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무지의 대가로 (3)
나는 뜬금없는 전개에 눈을 껌뻑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 원작에서 드라우거 사건이 악마계약자 내지 숭배자와 이어지는 것도 알고, 내가 이런 이벤트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라서 재미를 많이 느끼긴 하는데.
갑자기 웬 그레첸? 뜬금없네. 실 잣는 그레첸도 아니고.
“이단자에게 사로잡히신 거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살육의 제를 즐기러 가시지요.”
이벤트 자체에는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초기 게임 이벤트는 대부분 다 이런 식인지라 익숙한 까닭이다.
그렇지만 ‘그레첸’이란 명칭은 역시 좀 그렇다. 그레첸이라 정한 이유도 감이 잘 안 잡힐뿐더러, 멋이 안 살았다.
“그레첸이시여?”
그래도 이름 주는 건 내가 아니라 게임사니, 개인적인 의견은 나중으로 접어 두는 게 낫다 싶다. 어쩌면 무슨 의미라도 있는지 모르고.
무엇보다 악마계약자의 발언에도 주의할 점이 더 있었다. 괜히 오른팔의 악마를 언급하는 NPC가 등장했을 리 없으므로.
하면 가장 높은 가능성은 악마기사 개인 스토리겠지? 아, 혹시 저 제의 받아들이면 인류 배반하고 악마들 편도 들을 수 있나?
“뚫린 게 입이라고, 잘도 나불거리는구나.”
저 제의를 받아들였을 때 어떻게 될지 궁금은 하다. 그러나 컨셉상 이번 회차에서는 영 무리인지라.
그래도 뭐 다회차 할 거니까 지금 안 봐도 상관없다. 나는 투헨더를 세게 움켜쥐었다.
“…실언하였군요. 사죄드립니다. 그레첸께서 이단자 따위에게 사로잡히실 리 없지요.”
속내와 별개로 눈깔 뒤집을 기세로 핏대를 세우니 상대가 바로 수그러들었다. 컨셉상 화난 포인트는 다른 쪽이지만, 저쪽은 아직 그걸 눈치 못 챈 모양이다.
“하지만…… 그레첸이시여, 그것은 보통의 이단자가 아니라 용사라 불리는, 가장 위험한 존재입니다. 여흥은 그만 즐기시고 그 목을 치시지요. 머리를 들고 가면 왕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음, 좋아. 이 정도면 많이 들어줬지.
좀 더 이성적으로 구는 컨셉이었다면 같은 편인 척 정보를 더 빼냈겠지만, 지금 컨셉으로는 그게 안 된다.
사로잡아서 고문하면 했지 그렇게 약삭빠른 짓은 못할 성정이고 설정이니까.
“제가 돕겠─?”
“브레이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역시 선빵 갈기기다.
콰앙!
“그레첸이시여?!”
에비. 말 안 섞는다.
인퀴지터한테 오해받고 습격당했을 때는 그나마 상대가 악마의 대척점인 성직자기라도 했지, 지금은 ‘악마계약자’에게 ‘악마 동지’로 오해받은 건데 내가 왜 말을 섞어.
애초에 오해 안 받은 상태였어도 말을 과연 섞었을지 의문이다. 초면에 칼 휘두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무, 무슨…….”
그러니 인퀴지터와 다르게 너는 용서를 구해도 모가지 날아간다. 딱 대라.
“히익!”
워낙 동작이 큰 스킬이라서 그런가, 스킬 적중은 실패했다. 그렇지만 로브인을 보호하느라 앞에 선 드라우거는 한 대 칠 수 있었다.
흐우우우우.
안개가 반으로 갈라지며 망령이 기괴한 소리를 냈다. 비명에 가까운 울음이었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드라우거의 곡소리에 로브인이 사색을 띠며─로브에 얼굴이 가려졌는데도 그게 보였다─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조금 기이한 반응이었다.
“용서?”
그러고보니 드라우거, 왠지 모르게 내게 공격 한 번 안 한다. 분명 공격 타이밍이 두 번 정도 있었는데.
단순히 이벤트라서? 인퀴지터의 사례를 생각하면 그럴 리는 없다. 이벤트라고 배려해 줄 만큼 호락호락한 게임이 아니었다.
“죽음마저도 널 구할 수 없을 거다.”
좀 의문이긴 하지만 일단 족치고 볼까.
나는 가장 위협이 되는 드라우거부터 응시했다. 따진다면 서포터 역인 악마계약자부터 죽이는 게 맞으나, 드라우거가 쉽게 뚫려 줄 것 같지 않았다.
“메, 메이블 상회를 건드린 건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레첸께서 눈독 들이시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 뭐라는 건지. 여기서 메이블 상회 이야기가 왜 나와?
나는 드라우거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스킬을 두르면서도 미간을 구겼다. 난데없는 ‘메이블 상회’ 언급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콰앙!
“부, 부디 용서를!”
검을 내려찍으며 머리를 굴려 보았다.
하필 지금 전 도시의 상회가 언급되는 건 어째서인가. 그것도 내가 퀘스트 3개나 받아서 해결한 집단의 이름이.
이미 예상한 부분이긴 하지만, 역시 너희가 벌인 짓이었냐?
“드라우거!”
악마계약자가 결국 드라우거를 방패로 세우고, 드라우거가 기어이 이를 드러냈다. 연기를 뭉쳐 팔다리를 만들어 내고 칼날과 방패를 세운 것이다.
심지어 악마계약자가 강화를 걸었는지 드라우거의 안광이 더 강해지고 몸체에 붉은 빛이 돌기 시작했다.
“같잖은 수를……!”
그러나 내가 그것에 질 이유 없다. 적확한 레벨은 알 수 없으나, 퀘스트 권장 레벨에 맞춰 온 이상 밀릴 리 없었다!
까앙!
브레이커. 대각선으로 휘두른 검이 드라우거의 방패에 맞아 방향이 틀어졌다. 덕분에 바닥에 닿는 대신 그 끝이 바닥을 긁는 듯하고, 나는 리캇소 부분을 쥐었던 손을 뒤집었다.
올려 베는 것과 찌르는 것 사이의 칼날이 드라우거의 칼을 튕겨 냈다. 퍼억! 내 발은 드라우거의 방패를 밟듯 밀어내고 있다.
“…스읍.”
얻어 낸 틈 속에서 숨을 내쉬며, 나는 방금 검에 둘러졌던 스킬 이펙트를 떠올렸다.
대각선으로 내리 벨 때야 브레이커라는 스킬이 발동했던 상황이니 검은 기운이 줄기줄기 뻗어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한데 올려 벨 때마저 기운이 뻗어 있던 건 어째 이상하단 말이지. 새로 시험해 볼 게 하나 생겼다.
흐우우우.
그 사고가 이뤄지는 동안 내 몸은 충실히 앞으로 전진 중이었으니. 나는 손을 또 자유롭게 바꾸며 검을 휘둘렀다.
부정형이기 때문에 머리에만 동동 떠 있던 표적마크를 따라, 검은 기운이 맺힌 검날이 쏘아졌다.
서걱!
끼아아아악!
드라우거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뒤로 빠르게 후퇴하며 다시 뭉쳐졌다. 이래서 부정형은 까다로웠다.
“아, 안 돼. 회복을.”
“버러지 주제에, 발악하는가……!”
회복은 안 되지. 나는 검을 쥐었던 오른손을 회수해, 가슴팍 쪽으로 집어넣었다. 코트 안쪽에 걸어 둔 단검이 손가락 사이에 잡혀 들어왔다.
퍼억.
“으악!”
에임만 좋으면 단검도 참 쓸 만한 무기인데 말이야. 나는 로브인의 어깨─거의 가슴 부근이었다─에 박혀 들어간 단검을 확인한 후, 검을 고쳐 잡았다.
에임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 던지는 족족 헤드샷을 날릴 수준도 못 되기에 저 정도로도 만족이었다.
흐우우우!
그리고 악마계약자에게 몰두하기엔 당장 덤벼드는 드라우거가 있었다.
나는 내 발목을 잡기 위해 달려드는 연무를 피하며 투헨더를 가드하듯 세웠다. 물론 손잡이 부분만 잡아선 밀려날 것이므로, 도신 부분을 건틀릿 낀 손으로 쥐어 받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까앙!
드라우거의 칼날이 손과 손 사이에 뻗은 검날에 막히고, 나는 그대로 드라우거를 밀어냈다. 부정형이라곤 하나 공격할 때는 물질화하기에 이 정도는 가능했다.
퍼억!
밀려난 드라우거가 제게 거리를 허락한 순간, 나는 방금 전 얻었던 의문을 시험해 보았다.
내려찍기 이후 몇 초 더 이펙트가 유지된다면, 빠르게 연속 동작을 했을 때도 이펙트가 이어질까? 이펙트가 이어진다면 스킬 효과도?
아니, 애초에 내려찍기의 형태는 어디까지 허락되지?
지금껏 브레이커를 쓸 때는 전심전력으로 내려찍는다란 느낌으로 사용했다. 그래야 스킬이 사용될 것 같았으니까.
그렇지만 아까 드라우거의 방패로 인해 내려찍는 게 반쯤 실패한 상태였는데, 외려 스킬은 길게 이어졌다.
그렇다는 건 꼭 전력으로 내려찍지 않아도 된다는 게 아닐까?
나는 그런 의문에 착안해서 힘을 덜어 낸 채로 내려 베었다.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오른팔이 손잡이가 아닌 검신을 잡고 있던 까닭에 힘을 많이 싣는다 해도 바닥까지 치달을 정도는 못 됐다.
서걱!
하여 내 검날은 드라우거를 베었고, 그 이후에도 스킬 이펙트는 유지되었다.
끼이익. 내가 검날을 찌르듯 앞으로 내밀고, 그 과정에서 방해받지 않도록 건틀릿으로 도신을 훑듯 손을 회수했는데도 그랬다.
콰직!
끼아아아악!!!
「❖ 마을에 숨어든 악
∎ 드라우거 제거 1 / 1
∎ 악마계약자 사로잡기 0 / 1」
표적마크의 중심을 꿰뚫린 드라우거가 녹아내리듯 아래로 풀썩 흩어져 내렸다. 사위에 깔린 안개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스킬 이펙트뿐 아니라, 효과가 이어져서 이렇게 대미지가 들어간 것일 테니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무슨!”
때마침 악마계약자가 비명을 질렀다. 공격마법이라도 쓰면서 드라우거를 보조했다면 이렇게 허무히 밀리진 않았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는진 의문이다.
“후.”
그래도 생각이 있으니 그런 거겠지. 아니면 게임의 강제력이든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고쳐 잡았다. 탁탁탁. 멀리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려왔다.
“……!”
혹시 소란을 듣고 누군가 온 건가? 내가 그쪽을 힐끗 보고, 악마계약자도 피 흐르는 가슴을 움켜쥔 채 고개를 돌렸다.
“악마기사!”
“…젠장, 이단자가!”
아, 그러고 보니 저 둘이 있었지.
“……! 악마에게 몸도 영혼도 팔아넘긴 치룽구니인가! 합류하겠습니다, 악마기사!”
“이런, 벌써 싸우고 있었군.”
악마계약자를 눈에 담은 인퀴지터가 송곳니를 세우며 메이스를 들고, 아크메이지도 지팡이를 치켜세웠다.
졸지에 뒤는 내가, 앞은 저 두 사람이 악마계약자를 포위하게 된 꼴이었다.
“젠장, 어찌 우리를 배신하는 겁니까 그레첸!”
“……!”
결국 악마계약자가 체념하는 태도로 와락 외쳤다. 인퀴지터의 표정이 굳는 게 다시 오해라도 할까 싶었다.
“어째서─!”
“인류의 배반자가, 어디서 감히 배신을 운운하는가!”
다행히 오해는 안 하나. 일단 제게 무기를 겨누지 않는 걸 보면 저 말 한마디로 적대할 모양새는 아니다.
“어째서?”
어쨌거나 저 소리 듣고 가만히 있는 것도 컨셉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나는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투헨더를 휘둘렀다. 그러다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감히, 내게 이유를 묻는 거냐, 이 버러지가!”
아무렴 사로잡기 퀘스트가 나왔는데 대상이 죽을 리 없었다. 오히려 HP를 다 떨어트려야만 제압한 상태로 붙잡는 연출이 나올 텐데.
아, 물론 이 게임은 어째 처음을 제외하고 컷 신이 나온 적이 없어서 어떻게 될진 모르겠다.
콰앙!
그러나 내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날아온 마력탄이 내 투헨더를 후려치며 공격 방향을 빗겨 나가도록 한 탓이다.
덕분에 칼날은 악마계약자의 바로 옆쪽 대지를 후려쳤다. 대지가 쪼개지며 악마계약자가 비명을 질렀다.
“날 방해하는 거냐……!”
왜 방해를 한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화부터 내고 봤다.
암, 증오스러운 악마(계약자) 새끼에게 별 소리를 다 듣고 마지막엔 배신 운운까지 당했는데 화가 안 나고 배겨. 심지어 화풀이까지 막혔는데.
“진정하게. 저자를 죽이는 것보다 사로잡는 것이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네.”
“악마 새끼를 살려 둘 순 없다!”
“저자 외에 또다른 악마가 도시에 있을지 모르지 않나!”
아크메이지가 지팡이를 아래로 내려찍으며 바인딩을 시전했다. 묶인 건 나의 팔과 악마계약자였다.
“드라우거는 보통의 악마가 아닐세. 이런 도시에서 혼자 소환하긴 더더욱 힘든 악마지. 높은 확률로 뒷배가 있을 걸세.”
바인딩의 사슬을 박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잠깐의 시간이야말로 아크메이지가 바라던 것일 터였다.
“하니 진정하고 인내하게. 지금 저자를 죽이면 잠깐의 분노는 달랠 수 있으나, 혹시 생겨날 희생양들은 구할 수 없지 않은가. 분노가 시야를 가리게 하지 않도록 하게.”
“…….”
아니, 그, 나도 그건 아는데. 나도 제압하려고 한 거였는데. 죽이려던 거 정말 아닌데…….
혹시 여기 제압 퀘스트는 HP를 바닥까지 떨구면 안 되는 식인가?
「사로잡기│사로잡기는 체력 일부를 깎은 상태에서 시도해야 합니다.
사로잡던 도중 대상이 사망할 경우, 생포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빌어먹을!”
퍽!
“커억!”
이걸 지금 알려 주네. 게임 레전드.
나는 뒷골 당기는 감각과 함께 악마계약자를 발로 한 대 차고, 투헨더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다행히 발로 차는 것까진 막는 이는 없었다.
“…메이블 상회를 언급했다.”
“음?”
아, 그래. 이것도 말해 놔야지. 말해 놔도 반응할지, 스토리에 영향을 끼칠지는 알 수 없지만 궁금하니까.
“그건…… 굉장히 중요한 정보로군.”
역시 갓겜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물론 이걸로 정말 스토리가 틀어졌을진 모르는 노릇이나, 응해 주기라도 하는 게 어딘가?
“압송하겠습니다.”
그사이, 슬쩍 눈을 굴리던 인퀴지터가 성스러운 주문과 함께 악마계약자를 또 한 번 포박했다.
신전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