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돌이킬 수 없는 (3)
이단심문은 자정 넘을 때까지 이어졌다.
신전 소속이라고 해서 모두가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건 아닌지라, 후반 조사가 지지부진해진 까닭이다.
어쩔 도리 없다. 신성력을 다뤄야만 올라갈 수 있는 직위의 사람이 신성력을 못 쓴다면 그건 조사받을 일이지만─설정상 부정을 저지르면 신이 힘을 거둬 간다더라. 편리한 설정이었다─, 원래 못 쓰던 사람에게 ‘너 신성력 못 다루니 죄인’이라 할 순 없었다.
결국 세세하게 심문해서 알아내는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데 그 과정이 짧고, 쉽고 재밌게 이뤄질 리 있나. 하물며 난 관련 능력도 없어서 뒤로 빠져 있어야만 하는데.
로그아웃 문제만 아니었더라면, 퍽 지루하게 느꼈을 테다. 그래, 로그아웃 문제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
게임 시간으로 나절. 다음 퀘스트도 없고 도울 일도 없던 덕에 고민할 여유만큼은 충분했다.
덕분에 내린 가설은 딱 두 가지. 내가 날짜를 잘못 계산했거나, 시스템상 스킵되는 시간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잠자는 시간 같은.
후자는 행복회로라고 마냥 말할 수만도 없는 게, 어떤 게임이든 플레이어가 수면을 취할 경우 시간을 빠르게 돌린다. 축지법처럼 시간을 접어 버린단 소리다.
하면 그래. 내가 이곳에서 잤던 시간만큼 풀다이브 종료가 늦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엄밀히 다지면 늦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시간을 건너뛰며 산 거지만, 어쨌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인퀴지터가 돌아온 것도 딱 그 시점이었다.
“남은 심판은 다른 이들이 잇게 될 것입니다. 대신전에서 파견한 이단심문관이 도착하기 전까진, 도시에서 책임지고 관리할 테고 말입니다.”
오, 며칠 더 이어질 줄 알았는데. 여기서 손 뗀다면 딱 좋다.
이단심문관, 주교, 주요사제들 심문하는 건 적이 튀어나오는 재미라도 있었지, 일반인쪽으로 넘어간 후엔 대화로 캐묻기만 해서 너무 노잼이었으니까.
재미를 느낄 정신 자체가 없었다 해도 그렇다. 노잼은 노잼이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빠밤빰!
인퀴지터의 말과 함께 퀘스트 완료 BGM가 들려왔다.
「LEVEL UP!」
레벨도 겸사겸사 오른 건 덤이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한데 내가 레벨을 확인하는 사이, 도적이─왜 안 가는진 모르겠다─삐죽 물었다. 말 자체는 나름 이해 가는 부류였다.
가해자가 소속된 집단에서 가해자를 심판한다고 하면, 누군들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을 거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괜히 있진 않으니까.
“내통자라곤 하나 전원 일반인. 훈련받은 군대가 제압 못 할 수준은 아니다. 그리고 일주일이면 교단이 보낸 심판자들이 도착할 터.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은 적다.”
“제가 그쪽을 물은 것 같습니까?”
“그럼 뭘 물은 거지?”
도적이 하는 말을 나와 아크메이지는 알아들었으나, 안타깝게도 우리 벽창호에겐 무리였다.
쟤는 아마 도시 병력으로 감시 가능하냐는 물음으로 알아들었을걸.
“음. 내가 맡길 바라는 거라면 그건 불가능하다. 나 또한 끝까지 책임지고 싶으나…….”
인퀴지터는 잠깐 말을 흐리더니 곧 힘을 주어 끝을 마무리했다.
“내겐 더 우선해야 할 사명이 있다.”
도적의 어이가 털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도적이 나를 돌아보더니 인퀴지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뭔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알겠다.
“…이번에 올 이들은 부정자가 아니어야 할 거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악마기사. 이번 일로 하여금 교단에서도 대대적인 색출이 이어질 것입니다.”
“하. 그래 봤지. 부정자라도 같은 식구라며 감싸 줄 줄 누가 알아?”
“…그 이상의 능멸은 허용하지 않겠다, 범죄자!”
와중에 나랑 도적을 대하는 인퀴지터 태도차이도 웃기고.
“크흠. 그보다 자네. 아까부터 묻고 싶었네만…… 도망치는 이들을 어떻게 찾은 건가?”
화제를 돌리고자 아크메이지가 질문 하나를 던졌다. 도적이 어깨를 으쓱였다.
“신전에 내통자가 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고…… 보아하니 색출을 늦게 할 눈치도 아닌지라. 뒷골목에 돌아가는 즉시 애들 데리고 신전 주위에 대기했습죠. 그러다 도망가는 놈들 하나둘 잡은 거고.”
나는 그냥 스노우볼이 된 줄 알았는데, 심지어 캐릭터 속성에 맞는 백스토리까지 있네.
버그만 아니었으면 진짜 갓겜인데. 아 빌어먹을 로그아웃.
“아, 그렇다고 제가 당신네들과 화해하려는 건 아니니 오해 마시죠. 저는 그저 기사 나리에게 은혜 갚은 것뿐이니까.”
“…….”
별개로 도적 저 녀석은 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겁은 겁대로 먹고 시비는 시비대로 건다.
“…그 부분에 대해선 늦게나마 감사를 표하겠다. 나는 여전히 너 같은 범죄자들을 용납할 수 없으나…… 도움 받은 것은 사실이니.”
그래도 인퀴지터는 인정할 줄 아는 NPC였다.
“고맙다. 덕분에 교단에 기생하고 있던 악의 종자를 박멸할 수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감사 인사는 집어치우십쇼. 말했잖습니까. 당신네들을 위한 게 아니라 기사 나리에게 은혜 갚은 것뿐이라고.”
덕분에 도적이 당황해서 고개를 돌리고 쭈뼛대는 꼴을 구경할 수 있었다. 거의 뭐 귀신을 본 사람의 표정이었다. 비록 드러난 건 귀와 하관뿐이더라도.
“그렇지만, 감사와 범죄를 눈감아 주는 것은 별개다. 데려간 악마계약자를 마냥 빼돌린 거라면─.”
“염병, 당신네들이 순순히 고맙다고 할 리가 없지.”
“감사는 순수한 진심이었다!”
“예, 예.”
도적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대충 대답했다. 그에 인퀴지터가 메이스를 쥐려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가 끝내 주먹만 쥐고 넘겼다.
의외였다. 뽑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릴 의향도 없었고.
“빼돌리진 않았으니 걱정 마십쇼. 혹시 몰라서 시체도 들고 왔습니다.”
그래도 인퀴지터의 짧은 인내는 요구한 것을 얻어 냈다. 도적이 손가락을 튕겼다. 기척 하나가 내 귀에 들어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데스브링거, 부르셨습니까.”
와 색적스킬 발동 안 되니까 찾기 힘들…… 으하학!
“들었겠지만 신관 나리께서 시체를 수거하셔야겠단다.”
내가 도적의 전직을 기억하는 이유가 나왔다.
데스브링거DeathBringer…… 다들 멀쩡하게 멋있는 전직 이름 가지고 있는데, 도적만 유독 오글거리게 지어져서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아마 한국인 감수성에 ‘데스’란 단어가 영 안 맞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아무튼 덕분에 사람들이 가장 안 플레이하는 직업 1위면서도 제일 많이, 정확히 기억하는 직업이 됐다.
참고로 제일 많이 틀리는 직업은 인퀴지터다. 사사게(사건사고게시판)만 가봐도 인지퀴터, 인지쿼터 별 발음을 다 구경할 수 있었지.
“…확실하군.”
각설하고, 내가 딴 생각에 빠진 사이 도적…… 음, 도적은 다른 애들이랑 헷갈리니까 이왕 명칭 나온 김에 그걸로 불러 줄까. 근데 데스브링거를 계속 발언할 자신은 없으므로 데브라 줄여 부르겠다.
그래, 데브가 다른 도적이랑 함께 악마계약자 시체를 검사받았다.
처음엔 자루를 내밀기에 뭔가 했는데, 까보니까 잔인하게 난자된 시체가 굴러 나오더라. 자루 까던 도적NPC의 눈이 여전히 이글대는 걸 보면 쟤 짓인 것 같다.
“…그보다, 이쪽도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무어가 궁금한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면 답해 주겠네.”
“그, 용사라는 말 말입니다.”
한데 데브가 갑자기 뜬금없는 단어를 들고왔다.
“진짭니까?”
“…아, 그래. 자네는 들었지.”
아크메이지가 말을 고르려는 듯 잠깐 침묵을 올렸다. 그리곤 피곤에 절여진 눈을 꿈뻑거리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얼음에 자빠진 쇠 눈깔이었다.
“맞네. 인퀴지터는 용사일세. 신께서 택하신.”
…저기, 아크메이지 괜찮은 건가. 저 양반 아무래도 피로도 Max 상태 같은데.
뭐, 힘체민(힘체력민첩) 높은 나도 슬슬 위험 수준인데, 지능 몰빵캐가 피로도 Max 아닌 것도 좀 우습긴 하다. 그나마 기본 힘체민이 높은 샤기 종족이라서 여기까지 버텨 낸 게 맞겠지.
“…진짜?”
“진짜네.”
“아니…….”
도적의 하관이 찌그러졌다. 인퀴지터가 용사라는 걸 도저히 믿기 싫다는 게 보였다. 제게 용사란 직함이 과분하다 생각하던 인퀴지터 역시, 그 의견을 인정하면서도 어쩐지 기분 상한 사람처럼 분함을 담고 있고.
하여간, 붙여 두면 또 재밌는 조합이 될 두 NPC였다.
스윽.
뭐, 그렇다 해서 더 지켜보고 싶진 않다. 나는 벽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워, 걸음을 내디뎠다.
퀘스트도 깼겠다, 내통자의 후처리 방법도 들었겠다, 도적이 데려간 놈도 처리됐음을 확인했겠다.
컨셉의 성미를 고려했을 때나 플레이어로서나 더이상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 어딜 가십니까?”
신전에서 자긴 싫고, 대충 아무 여관이나 들어가서 자야지. 이 망할 게임, 진짜 피로감이랑 졸린 걸 왜 구현해서.
아까까진 긴장 때문에 잘 안 느껴졌는데, 로그아웃에 대한 불안을 덜어 내고 여유가 생긴 지금은 진짜 장난 아니게 피곤하다. 쉬고 싶었다.
“타타라로 가려는 건가?”
근데 왜 저런 오해가 튀어나오는 건지.
“타타라라면…… 전에 있던 그 도시 아닙니까?”
“…그리고 메이블 상회가 있는 곳이지요.”
어. 맞다.
“……! 메이블 상회라면…….”
“악마계약자의 입에서 나온 이상 그곳에서도 무언가 일이 진행되고 있을 터…….”
심문 결과가 나온 후에 움직일 거였는데, 어쩌다 보니 사건이 옆으로 새서 까먹고 있었다. 메이블 상회에 대한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조금은 쉬고 싶을 법한데, 자네의 책임감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군.”
…완전히 잊고 있었던 상황이지만, 굳이 오해를 풀어 줄 이유는 없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이동 수단 얻을 곳을 궁리했다.
시간상 타타라 가던 도중에 로그아웃하게 될 테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로그아웃만 된다면, 뭔들 아니 좋겠나?
“그러나 지금 출발하는 건 좋지 않은 판단이라 생각하네. 체력이 부칠걸세.”
그것도…… 그렇긴 하지.
“그래서, 이 순간에도 어떤 짓을 벌이고 있을지 모를 그놈들에게 시간을 제공해 주자는 이야긴가?”
그런데 악마에 한해서 내 컨셉에겐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효율의 문제일세. 당장 출발하면 시간은 단축할 수 있겠지. 그러나 스스로를 채찍질해 가며 타타라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처리할 체력이 남아 있겠나?”
“네놈의 나약함을 내게 전가하지 마라.”
“인정하네. 나와 다르게 자네는 힘이 남아돌 수도 있겠지. 그런데, 정말로 그런가? 무리한 몸으로 출발해, 중간중간 짧은 노숙을 취하며 돌아간 타타라에서 진정 모든 힘을 끌어낼 수 있나?”
그럴……걸……? 피로도야 많이 차겠지만 그래 봐야 잠자면 떨어지는 수치에 불과하다.
그리고 시스템상 여관에서 자나 노숙하나 피로도 떨어지는 속도 외엔 별 차이점 없어서. 게임 꺼질 것까지 고려하면 애초에 관리할 필요도 없고.
“이보게. 타인을 도울 힘이 있음에도 돕지 않는 것은 나태가 맞네. 그러나 타인을 돕기 위해 스스로를 혹사한다면, 그건 과연 성실이겠나.”
한데 그런 이유로 한 말에 어째서인지 삶에 반영하면 좋을 명언이 돌아온다.
“내가 있기에 세상이 있는 것이고, 나 스스로를 세워야 타인을 지탱할 수 있게 되는 법일세.”
아니, 나도 현실이었다면 구구절절 동의할 이야기긴 한데. 게임에서 이런 말을 들어 봤자…….
“그래서, 내게 설교하는 건가?”
플레이어와 내 컨셉은 안 들어.
“설교가 아니라…….”
“그렇게 살고 싶다면 그렇게 살아라, 현자. 네놈이 체득한 진리대로 처신하고, 네놈이 옳다고 여기는 방향대로 숨쉬어라.”
그도 그럴 게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조차 악마가 나타나면 2순위로 미뤄 버릴 만큼 악마를 증오한다는 설정의 컨셉이다. 즉, 제 안위보다 악마처리를 우선시한다는 거지.
한데 그런 캐릭터가 몸 좀 힘들다고 악마를 뒤로할까?
“나 또한 그리할 테니.”
절대 아니지! 만약 그리한다면 그건 캐릭터 붕괴다. 그것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 뒷면에 숨은 것
∎ 타타라로 이동」
그리고 퀘스트가 떴다.
“그리 살다간 언젠가 무너질 걸세.”
“알 바 아니다.”
플레이어는 안 무너지니까 신경쓸 것 없고, 그보다 말 진짜 어디서 구하지. 교역소에서 말을 사야 하나? 내가 가진 돈으로 못 살 것 같은데.
쓰읍. 모험가 길드에 요청을…… 될 리가 없겠지? 와 이거 어떡하냐. 간지는 간지대로 잡았는데 여기서 막히네. 이래서 가오는 돈이 있어야 하는데.
“…저.”
그때 데브가 손을 쓱 들어 올렸다.
“이 도시에서 제일 빠른 말을 수배해 드릴 수 있습니다요. 신전에서 기르는 것보다도 더 좋은 놈들로.”
…너 이 자식, 마음에 들었다! 근데 나 소지금 얼마 없는데……! 돈 안 되면 무슨 쪽이냐. 으아아. 드라우거 잡고 50만 갈 받았어야 했는데! 아니면 이번 사건 해결한 값이라도!
“그렇지만 최소 두, 아니 세 시간은 걸릴 겁니다. 말의 컨디션에 따라 더 걸릴 수도 있고요. 음, 괜찮으십니까?”
“…….”
시간이 걸린다라. 그렇지만 나 혼자선 말 구할 방법도 없고, 제일 빠른 말을 구해 준다는 장담을 했으니 그 정도라면 꽤 타협 가능한 부분이다.
“대가는.”
단지 값이 문제지……!
“…값은, 뭐.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나는 별안간 감격에 울컥할 뻔했다. 천산가?
“대신…… 하나만 묻겠습니다.”
“말해라.”
“…분명 얻는 게 없을 텐데, 왜 그리 헌신하십니까?”
대답 하나로 말 하나 퉁칠 수 있으면 얼마든지 답하지. 그런 생각으로 질문을 기다리니 다소 요상한 물음이 왔다.
“재물도, 명예도 따르지 않을 텐데, 어째서…….”
시스템의 활용과 컨셉질의 크로스가 NPC 눈엔 헌신으로 비치는 건가…… 딱히 그런 걸 노린 건 아닌데.
내가 생각해 둔 행동원리는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자기 학대였다. 헌신과 희생 같은 숭고함이 아니라.
“너는 벌레를 잡는 데도 이유를 대나?”
뭐, 그걸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으므로 나는 산뜻히 뇌까렸다.
“나는, 그저 세계를 갉아먹는 해충들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을 뿐이다.”
참고로 이 말을 할 때 내 오른팔도 붙잡았다. 와하학.
이런 과몰입 찬스는 못 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