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돌이킬 수 없는 (4)
“아, 빌어먹을.”
방금 거 완전 찢었다, 라고 뿌듯하고 있자니 데브가 다짜고짜 욕을 내뱉었다. 말 빌려준다고 했으니까 그 정도는 봐주겠지만, 왜 갑자기 시빈지 모르겠다.
“…이봐요, 나리. 우린 신전의 샌님들이 싫습니다.”
그건 이미 아는 사항이다. 친하지도 않은 내게 새삼스레 험담할 정도로, 그것도 듣는 신전의 샌님 앞에서 토로할 정도로 싫어하는지는 지금 알았지만.
“하지만…… 악마들은 더 싫습니다. 악마나 다름없는 인간들도 정말 싫습니다.”
스토리 NPC들은 호감도 부분이 다 고장나 있나. 그렇지 않고서야 만난 지 몇 시간 됐다고 이런 소리를 듣게 될 리 없는데.
나는 그런 추론을 내며 남은 말을 들었다.
“그러니, 받으십쇼.”
무언가가 날아옴에, 반사적으로 받아 낸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조금 발달됐다 싶은 도시라면 그 문양을 단 주점이 하나씩은 있을 겁니다.”
뭘 준 건지 확인하려던 찰나, 데브가 사근댔다. 대체 뭘 줬기에 주점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가서 그걸 내미십쇼. 어떠한 정보든 살 수 있을 겁니다.”
나는 힐끗 내가 붙잡은 걸 살폈다.
음각된 쥐와 양각된 뱀의 조각이 겹쳐진 목각패가 눈에 들어왔다. ‘영웅전설’ 경험자라면 모험가 길드의 것만큼 익숙해할 세력의 문장이었다.
“당신의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미친. 이거 정보길드 출입패잖아. 모험가 길드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역할의 거기.
나는 순간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난 이번 사건으로 데브가 합류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이 패를 전달하기 위한 그림임을 깨달은 까닭이다.
이런 반전 아주 환영이다. 사용해 보기도 전에 로그아웃할 것 같지만.
“…내게 이걸 주는 이유는.”
“말했잖습니까. 신전을 싫어하지만, 악마나 악마 같은 인간들을 더 싫어한다고. 그리고 기사 나리는 정보를 쥐고 있기만 하는 우리보다 더 잘 쓰실 것 아닙니까?”
그건 맞는 말이지. NPC가 정보를 제공하면 플레이어는 퀘스트를 따라 관련된 문제를 파헤치고 해결하니까.
저놈이 그걸 알고 주진 않았겠지만.
“바라는 건.”
나는 패를 인벤토리에 넣으며 물었다. 그러자 데브가 입술을 끌어올렸다.
“됐습니다. 이미 받았습니다.”
…이따 인벤토리 빈 거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난 준 적도 없는데 대체 뭘 받았다는 거야.
“그리고 말은…… 최대한 빠르게 준비해 보겠습니다. 그동안 어디서든 쉬고 계십쇼. 알아서 찾아가겠습니다.”
와중에 서비스 하나는 진짜 좋다.
뭐지? 대체 뭘 했다고 나한테 이렇게 해주는 거지? 스토리라고 퍼줄 리는 없는데. 아니면 아까 악마계약자 한 마리 내준 게 여기까지 스노우볼을 굴린 거야? 말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건 너무 과한데?
“잠깐.”
내가 데브의 심리를 점치는 동안 이번엔 인퀴지터가 발언했다. 그녀의 침잠한 눈동자가 달빛을 받자 꼭 하얗게 빛났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특별히 바라지도, 그렇다고 예상 못 한 대사도 아니었다. 스토리 동행NPC가 설마 안 따라오겠어. 안 따라와도 상관은 없지만.
“아크메이지께선…….”
“…제가 어찌 빠지겠습니까.”
아크메이지 표정이 다소 죽을 맛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녀도 결국 찬동했다. 그녀의 두툼한 손이 본인의 눈을 꾹꾹 눌렀다.
“그렇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벌써 이런 고행이 시작되리란 예상은 못 했으나…… 인퀴지터와 함께하기로 결정한 시점부터 각오한 일이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좋아, 그러면 이걸로 출발이 결정된 건가. 근데 쟤네들 몫 말은 어떻게 되는 거지.
“…댁들은 알아서 하십쇼.”
“으음. 값은 지불하겠네. 그래도 안 되나?”
“뭐, 그러신다면야.”
데브가 어깨를 으쓱이곤 손짓을 했다. 아직 근처에서 미적거리던 도적─시신 자루 내밀었던 이였다─이 순식간에 골목 속으로 몸을 감췄다.
“그쪽은 원가 그대로 받을 테니 각오하십쇼.”
데브도 사라진 도적 쪽으로 슬슬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몸을 완전히 돌려 달려갔다. 순식간에 몸을 감추는 솜씨가 과연 도적 대표 캐릭터다웠다.
“…하면,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아, 숙사로 가시지요. 써도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신전의 숙소라…… 안 가는 게 성질머리엔 더 맞지 않으려나.
“악마기사도 함께하시지요. 잠깐이라도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지 않습니까.”
쓰읍. 근데 이렇게 말해 주면 따라가는 것도 캐붕은 아닐듯.
그냥 가서 침대에만 안 누우면 되겠지. 어차피 서서 자나 앉아서 자나 누워서 자나 피로도는 똑같이 까이기도 하고.
“이쪽입니다.”
나는 안내하는 인퀴지터를 가만히 보다가, 가장 늦게 발을 떼었다.
“자네는 파멸을 기다리는 건가?”
그러다 인퀴지터가 듣지 못하도록 작게 물은 현자에겐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 물음이 내가 노렸던 이미지를 정확히 관통했으니까. 으하학.
* * *
데브는 동트기 전 즈음에 돌아왔다.
생각보다 더 걸렸으나 그건 “늦었다.”라고 한 번만 말하는 걸로 끝냈다. 인성질을 부리기엔, 데브가 데려온 말들이 너무 훌륭했다.
사실, 늦게 와준 덕에 피로도를 많이 깎아 내기도 했고.
“왜 다섯 마리지?”
“아무리 좋은 말도 댁처럼 풀플레이트를 장착한 기수를 태우면 금세 지칠 테니까요. 왜요.”
그건 대략 짐을 분배하란 소리였다. 그래도 한 마리 더 많았지만.
“…이게 귀한 말이라서 말입니다. 데려올 사람이 있어야 한다더라고요.”
인퀴지터에겐 퉁명스럽게 발언하던 데브가 내 눈길에는 바로 직고했다.
이상한 놈들이었다. 인성질은 내가 부리고 있건만 왜 둘 다 나한테만 우호적으로 굴고 서로에겐 가시를 세우는데.
“그게 너인가?”
“예에…….”
「???(데스브링거)와 함께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나는 떠오르는 창을 힐끗 확인한 후 옆으로 치웠다.
"혹 불만이신지? 불만이면 말은 되받아가고요."
옆에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난 딱히 불만이라고 한 적 없는데… 그보다 처음 듣는 목소리다. 나는 그쪽으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 자매님!”
배웅하겠답시고 나온 사제들이 경악하는 게 귀에 은은히 들어온다. 사제들이 알아볼 정도면 이 도시에선 꽤 유명한 양반인 듯하다.
“아는 사람입니까?”
“그, 저희 신전의 큰 후원자십니다. 빈민가에 자선 사업도 많이 하시고요.”
“…범죄 전적은 없겠지요.”
“당연합니다!”
와중에 인퀴지터 덕분에 정보도 얻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딱 봐도 알겠네요. 우리 꼬맹이가 홀라당 넘어간 악마기사가 당신이죠?”
“넘어간 적 없거든요?”
“야밤에 조르르 달려와서 말 빌려줘야 한다고 조를 정도면 넘어간 거지.”
“아오.”
거기에 데브랑 떠드는 걸 들어보니 이쪽이 말 주인인가 싶다.
나는 온전히 풀리지 않은 피로감을 짓누르며 말을 향했던 몸을 틀었다. 그러자 상대가 제대로 보였다.
뾰족한 귀에 가는 체형을 가진 ‘슬랜드’족이었다. 은은한 한약 냄새가 썩 정겹다.
“뭐, 도로 받아간다는 건 농담이에요. 그냥 말 빌려가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와봤을 뿐이니 걱정 말아요.”
“누구냐.”
“저어기 자그만 약방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스카일리라고 불러요.”
약방 주인이 저렇게 좋은 말을 자그마치 다섯 마리가 가지고 있다는 건 좀 이상하지만, 그 부분은 넘기기로 했다. 기껏해 봐야 정보길드의 협력자거나 정보길드 소속원이겠지.
물론 그냥 데브랑 사적으로 친한 관계일 수도 있긴 한데…… 거기까진 별로 궁금하지 않다. 중요 NPC면 나중에 또 보겠지.
“당신이 말 주인입니까?”
그사이,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갑주를 벗는 데 성공한 인퀴지터가 앞으로 나왔다.
플레이트만 벗었다 할 뿐이지, 안에 입은 사슬 갑옷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어서 썩 위압적이었다.
“먼저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빌려주신 값은…….”
“아, 괜찮아요. 신전에 소속된 분이 빌려가신다는데, 대가를 어찌 받겠어요. 이럴 때 돕고 살아야죠.”
“그래도…….”
“좋은 일에 써주실 거잖아요. 그렇죠?”
스카일리는 그리 말하곤 빙긋 웃었다.
“애정을 가지고 키운 아이들이니까 다치는 일만 없게 해주세요.”
다만 그 말을 할 때 그녀가 본 건 인퀴지터가 아니라 나였다. 참고로 그녀의 손은 옆에 있던 데브의 머리를 꽉 눌렀고.
“아, 또 왜!”
“만약 다치면…… 좀 화날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말도 말이지만 데브 잘 지켜 달란 거지. 여기 NPC들 진짜 돌려 말하는 거 잘한다.
“절대로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물론 속뜻을 못 알아들었을 인퀴지터의 표정은 다소 비장해졌다.
데브 대할 때와 달리 태도가 깍듯한 게, 범죄자랑 아는 사이여도 범죄 전적이 없으면 OK인가 보다.
“그럼 다행이고요.”
“저, 그런데…… 말을 데려올 사람이란 건.”
“아, 말 그대로예요. 워낙 귀한 아이들인지라, 제가 모르는 곳에 오래 두고 싶지 않았거든요.”
“…신전에서도 충분히─.”
“물론 신전에 부탁드린다면 안전히 되돌려 주실 건 알아요.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네요. 제가 아는 사람을 붙여 놔야 좀 안도가 될 것 같아서.”
“그, 그럼…….”
“마침 꼬맹이와는 꽤 오래 알고 지낸지라, 쟤라면 괜찮겠다 싶어서 맡긴 건데. 아, 혹시 문제가 되나요?”
“그건…….”
“저 애가 하는 짓이 좀 껄렁껄렁해서 그렇지 제 자선 사업도 곧잘 도와주고 그런 아이예요. 눈치도 빨라서 이단심문관께 폐 끼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와중에 인퀴지터는 데브를 떼놓고 가거나 최소한 다른 이로 바꾸고 싶었던 모양인데…….
저쪽이 데브를 고집하는 이유는 몰라도─아마 스토리겠지만─이대로 가게 될 것 같다. 나야 뭐, 누가 붙든 알 바 아니었다.
“계속 미적댈 건가?”
각설하고, 기껏 말을 구했는데 떠들면서 시간 보내게 할 순 없다.
나는 말에 올랐다. 마침 아크메이지도 터덜터덜 이곳에 다다른 참이다.
“내가 제일 늦었군.”
그녀는 말이 왜 다섯 마리인지, 새로 추가된 이가 누군지 묻지 않았다. 하기야 일반인의 청력만 되어도 인퀴지터와 스카일라의 대화 절반 가량을 들을 수 있을 테고, 그 정도면 상황 파악엔 어려움이 없을 거다.
“어머, 제가 너무 시간을 끌었나 보네요. 어서 일 보러 가시지요.”
“그,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언변에 패배한 인퀴지터도 결국 시무룩한 얼굴로 말에 올랐다. 데브도 이미 제 말에 오른 채니, 이제 출발만 하면 된다.
“아, 잠깐. 얘, 귀 좀.”
“아, 또 뭐요.”
…말 주인이 제 대리인에게 말하는 것까지만 기다려 주고 출발하면 된다.
“그럼 무운을 빌게요.”
“신께서 함께하시길.”
속삭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축복을 비는 말은 들을 필요 없다 싶어, 냅다 말을 출발시켰다.
“이랴!”
히잉!
기골이 장대한 말이 투레질 한 번 하곤 다리를 바로 움직였다. 가속력이 제법이다.
“저, 저.”
“호오.”
물론 뒤에서 사제들이 뒷목 좀 잡은 것 같은데, 내 캐릭터는 남 호감도 같은 거 신경 안 쓴다. 으하학.
“……! 정말 좋은 말이군요!”
“…죽어라 애지중지하더니, 그럴 만하네.”
그사이, 인퀴지터가 감탄하고 데브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잠깐 귀에 스쳤다. 데브도 이걸 타보는 건 처음인 듯하다.
“이 정도면 사흘 안에도 가능하겠습니다.”
“그 정도입니까?”
“예에.”
아크메이지마저 말에 대해 가탄할 즈음, 말 한 마리가 내게 근접해 왔다.
“…저, 나리. 아까 들은 말은 잊으십쇼.”
데스브링거였다.
“제가 뒷골목을 전전할 때 만난 사람인데, 좀 오지랖도 넓고 그래서…….”
“관심 없다.”
사실 아주 잘 기억하고 명심할 거긴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다. 컨셉상 관심 가질 부분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습니까요.”
그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지,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는지. 옆에 붙어서 달리던 데브가 한참만에 한마디를 토해 냈다.
“…나리, 나리는 후회한 적 없습니까?”
이 상황에서 튀어나오긴 좀 엉뚱하지 않나 싶은 물음이었다. 거기에 이런 민감한 질문은 보통 서로를 좀 안 뒤에야, 그러니까 호감도가 좀 쌓이고 나서야 하지 않나?
너도 인퀴지터처럼 나 몰래 내적친밀감 쌓은 거야?
“…….”
무시할까, 말까. 무시하지 않는다면 어떤 답이 맞을까.
나는 빠르게 캐릭터를 고찰해 보았다. 곧 답이 보였다.
“의미없는 질문이다.”
능력이 안 돼서 가족이 죽는 걸 막지 못했고, 능력이 안 돼서 혼자만 살아남았고, 능력이 안 돼서 잡악마나 사냥하는 게 다다.
그런 입장에서 후회 같은 거 할 수 있을 리 있나.
후회라는 건 잘못을 인정하거나, 제가 한 선택에 더 나은 것이 있음을 깨달아야 가능한 건데, 악마기사는 그 무엇에도 속하지 않는다.
즉, 그는 후회할 기회마저 받지 못했다.
그의 모든 절망은 막을 수 없는 재해로 인해 벌어졌으므로.
그러하므로.
“…슬슬 영양제가 떨어질 때가 됐는데, 왜 아직도 로그아웃이 안 돼냐.”
타타라로 향한 지 이틀이 지났을 때. 잠자는 시간이 스킵으로 빠졌다는 말로도 더는 감싸지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건만 여전히 로그아웃이 되지 않을 때.
심지어 타타라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게임이 종료되지 않았을 때.
“왜……?”
나는 후회할 수 있었다.
게임에 접속한 것, 컨셉질에 몰두한 것, 때가 되면 로그아웃되겠거니 근심을 접어 두었던 것까지 모조리 내가 저지른 일이었으니까!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