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난 그걸 몰랐고 (6)
다시 한번 말한다. 심해진주는 신이고 ‘영웅전설’은 갓이다.
“내 하나 남은 눈깔이 삐었거나, 네놈들 귓구멍이 막혔거나. 가능성은 둘 중 하나겠군그래.”
밤거리를 헤매다가 또다른 여관을 찾아 남은 밤을 지새운 참이다. 샤워를 마친 후─첫 여관은 차라리 나았다. 여긴 전체 욕실도 없더라─, 내려간 포만감 해결을 위해 적당한 요리를 주문한 상태였고.
그런데 내가 혼자 자리 잡은 홀 테이블에 합석이 생겼다. 당연히 사제와 법사였다.
쾅!
“정말 혓바닥을 잘라내야 말을 이해할 건가?”
물 마시던 잔을 거칠게 내려 뒀다. 그러자 인퀴지터가 들썩였다. 얼굴이 빨간 게 NPC 나부랭이도 염치 없는 상황인 건 아는 모양이다.
별개로 저런 감정까지 프로그래밍한 심해진주에게 감탄 반, 저 둘과 합류하는 게 스토리가 맞긴 한가 봐, 하는 추측 반이 내 심리를 차지했다.
아무렴, 스토리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따라붙을 리 없었다.
“너무 화내지 마시게나. 더이상 실례를 끼치진 않을 걸세. 실수도 하지 않을 테고…… 이 대화가 자네에게 손해될 일 또한 절대 없네. 그것만은 맹세할 수 있네.”
그렇게 말하셔도…… 컨셉상 화 안 내는 건 무리지 않을까 싶은데. 스토리 무시하고 컨셉 고수한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아, 물론 이렇게 막 나가는 건 나도 처음이긴 하다. 다른 게임은 막 나가고 자시고 NPC들이 받아 주질 않아서 내가 좀 맞춰 줬어야 했거든. 아니면 스토리 진행이 아예 안 막히거나 재시작해야 될 때도 있었고.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그렇지만 이 게임은 내가 어떻게 나와도 받아쳐 주니까, 거리낌 없이 컨셉질을 시도해 볼 수 있다. 너무 즐겁다.
“…을.”
그때, 인퀴지터가 우물주물거렸다. 내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니 안 그래도 홍시 같던 얼굴이 더 빨개졌다. 머리색이랑 피부색이랑 똑같다. 좀 귀엽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 관용을 배우고 싶어서 왔습니다!”
근데 외치는 말은 뭐 이리 골 때려.
“…뭐?”
지금 게임 오류 난 거 아니지? 내 귀가 이상해진 거 아니지? 컨셉도 잘 챙기고 있지?
“타인에게 자비와 배려를 베풀고 오만과 아집을 멀리하라. 평생을 그리 배워 왔으나 지난날의 저는 그 무엇도 따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달랐습니다. 제가 행한 모욕을 몇 번이나 눈감아 준 것도 모자라, 마지막의 순간마저 용서를 베풀었습니다.”
삐끗할 뻔한 잔을 굳게 쥐었다. 동시에 씰룩이는 입술을 겨우 억눌렀다.
“전, 전 그런 그대에게서 제가 되고 싶던 일면을 보았습니다……!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이곳에 다시 선 건 그것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더없는 폐와 무례를 끼친 걸 압니다만, 함에도 저는……!”
오타쿠들 사이에서 유구하게 내려오는 명언이 하나 있다. 최애는 네가 정하는 게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찾아와 멱살 쥐고 뺨 때린 채 자리 잡는 놈이 최애라고.
그리고 이 명언으로 내가 지금 전달하고자 하는 말이 뭐냐면.
쟤가 지금 내 오타쿠 가슴 멱살 잡고 뺨 때렸다.
“…내 기분을 망치려 한 거라면,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간신히 컨셉을 지키면서도 속으로는 머리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귀엽다 귀엽다 생각은 했는데. 아까 무릎 꿇고 우직한 태도 보일 때 조금 취향존이라 사뭇 불안하긴 했는데.
이렇게 치고 들어온다고?! 요령 없이 사과하는 모습으로 내 취향존 스트라이크한다고?!
미친 거 아냐?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원작에서도 사제 설정과 개인 스토리가 내 최애 설정이긴 했지만, 이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저, 입 간수…… 못 했습니까? 이번에도 실례를…….”
“…….”
와중에 말은 또 너무 직역해서 알아듣는다. 미치겠다. 고지식하지만 서툰 캐릭터가 내 유구한 취향인 건 또 어떻게 안 건데!
안 그래도 머리카락 동그란 단발로 정리해서 꼭 김치만두처럼 보이는 녀석이…….
“이제 알겠군. 재밌는 시도였다. 이런 식으로 자살하려 드는 이는 처음이라 새롭군.”
컨셉 망칠 수는 없어서 겨우 부들대며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그걸 분노의 극점으로 오인한 건지 아크메이지가 긴장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게 절대 아닐세. 제발 내 말 좀 들어주시게.”
나름 컨셉은 안 망가진 듯해서 천만다행이었다. 갑작스런 최애 점지는 하나도 기쁘지 않지만.
“아니, 필요 없다.”
근데 애가 귀여운 건 팩트잖아. 꽉 막힌 주제에 사회생활 설어서 요령 없이 정면으로 사과하러 쳐들어온 부분이 너무 사회 초년생 같고 귀엽잖아.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 아닌가?
“네놈들과 나눌 건 칼날밖에 없을 테니.”
드르륵.
눈물을 삼키며 일단 거칠게 일어났다. 내 손은 당연히 등에 진 투헨더에 가있다.
아무렴, 김치만두고 스토리고 컨셉은 포기 못 한다. 이 성질머리에 개소리─딴에는 칭찬이었겠지만─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어.
“악마들의 왕, 사탄을 죽일 수 있다고 해도?”
그러나 칼을 뽑으려든 순간, 아크메이지가 한마디 툭 뱉었다.
사람들로 적당히 차 있던 홀이 적막에 잠기고, 내 손이 우뚝 정지했다.
“대악마 사탄과 악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다 해도, 정말 그 칼을 뽑을 텐가?”
현자는 현자인가 했다. 대화도 얼마 안 나눠 봤는데 내가 잡은 컨셉의 약점을 딱 찌르고 들어오는 걸 보면.
“…그 이야기.”
이건 구르면서 봐도 확신할 수 있다. 이건 내 컨셉이 절대 못 넘길 주제다.
“무슨 의미지?”
나는 짜증과 광기가 묻어나는 눈으로 칼을 뽑아 늘어트렸다.
말이 말 같지 않다면 바로 휘두르겠다는 의지였고, 그건 아크메이지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 전에 잠깐,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테니 목 먼저 축이겠네.”
“피도 마실 것에 속하겠지.”
나름 분위기를 환기하려던 것 같지만, 악마를 전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성정에 그런 거 허락해 줄 리 있나.
나는 투헨더를 빠드득 움켜쥐었다. 아크메이지가 헛기침을 했다.
“…인퀴지터가 신전에서 갓 나온 사람이라곤 말했겠지.”
그녀는 과연 현명했다. 현자는 내 기세를 감지하곤 곧바로 선을 지켰다.
“인퀴지터치곤 많이 젊음에도 그녀가 신전을 나온 것엔 이유가 있네. 전부 계시 때문이지.”
그녀는 슬쩍 인퀴지터에게 눈치를 주었다. 눈치를 보던 인퀴지터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과분하게도…… 그분께서는 제게 사탄을 퇴치할 운명이 있노라 전언하셨습니다.”
그건…… 나를 조금 당황케 하는 이야기였다. 계시가 벌써 나와? 그리고 사제에게 사탄을 퇴치할 운명이 있어?
“그렇지만 저 혼자로는 역부족이라며 동료를 모아야 할 것이라 하셨지요.”
저 계시는 분명 플레이어의 몫이었다. 사제의 것이 아니라.
“그래서 전 아크메이지님을 가장 먼저 찾아뵈었고…… 다음으로 각지를 돌아다니며 함께할 분을 규합할 예정이었습니다.”
설마, 리메판은 완전 사제 중심으로 스토리를 바꾼 건가?
“자네가 불쾌해하리란 걸 알면서도 다시 찾아온 건 그런 이유 때문일세.”
“……? 아크메이지님, 아깐 괜찮을 거라 하시지 않으셨……?”
“커허허험.”
당혹스러운 사실에 얼굴에 혈관만 도드라지도록 힘 뽝 주고 있자니, 아크메이지가 다급히 선언했다.
“자네, 사탄을 해치우기 위한 여정에 합류할 생각 없나?”
「※마왕 토벌을 위한 한 걸음※」
그 한마디가 퀘스트를 띄웠다.
술 한 궤짝 마시고 봐도 메인 퀘스트임을 알 수 있는 특별한 표기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알아보니 꽤 유명한 용병이더군. 악마를 죽이는 데 물러섬이 없다던가. 그래서 제의하는 걸세. 사탄을 죽이면 이 땅의 모든 악마가 물러갈 터이니.”
…일단 저 둘과 합류하는 게 스토리란 예상은 맞았으니 넘어가자.
그리고 메인 캐릭터 죽일 뻔한 것도 뭐…… 경고라든가 안내창이 없던 건 아쉽지만, 죽였다고 해도 마지막 저장시점부터 재시작했을 테니 괜찮다.
만약 재시작 안 했어도 그건 그것대로 좋다. 스토리를 내 맘대로 바꿀 수 있단 소리잖아 그거.
‘영웅전설’이 모든 게 가능하고 모든 걸 할 수 있단 캐치프라이즈로 밀고 가는 게임이 아니어서 당황했을 뿐, 전례 없던 일은 아니기에 금방 수긍했다.
물론 이 그래픽으로 이 자유도를 채택하려면 정말 사람을 얼마나 갈아 넣은 거지? 하는 의문이 안 드는 건 아닌데…… 뭐, 가능하니까 출시된 것 아니겠나.
예고 없이 들이닥친 설정이라 당황스러웠을 뿐, 즐겜러 입장에선 무엇이든 환영이다. 심지어 이건 컨셉질도 자유롭잖아. 이걸 어떻게 거부해!
“저딴 게, 용사라고.”
그러니 컨셉에 집중해서 저 제의를 두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나 고민해 보자.
일단 순순히 넘어가긴 좀 그렇지? 저 둘과 나 사이엔 신뢰는커녕 일방적인 경멸과 분노만 가득하니까.
“그녀가 계시를 받은 건 확실하네. 증거를 바란다면 신전까지 동행할 수도 있어. 어떤 신전이든, 그녀가 용사임을 인지하고 있으니.”
함에도 현자가 저렇게 나와 주면 끝까지 거부할 수 없다.
왜냐? 쟤네 둘에 대한 빡침보다는 악마에 대한 증오가 여전히 더 클 테니까.
그런 와중에 악마들의 근원인 사탄을 제거할 기회가 온다? 악마들을 죄다 뿌리 뽑고자 하는 입장에서 절대 못 놓친다. 내가 설정한 컨셉의, 악마를 향한 원념은 그 스스로마저 불태울 만큼 깊었다.
“…역시 제가…….”
“그 말.”
그러니까, 악마들 전부를 죽일 수 있다면 짜증나는 놈들 두엇과 같이 다니는 것 또한 일도 아닐 것이다.
“진실이어야 할 거다.”
나는 정말 적절히 대사를 쳐주는 NPC에게 감격하며 꼬나 쥔 검을 더욱 세게 쥐었다.
“아닌 즉시 네놈들의 사지를 조각내어 내 고향에 바칠 테니까.”
금방이라도 휘두를 것처럼. 그러나 끝내 휘두르지 않도록.
“하면 환영하네. 원정대에 들어온 것을.”
「???(인퀴지터)와 함께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아크메이지)와 함께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마왕 토벌을 위한 한 걸음※
∎ 토벌대에 합류
∎ 아크메이지와 대화」
퀘스트가 갱신되었다.
* * *
“필요 없다. 내 목적과 부합하기에 동행을 허락했을 뿐, 네놈들의 오만과 방자함을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인퀴지터는 사내의 말을 한 자 한 자 새겨들었다. 말투는 험악하고 사늘했으나, 지은 죄가 있다 보니 크게 거슬리진 않았다.
“날 동료 취급할 생각일랑 버려라. 사탄을 죽이는 게 아니었다면 네놈들과 한 공간을 점유할 일 따윈 없었을 거다.”
외려 목표 앞에서 분노를 억누르고 냉정을 갖출 수 있는 그가 대단해 보였다.
언제나 이성을 유지하라던 주교님의 가르침은 바로 저런 모습을 염두에 둔 것일 터였다.
“알아들었나?”
“예!”
동료 취급도 받지 못하는 건 역시 아쉬울까. 그렇지만 동행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같이 다니다 보면, 무례에 대한 사죄나 그의 행실을 배울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
인퀴지터는 제 우렁찬 외침에 악마기사가 미간을 좁히건 말건 눈을 빛냈다.
처음엔 그녀의 지식이 짧아, 전례가 없단 이유로 그를 부정하고 의심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목숨을 거두어 가도 좋다니,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말하신 겝니까! 인퀴지터! 당신의 사명이 얼마나 막중한데! 그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제 행동이 충동적이고 무책임했음은 압니다. 아크메이지님의 질책은 합당합니다.』
그녀는 이제 악마기사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제 짧아진 머리를 상기할 때마다 그가 존경스러워졌다.
『하지만 아크메이지님, 제 좁은 시야로 피해가 났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금전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나, 만약 누군가가 죽었다면? 그때도 금전으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목숨을 내버리셨습니까?』
『정의란 정당화된 폭력을 말하니, 그렇기에 정의는 더욱 무겁고 신중히 다뤄야합니다. 심지어 신께서는 스스로의 정의를 확신해선 안 되노라 말씀하시기까지 했지요. 허나, 그때의 제가 그 말씀을 따랐습니까?』
『…9번째 계명이군요.』
『묻건대, 신의 말씀조차 제대로 따르지 못한 제가 어찌 세상을 구할 수 있습니까? 저는,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게 용사가 될 자격 같은 건, 정말로…….』
그녀는 어제 아크메이지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 다시 앞에 선 이를 보았다.
『함에도 용서받았습니다. 다음을 받았습니다. 속죄할 기회를 받았습니다.』
『인퀴지터…….』
『저라면, 용서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라면 혀라도 잘랐을 겁니다. 저라면, 저 사람처럼 굴지 못했을 겁니다.』
사나운 눈매 뒤에는 악마를 품었음에도 살의와 악의를 뒤로할 수 있는 정신력이 있고, 흉흉한 말투 뒤에는 불쾌함을 삼키며 자비를 베푸는 관용이 있다.
그녀가 미처 보지 못했던 뒷면이었다.
『감히 신의 대리자에 위치하게 된 저보다, 더 신의 대리자 같지 않습니까?』
밤새 기도를 올리며 악마기사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악마를 품게 된 원인을,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되며 겪었을 일과 가졌을 생각 따위를. 그를 모른 채 편견 하나로 눈을 가려 가며 검을 겨눴던 자신을.
그럴수록 후회와 상대를 향한 존경밖에 자라는 건 없었다. 아크메이지와 조사한 결과, 그가 악마들을 퇴치하며 사람들을 돕고 다님을 알게 되었기에 더 그러했다.
『그를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배우고 싶습니다. 몸에 똬리 튼 악마를 견뎌 내는 것도, 분노마저 이겨 낼 수 있는 정신도, 저를 매도하고 모욕한 자를 용서할 수 있는 관대함도.』
비록 말이 험하고 행동거지가 비속하긴 하지만…… 아크메이지께서 이르시길, 배움이 짧으면 말도 짧아진다 하셨다. 또한 배움이란 건 모두에게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러니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배우지 못했음에도 그녀보다 더 나은 그가 대단했다.
역시, 저 사람에 대해 알고, 저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스물. 아직은 어린 청년의 동경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게 착각이란 걸 깨닫게 되는 건 비록 먼 시일이 흐른 후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