것도!
덕분에 하나하나 목을 베고 심장에 칼을 박아 죽일 수 있었다. 악마가 있었다면 모를까, 사람을 죽이는 건 그의 특기였기에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이쪽이랑은 연관될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는 자신이 죽인 이를 두고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껏 이렇게 대면할 일이 없어서─소몬의 지하는 후방에서 마법사 보조만 했으니 노 카운트다─일까. 상대할 수 없을 거라 막연히 생각해 왔던 참이다.
한데 사실 그게 아니었음이 밝혀지자 너무 신기했다.
“악마와 계약해도 사람은 사람이란 건가…….”
물론 꼭 그의 실력이 뛰어서만은 아닐 테다. 그건 확신할 수 있다. 이 결과에는 많은 요행과 운이 따랐다.
그러나 행운이 적용했다고 해서 그가 이뤄 낸 게 어디 사라지던가?
최소한 그는 이번 일로 잘하면 악마계약자도 죽일 수 있음을 배웠다. 막연한 불가능이, 형체를 가진 가능으로 변했단 소리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꽤 큰 간극이 있다.
그도 한다면 할 수 있었다. 마냥 방해는 아니라, 약간의 노력과 주의만 기울이면 지금처럼 해낼 수도 있단 말이다.
“그보다 이건 어찌해야 한담.”
다만 문제는 뒤처리인데.
그는 활활 타오르는 시체 더미와 망가진 마법진, 그의 손에 명을 달리한 자들을 보며 뺨을 긁적였다.
“신호를 주면 알아서 오겠지.”
일단 사람들의 관심만 모으면 된다. 그중 하나쯤은 성주나 교단 소속일 테고,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오게 될 테니까. 하면 뒤처리는 자동 예약이고.
하므로 데스브링거는 폴짝폴짝 뛰어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리다나 상회란 간판 뒤쪽, 옥상에 쪼그려 앉았다.
그의 손엔 예전에 얻어, 소량으로 들고다니는 염료 가루가 있다. 모닥불에 집어넣으면 연기색이 바뀌는 물건이었다.
파스스스.
값이 비싼 만큼 효과는 탁월해서, 신호용으로 거대하게 피운 모닥불의 연기가 금세 색을 띠었다.
혹시 몰라 2개의 색을 섞어 피웠으니 분명 누군가는 이곳에 올 것이다.
“좋아.”
그럼 이제 할 건 몸을 감추는 것이다. 딱히 그가 잘못한 게 없다 해도 그렇다.
이 신호를 보고 올 사람이 그의 아군이란 보장이 없었다.
“…와, 이걸 바로 알고 오네.”
어쩐지 미심쩍은 이들이 곧장 달려오는 것처럼 말이다.
“어쩐다.”
겉만 보면 민간인이나 다름없으나 현직 도적의 눈엔 나름의 헛점이 보인다.
헌옷에 비해 깨끗한 신발이나, 여러 사람에게 빌려온 것처럼 통일되지 않게 때가 진 옷, 햇빛에 그을리지 않은 흰 피부.
먼곳에 숨어 확인한 정보만 해도 이 정도인데, 가까이서보면 더할 거다. 아무리 봐도 께름칙하다.
“들켰나.”
“빌어먹을, 조금만 더 하면 됐는데…….”
거기에 긴장감 하나 없이 관련 발언까지 지껄여 주면 더 그렇다.
데스브링거는 방금 해냈단 사실로 이는 들뜸과 자신감을 버리고, 최대한 차분히 사고해 보았다.
죽이는 것보단 살리는 것이 꼬리 잡기는 편할 테지. 그렇지만 따라가서 그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방금 전 학살은 온갖 변수가 겹쳐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다 확실한 무력이 있어야 했다. 예컨대 재수 없는 신관 나리나 악마기사같이, 악마추종자들이 무엇을 대비하든 깡그리 무시하고 쓸어버릴 수 있는 무력이.
“젠장, 용사를 보내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이미 끝난 일이야. 애초에 지하도쪽도 이미 전멸해 버린 듯하고.”
문제가 있다면, 그의 몸은 하나라서 저들을 쫓는 것과 소식을 전하기를 동시에 못 한다는 점이다.
“돌아가지. 지금 해야 할 일은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이니까.”
“그래.”
아, 이 수단만은 정말 쓰기 싫었는데.
그는 얕은 불쾌함을 참으며 조용히 숨을 베어 물었다. 찌지직.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빨리 오기 전에 튀어!”
빠르게 몸을 피하는 이들의 그림자에 새로운 그림자가 합류했다.
“날 안내해 달라고.”
그림자표식. 정보길드 소속원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배울 수 있는 기술이다.
스스로의 그림자를 찢어 적에게 붙이는 것으로 위치를 알아내는, 가장 뛰어난 추적술이기도 했다.
“그럼 신전 쪽에…….”
아. 깜빡했다.
“그 빌어먹을 놈들이 말을 들어줄 리가 없잖아.”
말 보러 간다고 했을 때도 주인임을 알 수 없다며 꺼지라던 새끼들이었다. 그래서 담벼락 위에 앉아 몰래 말들을 지켜봐야 했고.
한데 그랬던 사제놈들이 이 말도 믿어 줄까? 아니, 절대로! 그놈들이 그럴 리가 없지!
“모험가 길드가 답이겠구만.”
영 맥아리 없어 보이는 놈들만 있었는데, 그것들로 될까.
그래도 그가 혼자 쫓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안면도 있으니까 최소한 말은 통할 거고.
“어휴.”
내가 어쩌다 이런 일에 휘말려서는.
데스브링거는 답답함에 한숨을 다 내뱉으며 일단 다리를 놀렸다. 급한 사항이니만큼 사감은 집어넣고 달려야 했다.
“너!”
“뭐야. 샌님이잖아.”
그러다 뜻밖의 인연을 마주친 건, 그래도 나름의 운명이었을 테다.
“마침 잘됐네요. 이봐요, 꽉 막힌 양반. 악마계약자로 추측되는 놈들을 찾았는데, 같이 좀 가주시죠?”
“…그건 확실하겠지?”
“염병, 그럼 말든가.”
“아니, 가겠다! 안내해라!”
시작부터 아슬아슬한 건 결코 기분 탓이 아니겠지마는.
* * *
“이보게,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아앙? 넌 뭔데─.”
“앗, 사제님과 함께하신 마법사님 아니십니까! 그리고…… 당신도 살아 있었군? 지하도에서 살아나온 건가?”
“그는 많이 지친 상태니 말 걸지 않는게 좋을 걸세. 그보다, 잠시 비켜 줄 수 있겠나?”
“아. 예, 예. 편히 보시지요.”
“…….”
“사제님께선 의식의 흔적이라곤 하셨는데…… 마법사님께선 달리 보이십니까?”
“…이건.”
“무슨 문제라도?”
“인퀴지터가 이곳에 왔다 간 듯한데, 어딜 갔는지 아나?”
“예? 사제님 말이십니까? 조사차 나온 사람들 일부를 데리고 서쪽 거리로 가긴 하셨습니다. 저희는 증거 보호를 위해 이곳에 남은 것이고요.”
“서쪽 거리. 알았네. 악마기사! 당장 가세!”
“무, 뭡니까?”
“악마추종자들이 도시를 빠져나가거나, 다른 의식으로 전환하기 전에 잡아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