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난 그걸 몰랐고 (5)
아크메이지가 건 사슬을 부수는 건, 맹세코 의도한 게 아니었다.
아니, 의도했다면 의도한 거긴 한데, 난…… 난 당연히 안 부서질 거라 생각했지. 레벨 차이가 안 나도 바인딩은 2초 정도 묶어 주긴 했단 말이야.
근데 리메판은 법사 스킬을 어떻게 개편했기에 이런 꼴이…….
“커흠…… 둘 다 진정하시지요.”
“하지만!”
“인퀴지터! 악을 향한 분노에 두 눈까지 멀어 버린 겁니까!”
아크메이지의 호통이 내 정신마저 퍼득 들게 만들었다. 물론 컨셉에 맞춰서 그쪽을 맹렬히 노려보기는 했다. 그쪽은 인퀴지터를 야단치느라 여념이 없어 보이긴 하지마는.
“잘 보십시오. 저 청년이 과연 사람을 죽였는지!”
“그럼 죽이지 않고서야 피가……! 피가…….”
인퀴지터는 홀 한복판에서 벌벌 떠는 도둑놈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드디어 본인 오해를 깨달은 모양이다.
“…죽지 않았어?”
그녀는 뻐끔뻐끔 입을 열고 닫길 반복했다. 나름 귀여운 모습이었다. 내가 아는 사제 스크립트가 떠올라서 정겹기도 하…… 고?
어?
나는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인퀴지터의 얼굴이 사뭇 낯익었던 까닭이다.
첫 만남 때는 주변이 너무 어두워서, 아까는 컨셉에 몰두하느라 의식하지 못했던 익숙함이었다.
“저, 정말로 살아 있는……?”
나는 고장난 듯한 인퀴지터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타오르듯 새빨간 머리카락. 그에 대비되는 신록의 눈동자. 단명헤어로 유명한, 느슨하게 묶어 한쪽 앞으로 내린 머리.
내 기억이 이상한 게 아니라면, 저거 공식에서 미는 사제 대표 이미지랑 똑같다. 리메이크판 트레일러 영상에서 저 얼굴을 수십 번 봤던 만큼 확신할 수 있다.
“…제 진실을 봐야 하노라 누누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아크메이지 얼굴도…… 마법사 대표 이미지와 동일했다. 샤기족 특유의 짐승 외형,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독 잘 뽑힌 백사자 외형은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 없다.
다만, 그래. 의아한 것은 왜 다른 직업군 캐릭터가 등장하는가.
‘영웅전설’은 원래 한 직업을 택하면 그 직업군 캐릭터만 굴리고, 다른 직업은 등장시키지 않았다.
온라인이다 보니 다른 게이머의 캐릭터와 마주칠 순 있어도, 스토리 내에서 타 직업 캐릭터가 등장하진 않았단 소리다.
그렇다면 이건 개편된 스토리의 영향이라 봐도 될까? 저들이 그냥 지나가는 NPC라고 하기엔 외형이 너무 걸리니까. 계속 작위적으로 엮어 주는 것도 그렇고.
하긴, 생각해 보면 트레일러에서 다섯 명 동시 등장이 너무 많았다. 나는 그게 직업 차별 이야기 방지용인 줄 알았지만 사실 스토리용이었던 거지.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저들이 동료가 되려나……? 나랑 이렇게 개판 싸우고……?
아니, 뭐. 알았어도 다르게 행동하진 않았겠지만.
“…부디, 설명해 주시게.”
그렇게 생각이 마무리되었을 즈음, 아크메이지가 내게 물었다. 내가 생각을 빨리 정리하는 편이라 다행이었다.
“지금 내게 설명을 요구하는 건가? 내게?”
나는 저들이 내 동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구태여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아무렴, 컨셉질하느라 파티원 안 쓰고 깬 게임이 몇 갠데 새삼스럽게 행동을 삼갈 이유가 없었다. 내겐 후일의 업보보다 지금의 재미가 더 중요했다.
아하학. 컨셉질 짱잼. 꿀잼.
“…인퀴지터나 나나, 해명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건 아네. 그렇지만, 이곳엔 다른 사람들도 있지 않나. 그들에게 불안감을 해소할 기회를 주게나.”
별개로 아크메이지의 말주변을 보며 감탄을 했다. 역시 현자는 현자란 건가? 저런 연륜은 나도 배우고 싶다.
“…….”
하나 그렇다 해서 봐줄 이유는 없으니. 나는 마법사를 이글이글 노려보며, 바닥에 박히다시피 한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곤 벌벌 떨던 습격자 새끼를 발로 찼다.
“그대……!”
인퀴지터가 뭐라 하려 했지만, 아크메이지가 한발 빨랐다. 계단에서 내려온 노인이 인퀴지터의 입을 막았다.
“네놈 입으로 고해라.”
“사, 살려…….”
“내가 두 번 말해야 하나?”
하, 악역도 아니면서 악역이 된 듯한 이 느낌, 짜릿하다.
“제, 제가 저분의 돈을 노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인퀴지터의 성질이 터지기 전에 강도가 입을 열었다.
“심부름꾼에게 팁을 주는 걸 보고 돈이 많나 싶어서……!”
“……!”
인퀴지터의 표정이 새파래졌다. 아크메이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고.
와중에 습격 이벤트 원인이 팁이었다니, 상상초월이다. 난 그냥 스토리거나 내가 운이 나쁜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냐고.
“대체 뭔 소란……!”
그때, 횃불을 든 누군가가 앞섶을 주섬주섬 추스르며 홀로 나왔다. 아까 여관에 도착했을 때 나를 받아 준 여관 주인이었다.
기억하기로 저 NPC, 심부름꾼 아이가 전해 주는 말을 듣고선 날 아주 귀빈 취급하지 않았나?
내가 하수도 청소할 때 가져온 모험가 패가 본인의 친구 자식의 것이었다며, 친구의 한을 풀어 줘서 고맙다고 여관비도 절반으로 받았었지.
하면 좋다. 이걸로 완전 오해 끝이다.
“아니! 기사님, 어찌 이 야밤에, 아니 이게 무슨…….”
“앞으론 보안에 신경 쓰는 게 좋을 거다.”
“예?”
“저 쥐새끼는 알아서 처리하도록. 그리고…….”
난 괜스레 아크메이지와 인퀴지터에게 시선을 주었다.
“신세는 여기까지 지지.”
아, 너무 재밌다. 게임이 이렇게 재밌어도 되나? 게임을 관둘까 하던 마음따위 바로 잊혀질 만큼 너무 최고였다.
“예?”
여관 주인이 당황했지만, 나는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마침 내겐 챙길 짐도 없었다. 검도 손에 쥐고 있고, 가방도 잘 메고 있으니까.
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신발도 안 벗고 잤으니─깨달은 즉시 한국인의 혼이 비명을 질렀지만─챙기러 갈 것 자체가 없는 셈이다.
덕분에 나는 위층 한 번 들르지 않고 여관을 나왔다. 여관 주인이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뒤따라 나왔다.
“이, 이렇게 가신다니요. 모험가님.”
그는 애타게 돌아갈 것을 요청했지만 듣는 척도 안 했다. 여관으로부터 올라온 횃불이 점점 거리를 밝혀 주었다.
“잠깐, 그대!”
지금에서야 정신이 퍼득 든 모양이다. 인퀴지터도 후다닥 달려 나왔다. 이쪽은 좀 반응할 필요가 있었다.
“내 말은 말 같지도 않나보군. 그래, 고. 귀. 하신 신관님이라 악마 새끼의 말 따윈 듣기 싫은가 보지?”
몸을 부드럽게 돌리며 검을 치켜들었다. 인퀴지터의 시야에 비치는 내 얼굴은 아마 분노로 가득 차다 못해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지 않을까.
왜, 너무 화나면 사람이 웃음도 나온다잖아. 실제론 재밌어서 웃는 거지만. 와하학.
“넘어가는 것도 여기까지다.”
“…난, 난 사과를…….”
“내가 네 방종을 이 이상 봐줄 이유가 있나? 내 인내심은 길지 않아. 그리고 그걸 다 닳게 만든 건 네놈이다.”
내 일갈에 인퀴지터가 눈을 꽉 닫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컨셉이 아닌 본체 입장에선 다소 안쓰러운 모양새였다.
아무렴 내가 아는 사제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신전에서 막 파견됐다는 설정이었다. 사회와 격리된 장소─신전─에서 가르침만 받다가 때가 됐다는 이유로 다짜고짜 내보내졌다 이거다.
그런 마당에 제가 배운 원칙과 규칙을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 겪어 본 바 없으니 형편을 따져 가며 느슨하게 처리할 여유도 없을 테고.
그런 이유에서 난 그녀의 행동이 크게 화나지 않는다. 내가 아는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경직되고 고지식해질 수 있다.
“네놈의 혀를 뽑으면 헛소리도 더는 지껄이지 못하겠지.”
근데 나는 이해해도 내가 잡은 컨셉은 그걸 이해 못 해.
“…그대 말이 옳다.”
미안하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이런 컨셉질을 좋아해서.
그래도 NPC니까 이러지, 현실에선 안 이러니까…… 네가 참아라.
“모, 모험가님…….”
여관 주인이 뭐라 지껄이든, 인퀴지터를 화난 얼굴로 응시했다.
그 시선을 인지하기라도 한 양, 인퀴지터가 각오한 듯 눈을 떴다. 그녀의 다리가 굽혀졌다.
“……!”
표정에 힘주고 있지 않았으면 지금쯤 내 눈이 왕방울만 해지지 않았을까.
아니, 아니, 사제가 왜?
“인퀴지터…….”
뒤늦게 따라 나온 아크메이지마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곤 나를 번갈아 봤는데, 나도 묻고 싶었다. 쟤 왜 그러냐고.
“내가 그대에게 가한 모욕, 더는 말로서 참회할 수 없을 터. 뽑아라. 그로도 부족하다면…… 내 목숨을 거두어 가도 좋다.”
…잠깐,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이 NPC가 뭐라는 거야. 돌겠네. 혀 뽑겠단 말에 수긍할 줄은 몰랐는데.
이런 엄격하고 굳건한 캐릭터를 좋아하긴 하지만, 실제로 이런 성격 좋아해서 사제 캐릭터를 가장 애정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난 당연히 거부할 걸 상정하고 지른 말이었다고……!
“…….”
그렇다고 컨셉을 포기하긴 또 그래서. 진짜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니 누군가가 급박히 달려와 앞을 막아섰다. 아크메이지였다.
“부디, 관용을 베풀게.”
“아크메이지님, 그러지 마십시오.”
“그녀는 이제 막 신전에서 나온 사람이네. 아직 세상을 몰라.”
“제 잘못입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녀를 제때 말리지 못한 내게 있네. 하니 벌할 거라면 차라리 이 늙은이를 벌하게.”
급기야 아크메이지마저 무릎을 꿇으려 들었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롱소드를 쥐었다.
“아크메이지님!”
“이런 말할 자격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부디…….”
“아니, 내 잘못이다! 아크메이지님은 관련이 없어!”
내 마음속 세모에 버섯이 돋긴 했지만 그래도 이 상황이 나쁘진 않다. 덕분에 넘어갈 구멍이 생겼다.
솔직히 그래. 죄책감이야 NPC니까 덜 수 있다고 쳐도, 남의 혀 자르는─그렇다고 목을 자를 순 없으니까─건 너무 비위 상한단 말이지.
그도 그럴 게, 자르려면 분명 혀를 붙잡고 베어야 할 텐데, 이 게임이라면 침까지 구현해 놨을 것 같았다. 아니, 이건 확신이다. 분명 침 묻는다.
그런 점에서 난…… 남의 침을 굳이 내 손에 묻히고 싶지 않다. 내 검에 묻는 것도 싫다. 끔찍하고 더럽다.
“난 분명 기회를 줬다. 그런데도 벌주를 택한 건 네놈들이지.”
최대한 서늘하게 말을 내뱉으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여관 주인이 숨죽이는 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의 어깨가 얄팍하게 튀었다.
“아크메이지님은 죄가 없다. 전부 내 어리석음이 자초한 일이다. 그분께는 손대지 말아다오.”
“아니, 이 늙은이에게…….”
이러니까 내가 대악마라도 된 기분인데. 다음 컨셉은 제대로 된 인성 파탄자로 잡아 볼까?
근데 지금도 이리 죄악감 느껴서야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NPC가 너무 사실적이란 것도 고달프다. 같은 말만 반복하면 0과 1로 이뤄진 데이터 쪼가리란 게 확연히 느껴져서 별 어려움 없이 상해 입힐 수 있는데.
난 무릎 꿇은 인퀴지터 앞에 섰다. 아크메이지가 탄식을 흘리며 고개 숙이고, 그녀가 입을 앙다물었다.
미간엔 주름이 가득했는데, 공포로 다물리려는 눈을 억지로 치뜨느라 생기는 주름 같았다.
“…….”
그런 표정 하지 마라. 아저씨…… 아니 얘 정도 나이면 삼촌인가. 어쨌든 삼촌 마음 약해진다.
스릉.
나는 롱소드를 뽑아들고 이를 악다문 채 인퀴지터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올렸다. 본인이 한 갈래로 묶어 둔 덕에 그러모아 잡긴 편했다.
“윽!”
너무 위로 잡아당겼나. 인퀴지터가 아픔을 호소하면서도 입을 살금 벌렸다. 쓸데없는 배려였다.
치위생사도 아니고 남의 입안 구경하는 취미는 없다.
서걱!
나는 손쉽게 붉은 것을 잘라 냈다.
이것도 절단 부위로 구현됐나 불안하긴 했는데…… 운이 좋았다. 성공했다.
툭.
나는 잘라 낸 머리카락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붉은 머리카락이 흙바닥에 촤악 퍼진 게 꼭 장미꽃을 보는 기분이었다.
별개로 위로 잡아당긴 상태에 잘라 낸 거라 좀, 남은 머리스타일이 많이 이상해지긴 했는데…….
뭐, 목숨값으로 치면 저 정돈 괜찮지 않나 싶다. 나름 단명헤어도 탈피했고.
넘어가자.
“……?”
와중에 동그래진 눈으로 올려다보는 청년은 퍽 가엽고, 제법 귀여웠다. 티는 못 내지만.
“다음은 네놈 목이 될 테니, 네 머리카락을 돌아보면서 입 간수 잘해야 할 거다.”
아, 그러고 보니 악마기사 가족 중 누나가 딱 저 나이대쯤 아니었나?
너무 빨리 스쳐 지나가서 확신을 못하겠네. 그래도 메이스 다루는 건 똑같으니까.
그러면 마지막에 누나 생각이 나서 누그러진 걸로 하자. 딱히 노린 건 아니지만 원래 설정은 나중에 갖다 붙이는 게 절반이다. 충분히 완벽하다.
이제 이대로 떠나기만 하면 마무리까지 딱이겠지. 좋아. 방랑기사 느낌 낭낭해.
“이대로…… 이대로 간다고……?”
“아, 하늘이시여…….”
뒤에서 허탈한 듯한 목소리와 안도감에 젖은 목소리가 교차했다. 캐붕으로 인한 당혹감이 감지 안 되는 지점에서 조금 뿌듯했다.
“그대!”
에비에비. 부르지 마라. 사제님 당신은 지금 죽다 살아난 거라고. 막판에 법사님이 무릎 안 꿇었으면 혀 진짜 자르거나 모가지 뎅겅당했을 거라고.
컨셉충을 무시하면 안 돼. 죄악감과 컨셉질은 별개다?
“인퀴지터…….”
옳지, 앜메 잘한다.
나는 아크메이지가 인퀴지터 말리는 소리를 배경 삼아 그 거리를 유유히 떠났다. 여관의 횃불과 멀어지자 어둠만이 나를 반겼다.
…좋아.
그래서 이제 어디 가지?
조금 사소한 문제점이 발견되긴 했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도시맵을 이렇게 넓게 만들어 놨는데 설마 여관을 하나만 만들어 놨겠어. 정 급하면 도시를 나가서 밤사냥해도 되는 문제고.
무엇보다, 이 다음 스토리를 심해진주가 어떻게 수습할지─ 그러니까 NPC들이 어떤 식으로 커버 칠지 생각하면 여관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지는 거다.
게임 너무 즐겁다. 으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