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무지의 대가로 (7)
흐우우우우!
악마계약자들이 팔뚝을 그어 흘려 낸 피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 수가 셋이었다.
“드라우거! 가라!”
“시간만 벌면 돼!”
그나마 다행인 건 불러낸 대상이 드라우거란 걸까. 처리하기 다소 까다로운 놈은 맞지만 그건 나한테나 그런 거고, 사제 앞에선 바람 앞 등불이나 다름없다.
“영광으로 알아라…… 내 손수 네놈들을 지옥으로 돌려보내 줄 터이니.”
그래도 인퀴지터에게 전부 맡긴 채 손 놓고 있을 순 없으니까.
나는 스킬, ‘생존본능’을 통해 가장 피해를 덜 입는 경로를 따라 달려갔다. 나처럼 빠르지도 않고 스켈레톤을 요리조리 피하는 요령도 없는 인퀴지터가 순식간에 뒤처졌다.
“그레첸도 죽여야 합니다! 그는 배신했습니다!”
그렇게 스켈레톤 사이에 홀로 고립되려던 찰나, 들어 본 목소리가 귀를 건드렸다. 밤사이 내게 일방적으로 친한 척했던 그놈이었다.
“역시, 신전도 한패였군.”
“……!”
“그때 네놈의 목을 쳤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나, 버러지?”
나는 내게 손뻗는 스켈레톤을 팔로 후려치며 스킬창을 빠르게 열고 닫았다. 하나 남은 포인트가 제자리를 찾아가며 내게 새로운 힘을 부여했다.
흐우으으으.
마침 드라우거 한 마리도 내게 근접한 상태다. 타이밍이 좋다.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목을 잘라 죽은 자를 위로하리라……!”
“나리, 앞에─!”
“그라운드…… 크래쉬!”
나는 방금 찍은 브레이커 상위 스킬을 시전했다.
「그라운드 크래쉬│뛰어오른 직후 급강하하며 마력을 두른 무기를 대지에 내려찍는다. 착지시 전방위로 충격파가 퍼져 나간다.
효과: 마력 60 소모. 적중당한 적에게 700%의 대미지로 공격. 충격파 범위에 들어온 적들은 370%의 대미지를 입으며 밀려난다.」
허공으로 뛰어오른 내 몸이 역수로 쥔 투헨더를 바닥에 내리꽂는 순간, 새까만 기운이 사방을 휩쓸며 대지를 요란하게 울렸다. 마치 폭발하듯, 혹은 폭풍처럼.
후드드득!
“악마기사……!”
비산하는 돌가루와 피어오른 먼지바람 사이에서 어렴풋이 인퀴지터의 부름이 들린 듯하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저, 저게 그레첸……!”
“주, 죽여!”
“드라우거!”
대신 나는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을 했다.
콰앙!
“……!”
브레이커 계열 스킬은 동작이 커서 연계공격을 하기 어려울 뿐, 실제로 경직 페널티가 있진 않다. 때문에 스킬을 잘만 사용하면 연격도 그리 어렵지 않으니.
나는 단번에 뽑아 든 검을 앞으로 내려찍음으로써 드라우거를 단칼에 베어 냈다. 표적마크 중심을 베인 이상 최소 치명타다. 앞서 들어간 공격까지 생각하면 아마 죽었을 확률이 높다.
화악!
근데 먼지바람 때문에 드라우거의 안개가 잘 안 보여.
나는 시야를 트기 위해 검을 휘둘러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내가 반으로 쪼갠 드라우거의 예후가 보였다.
정말 사망했는지 안개가 아래로 폭삭 주저앉아 사라지고 있다.
“악을 멸하라!”
잠깐의 적요가 사방을 차지하려 했을까, 뒤쪽에서 주문을 외던 아크메이지가 드디어 공격 하나를 날렸다. 하얗되 금빛을 띠는 불꽃이 남은 스켈레톤과 드라우거 한 마리를 삼켰다.
콰앙!
비슷한 타이밍에 인퀴지터도 마지막 하나를 해치웠으니. 이걸로 녀석들의 준비는 끝이다.
나는 단번에 뛰쳐나갔다. 어려운 적을 상대하는 것도 나름 쾌감 있지만, 그렇다고 소환할 시간을 주고 싶진 않았다.
“으, 으아─!”
“젠장, 제어를 포기해!”
“뭐? 미친─!”
그렇게 의식이 이뤄지는 마법진 근처에 다다랐을 즈음, 악마계약자들이 피를 토하며 결단을 내렸다. 반길 만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허락할 것 같으냐!”
방해한 세 놈은 몸을 던져도 나를 못 막으니 미뤄 두고, 의식을 진행하던 놈을 죽이면 소환이 멈출까? 보통 만화나 소설 전개는 그런데, 게임은 또 모르겠다.
뭐, 필수 전개라면 소환되고 막을 수 있는 재질이면 막히겠지.
“오라, 죽음이여!”
서걱!
“커억!”
나는 달려드는 악마계약자 세 놈을 무시한 채 의식의 당사자 중 한 명의 목을 베어 냈다.
악마계약자도 나름 법사로 분류되는지라 나를 방해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체적으론 능력이 딸려서, 능력적으로는 캐스팅 시간이 길어서.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발 늦은 모양이다. 아니면 정해진 전개였거나.
“됐다, 성ㄱ─!”
번쩍!
잡혀간 이들로 추측되는 시체 더미 아래, 하얗게 그려진 소환진이 붉은 빛을 토해 냈다. 문득, 오른팔의 간질거림이 조금 더 강해졌다.
파직, 파직─
제가 오른팔의 간질거림에 잠깐 집중이 풀렸을까.
퍼엉!
한순간 빛의 세기가 치솟더니, 엄청난 물리력이 내 몸을 강타했다. 내 몸이 부웅 뜨다못해 뒤로 날아갈 정도였다.
“악마기사!”
텅!
날아간 위치가 하필 인퀴지터의 대형 방패 위라는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HP가 와락 깎였다. 그게 부딪친 충격 때문인지, 인퀴지터가 두르고 있던 신성력 때문인지는 알 겨를이 없다.
통각 수치를 낮게 했는데도 등판이 얼얼하다.
“구더기 놈들이…….”
나는 대형 방패에서 주륵 미끄러져 내림과 동시에 땅을 디뎠다. 앞판과 등판 두 곳이 욱신거리니 기분이 좀 그랬다.
그래도 뭐, 크게 다친 곳이 없으니 감수할 만은 하지만.
“나리, 괜찮습니까요?”
“네놈 눈깔은 장식인가?”
HP가 좀 내려가긴 했지만, 상처 자체는 없다. 하므로 나는 전방에 시야를 고정했다.
내가 날아갔듯 악마계약자 놈들도 사방으로 던져져 빌빌대는 게 보였다. 그건 좀 꼬셨다.
키아아아아!!
소환을 못 막은 건 조금 슬프지만.
“…잘도 소환해 냈군.”
“저, 저건 뭐랍니까.”
뭐, 아슬아슬한 장면은 뽑았으니까 만족이다. 난 소환된 악마를 찬찬히 살폈다.
날개가 없되 지느러미를 달고 있는 드래곤 형상의 악마였다.
「너커│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다가 우물을 통해 인간을 잡아먹는 악마. 그 이빨에는 강력한 독이 흐른다고 한다.」
“너커일세. 이빨엔 독이 있으니 조심하게.”
“…독이 없어도 물리면 위험할 크긴뎁쇼?”
도적의 말이 맞았다. 소환된 너커의 크기는 4족 보행임에도 발끝부터 정수리까지의 높이만 대략 3m.
괜히 공동이 크게 설정된 게 아니었다.
“쯧.”
그보다 내 기억상 너커가 초반에 나올 만한 몹이 아닐 텐데. 물론 퀘스트 권장 레벨에 맞게 조절되어 있긴 하겠지만…….
“흐… 저거라면 용사도……!”
와중에 나한테 친한 척하던 그놈은 아직 살아 있었다. 나쁜 일은 아니었다. 저 NPC 목은 내가 따고 만다.
키아아아악!
“……! 옵니다! 제 뒤로!”
그때 너커가 우리를 발견하곤 입을 쩍 벌리며 돌진을 시작했다.
“…를 바치노니, 이성을 버리고 힘을 얻으라……!”
키아악!
심지어 엎어진 채로 중얼중얼대던 한 놈 덕에 광폭화까지 걸렸다. 확신할 수 없으나 갑자기 눈깔 벌게지고 몸에서 검은 기운이 흐르는 걸 보면 거의 99%다.
“신이시여, 악에 굴하지 않을 힘을 제게 빌려주소서……! 흐아압!”
한데 그걸 본 인퀴지터는 구태여 정면승부를 하려더라. 내가 보기엔 그냥 옆으로 피하면 될 것 같은데.
우직한 성격은 싸움에서도 적용되는가 싶었다.
“으아아, 이거 버티는 게 맞는 겁니까?!”
그때 인퀴지터가 기도문을 읇으며 더더욱 강렬한 광휘를 품고, 도적이 그 뒤로 쏙 숨었다. 아크메이지도 마찬가지였다.
“응집하고 쌓아 올려, 보호하는 벽을!”
“뭐합니까, 나리!”
“너─!”
아니 난, 옆으로 피할 거였는데……!
도적이 나를 붙잡고 인퀴지터 뒤로 끌어왔다. 타이밍이 애매하게 맞물려서 이젠 빠져나갈 수도 없다.
콰앙!
직후 산이 무너지는 듯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저, 저걸, 버티다니……!”
아크메이지가 쳐둔 방어막이 단번에 깨져 나가고, 인퀴지터의 방패와 드래곤의 머리가 치열한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뚫리지도 부서지지도 않은 채, 당당히 맞대결에 돌입한 것이다.
“으아압!”
심지어 인퀴지터가 기합을 내지른 후엔 밀려나는 것도 없었다. 초반엔 부딪친 충격으로 인해 조금 밀려났는데, 이젠 꼿꼿히 두 다리로 서서 저 무게와 힘을 견뎌 내는 것이다.
파티 생각은 여전히 없으나, 정말 쩔어 주는 탱커가 아닐 수 없다.
“악마는…….”
하면 딜러 포지션으로써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마침 기회도 딱 좋았다. 너커의 약점─대가리─을 이 정도로 편하게 노릴 타이밍은 흔하지 않았다.
“전부 죽어야 마땅하다……!”
스릉.
나는 투헨더를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인퀴지터의 뒤에서 빠져나왔다.
한 걸음에 방패와 머리를 비비고 있는 너커의 옆에 서고, 발목 한 번 트는 것으로 내 몸이 너커를 향했다.
브레이커. 불길한 기운이 검에 맺히며, 거대한 도신이 단두대의 칼날처럼 내려찍혔다.
서걱!
핏줄기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
“…저게 악마기사란 건가…….”
키아아아아악!
나는 주둥이와 혀가 통째로 잘려 나간 너커를 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보스전 내지 엘리트몹을 사냥할 때, 약점 타격을 성공했다 해서 부위 파괴까지 바라는 게이머는 드물다.
바란다 해도 어서 대미지가 쌓여 파괴가 이뤄지길 원하는 거지, 그게 한 방에 될 거라 기대하는 이는 없단 소리다. 나도 그런 사람이고.
근데 이 게임은 뭐가 아쉬워서 한 방에 부위 파괴가 되도록 설정한 건가.
고블린이야 뭐, 거긴 유구한 잡몹이고 어떤 게임을 가도 약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으니 이해했지만. 쟨 드래곤이잖아. 아종이라도 드래곤이잖아.
내가 이제 15렙인데 이건 좀 아니지 않냐.
“무슨─!”
“단 한 합에……?!”
악마계약자들 심정이 내 심정일 것 같으나, 캐붕을 일으킬 순 없으므로 입술을 꾹 다물고 자세를 정비했다.
주둥이는 잘려 나갔을지언정 너커는 아직 살아 있었다.
“후우.”
나는 숨을 뱉고, 느릿하게 삼키며 투헨더를 당기듯 고쳐 쥐었다. 다음 타깃으로 잡은 부위를 공격하기 위한 전 단계였다.
“아, 안 돼! 막아야!”
주둥이가 잘려 나가며 머리를 위로 치켜들었으니 대가리를 치는 건 불가능. 그렇지만 드래곤의 약점은 꼭 머리에만 있지 않다.
역린.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거꾸로 돋아난 비늘. 벌겋게 달아올라 더없이 잘보이는.
웬만한 가상현실 게임─드래곤이 나오는─들은 대부분 구현해 두는 약점이었다.
“소, 소환을!”
“제, 제물이 없어!”
“내 피를 바치노니…….”
드래곤 뒤편에서 무언갈 꾸미고 있던 적들이 발광했으나, 이 거리에선 절대 못 막는다.
“적을 묶어 다오!”
하물며 아크메이지가 지원사격도 해주었다. 나는 꽁꽁 묶인 적들을 관심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다음 단계를 밟았다.
문득 그라운드 크래쉬를 찍는 바람에 찌르기 스킬─스팅거를 지금 쓸 수 없다는 게 아쉬워졌다. 그라운드 크래쉬를 찍은 걸 후회하진 않지만, 이때 스팅거 쓰면 그림이 좋았을 텐데.
사르륵.
그렇게 아쉬움을 흘리며 칼을 내지르니, 일순 검에서 검은 기운이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
푸욱!
제가 그것을 인지함과 동시에 검날이 너커의 심장을 꿰뚫었다. 덕분에 다시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이고, 나리. 뒤가 비었잖습니까요!”
그러나 착각이라 넘기기엔 기억에 너무 선명히 상이 맺혀서.
해당 의구심에 정신이 퐁당 빠지기 직전, 제 옆을 누군가 스치듯 지나가며 등 뒤로 넘어갔다. 덕분에 상념이 0.1초도 가지 않아 깨졌다.
파각!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면 도적의 후드 자락과 뼛조각이 보인다. 악마계약자가 힘을 쥐어짜 불러 낸 스켈레톤이 아닐까 싶다.
“…뭐, 드래곤도 단칼에 잡으시는 분이 스켈레톤에 당할 것 같진 않습니다만.”
아니, 이건 그냥 드래곤이 약하게 설정된 걸 텐데. 그걸 모르는 NPC 입장에선 대단하게 보일 법도 하지만.
쑤욱.
나는 순식간에 머릿속을 점령하기 시작한 의문들을 겨우 밀어내며 검을 뽑아냈다. 부서진 역린 조각이 사방으로 튀고, 꿰뚫린 살점의 끝에서 핏불이 촤악 튀었다.
얼굴과 몸이 드래곤의 피로 흠뻑 젖었다.
쿵!
「LEVEL UP!」
주둥이가 잘리고 심장마저 꿰뚫린 게 직격타였는지, 너커도 몸을 눕혔다. 너커가 상위 몹인 걸 아는 입장에선 다소 찝찝한 끝이었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 상처를 입었을 때 죽는 게 맞긴 한데…… 뭐랄까, 15렙의 공격 두 번 맞고 죽었다 생각하니까 좀…….
“그레체에에엔!”
별안간, 내 닉네임이나 이름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를 지칭한다는 건 아는 호칭이 공동을 한가득 메웠다. 친한 척하던 그놈이다.
“정말로, 정말로 배신을─!”
뭐래. 나는 얼굴에 흐르는 핏물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별로 효과는 없었다─울부짖는 NPC를 직시했다. 후드 아래로 보이는 하관은 마찬가지로 피에 젖어 있고, 몸뚱이는 아크메이지의 바인딩에 꽁꽁 묶여 있다.
딱 목을 치기 좋은 모습이었다.
“저 치룽구니가 뚫린 입이라고……!”
인퀴지터가 노한 얼굴을 하고, 나는 그와 대조되게 사늘한 표정을 내세웠다. 화가 안 났다는 설정은 물론 아니다.
“어떻게, 당신이 왕을……!”
“그래, 아직 네놈이 남았지…….”
방금 전 무표정은 입꼬리를 파르르 떨면 눈을 까뒤집기 위한 전초였을 뿐이다!
“더 지껄여 봐라. 네놈이 내 분노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나도 궁금해지니까.”
“……!”
나는 투헨더를 훅 털었다. 핏물이 공동 바닥에 팍 튀고, 섬뜩한 광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
“왜, 더는 못 떠들겠나?”
한 걸음, 한 걸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었다.
그러자 상대는 후드를 쓴 주제에 고개를 틀어 시선을 피했다. 그럼에도 내가 가까워지는 건 막을 수 없다.
“악마기사.”
아크메이지가 그런 나를 불렀다.
“이번에도 날 방해할 셈이냐?”
사납게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물으니 아크메이지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되도록 깔끔히 죽여 주게. 신전에 제공해야 할 증거물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번엔 구태여 막지 않겠단 소리였다.
“흥.”
콧숨과 함께 내 투헨더가 허공으로 치켜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