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난 그걸 몰랐고 (7)
「함께 행동과 동료│특정 NPC는 함께 행동: 동행하거나 동료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동행NPC는 일정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같이 다닙니다. 호감도에 따라 이르게 헤어지거나, 동료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동료NPC는 플레이어가 이별을 고할 때까지 헤어지지 않으며 정보 확인, 위치 감지 등이 가능합니다.
동행, 동료NPC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행동하되 호감도에 따라 특정 지시를 내리는 게 가능해집니다.」
「호감도│NPC는 호감도에 따라 각기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호감도 수치는 직접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안내창을 살피며 나는 판단했다. 동료NPC 사귀긴 글렀다. 더불어 저 두 사람의 레벨을 확인할 방법도.
그러나 후자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전자도 별 심각한 일은 아니었다. 여차하면 솔플로 가도 문제없다.
“날 동료 취급할 생각일랑 버려라. 사탄을 죽이는 게 아니었다면 네놈들과 한 공간을 점유할 일 따윈 없었을 거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나는 컨셉질에 미쳐 동료 캐릭터를 한 번도 안 쓰고 게임을 깬 적도 많았다.
“알아들었나?”
하니 이미 글러 먹은 호감도에 미련 따위 두지 않는다. 나는 사나운 태도로 대사를 쳤다.
그러자 돌아온 답은 이랬다.
“예!”
…동료가 될 생각 없다고 선 그은 건데 대답이 왜 이렇게 해맑은지. 진짜 김치만두야? 귀여워 미치겠네.
별개로 왜 초롱초롱 눈빛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낮은 호감도 같지가 않은데.
대체 내가 뭐했다고 호감도가 +상태지?
모가지와 혀를 붙여 주긴 했고, 그게 어떻게 보면 자비는 맞다. 하지만 그게 호감도 올라갈 일인가 묻거든 백이면 백 고개를 저을 일인지라.
아니면, 뭐. 경험 하나 없는 백지 상태에서 마주한 첫 자극이 너무 크게 다가간 건가. 흔들다리 효과처럼.
혹은 그냥, 스토리 진입을 위한 강제력인지도 모르겠다. 플레이어가 메인 진입 전까지 어떤 깽판을 쳤든, 이후엔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한 거지.
음, 그래. 이게 가장 맞는 것 같다.
“…….”
그래서 이제 어쩐다. NPC 호감도야 미뤄두고서라도 들이닥친 상황은 어서 해결해야 하는데.
아침 식사는 나왔지만 손대기는 또 애매하고, 그럼 퀘스트가 시키는 대로 대화를 해야 하나? 그런데 어떻게 말을 붙여야 컨셉에 어긋나지 않─.
“찾았다!”
위협적으로 보이도록 내내 쥐고 있던 검 자루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모험가님!”
슬쩍 고개를 트니 모험가 길드 소속 심부름꾼이 보였다. 어제 나를 다른 여관까지 안내해 준 꼬마였다.
“뭐냐.”
대화를 해야 하긴 하는데, 어째 이쪽도 퀘스트의 냄새가 난다.
나는 판단이 내려지는 즉각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을 의식해 표정은 여즉 흉흉함을 두른 채였는데, 그 때문인지 아이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 찾으시는 분이…….”
아이는 찔금찔금 다가오다가, 제 옆에 있는 두 사람을 보고 힉 소리를 냈다.
인퀴지터가 입은, 정말 기사 같은 갑주와 아크메이지의 종족이 아이를 놀라게 했을 테다. 보통 인간종이라 부르는─이곳에선 ‘미들’이라 부르는─ 종족 외 다른 종족은 해당 서식지를 가지 않는 이상 보기 힘들거든.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설정이 유지되었다면 말이다.
“저…….”
아이가 긴장한 눈치이자 인퀴지터가 가볍게 목례하고 아크메이지는 자애롭게 웃었다. 아이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모험가님, 사무관께서 찾으시는데…….”
…여기서 나온 사무관은 이즈렌이겠지. 나는 메인 퀘스트 아래에 적힌 사이드퀘를 확인했다.
「❖ 서북쪽 숲에 도사린 위험
∎ 사무관 이즈렌과 대화하기」
말이 대화지, 그냥 보상을 받아가란 내용이다. 사람 구하는 퀘스트 때도 보상을 받기까기 전까지 이게 떠 있었다.
“모, 모셔 올 동안만이라도 기다려 주시면…….”
“안내해라.”
“에?”
본래라면 그쪽에서 오라고 할 텐데, 지금 상황이 상황이라.
동행은 수락했어도 저 둘과 내 컨셉 사이의 관계는 여즉 엉망이고, 대화의 타이밍을 놓친 이상 함께 있고 싶어할 것 같진 않다. 그런 해석 끝에 나는 내가 직접 가기로 결론을 내렸다.
“안내하라 말했다.”
물론 내가 자리를 떠 봤자 두 사람이 따라올 확률이 높다. 보통 게임은 파티 맺으면 계속 같이 다니니까.
그렇지만 ‘영웅전설’ 리메이크판은 또 몰라서, 한번 시도나 해볼까 한다. 어느 쪽으로 결론 나든 내겐 손해가 아니었다.
“같이 가도 되겠나? 이쪽도 그곳에 볼일이 있을 것 같아서 말일세.”
그렇지만 역시 게임은 게임인가 보다.
나는 일어서는 둘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소년을 재촉했다. 당황한 아이가 두 사람과 저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외쳤다.
“따라오세요!”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경보에 가까운 걸음이었는데, 보폭 차이로 인해 적당히 걷기만 해도 따라잡긴 어렵지 않았다.
“같이 가도 되는 겁니까?”
“거절을 안 하지 않았습니까.”
“거절하지 않으면 승낙으로 여겨도 되는 겁니까?”
“그건…… 때에 따라 다르지요.”
그보다 인퀴지터, 사회 공부하는 건가…… 장하다.
“사무관님!”
모험가 길드 근처까지 다다르자, 아이가 갑자기 튀어나갔다. 목표는 내 눈에도 보였으므로 굳이 속도 높이진 않았다.
“모험가님을 찾았─. 아!”
아이를 보자 화색한 사무관 이즈렌은 다음으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안색이 조금 굳었다.
“일단, 사과드릴게요.”
보수에 대해 물으려던 나는, 뜬금없는 발언에 눈매를 꿈틀거렸다. 설마 보수를 떼먹겠다는 건…….
“도둑은 경비병으로 넘겼어요. 본래 그렇게 도둑이 들던 곳이 아닌데…….”
다행히 아니었다. 그냥 추천한 곳에서 사건 터진 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저, 여관 주인분이 다시 한번만 기회를…….”
“필요 없다.”
추가 보상은 언제나 환영이지만, 컨셉상 이건 거절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나는 아쉬움을 손쉽게 털어 내며 상황에 집중했다.
“용건은 그게 다인가?”
“…음, 그,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싸움이 일었다 들었는데.”
“그따위 약한 것에 내가 당했을 거라 생각하나?”
자존심 건드려졌으니 당연히 이를 세워야겠지.
까칠한 태도에 사무관이 바로 찔끔해했다.
“하지만, 마탑의 현자와 이단심문관이……?”
말을 잇던 사무관의 시선이 살짝 빗겨 났다. 눈동자 움직임마저 구현한 갓겜 덕에 나는 말 끊김의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저 NPC는 내 뒤에 있는 두 사람을 드디어 발견한 모양이다.
“두, 두 분은…….”
“허허, 일주일 만이군.”
오, 구면이었나.
“의뢰는…….”
사무관이 더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유가 뭔가 하며 고민 좀 해보니, 하나 감이 잡히는 게 있다.
이 양반, 중개자 입장에서 그 괴팍한 노인네가 이중 계약하는 거 못 말렸잖아.
“아네, 아네. 저 친구가 잡았지.”
그래도 위약금 운운했던 것 보면 이렇게까지 곤란해할 건 아니지 않나. 체면 문제 때문에 그런가? NPC한테 체면 이야기하는 것도 좀 웃기지만.
“늦게 잡은 건 우리이니 대금은 받지 않겠네. 선금으로 만족하지.”
“아뇨, 위약금도 당연히 지급될 것입니다. 모험가님의 권리를 지켜드리는 것이 저희 길드의 일이니까요.”
이중 계약을 했음에도 관대히 넘어가는 메이지의 발언에 사무관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괜히 중개비를 받아 가는 게 아니었다.
“저, 한데 세 분은 혹…….”
“어제 오해가 있어서 조금 다투었네만, 오늘부로 오해를 풀고 함께하기로 했네.”
“아, 그런 것이었군요.”
뭐,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내게 더 볼일이 없다면, 이쪽에서 하나 묻지.”
“무엇이오?”
“보수 지급은 언제할 거지?”
보수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는데 왜 관련된 이야기를 안 꺼내. 보상 내놔. 보상.
“아, 어제 조사관을 보냈으니 내일쯤이면 조사 결과가 나올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모험가님.”
그러나 사무관은 방긋 웃으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내놓았다. 게이머 입장에선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내일.”
나는 반사적으로 음산하게 말하며 생각했다.
이건, 이건 조금 당황스러운데. 퀘스트 보수 지급에 이틀─현실 타임으로 16시간─이상 걸리는 게임이라니.
“네. 숲에 위험 요소가 확실히 없어진 게 맞는지 확인을 해야 해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사무관은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 굴었다. 따지고 보면 억지스러운 반응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런 절차를 밟아 확실히 매듭짓는 게 맞으니까.
그렇지만 그건 현실이고, 게임에서 이러니까 좀…… 당혹스럽달지. 현실성 챙기는 건 좋지만 이건 너무 과하달지.
“아, 그거 말일세. 우리가 보증할 테니 미리 지급해 줄 수 있겠나?”
다행히 내 떨떠름이 어이없음과 짜증으로 치환되기 전, 아크메이지가 나서서 발언했다.
“우리가 본 바, 그 숲의 위험 요소란 메두사뿐이었네. 그것을 저 청년이 죽인 이상, 그리고 우리가 정화까지 해 둔 이상 문제 될 건 없을 걸세.”
“저 또한 보증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타이밍에, 김치만두도 선언했다. 사무관의 안색이 곧바로 난처해졌다.
“으음…… 두 분이 그리 말하신다면…….”
“만약 문제가 있다면 마탑이나 신전에 말하게. 사람을 보내도록 손써 둘 테니.”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면야, 네. 의뢰를 완료 처리, 보수를 지급하겠습니다.”
사무관이 고개를 주억이곤 이쪽을 보는 게 딱 봐도 보상이 바로 주어질 감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여전히 떨떠름하다.
…현실성을 챙기기 위해 이런 식으로 돌아돌아 지급하는 건 알겠지만, 뭐라고 해야 하지. 저 둘이 있어야만 단축된다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묘하고 그렇다.
다른 직업 때는 어쩌려고 그러지.
“이쪽으로 오시죠.”
그래도 안 받을 이유는 없다. 내가 받아야할 100만 갈은 죄가 없으니까.
나는 사무관을 따라갔다.
“하면 이 도시에서 자네가 할 일은 끝인가? 아니면 더 있나? 혹 이 다음으로 향할 목적지가 있다든가.”
그러자 은근슬쩍 아크메이지가 따라붙었다. 질문의 의도가 제법 익숙했다.
그러니까, 일정 맞추자 이거다.
“없다면, 그리고 자네가 괜찮다면, 오늘 안에 이 도시를 떠나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다음 마을로 바로 가는 거야, 준비 시간만 준다면 별로 상관없다.
근데 시작도시 타타라를 벌써 떠나는 건가? 서북쪽 숲 때처럼 사냥터 때문에 자잘히 이동할 순 있어도 거점 자체를 바꾸기엔 이르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에 악마가 있다면.”
어쨌거나 대답은 주기로 했다. 안 그래도 내가 먼저 말 걸기 애매했는데 먼저 시도해 주면 나야 고맙지.
“오, 하면 9시에 출발하는 것도 괜찮겠나? 경로 일부가 겹치는 상단이 딱 9시에 출발해서 말일세.”
근데 이렇게 시간제한을 준다고?
“역시 너무 갑작스러운가. 미안함세. 자네의 합류는커녕 있는지도 알기도 전에 결정한 사항이라. 물론 자네가 바란다면 의뢰를 취소할 수 있네. 꼭 상단과 동행하지 않아도 도시를 떠날 순 있으니.”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원한다면 미루는 게 가능하다지만, 시간제한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좀 낯선 까닭이다.
더구나 의뢰 취소 이야기까지 들어 버렸는데 어찌 함부로 미룰까.
내 일정이 따로 있었다면 컨셉상 네놈이 먼저 취소해라 따위의 발언을 했겠으나, 지금은 아니다. 이유 없이 꼬장 부리는 진상 컨셉은 안 잡았다. 따진다면 자존심 때문이라도 해내는 유형이지.
그러니 나는 저 시간제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출발 시간이 밤 9시일 리는 없으니 낮 9시일 터. 그러면 얼마 안 남았을 텐데, 지금 몇 시지?
나는 슬쩍 시계를 찾았다. 다행히 막 들어선 건물 안쪽 정면에 시계가 있었다.
대충 7시 10분인가. 그러면 좀 빠듯하게 움직여야겠네.
펄럭.
나는 머릿속으로 바쁘게 시간 계산을 하며, 수긍은 했단 의미로 옷자락을 펄럭이며 걸음 속도를 높였다.
아크메이지와 김치만두가 그런 제 뒤를 쫑쫑 따라왔다. 마치 병아리가 따라오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