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선택의 결실 앞에서 (5)
“젠장…….”
데스브링거는 다섯 시간 넘게 말들을 감시하다 말고 욕설을 지껄였다. 제 처지가 갑자기 짜증난 까닭이다.
“따라갈 걸 그랬나.”
원인은 말들을 감시·보호한다는 일이 너무 평탄해서 일까? 혹은 마법사가 도시를 버려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던 탓일까.
자꾸만 어떤 이의 뒷모습이 어른거렸다. 주로 뒤 한 번 보지 않고 멀어지던 이의 등이었다.
“아냐, 내가 뭔 도움이 된다고 그걸 따라가.”
애초에 악마기사도 그러지 않았나? 약하다고, 방해라고!
“…씨.”
함에도 가슴을 꽉 조이는 답답함은 가시질 않는다.
결국 데스브링거는 마른세수를 했다. 씻겨 나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난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도시가 위험하다는데 왜 그는 말만 보고 있어야 하는지. 애초에 그들이 실패하면 그도 죽는 것 아닌가?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랬으니까.
그렇지만 그들과 함께 하기엔 그도 제 주제를 알았다. 그의 특기는 사람 모가지 따는 것이지 악마의 모가지를 따는 게 아니었다.
“이게 다 스카일라 때문이야.”
그냥 말만 빌려달라 했을 뿐인데, 꼬치꼬치 캐묻고선 하는 말이 ‘너도 따라가라’라니. 그 말만 아니었어도 그는 지금쯤 소몬에서 푹 쉬고 있었을 것이다.
일신의 안전을 보장받은 채로, 방해니 꺼지라는 폭언이나 범죄자라는 말 하나 듣지 않으면서!
“도움이 되기는 개뿔…….”
그는 소몬을 출발할 적 스카일라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꼬맹아, 그를 주시해.』
『예?』
『그리고 고민해. 네가 되고 싶은 게 저런 거였는지.』
『뭔 소릴 하는…….』
『네 남은 삶이 저치와 닮아도 정말 후회하지 않을지, 네 두 눈으로 보면서 판단하라고. 분명 네 미래에 도움이 될 테니까.』
뭐, 미래에 도움이 돼? 주시고 자시고 따라왔다가 죽게 생겼는데 뭐가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리고 제 남은 삶이 왜 악마기사와 닮을 거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악마사냥꾼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 씨. 이제라도 튀어야 하나…….”
마음은 정말로 그러고 싶지만, 역시 혼자 포위진을 뚫을 자신은 없다. 빌어먹을. 역시 따라오는 게 아니었다.
“왜 거절할 생각을 안 했던 거냐고오. 진짜 사람 열받게…… 응?”
그러다 잠깐. 그는 신전의 담벼락에서 얼른 내려왔다.
그가 왜 담벼락 위에 있었는지는 글쎄. 그에 관해선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하거니와 당장 중요한 건 아니므로 생략하겠다.
“…저 새끼들은 뭐야.”
지금 집중해야 할 건 골목 안으로 숨어드는 수상한 무리였다.
* * *
도시 지하에 얼마나 많은 악마계약자들이 모인 건지.
숨을 돌릴라 치면 적이 몰려오거니와 밀폐된 공간 특유의 답답함이 나를 더 지치게 만드는 것 같다.
시간과 끝을 알 수 없다는 막막함도 매한가지였다.
차라리 중간에 나갔다 올까? 라고 고민까지 했을 정도니…….
물론 컨셉과 더불어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게이머 특유의 근성이 이기긴 했다. 막상 돌아가자니 그게 더 귀찮기도 했고.
“후.”
다행히 슬슬 끝날 때가 되었다. 지도도 거진 절반을 탐색했을뿐더러,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새로 찍은 추적스킬 또한 지하로 흔적이 이어짐을 말하고 있으니 확실할 거다.
“…잠깐만 쉬자.”
목적지에 다다르면 아마 보스전이 벌어질 터. 그런 만큼 나는 이번만은 정비를 하기로 했다. 그래 봤자 붕대로 상처를 감고, 칼을 가는 게 다지만.
“내 핀지, 몹들 핀지.”
통각도 다소 무디다 보니 상처 부위 찾기가 어렵다.
나는 일시적으로 통각 수치를 올려 보았다. 10%만 올려서 그런가. 올리기 전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어쩌면 다친 데가 적은 걸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더 올리자니 너무 아플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더듬더듬 부상 지점을 찾았다. 마침 두어 개 잡히는 위치가 있었다.
「지혈용 붕대│상처를 감는 데 쓰이는 천. 큰 효과는 없으나 출혈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영웅전설’ 리메이크 판에는 HP를 한순간에 회복시키는, 예컨대 포션 같은 물건이 없다.
있는데 내가 못 봤거나, 후반부에 등장하는 걸 수도 있지만 아무튼 당장은 자연 회복에 기대야 한단 소리다.
그렇다고 붕대가 필요 없느냐면 그건 아니다. 출혈은 수치에 따라 자연 회복량을 낮추거나 HP를 아예 깎아 내리는 상태 이상이었고, 붕대는 그걸 해결해 줬다.
즉각적이진 못할지언정 쓸모없진 않단 소리다.
찌이익.
왼쪽 팔뚝과 오른쪽 허벅지에 붕대가 돌돌 감겼다. 줄었다 늘었다 같은 자리를 맴돌던 HP가 조금씩 차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하면 이제 칼을 손볼 차례니.
나는 코트 자락으로 도신을 쓰윽 닦았다. 핏물을 닦을 게 없는 이상 임시방편으로라도 이렇게 해야 했다. 어차피 옷은 자동 빨래되니까.
사각사각.
지식 없이 보정에 의지한 손이 기계적으로 칼을 손질했다. 생각할 필요 없는 작업이다보니 머리가 잠시 띵해졌다.
「적의를 품은 대상이 반경 20m 이내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던전은 그런 내 머리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나는 거의 다 손질된 두 자루의 검을 챙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표식이 없었다.
그렇다면 알림이 왜 떴을까.
틱.
돌가루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는 시선을 내렸다. 구멍에서 표식이 보였다.
대체 몇 놈이나 있는지, 나를 막기 위해 또 올라오는 거다.
“시발, 앞서 나간 놈들은 왜 안 돌아오는 거야.”
글쎄, 왜일까? 나는 전등을 바닥에 조용히 내려놓고, 불빛의 바깥쪽으로 살살 물러났다. 전등이 밝은 만큼 그 바깥 지대는 섬뜩하리만치 어둡다. 저 하나 숨길 수 있을 만큼.
“이젠 나갈 놈도 없다고…….”
“투덜대지 마.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곧 구멍에서 한 놈이 올라왔다.
“근데 누가 여기에 불빛을 가져다 둔 거야? 이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몰라. 치워도 나 올라가고 치워. 거의 다 올라왔으니까.”
그리고 한 놈 더.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내 손이 투헨더를 랜스처럼 잡았다.
“다 올라왔지? 그럼 이제 치운─?”
아, 이걸 보네. 상관은 없지만.
“어?”
정식 스킬은 아니지만, 굳이 이름 붙이자면 돌진 찌르기 정도 되지 않으려나. 나는 쓰잘데기없는 생각을 하며 발에 힘을 주었다.
쿵. 약간의 울림과 함께 내몸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뭐 하는 거─?”
푸욱!
1타2피는 보통 이런 걸 말하는 거겠지.
나는 투헨더에 나란히 꿰뚫린 이들을 보며 그대로 검을 우로 휘둘렀다. 촤악! 조금 잔인하긴 하지만 확실히 죽을 상처가 두 명의 적에게 남겨졌다.
“커억!”
다만 그중 한 명이 구멍 아래로 떨어지려 하기에, 저는 다급히 그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이놈 시체가 추락하면 지하에서 대기하고 있을 놈들에게 걸릴 것이므로 당연한 판단이었다.
뭐, 삼목구의 존재를 고려하면 이렇게 해도 걸릴 것 같지만.
「❖ 뒷면에 숨은 것
∎ 하수도 수색하기
∎ 보너스: 악마 제거 200 / ??」
와중에 기어코 카운트가 200을 찍었다.
나는 내가 그렇게나 많이 죽였나 되짚어 보다가, 고블린과 스켈레톤 때문에 수가 뻥튀기 됐음을 깨달았다. 여기서 죽인 악마계약자나 좀 세보이는 악마는 다 합해서 사십도 채 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총량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어우, 눈 뻑뻑해.”
나는 눈가를 꾹꾹 누른 후 구멍 안쪽 밧줄을 잡았다.
놈들이 올라오며 떠들길,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했으니 서둘러야 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조금 미적거렸다고 실패 뜨면 그땐 성질 뻗쳐서 잠 못 잔다.
“이번 거 끝나면 컨셉이고 나발이고 푹 쉬어야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최고급 좋은 여관을 찾아갈 거다. 푹신한 침대에서 도톰한 이불 덮고 12시간 정도 자는 거지. 일어난 다음엔 맛있는 거 사먹는 거고.
상상만 해도 기분 좋다.
“좋아, 가자.”
나는 안락한 침대와 맛난 음식을 꿈꾸며 강하를 시작했다.
회수한 전등은 꺼버렸기에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만이 사방에서 나를 압박해 왔다.
“죽여!”
그리고 별안간 땅에 발이 닿은 순간, 공격이 들어왔다. 근접인 것으로 보아 뱀파이어 같았다.
“쓸데없는 반항을.”
아, 그래도 좀 기대했는데 역시 들키네.
나는 아쉬움을 금치 못하되 목소리로는 태연을 가정하며 칼을 휘둘렀다. 색적스킬과 들리는 기척으로 적의 위치를 가늠해 두었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여차하면 ‘생존본능’을 사용해서 활로를 찾으면 그만이고.
크르르르!
그어어어.
“죽어라, 버러지들.”
기척이 사방에서 느껴지는 걸로 보아 공간이 꽤 넓을 터. 그것을 고려해 나는 시작부터 그라운드 크래쉬를 갈기고, 이어 트루 투헨더를 잡고 휘둘렀다.
서걱!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파육음과 비명 소리가 메아리쳤다. 각종 악마들과 인간들이 섞여 내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공격을 할 수가 없어!”
“뱀파이어들이 앞장서! 악마들을 앞세우라고! 몇 분만 더 버티면 되니까!”
그래. 몇 분밖에 시간이 안 남았다는 거지. 그럼 더 빨리 움직여야겠네.
“그리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는 난무하듯 사방으로 참격을 마구 쏘아 보냈다. 스킬 사용에 필요한 마력이 쭉쭉 닳았으나 시간을 내줘서 강력한 몹이 소환되는 것보단 나았다.
물론 소몬처럼 반드시 소환되는 구조일 수도 있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무엇보다 마력 회복 속도가 제법 빨라서 꽤 질러 볼 만했다. 피곤해서 깊게 생각하기 싫은 것도 있기야 하겠지만.
“으아악!!”
“보이지가 않아!”
“크악!”
좋아. 근데 보스방은 따로 없나? 여기가 보스방인가?
보이는 게 없어서 분간이 어렵다. 누가 악마랑 그 계약자들 아니랄까 봐 불 하나 안 켠 게 참 음침했다.
“거기냐!”
함에도 힌트가 아예 없진 않았으니.
나는 옅게 흐르는 빛의 존재를 기어코 발견했다. 저편 바닥에선 실금 형태로 빛이 기어나오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꼭 마법진의 형상과 닮았다.
더불어 그 위에선 짙은 피냄새와 부패해 가는 고깃덩이의 냄새가 났다. 하수도의 온갖 악취에 절여져 마비된 코임에도 그랬다.
분명 제물 의식이다.
“전부 죽여 주마……!”
해서 그 빛을 쫒아 바로 내달렸다. 이번엔 소몬 꼴을 내지 않고자 달려가며 참격도 날렸다.
마법진도 망가트릴 겸, 의식을 치르는 놈들의 모가지를 최소 셋은 딸 요량이었다.
“지금이다!”
다만 그래. 내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건 그 다음 순간이었다.
“묶어!”
이 마법진, 보스몹 소환하는 용도가 아니었다.
화악!
마법진을 구성하던 인원 둘을 참격으로 죽이고 하나는 직접 찔러 죽였음에도 마법진은 끝끝내 발동했다. 마법진을 구성하는 실선의 빛이 더욱 강해지며 사방을 약간이나 밝힐 정도가 되었다.
어둠 속에서 쌓인 시체 더미가 어렴풋이 보이고, 마법이 발동하며 무언가를 토해 냈다.
촤르륵!
어떤 고위 악마가 아니라 희고 붉은 사슬이었다.
“……!”
저게 뭔가 하는 궁금증과 게이머 짬밥이 가져온 불안감을 기반으로 다급히 마법진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거기서 내 두 번째 실수가 드러났다.
“못 간다……!”
내가 찔렀던 뱀파이어 하나가 끈질기게 살아남아 내 발목을 붙잡은 거다.
촤악!
힘주고 발을 빼면 그만일 정도로 약한 발악이었으나, 최소한 1초의 시간은 빼앗겼다.
덕분에 사슬은 내게로 다가왔고, 그것에게 저항하려던 내 팔을 칭칭 둘러쌌다.
아무것도 들지 않고 있던 오른팔이 사슬에 옭아매졌다.
“이딴 것에 당하진─.”
그래도 뭐. 아크메이지의 바인딩을 쉽게 부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스킬을 쓰려 했다. 촤르륵. 삽시간에 왼팔도 사슬에 묶였다.
“무슨……!”
뿌리치고 싶어도 바인딩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단단함이 팔을 옭아맨다. 스킬을 써도 무리였다.
심지어 팔 다음으로는 내 목이 묶여 버렸으니. 숨이 턱 막혔다. 목을 조르는 수준까진 아니고 초커 같은 걸 여유없게 묶은 느낌이었다.
“묶었나?!”
“성공했다……!”
이어 허리와 허벅지, 발목도 사슬에 휘감겼다. 사위가 밝아진 것도 딱 그때쯤이었다.
한가운데 마법진과 마법진을 둘러싼 채 띄엄띄엄 놓인 등잔이라. 정말 사이비 제단스럽군.
별개로 저걸 등잔이라고 부르는 게 맞나? 직육면체 형태의 대리석 윗부분을 파내어 기름을 채워 넣고 그 위에 불을 피운 것도 등잔인가?
나는 잠시 명칭을 고민하다가, 정신을 다잡았다. 당장 죽게 생겼는게 그거 생각할 시간 없다. 사슬을 빨리 풀어내야 했다.
마지막 저장 지점이 어딘진 몰라도, 이 짓을 다시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감히, 버러지 새끼들이……!”
“잡았다!”
“본래는 용사를 대비한 것이지만…….”
미쳤나 봐. 대사만 들으면 거의 뭐 내가 최종보스다.
게임에서 제일 악랄하고 가장 강한 건 플레이어가 맞으니,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지만.
“용사도 지하굴에 들어왔으니 상관없겠지.”
“하, 드디어 저 괴물을 죽이겠군……!”
“얄팍한 사슬로 나를 묶을 수 있을 것 같나!”
나는 사슬을 풀어내고자 몸을 간헐적으로 흔들며 빠르게 뇌를 굴렸다.
용사도 지하굴에 들어왔으니 상관없다? 거기에 이 마법진은 소환진이 아니라 대상을 속박하는 종류고.
더구나 말을 들어 보니 날 묶은 이 마법진은 원래 용사를 위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녀석들의 원 목적은 용사를 이곳에 묶는 것일까? 그게 정말이라면 묶지 않아도 지하도에 들어온 이상 됐다는 발언은……?
아, 머리가 둔해서 생각이 안 나. 미치겠네.
크르르르.
그때 미처 죽이지 못한 삼목구 두 마리와 스켈레톤 다섯 마리가 제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렇지만 사슬을 푸는 건 여전히 불가능했다.
스킬을 쓰고 싶어도 몸이 너무 단단히 묶인 관계로 무기를 휘두를 수 없어 별 의미가 없다.
무기의 검은 기운이 사슬을 내려치면 끊어질 것 같다는 확신이 분명 드는데, 그거 하나가 안 되는 거다.
실로 짜증 나는 일이었다.
잠깐, 그럼 나 정말 여기서 죽나? 와, 에반데. 아니, 죽는 것 자체는 그럴 만하다 싶으니까 상관없지만, 이거 설마 처음부터 다시는 아니겠지? 저장 지점 잘되어 있는 거지?
아니면, 정말로……?
나는 졸리는 목으로 숨을 토해 냈다.
있잖아, 게임에 갇힌 이후 계속 고민했던 건데.
플레이어 캐릭터가 사망하거나, 도시가 망하거나, 어쨌든 무언가가 잘못되어서 GAME OVER가 뜬다면.
그땐 로그아웃이 될까, 혹은 리트라이(Retry)가 될까, 그도 아니면…….
크르르르.
나는 내 정면에 존재하는 삼목구를 보며 흐릿한 숨을 뱉었다.
아, 역시 리트라이가 가능성 제일 높겠지? 난 로그아웃이 되는 쪽이 제일 좋은 것 같지만, 솔직히 그건 가능성이 너무 낮아 보이고.
그렇다면 결국 전자라는 건데. 강아지나 뼈다구한테 죽어서 리트한다?
와. 모양 너무 빠진다. 리트 각 잡아도 보스한테 잡혀야지, 잡몹도 저런 잡몹들한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멈추기 좀 그런 것 같아.
잠깐 멈췄던 저항을 다시 행했다. 맨몸으로도 스킬이 써졌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힘을 싣고 휘두를 틈이 생길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은 덤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 지독한 뻔뻔함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버그로 꿀 빨고 있는 주제에 스킬 적용 범위까지 늘려 달라니. 양심도 없지.
사르륵.
근데 게임이 그걸 들어주더라.
오른팔의 건틀릿에서 스킬 쓸 때나 올라오던 검은 이펙트가 줄기줄기 올라왔다.
“안 돼! 어서 죽여!”
“40명을 제물로 바친 속박일 텐데……!”
“하─!”
뭐지? 뭐지? 진짜 뭐지?
그렇지만 나는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바로 팔에 힘을 주었다. 컨셉에 맞는 웃음소리 연기는 덤이었다.
“내가 말했을 텐데……!”
끄덕도 없던 사슬이 처음으로 끼기긱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게임 버그 오지네’와 ‘로그아웃 제외 갓겜이네’의 심정이 교차했다.
“이따위 것으로 날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챙그랑!
어울리지 않는 맑은 소리와 함께 오른팔의 사슬이 산산조각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