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7화 (27/389)

◈27화 선택의 결실 앞에서 (2)

“네놈─ 헛! 악마기사! 정신이 드십니까?!”

당연하게도 자는 사이 로그아웃되는 기적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나를 반긴 건 서로 컁컁대며 싸우는 인퀴지터와 데브, 바인딩으로 나를 묶은 채 경계심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아크메이지였다.

“…죽고 싶나?”

부수고 싶어도 무기가 없는지라. 나는 내 몸을 묶은 사슬을 한 번 보고, 경멸을 담은 채 아크메이지를 보았다.

그녀가 잠시 나를 살펴보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혹시 몰라 대비했을 뿐이니, 너무 화내지 말게.”

사슬이 조각나며 사라졌다. 마치 내 사회적 체면을 보는 것 같았다.

“…….”

나는 칼을 쥐고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린 채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로그아웃도 못 하겠다, 그냥 남은 시간 컨셉성격 좀 죽인 채 과몰입하면서 가려 했건만.

그걸 전부 뒤엎어 버리는 시련이 생길 줄이야.

괴롭다. 너무 괴롭다.

근데 이젠 그만두지도 못해…….

펄럭

나는 쉼호흡을 하며 모포를 완전히 내던졌다.

상체를 일으키며 흘러내렸던 천자락이 흙바닭 위로 내던져졌다. 슬쩍 보니까 아무래도 인퀴지터의 것─각자 색이 달라서 구분할 수 있었다─인 듯했다.

근데, 그래서 뭐? 이건 전부 쟤네가 자초한 일이었다. 염병, 나는 바꾸려고 했는데 인성질 계속하길 강요한 건 쟤네라고……!

“…그 불손한 눈을 베어야 고개를 돌릴 텐가?”

이번에 살아남기만 해봐. 다신 컨셉질하나 봐라 내가. 재미 삼아 한 컨셉질의 업보를 이렇게 받을 줄은.

“핫, 아닙니다!”

이 와중에 쟤는 이 험악한 말이 뭐가 좋다고 저렇게 해맑게……!

여러 의미로 열받고 빡친다. 김치만두, 특히 너 인마, 너!

절그럭.

나는 부글거리는 속내를 숨기지 않으며 말 위에 올랐다. 모닥불은 이미 정리되어 있고, 짐은 인벤토리 덕에 하나도 없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 참고로 나는 망토나 모포도 없다. 시스템상 체온까진 신경 쓸 필요 없어서─그랬다면 체온도 표기해 줬을 테니까─그냥 없이 자거든. 시스템으로 잠에 빠지면 추위 같은 거 안 느껴지기도 하고.

내가 이곳을 현실이라 여기기 힘든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이 컨셉 이슈 때문이지만!

“이랴!”

“헉, 나리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아 몰라! 나 다시 하고 싶어!!

“악마기사!!”

“나리!!”

으아아!!

* * *

무아지경으로 말만 보면서 달린 끝에, 타타라에 거의 다다랐다.

너무 심각한 문제가 내 머리를 점령한 까닭인가. 나는 그다지 피로를 못 느꼈지만 나머진 제법 죽을 것 같단 표정들이다.

“도시에 들어서시면 가장 먼저 어디로 가실 겁니까?”

김치만두 말은 안 들어, 안 들어, 안 들어!

뻥이고 나는 악마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치밀히 계산된 행동─무시─을 했다.

그도 그럴게, 악마에게 일시적으로 점…… 령 당했던 입장이다. 김치만두가 알아채지 않았다면─제길,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몸을 점령한 악마가 주변인을 해쳤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런데 악마기사 과거가 어떻지? 악마에게 가족이 몰살당했다. 즉, 트라우마 자극받기 딱 좋다. 자연히 신경도 곤두설 수밖에 없고, 그게 주변인을 향한 가시로 표출된단 이야기다.

가령 묵살이나, 외면같이. 타인과 자신을 위한 밀어내기로.

근데 해석을 하면서도 얼굴이 다 부끄럽다. 그렇다고 안 하자니, 아까 그 상황을 또 맞닥뜨릴 것 같고.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된 거지? 당장이라도 컨셉 풀고 싶은데 이젠 그것도 안 된다. 낯뜨거워 죽을 것 같다.

“메이블 상회로 바로 갈 건가……?”

화끈거리려는 얼굴을 겨우 식히니, 본래도 흰 털이 꼭 표백된 양 희어진 아크메이지가 물었다. 정답이긴 한데 역시 대답은 안 해줬다.

“가십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메이지님?”

“…조금 더 견뎌 보지요.”

나는 선두에서 말을 달리며, 슬슬 보이는 타타라의 모습을 확인했다.

한데, 도시와 연결된 다리에 놓인 바리케이드가 유독 눈에 띄었다.

떠날 때만 해도 없던 것들이었다.

“……! 사람이다!”

심지어 초소 위의 경비는 저흴 발견한 순간 분주해졌다. 화살의 사정거리에 들어섰음에도 공격이 안 날아오는 걸 보면 적대하는 건 아닌 듯한데.

“어째, 낌새가 안 좋습니다?”

데브도 같은 걸 봤는지 제가 하고픈 말을 대신했다. 이어지는 건 딱딱히 굳은 인퀴지터의 목소리다.

“…도시에서 마기가 느껴집니다.”

망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것이 정말입니까?”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런 감각은…… 악마를 마주했을 때밖에 느낀 적 없습니다.”

뭐, 새삼스럽게 여길 건 아니었다. 퀘스트가 타타라로 가라 한 이상, 여기서 뭔가 벌어질 건 자명했으니까.

「❖ 뒷면에 숨은 것

∎ 타타라로 이동

∎ 도시에 벌어진 일 탐문하기」

단지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나의 몫일 뿐이었다.

“거기, 멈춰라!”

초소에서 달려 나온 경비가 우리를 제지했다. 물론 그들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멈추긴 했을 거다. 바리케이드─통나무를 X자로 엮어 만든─가 빈틈없이 놓여 있던지라.

“정체를 밝혀라!”

나는 지금껏 해온 것처럼 인퀴지터에게 일임할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인퀴지터에게 뚝배기 깨지고 싶지 않으면 이제부턴 컨셉 제대로 해석해야 했다.

내 손이 인벤토리 속에서 모험가 패를 꺼내 들었다.

휘익.

“허억!”

바리케이드 너머로 패를 던지니,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그것을 받아 냈다. 받은 놈이 찔끔하고, 주변인들은 후다닥 물러나는 게 꼭 수류탄이라도 되는 양했다.

“모, 모험가인가…….”

그래도 증명했으면 된 거지.

“다른 이들도 다 모험가인가?”

“아, 아닙니다. 아니, 모험가 패는 있긴 한데.”

인퀴지터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잠시 혼동하다가, 그냥 성물과 모험가 패를 둘 다 내밀었다. 경비병들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사제님이셨군요!!”

세계관상 사제가 전체적으로 대우받는 듯하긴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어딘가 과한 감이 있다. 마치…… 물에 빠진 상황에서 저를 구해 주러 온 사람을 목격한 것처럼.

“그, 그런데 왜이리 적게 오셨습니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군요.”

“예?”

그리고 다음 순간, 경비가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전령을 받고 오신 게 아니십니까……?”

판 커지는 소리였다.

“…사제님과 우린 그저 이 도시에 볼일이 있어 온 것뿐일세.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인퀴지터를 손으로 제제한 아크메이지가 나서서 질문했다. 심각함을 인지한 시점부터 그녀의 눈은 더이상 피로로 축 쳐지지 않았다. 그저 냉정함만이 두 눈에서 빛날 따름이었다.

“그건…….”

경비들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지요.”

경비대원들이 몇 명이나 달라붙은 끝에 바리케이드가 좁은 길을 만들어 냈다.

“전령이라…… 일이 벌어져도 단단히 벌어진 모양이군.”

귀한 말들부터 먼저 통과시키는 사이, 아크메이지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옆쪽에서 슬그머니 올라오는 손은 데브의 것이다.

“…늦었긴 한데, 뭐 하나 말해도 됩니까?”

“무엇인가?”

“이곳으로 오는 길 내내, 싸운 흔적이나 핏자국 같은 걸 제법 봐서 말입죠. 처음엔 산적이나 들짐승에게 당한 흔적이겠거니 했는데…… 짭, 경비들 말이나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니 영 수상쩍어서.”

“그 수가 얼마나 되었나?”

“성주가 가도 관리에 몇 년쯤 손을 뗀 정도?”

그러니까, 평균보다 더 많은 사건이 벌어졌단 소리로 알아들으면 되나.

더구나 난 이 세 사람과 달리 한 가지 정보를 더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두 번째로 해결한 퀘스트, 긴급 구조 요청 그거 말이다.

원작의 기억은 안타깝게도 쓸데없다. 거기선 이런 거 없었다.

“네놈이 잘못 본 것 아닌가? 정말 가도의 치안이 관리되지 않았다면, 우리도 습격을 한 번쯤은 받았어야 했다.”

“아, 누가 그거 모릅니까? 그런데 짭새들이 전령 운운했잖아요. 멍청한 이단심문관 씨.”

“지, 지금 뭐라고 했지? 멍청한?!”

“예! 멍청한!!”

인퀴지터와 데브가 또 싸웠지만, 저건 며칠 간 계속 봐온 장면이다. 나는 제법 익숙해진 두 사람의 신경전을 손쉽게 외면했다.

안으로 들어오라며 손짓하던 경비가 입을 연 건 그 즈음이었다. 다른 경비보다 질이 좋은 투구가 음울한 빛을 흘렸다.

“이 도시로 들어오는 이들은 공격을 받지 않습니다.”

“당장 네놈의 손목을─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도시로 들어오는 이들은 공격을 받지 않습니다, 사제님.”

그 말을 듣자마자 단번에 돌아가는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악마계약자 놈들이 들어오는 무리는 방치하고, 나가는 이들만 죄다 잡아가고 있나 본데. 상단 구조할 때 듣고 본 걸 고려하면…… 아마 제물로 쓰려는 거겠지?

아, 이래서 메이블 상회 이야기가 나왔던 건가. 상회 출신 나가는 놈들을 건드려서?

근데 어차피 도시 전체에 수작을 부리는 거면 결과적으론 휩쓸릴 수밖에 없잖아 거기도. 난 또 상회만 이야기해서 다른 사건인 줄 알았네.

“뭐야, 제 말이 맞잖아요.”

“다, 닥쳐라.”

“하면, 나가는 이들은?”

아크메이지가 질문을 던졌다. 나 대신 탐문해 주고, 아주 고마웠다.

“살아 돌아온 몇 명 덕에 나가는 자들은 전부 습격받음을 알아냈습니다. 함에도 도움은 요청해야 하니…….”

“전령을 계속해서 보냈던 거군.”

“한 명쯤은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한 줄 알았습니다.”

뭐, 도시 전체에 수작을 부리려 한다면 고립시키는 게 제일 안전하긴 하지. 밖에서 지원이라도 왔다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으니 그쪽도 필사적으로 막았을 거고.

나는 일행과 한 걸음 떨어져서 걸으며 가만히 일의 전말을 더듬어 보았다.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오른팔이 간질간질했다.

“그것 외의 특이사항은 없습니까? 바리케이드는 무엇이고요?”

“바리케이드는 도시까지 공격받을까 걱정한 성주님께서 설치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 특이사항이라 한다면…… 실종자들이 급증했습니다.”

“신전은, 신전은 여태껏 무엇을 했습니까?”

“…신전은 지금 움직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예?”

“가장 먼저 이상을 알아채고 사제분들이 움직이셨지만…….”

경비는 다리의 끝, 도시로 들어가는 문을 열도록 지시하며 남은 말을 뱉었다.

“하수도를 차지한 악마들을 처리하시다가 대부분 사망하셨습니다.”

이건, 다소 공교로운 이야기였다. 내 튜토리얼 임무가 하수도 청소였으니까.

다만 그땐 고블린밖에 나오지 않았건만, 지금은 뭐가 출현하길래 신전이 당했을까.

“버러지 놈들이…… 같잖은 수작을…….”

이거 아무래도 하수도에 다시 들어가야 할 삘이다. 벌써부터 코가 괴롭네.

“자네도 눈치챘나보군.”

“두 분 다 짐작가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악마숭배자들이 아무래도 일을 벌이는 모양입니다. 다만…….”

메이지의 눈길이 인퀴지터에게 닿았다. 그녀가 내는 목소리는 자연히 낮아져, 경비에겐 들리지 않을 수준이 된다.

“최악의 경우, 도시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이봐요, 법사 나리. 그 정도로 상황이 심각한 겁니까요?”

“상황 자체는 소몬에서 벌어진 것과 비슷하네. 악마계약자들이 숨어서 제물을 모으고, 그것을 토대로 일을 벌이려 하는 거겠지. 다만…… 서른 안팎에 그쳤던 소몬과 달리, 이번에 제물로 쓰인 자들은…….”

셀 수도 없을 거다. 도시를 나가는 자들이 당한 걸 고려했을 때 못 해도 백 단위를 넘기지 않을까 싶을 뿐.

즉, 너커를 최소 다섯 마리는 볼 수 있을 거란 이야기다.

“들어가시지요. 사제님.”

“아, 예.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당연히 했어야 할 일입니다.”

…근데 이렇게 말하니까 완전 별거 아닌 것 같잖아. 밸런스 누가 담당했냐.

“저, 사제님.”

“예.”

“저흰…… 살 수 있겠습니까?”

나는 두 방에 잡힌 너커를 떠올리며 열린 문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건…….”

“예. 살 수 있습니다! 살 겁니다!”

뒤편에서 용사가 마법사의 이야기를 뒤로 한 채 희망을 논했다.

“신께서 여러분을 포기했다면, 제가 이곳에 오게 됐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희망은 아직 있습니다!”

또한 그 호기로운 말 앞에는.

두웅!

「타타라」

둔중한 종소리와 함께, 떠날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그러나 활기가 완전히 없어져 버린 도시가 펼쳐졌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