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선택의 결실 앞에서 (3)
우리는 가장 먼저 모험가 길드와 신전에 들렀다.
차례로 들린 건 놀랍게도 아니었다. 지금껏 따로 행동이 안 돼서 몰랐을 뿐, 이 게임엔 파티원 개별 행동 시스템이 엄연히 존재했다.
덕분에 일행은 나와 데브, 인퀴지터와 아크메이지, 이렇게 사이좋게 찢어져 움직였다. 내쪽이 모험가 길드 탐문을 맡은 건 당연지사였다.
“이야…… 저희가 온 게 모험가 길드가 아니라 병원이었습니까?”
데브는 모험가 길드에 들어서자마자 그따위 말을 지껄였다. 그렇지만 꼭 부정할 수만도 없는 게, 그만큼 상황이 안 좋았다.
모험가 길드 내부는 예전의 소란스러움 대신 부상자의 신음소리만 가득했다.
“송장들밖에 안 보이네.”
“……!”
신랄한 일침에 누군가가 몸을 들썩였다. 그러나 끝내 나서진 않았다. 아마 그의 상처가 일어서길 막아서일 테다.
“아, 악마기사님!?”
그러다 제법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무관 이즈렌이었다.
“다, 다른 도시로 가셨던 게……?”
“도시에 기생하고 있는 버러지들의 정보, 있나?”
“……!”
그녀는 저를 보자 당황과 반가움의 색을 띠며 다가왔다. 그러나 제 말이 이어진 후엔 금세 표정을 고쳤다.
공적인 일을 대하는 이의 진지함이 그녀의 눈동자에 흘러내렸다.
“…말씀에 해당하는 의뢰는 긴급 사안으로, 보수가 책정되지 않았습니다. 정식 계약서 작성도 불가능해, 후에 합당한 보수를 받아 낼 수도 없습니다. 더불어 모험가님의 안전 또한 장담할 수 없지요. 함에도, 협력해 주실 겁니까?”
오, 이렇게 말해 주니까 뭔가 간지 난다. 내겐 불필요한 물음이지만.
“보수 따윈 관심 없다.”
검 자루에 손을 얹은 채 사납게 뇌까렸다.
“난, 놈들을 쳐죽이러 왔을 뿐이다.”
“……!”
말투는 거칠어도 목적은 일치해서인가. 사무관이 울컥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정보를 가져오겠습니다!”
아주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이봐.”
한데 사무관을 기다리는 동안 또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장비로 보아 아마 모험가가 아닐까 싶지만.
“그러다 죽어.”
이 세계는 진짜 오지랖 넓은 사람들이 많다. 아, 싫다는 건 아니다. 모르는 타인에게 용기 내어 조언할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발악해 봤자, 다 죽을 거라고!”
근데 사기 하락은 좀 그렇지? 자존심 건드리는 것도 좀 그렇지?
“네놈의 나약함은 집에나 가서 고백해라. 내 귀를 더럽히지 말고.”
퀘스트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미지수이나, 어쨌든 깨게 만들었을 거다.
그리고 그 말은 즉, 플레이어가 해결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된다. 만약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살아남는 것만은 가능할 테고.
어느 쪽이든 저 NPC의 발언은 내겐 해당 사항 없다.
“하수도까지 악마로 가득 들어찼어! 이런데도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
나는 가슴팍을 부여잡은 채 울부짖는 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밀도 높은 공포가 이쪽의 발목까지 잡는 바람에 불쾌함이 괜히 차올랐다. 신성력이 못마땅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쩌란 거지?”
“─뭐?”
그렇지만 이건 좋지 않은 감정이니 비죽거림 한 번으로 털어 내자.
대신 나는 오른팔을 쥔 채 말을 전하듯, 혹은 스스로에게 뇌까리듯 중얼거렸다.
“목숨 따윈 아무래도 좋아. 악마를 죽일 수 있다면.”
이왕 과몰입할 거면 악마에 대한 증오심쪽이 낫지. 사람들 싫어해 봤자 스트레스밖에 더 받나.
“나리…….”
“저, 가지고 왔습니다!”
나는 희게 떴던 눈을 냉정함으로 내리며 손을 내밀었다. 사무관이 반사적으로 서류를 내밀었다가, 이내 눈을 동그라니 떴다.
“안 읽어 드려도 괜찮나요?”
“필요 없다.”
이놈의 문맹률 설정.
나는 일단 속독의 요령을 발휘해 종이들을 넘겨 나갔다. 직업상 서류 볼 일이 별로 없는 데다가, 표로 예쁘게 저리된 것도 아니라서 내용 파악은 다소 힘들었다.
옆에서 데브가 슬그머니 고개를 빼죽 내밀었다.
“피해가…… 크군요.”
뭐야. 얘도 글 읽을 줄 아네.
“예. 도시밖으로 나간 이들도 이들이지만…… 밤마다 하수도에서 나오는 악마로 인한 피해도 많습니다.”
나는 데브와 사무관의 질답도 머리에 담으며, 사건의 진행 상황이 적힌 글을 찾았다.
초반엔 악마가 올라오는 줄도 몰라 많은 이가 납치당함. 파악한 후엔 봉쇄 절차. 신전의 사제들과 소수의 모험가들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파티를 꾸려 내려간 후 연락 두절. 2차 조사대가 파견된 결과 한 사람만 겨우 살아 돌아옴. 증언에 따르면 악마계약자들이 악마 사이에 숨어 공격하고 있다 함…….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밤마다 디펜스 중.
“살아남기 위해 영지군과 모험가, 신전분들이 힘을 합쳐 버티고는 있지만…… 도시가 고립됨에 따라 물자도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전투로 인해 부상자들이 늘며 싸울 인력도 이제는…….”
어쩌다 이 상태가 되도록 몰랐나 싶지만, 굳이 캐내 가며 사정을 알고 싶진 않고.
이 상황에서 시급히 해결봐야 할 건 하수도와 도시의 고립이다. 다만 내 몸은 하나니 둘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는데…….
이거 설마 분기점인가? 잘못 선택하면 도시 망해? 쓰으읍.
“악마기사님, 역시…….”
그래도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건 무조건 하수도쪽이 맞다. 내 컨셉 자체도 악마를 두고 떠날 게 못 되거니와, 용사인 인퀴지터도 이곳에 남으려 들 테니까.
더구나 이 게임은 이동 시간이 너무 길다.
포위를 뚫고 다른 도시에 지원을 요청해도, 병력이 도착하려면 최소 일주일은 걸릴 터.
그 정도 시간이면 도시가 망하고도 남는다. 그 전에 속전속결로 사건의 핵심을 뚫어야 했다.
“하수도 내부 정보.”
“예?”
“하수도에 출현한 악마, 경로 따윌 정리한 건 없나?”
그보다 서류 너무 많아! 또 표나 차트, 제목, 강조 포인트 같은 건 왜 없는 거냐?
죄다 깨알 같은 글씨로 구구절절 적어 둔 바람에 찾기가 힘들잖아. 정리한 걸로 달라고.
“아, 이, 있습니다. 여기 마지막에…… 아, 하수도는 따로 지도가 있는데…….”
내 요구에 사무관이 허둥지둥대고, 눈치를 보던 다른 사무원이 빠르게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종이를 하나 빼왔다. 꽤 커다란 종이였다.
“하수도 자체의 지도는 이것인데…… 생존자의 말로는 길이 많이 막히고 꼬여 버렸다고 합니다. 방어를 위해 입구 자체를 막아 버린 곳도 많아서 더 그렇구요.”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탐색하고 기억하란 소리렷다.
“남은 입구를 말해라.”
“이곳과, 이곳, 이곳인데…… 아, 이곳은 아마 아실 것 같네요. 저번에 맡으신 임무가 여기서부터 진행되었으니까.”
그나마 아는 입구가 남아 있어 천운이다. 나는 그곳의 위치를 가늠하며 동시에 내 인벤토리 사정도 살펴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붕대 좀 많이 챙겨 둘 걸 그랬다. 죄다 한 방 컷이다 보니 따로 사질 않았는데. 지금처럼 갑자기 거대 던전이 나올 거란 생각도 자체도 못 했고.
불행중 다행인 건 내가 초기 지급 아이템을 많이 안 썼다는 점? 길 전부 가보는 걸 포기하고 스피드런처럼 달리면 어떻게든 될 듯하다.
「❖ 뒷면에 숨은 것
∎ 도시에 벌어진 일 탐문하기
∎ 하수도 수색하기
∎ 보너스: 악마 제거 0 / ??」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퀘스트가 갱신되었다. 내 판단이 틀리지 않음을 알려 주는 퀘스트였다.
“가져가지.”
길이 바뀌었더라도 지도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다. 나는 지도를 접어 품에 넣었다. 펜은 소지하고 있는 게─깜빡하고 안 돌려줘서─있으니 받을 필요 없다.
“저, 설마 혼자 가시려는 건 아니시지요? 혼자 가시긴 너무 위험합니다!”
그런데 제가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사무관 이즈렌이 기겁하며 외쳤다.
“기사 나리, 설마 바로 들어가려는 겁니까?”
나한테 슬쩍 서류를 받아 내 뒤적거리던 데브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목청이 워낙 좋아서 귀가 조금 아프다.
“삼 일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온 상태인데, 최소한 몇 시간이라도 자고 가셔야…….”
“예?! 그럼 더더욱 안 됩니다! 하수도 안에선 휴식도 취하기 어려울 거예요! 그리고 보급도……!”
글쎄, 그럴 필요 있나?
지난 사흘 간 피로도를 조절하며 깨달은 게 하나 있다. 피로도 수치가 높을 땐 머리가 조금 멍해서 놓친 사실인데…….
이 게임. 피로도 100을 넘겨도 페널티가 없다.
내가 그냥 졸리고 피곤하다고 느낄 뿐이지, 흔히 붙는 스텟 하락 따위의 불이익이 없단 소리다.
하면 뭐. 타임 어택이 우선되어야지. 쉬는 사이에 도시 망하는 꼴은 못 본다, 내가.
마침, 운 좋게도. 나는 이런 상태로 움직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직업 특성상 생명 깎아 가며 작업하는 게 일상이라서.
물론 나는 움직이는 쪽은 아니었는데…… 그거나 이거나 비슷하지 않을까?
“내게 신경 꺼라.”
“뭘 신경 끕니까요! 그럼 최소한 사제 양반이랑 법사 나리랑은 합류합시다!”
싫어!
아니, 엄밀히 따지면 싫은 건 아닌데 너희가 합류 못 하게 만들었잖아악!! 여기서 기다려주면 ‘그분이 우릴 기다려 주실 리 없다!’ 이러면서 메이스 들 거잖아아악!!
나는 애증의 김치만두를 떠올리며 이를 아득아득 갈았다.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건…… 맞지만! 그래도 파티 행동을 아예 못하게 막은 건 너희다! 그러니까 아무튼 너희 탓이다!
“진짜 혼자 갈 거냐구요!”
그런 내 뒤를 데브가 후다닥 따랐다.
덩치는 나랑 비슷한 놈이 졸래졸래 따라오는 게 동생이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김치만두랑 싸우는 걸 보면 솔직히 나보다 어린 건 확실하거든.
어, 그렇다고 인퀴지터가 동생 같으냐면, 그건 아니다.
걘 따지고 보면 동생보다 조카나 사촌 동생에 더 가깝지. 땡그란 눈으로 날 엿먹이는데, 미워할 수는 없다는 지점이 특히.
“너도 이만 꺼져라.”
“예?”
“약한 놈을 달고다닐 생각 없다. 방해다.”
어쨌거나 나는 관계 개선 따위 시원하게 포기하며 내질렀다.
죽고 싶지 않아서 이게 현실일 수도 있다는 가정까지 세워 봤지만, 그러면 뭐하냐. 현실이면 다른 의미로 망하는데!
그럴 바에야 수치심을 딛고 컨셉에 몰입이라도 하련다. 아, 그렇다고 팔의 악마를 연기하고 싶진 않다. 그건 나도 버티기 힘든 과잉 설정이었다.
“하, 하지만.”
“네놈의 일은 말을 지키는 것일 텐데?”
무엇보다 데브는 아직 정식 동료·동행NPC가 아니었다. 관련 메시지가 뜬 적 없으니 분명 그럴 거다.
실제로도 쟤, 말 감시역으로 온 거지 우리와 함께하겠다고는 안 했잖아? 말 감시역 주제에 인퀴지터랑 아크메이지가 신전으로 말 가져가게 내버려두긴 했지만.
아, 참고로 말을 기증한 건 아니다. 그냥 신전에 맡기는 게 제일 안전했을 뿐이지.
“…….”
어쨌거나 쟤한테는 나와 함께할 이유가 없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렇죠, 제 일은 말을 지키는 거였죠.”
본인도 그것을 자각했는지, 후드 아래로 보이는 하관이 조용히 달싹였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가 그의 멍함을 알려 주는 듯했다.
“그런데 나리…….”
아, 안 들어, 안 들어.
나는 걸음에 속력을 붙였다. 다행히 데브는 그 이상 말하지도, 따라오지도 않았다.
곧, 내가 기억하던 강둑 아래 하수구가 보였다.
“지원인가?”
디펜스 장소답게 하수구 앞엔 사람들이 꽤 기거하고 있었다. 다들 핏물 어린 붕대를 두르고 있는 게, 방어전이 꽤 험난한 모양이다.
“누구지?”
나는 모험가 패를 꺼내 보여 주곤 상대가 신분을 확인하는 순간 거둬들였다.
“잠깐, 어딜 가는 거냐. 지원이라면 지시에 따라!”
바리케이드가 강둑을 둘러싸고 있었으나, 시체 정리를 위함인지 한 곳 정도 좁게 뚫어 둔 길이 있었다. 나는 그곳을 거침없이 내걸었다.
“이봐!”
그러다 날 막으려 드는 이가 생기면, 의도치 않게 그의 도드라진 핏줄을 볼 수 있다.
검게 물든 핏줄. 마기 침식의 부가 효과였다. 부작용이라고 해도 되고.
“설마 저길 들어가려는 거냐?! 미쳤어?!”
상대의 말을 흘려들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 NPC 외에도 심심찮게 검은 핏줄, 충혈된 눈을 가진 이들이 보인다.
무시하기엔 조금 걸린다. 저러다 악마가 되면 이쪽만 골치 아프니까. 그리고…….
“받아라.”
“귀라도 먹었─ 뭐?”
뭐, 내겐 마침 약이 있었다. 나는 그 약을 영원히 쓸 일 없고.
“이건, 해독제잖아! 얼마 안 남았다고 들었는데……!”
무엇보다 악성 재고 처리로 길을 열 수 있으면 땡큐지!
나는 마기해독제에 사람들의 시선이 팔린 사이, 강둑 아래로 내려갔다. 뒤늦게 사람들이 뜨악해했지만, 이미 내려온 몸이었다.
「적의를 품은 대상이 반경 20m 이내에 존재합니다.」
그때, 하수도의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창살이 뜯겨 나간 입구를 밟는 건 새까만 발이다.
“……! 악마다!”
“이봐, 당장 올라와!”
타이밍도 좋지. 나는 갖가지 악마의 시체를 짓밟은 채 투헨더를 뽑아 들었다.
“그러다 죽어!!”
어디보자, 누가누가 나오나.
「삼목구│개와 닮았으나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악마. 세 번째 눈으로 벽 저편의 것도 꿰뚫어 본다.」
「구울│썩은 살점을 탐닉하는 악마. 배를 갈라야만 죽으나, 배를 두 번 가르면 부활한다.」
스켈레톤에, 고블린에, 오늘 처음 보는 두 놈까지 있다.
나는 하수구 안에서 기어나오는 것들을 보며 자세를 잡았다.
“젠장, 미친놈은 포기해! 당장 자리 잡─!”
“나의 검에게 승리를, 저 하늘에 영광을……!”
이번엔 검을 하늘로 추켜세우는 행위는 생략했다. 대신 다리 사이의 거리를 벌리고 양손에 단단히 붙잡은 투헨더를 가로로 휘둘렀다.
콰직!
밟고 있던 시체의 머리가 부서지고, 검에서 뻗어 나간 검은 기운이 초승달 형태로 날아갔다.
서걱!
수평보단 조금 기울어지게. 내 앞에 있던 악마들의 몸뚱아리가 죄다 두 쪽 났다.
날아간 검기─참격이 벌인 일이었다.
「참격│검을 휘둘러 강력한 마속성 참격을 앞으로 쏘아 보낸다.
효과: 마력 40 소모. 범위에 들어온 적을 300%의 대미지로 공격.」
스킬 설명은 이러한데, 참고로 스킬 자체는 아직 안 찍었다. 그럼에도 미습득 스킬을 쓸 수 있는 건, 내 착각인가 했던 스팅거 버그가 정말이었을 뿐이고.
아, 발동 트리거는 검은 기운이 둘러지길 염원하는 게 다다. 나는 브레이커를 쓰는 척하면서 다른 동작을 취하는 꼼수라도 필요한가 했는데, 그마저도 필요가 없더라고.
대체 어떤 원리로 기능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플레이어는 버그를 고치는 사람이 아닌, 그걸 이용하는 사람인지라.
덕분에 포인트 아꼈다.
“이, 이게 무슨…….”
각설하고, 한숨에 몰락한 적들을 두고 장내의 모든 이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주 좋은 현상이었다.
당장은 붙잡히지 않고 갈 수 있다.
나는 빠르게 몬스터의 생사 여부를 확인했다. 살아 있는 놈은 없었다. 즉, 이쪽도 방해되는 게 없다.
철컥.
투헨더를 집어넣고, 혹시 몰라 롱소드에 손을 얹은 채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물론 뛰지는 않았다. 내가 급한 건 사실이지만, 죄인처럼 뛸 이유는 없었다. 멋도 안 살고.
크륵!
근데 죽은 줄 알았던 삼목구 하나가 눈을 번쩍 뜨며 시체 더미에서 벌떡 튀어 올랐다. 몸이 반쪼가리가 났는데도 대가리만 살아 움직이는 게 진짜 악마 같았다.
서걱!
어우씨, 그래도 보여서 다행이지. 나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롱소드를 꺼냈다. 물 흐르듯 공기를 유영한 검이 놈의 머리통을 둘로 쪼갰다.
하면 이제 제게 간섭할 건 아무도 없으니.
나는 깔끔히 하수도로 들어섰다. 검은 가닥 따위가 진득히 달라붙은 기괴한 통로가 저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