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무지의 대가로 (1)
여관이 여러 개였던 걸 고려해 잡화점도 그럴까, 하고 확인해 본 게 신의 한 수였다.
잡화점도 많고, 심지어 잡화점마다 가격이 다르더라.
“…….”
별개로 흥정하거나 집을 너무 많이 확인하는 것도 제 컨셉과는 안 맞는지라.
나는 앞으로 눈치껏 바가지 덜 쓸 것 같은 집을 골라 들어가기로 했다. 현실에서도 영 성공한 적 없는 일이었지만.
“저, 아크메이지님. 악마기사께서 기분이 안 좋아 보입니다.”
“여정에 억지로 참여한 셈이니, 어쩔 수 없지요.”
“……?! 어, 억지로 참여하신 겁니까? 혹 제가 저도 모르는 새에 강압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한데 고민하느라 제 굳은 표정을 뭐라 여긴 건지, 두 NPC가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솔직히 덤앤더머 같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웃긴 부분이.
“출발합니다!”
그사이 행렬이 출발을 외쳤다. 나와 두 NPC가 앉아 있던 짐마차도 덜그럭덜그럭 기동을 시작했다.
보수를 안 받는 대신 얻어 낸 배려라는데…… 엉덩이가 들썩거릴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이쯤 되면 배려가 아닌 것 같다.
결국 나는 눈을 감았다. 저번에야 깡으로 버텼지만, 이번까지 그럴 필요 있나.
컨셉질은 즐거우라고 하는 거지 괴로우라고 하는 게 아니다. 나머지야 더한 재미를 위해 감수할 수 있지만, 이 경우는 아니니. 이럴 땐 포기하는 게 낫다.
“주무십니까?”
대답하는 대신 수면을 떠올렸다. 그러자 눈꺼풀을 닫은 시야에도 창이 떠올랐다.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생각만 하면 시간은 알아서 올라간다.
일단, 대충 3시간으로 잡아두자. 도착할 때까지로 설정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도착 시간을 정확히 모르니까. 부족하면 그때 가서 더 자면 되겠지.
“신께서 안온한 잠을 베푸시길…….”
인퀴지터의 축복과 함께 시야가 깜깜해졌다. 감은 눈꺼풀 사이로 새어드는 빛마저 삼키는 칠흑은, 마치 흘러내리는 물감인 양하였다.
* * *
서북쪽 숲을 갔다 왔으면서 3시간을 기대했던 내가 머저리였다.
다음 도시까진 무려 근 사흘이 걸렸다. 그래. 현실 시간으로도 하루가 걸렸다는 거다.
심지어 호위가 끝난 후엔 셋 다 말 타고 맹렬히 달렸는데도 그 모양이었으니.
중간중간 산적, 자잘한 맹수 퇴치를 하긴 했지만 그 외의 이벤트나 퀘스트는 전무. 정말 지루한 나날이 아닐 수 없었다.
30만 원 들인 사흘짜리 풀다이브 중 하루가 의미없이 증발해 버렸다. 이제 남은 시간은 게임상의 하루, 현실 시간으로 8시간 이내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네만.”
해서 그냥 대부분 얼굴을 구긴 채 말 타는 요령만 찾았는데…… 그게 아크메이지는 좀 의아했던 모양이다.
다음 도시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자네는 하나도 묻지 않는군. 우리가 정말 계시를 받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등은 궁금하지 않은 건가?”
그건 묘한 질문이었다. 내가 저들과 대화하지 않은 건 컨셉상 이유가 가장 큰 탓이다.
더불어 내가 플레이어라서 그런 것도 있다. 아무렴 메인 퀘스트가 둘의 신원을 증명해 주는데 굳이 의심할 이유가 뭐 있겠나.
또한 이 세계관의 지식이 없는 이상 목적지는 들어도 모른다. 원작을 해봤다 해도 도시 이름까지 기억할 정도로 머리가 좋진 못해서.
아, 도시를 바꾸는 이유 정도는 좀 궁금한데…… 컨셉을 깨 가면서 알고 싶느냐면 그다지?
무엇보다 저 둘은 무력이 필요해서 ‘플레이어’를 비롯한 동료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설정이다.
내가 나서야 할 필수퀘가 있다면 알아서 설명해 줄 거다. 말없이 동원했다가 개죽음당하는 경우는 꽤 흔하니까.
“계시가 거짓이라면 네놈들을 죽이면 그만이고, 내가 알아야 대처할 수 있는 장소라면 뇌가 녹아 흐무러진 게 아니고서야 그 주둥이가 이미 고했겠지.”
그 심정을 번역해서 입 밖으로 내놓은 후, 나는 숨을 골랐다. 마지막 대사가 중요했다.
“마지막으로. 네놈들이 무엇을 하건 무슨 일을 벌이건, 날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관심 없다.”
크, 악마 사냥을 위한 동행일 뿐, 네놈들 자체엔 관심 없다는 말까지 완벽했다. 선긋기는 여러 번해도 이상할 게 없지.
“그런가.”
메이지가 납득했는지 턱을 쓰다듬었다. 기분은 크게 나빠 보이지 않는데, 또 모른다. 호감도는 깎였을지도.
“하면, 자네 지금껏 마탑이나 신전과 얽힌 적이─.”
“말을 팔고 왔습니다! 이건 대금…… 아, 두 분 대화 나누고 계셨습니까?”
그러다 잠깐, 아크메이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구간에 말을 팔러 보낸 청년이 돌아왔다.
사회에 익숙해져야 한다며 아크메이지가 전담시킨 건데, 내가 보기에도 썩 나쁜 처사는 아니었다. 사회 경험은 겪어 봐야 는다.
NPC가 과연 반복 행동으로 인한 학습까지 탑재했을진 모르겠다만.
“제가 방해를…….”
“허허, 아닙니다. 잠깐 담소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자, 그럼 가지요. 이곳엔 신전이 있으니 여관을 잡을 필욘 없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건지 나는 좀 궁금하다마는, 이미 날아간 기회다. 그렇다고 이 컨셉으로 다시 묻기도 그렇고.
해서 나는 다음 목적지에 집중했다. 게임 시작하고 신전은 처음이라, 어떻게 디자인되었을지 궁금했다. 원판에서도 신전은 굉장히 근사했는데, 이곳도 엄청나겠지?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전 도시의 신전도 구경할 걸 그랬다. 거리가 너무 멀고 갈 타이밍이 안 나서 못 간 거긴 하지만.
서북쪽 숲 근처 마을은 신전 자체가 없었고.
나는 그런 잡생각과 함께 앞장서는 아크메이지를 따라갔다. NPC가 따라오는 게 아니라 이쪽에서 따라가려니 기분은 좀 생소했다.
이럴 땐 속도가 느려서 NPC 역전하고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게 국룰인데.
“우리가 이 도시에 온 건, 해당 도시에서 악마가 출몰한다는 신전의 연락 때문일세.”
그렇게 발걸음을 좀 옮겼을까. 아크메이지가 상황을 설명했다. 김치만두가 그제야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저흰 동료를 모으는 것과 별개로 신전에서 요청이 오거나 소문이 도는 곳에 찾아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신을 따르는 자로서 도탄에 빠진 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으니까요.”
딱히 설명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알아서 나쁠 이야긴 아니었다. 그래. 메인 퀘스트는 다 너희를 통해서 받으면 된다는 거지.
“이곳에 자리 잡은 신전이 있긴 하나, 그들 힘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며 연락이 왔습니다. 해서…….”
어쨌거나 악마 관련 일이라면 끼어들 수 있다. 컨셉은 악(마에 미)친 놈이니까. 으하학.
“그따위 사정은 알 바 아니다. 악마는 어떤 놈이지? 출현 장소와 시간은?”
“그건 아직 모릅니다. 악마가 나타난다는 연락을 받았을 뿐, 자세한 설명은 담겨 있지 않더군요. 신전에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기야 이런 류의 퀘스트는 정보 조사가 우선이지.
“무능하기 짝이 없군.”
그렇지만 컨셉은 그런 거 모릅니다.
나는 입으로는 매도를 쏘아 내며 곧 이어질 조사와 탐색, 사냥을 떠올리며 갱신된 퀘스트를 보았다.
「❖ 마을에 숨어든 악
∎ 신전으로 가기
∎ 주교와 대화」
근데 이건 왜 메인 퀘스트 취급이 아닐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긴 한데.
됐고, 빨리 퀘스트 진행하고 싶다. 이동하는 게 점수를 다 깎아 먹어서 그렇지, 사냥하고 악마 잡는 건 꽤 재밌단 말이다.
애당초 ARPG에서 전투를 빼면 뭐가 남겠냐마는.
나는 이어질 퀘스트를 기대하며 검 자루를 꽉 쥐었다. 멀리서 중간 규모의 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악마다!”
그런데 내가 퀘스트를 받고 싶댔지 이런 취급을 바란 적은 없습니다만.
인퀴지터가 초반에 오해하고 덤벼들었을 때부터 이 일을 예견했어야 했다. 하면 전 도시 신전에 못 들른 건 이제 행운인 건가.
“잠깐, 진정하십시오!”
신전에 다가가자 마자 사제들이 마구 튀어나오며 무기를 겨눴다. 제 앞에 아크메이지와 인퀴지터가 서지 않았다면 대치는커녕 바로 공격당했을지도 모른다.
색적 알람이 시야 일부를 반투명하게 가렸다. 저건 나중에 대상 설정을 바꾸거나 해야겠다.
“그는 적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의 종이 악마를 감싸는 것입니까!”
인퀴지터가 당황하며 이쪽 눈치를 연신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외침에도 흉흉한 반응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외려 기세만 더해질 따름이었다.
“다시 한번 고합니다. 그는 적이 아닙니다!”
상황이 쉽게 해결될 거라 판단되지 않는지, 인퀴지터가 건틀릿을 벗었다. 피부만 흴 뿐, 멀리서 봐도 굳은살과 상처로 가득한 손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손을 흉측하다 말 못 할 터였다. 신성력을 표출하는 순간 보이는 손등의 문양을 알아볼 수 있다면 더 그렇다.
“요, 용사의 증거……?”
그러고 보니, 원작을 플레이할 땐 미처 생각 못 한 의문 하나가 든다.
그땐 플레이어가 선택한 직업군 캐릭터에게 저 문양이 새겨졌었는데. 문양은 또 신성력이 닿거나 사용할 때만 발현되는 설정이고.
근데 악마기사는 신성력에 닿는 순간 대미지를 입는 직업이다. 하면 그땐 저걸 어떻게 확인했을까? 역시 게임적 허용?
“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그는 피해자일지언정 악마가 아닙니다. 그러니 무기를 거둬 주십시오.”
나는 딴생각과 함께 저치들이 하는 양을 살폈다.
단순한 사제의 발언에서 용사의 발언으로 무게가 성큼 상승해서일까. 신전에서 뛰쳐나온 이들은 눈이 왕방울만 해진 상태였다.
“용사께서 무기를 거두라 하지 않았나?”
거기에 못을 박아 버리는 아크메이지까지.
신관들은 서둘러 무기를 거두고 태도를 달리했다. 나를 향할 땐 미심쩍음이 여즉 섞여 있으나 최소한 적대하진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신의 대리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따르겠나이다.”
그런데 너희가 그런다고 나까지 그러리란 법은 없지 않나?
나는 롱소드의 검 자루를 꽉 쥐고 목에 힘을 주었다. 목 근육이 파들파들 떨리는 게 핏대라도 섰다면 딱 좋을 것 같다. 내가 게임에 너무 과한 걸 바란다는 느낌은 들지만.
“참아 주게.”
동시에 한 발 앞으로 내디디려던 저를, 아크메이지의 손이 막아섰다. 제 손의 반배만 한 손이 제 칼과 칼을 쥔 손을 짓눌렀다.
“그들에게 악의는 없었을걸세.”
딱 쥐기까지만 할 거였지만, 이렇게 말려 주면 나야 좋다.
“악의가 있었다면 진즉 베어 넘겼을 거다.”
나는 표정을 더럽게 만든 채 안으로 뚜벅뚜벅 들어갔다. 제 양옆에 도열한 두 사람이 힐끔힐끔 저를 훔쳐보았다. 눈치 보는 게 너무 훤히 보여서 너무 즐거웠다.
아, 사건 정보만 얻으면 바로 나가야지.
* * *
사건 청취는 시종일관 살벌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용사나 현자야 환대를 받았지만 내 쪽은 아닌 까닭이다.
나와 신전 측 사람들의 은은한 기싸움은 계속되었고─넘치는 컨셉질의 맛은 재밌었다─그건 청취가 끝난 뒤에도 여전했다.
“방은 준비되었습니다. 아니면 식사 먼저 하시겠습니까? 식당이 불편하시면 방까지 전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말은 나를 보면서 했다. NPC 주제에 음습하기 짝이 없었다.
“거절하지.”
하지만 그것 자체가 불쾌하느냐면, 절대로 아니!
그도 그럴게, 사제들이 피로를 핑계 삼아 두 사람한테 내일부터 수색하라고 사정사정해서 신전에 붙잡힌 참이란 말이지.
그런데 이렇게 눈치를 준다고? 컨셉질하면서 자연스럽게 나갈 구실을 준다고?
“위선자들의 보금자리에 지내느니 숲바닥에서 자는 게 신의 품과는 더 가까울 테니.”
“무슨……!”
대놓고 떠먹여 주는 건 못 참는다. 안 그래도 나 로그아웃까지 시간 얼마 안 남은 상태라고! 절대 탐색해!
나는 한시도 내려 두지 않은 짐을 가지고 발길을 돌렸다.
반쯤은 내쫓기는 셈이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저쪽에서 눈치 주긴 했지만 나오길 택한 건 결국 나 자신이고, 무엇보다 처음부터 잘 생각이 없었으니까!
아무렴 나는 너무 느린 템포로 게임하는 걸 선호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왕 풀다이브한 거, 뽕은 뽑아야 한다는 마인드도 있고.
덕분에 이런 식의 전개는 외려 포상이었다.
아, 물론 컨셉상으론 기분 나쁜 척해야겠지. 암암. 난 프로 컨셉충이니까.
“악마기사!”
더불어 앞선 대화로 퀘스트도 갱신된 참이다. 찾는 것엔 문제없다. 저 둘이 없어도 나 혼자 찾을 자신 있다는 거다.
“잠깐……!”
나는 붙잡으려는 인퀴지터를 뒤로한 채 퀘스트창을 힐끗 확인했다.
「❖ 마을에 숨어든 악
∎ 마을에 숨어든 악마 추적
∎ 선택: 주민들에게 묻기
∎ 선택: 악마의 흔적 찾기」
선택지를 통해 주민들에게 묻거나 악마의 흔적을 찾으면 추적할 수 있다는 힌트가 주어졌다.
그러나 내겐 불필요한 작업이었다. 신전에서 준 정보로도 이미 답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악마의 종류는 밝혀지지 않았되 낮밤을 가리지 않고 등장. 그것의 표적은 대게 자는 사람이며, 압사·흡혈·식인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죽임.
자료 조사를 자주 하는 입장으로선 꽤나 익숙한 놈이었다. 하물며 나는 원작을 플레이해 본 전적마저 있으니.
새로 추가한 몹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얘는 아는 놈이다. 확신할 수 있다.
이건 ‘드라우거’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탁.
찰나간 늘어트려 둔 오른손이 잡혔다. 설정 상 악마가 담겨 있는 그 팔이.
“……!”
반사적으로 그 손을 내치듯 거부했다. 원래도 갑작스런 접촉을 싫어하는 편이거니와 컨셉도 고려한 반응이었다.
뭣보다 오른손이잖아? 악마가 깃든 손이잖아? 절대 안 되지.
“날.”
얼굴 하얘진 인퀴지터를 보며 나는 날선 반응을 보였다. 경멸인가 하다가도 자기혐오의 색이 좀 더 강하게. 상대를 향한 분노 아래에 공포가 섞이게.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크으, 완벽했다. 항상 마시는 김칫국이지만 나 그냥 배우해도 되지 않을까? 아, 얼굴이 안 됐지.
“죄, 죄송합니다.”
오른 주먹을 꽉 쥐며 붙잡혔던 몸을 돌렸다.
“어딜 가려는 건가?”
이번에 발목을 잡은 건 아크메이지였다. 아주 쉬운 질문이었다.
“악마를, 죽이러 간다.”
오늘의 밤과 꿈은 아주 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