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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1화 (11/389)

◈11화 난 그걸 몰랐고 (4)

인퀴지터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사내를 보며 방패와 메이스를 힘껏 쥐었다. 이대로 보낼 순 없다는 의무감과 불쾌함을 표하던 사내의 표정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크메이지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으음, 글쎄요. 이 늙은이도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라.”

“저자를 그냥 보낼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저리 강한데, 혹 악마에게 먹히기라도 하면…….”

“저 사내가 악마에게 먹히리라 생각하십니까?”

“…개인적으로는 그러지 않길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압니다. 바람과 현실은 많이 다르지요.”

그녀의 침묵에서 많은 걸 읽어 낸 걸까. 아크메이지는 턱을 매만지다 손가락을 튕겼다.

“일단 저 청년에게 마크해 두겠습니다. 조금 시간을 두고…… 우연을 가장하여 다시 접촉하도록 하지요. 지금 억지로 따라가, 사내를 자극하는 건 악수일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나마 타협 가능한 방안이었다.

* * *

“…도착인가.”

나는 드디어 다다른 도시 입구에서 다짐했다. 내가 뚜벅이로 다시 길 가나 봐라. 심해 새끼들아.

“…….”

하루를 꼬박 걸은 것까진 좋다. 내가 직접 걸어서 그런가, 8시간이어야 할 하루가 현실 리얼 타임으로 하루인 기분이 났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다.

아니 못 참는다.

이 미친 심해진주, 무슨 장난을 부린 거야. 내가 게임에 열중하면 시간을 잊는 편이긴 하지만, 8시간을 24시간으로 착각할 정도는 아니라고……!

그래도, 그래. 이건 좋은 거니까 참을 수 있다. 잠깐 했는데도 오래한 느낌 나면 현생도 챙겨야 하는 게이머 입장에서야 나쁠 것 없으니.

그런데 무슨 게임이 졸린 거랑 피곤한 것까지 구현한단 말인가. 포만감이야 구현하는 게임 많으니까 이해하겠지만, 잠까지 구현한 건 납득할 수 없다.

아니면 뭐, 24시간 동안 사냥하지 말라는 걸 돌려 말하는 건가? 지들도 게임 너무 현실적으로 만든 건 알고 있나 보지?

근데 그걸 이딴 식으로 돌려서 규제한다고? 그럴 거면 차라리 풀다이브를 금지시키든가, 비싼 돈 들여 풀다이브 준비한 사람 빡치게……!

심지어 벌레도 많았다. 흙 속에서, 풀 사이에서, 나무에서!

최적화를 어찌나 잘했는지 버벅임 한 번 없긴 했지만, 이건 너무 기술력 낭비였다.

숲에서 잠깐 눈 붙였더니 등에 벌레 들어가서 기겁했던 심정을 너희가 알아? 아냐고 이 나쁜 진주 새끼들아.

내 망겜 갓겜으로 만들어 준 건 좋지만 이건 너무 과하잖아!

“응? 벌써 돌아오셨……?”

난 사무관 이즈렌의 얼굴을 보며 차마 말을 금치 못했다.

“…확인해라.”

나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힘들다 진짜.

“왠 뱀…… 설마!”

그렇지만 가오를 두고 울 수는 없었다. 뱀을 사무관 앞에 내던진 후 창구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메두사…… 메두사였던 거군요. 그래서…….”

아, 풀다이브고 뭐고 로그아웃하고 싶다. 게임 너무 잘 만들어서 때려 치고 싶기는 처음인데.

이 정도면 로그아웃했는데도 피곤한 느낌 남는 거 아닌가 싶다. 게임이 현생에 영향 주면 안 된다는 게 내 신조건만, 심해진주가 그걸 다 망치게 생겼네.

“만일을 대비해 숲의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하긴 하겠지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진짜 나가기엔 돈 쓴 게 아깝다. 풀다이브 전용액은 비싸다고. 다이브 도중에 나가면 액 다시 다 갈아야 하기도 하고.

참 서러운 일이었다. 망겜이 갓겜이 되긴 했는데, 너무 갓겜이 돼서 죽을 맛입니다. 젠장.

“진위여부를 파악하는 즉시 의뢰를 완료 처리, 보수를 지급토록 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모험가님.”

빠밤빰!

와중에 발랄한 BGM이 내 귀를 때렸다.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지금의 나는 실제로 날밤 깐 것처럼 머리가 다소 멍하고, 눈꺼풀이 무거운 상태였다. 즐겜러라도 이 컨디션에서마저 즐겁긴 어렵다.

“저…… 피곤하신 것 같은데 여관을 추천드려도 될까요?”

여관 추천? 추천 좋지. 원래라면 상회에서 잡아 줬던 거길 가려했지만 다른 곳에서 묵어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일 테니까.

“콘!”

“네!”

사무관의 부름에 맨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때 마주쳤던 아이가 조르르 달려왔다.

“모험가님을 흰바람 여관까지 바래다드릴래?”

“네. 맡겨 주세요!”

아이는 그때보다 활발하고 활기차 보였다. 비록 나는 그사이에 낡고 지쳐 버린 상태였지만.

“저…… 모험가님은 악마를 잡고 오신 건가요?”

“…그래.”

“어떤 악마를 잡으셨어요? 어떻게 생긴 악마였어요? 많이 강했어요?”

그때보다 덜 주눅 든 모양새의 아이는 슬금 제게 말을 걸어왔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컨셉이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대화 받아 줄 것 같은데,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악마는 재미로 논할 상대가 아니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한마디 툭 내뱉었다. 노린 대로 아이는 찔끔한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죄송해요.”

아아아! 네가 사과할 일 아니야!! 오히려 어른이 미안해!! 내가 현실 어린애라면 모를까, NPC 소년에게까지 친절을 베풀 만큼 그릇이 큰 어른이 못 돼서 미안해……!

나는 내적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여관까지 다다랐다. 다행이랄지, 소년은 제 까칠한 태도에도 여관 주인에게 모험가님을 잘 부탁한다는 아부까지 떨고 갔다.

사적인 감정을 뒤로할 수 있는 정말 멋진 아이였다.

“……!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는 칭찬을 팁으로밖에 못 하는, 너무도 안 멋진 어른이었다…….

“…그만할까.”

소년에게 두둑한 팁을 건네고, 여관방에 비척비척 들어서며 고민했다.

그래야만 했다. NPC가 다채로운 반응 보여 준 덕에 컨셉질이 재밌긴 한데 게임 자체가 날 너무 피곤하게 만들었다.

게임을 즐기는 감각이 아니라 체험, 극한직업 찍는 기분이라고 하면 아마 맞을 거다. 이 감상은 추억 보정과 감사함이 더해져도 도저히 덜어 내기 힘들다.

“후…….”

아니다…… 지금 내가 피로도 Max 찍어서 이런 걸 수 있다. 물론 이걸 실제로 느끼게 만든 게임사가 제일 나쁘긴 한데…….

나는 침대에 엎어졌다. 그러자 창이 스르륵 떠올랐다.

「 ▲ 0시간 00분 자기 ▼ 」

카운트는 적당히 6시간으로 정했다. 일단 자고 나서 판단─게임을 계속할지 말지─할 셈이었다. 경험상 피곤할 때의 판단은 후회할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아…… 그러고 보니 몸에 묻은 피도 닦아야 하는데…….

장비는 시간 지나면 자동 세탁되게 했으면서 왜 머리랑 피부에 묻은 것들은 안 사라지게 한 거야…….

안타깝게도 그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자기 버튼을 누른 후였기에, 금세 시야가 깜깜해졌다.

* * *

‘일어나야 해.’

「적의를 품은 대상이 반경 10m 이내에 존재합니다.」

눈이 번뜩 뜨였다. 창가로 흘러드는 빛이 잠들 때보다 덜한 걸 보면 한밤중이 아닌가 싶다. 귀뚜라미조차 울지 않는 적막이 고막을 가득 채웠다.

그보다 방금 색적스킬이 알림을 띄운 것 같은데?

…애초에 나, 창문 같은 거 연 적도 없고.

나는 눈을 껌뻑이다 말고 옆에 두었던 검을 쥐었다. 퍽! 반사적으로 들어 올린 칼날 위에 묵직한 일격이 떨어졌다.

등골이 섬뜩했다. 지금 깨달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선명한 기척이 내 뒤에 있었다.

“젠장!”

처음 듣는 목소리가 욕설을 내뱉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 망할 스킬은 적이 코앞에 오고 나서야 울렸다.

“죽어!”

투헨더에 닿았던 묵직한 것이 떨어져 나갔다가, 바람 소리와 함께 살의를 쏟았다.

당연히 그냥 당해 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재빠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게임 캐릭터답게 금방 어둠에 적응한 눈이 주변 상황을 명확히 비춰 주었다.

퍼억!

몽둥이가 비어 버린 침대를 후려치고, 나는 일으킨 상체를 틀어 적에게로 돌렸다.

그리곤 적을 향해 투헨더를 휘둘렀다. 자세가 자세인지라 큰 힘은 안 들어갔으나, 적의 살갗 일부는 베어 낼 수 있었다.

“크악!”

적이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거리가 벌려진 이상 승기는 내게 기울었다.

나는 적에게로 투헨더를 뻗은 채, 더듬더듬 손을 내려 허리춤에 걸어 둔 전등을 찾았다. 지금도 충분히 보이긴 하나, 이 일을 벌인 인간의 정확한 낯짝을 한번 구경하고 싶었다.

“제, 제길!”

그렇게 밝혀진 방 안에는 처음 보는 매부리코의 인간이 있었다.

오른손에는 철편을 박은 몽둥이를, 왼손으론 핏물이 번지는 가슴팍을 붙잡고 있다.

“사, 살려 줘.”

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벌벌 덜었다. 웃긴 놈이었다. 날 먼저 공격한 게 누군데?

“난, 난 그냥 돈주머니를…….”

“요즘 돈주머니는 남의 머리를 부수면 나오는 모양이지.”

색적스킬 안 찍었으면 어쩔 뻔했어. 인퀴지터한테 뚝배기 으깨지는 게 낫지, 자다가 대가리 부서지는 건 멋이 안 산다고.

난 이를 으득 갈며 검을 겨누었다.

“내려놓고 손 머리 위로 올려.”

와, 이 컨셉으로 경찰이나 할 만한 대사를 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이제 어쩌지?

“내, 내려놓을 테니 목숨만은…….”

“턱 아래에 검날이 파고들면 빨리 움직일 건가?”

으르듯 나직하게 말하니 상대가 팔짝 뛰어올랐다. 쿵. 나무 바닥 위로 뭉둥이가 떨어지고, 양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나는 그에게 검날을 세운 채, 침대를 돌아 다가갔다. 검이 길어서 겨눈 채로 갈 수 있다는 게 참 편리했다.

내 발에 채인 몽둥이가 방구석으로 굴러가고, 난 사내의 팔 한쪽을 붙잡았다. 머리에 손을 단단히 붙이고 있는지 끌어당겨도 크게 손이 풀리진 않았다.

대신, 그 스스로가 풀어 품안의 단검을 꺼낼 뿐이었다.

“가소롭기 짝이 없군.”

죽고 싶어 환장한 NPC인가. 학습이란 게 없네.

나는 투헨더를 방패 삼아 단검을 막았다. 그리곤 발로 도둑의 다리를 걸어 균형을 무너트렸다.

상대의 몸이 휘청이며 무너지려던 차, 내 오른팔이 팔꿈치로 그의 등을 내려찍었다.

“커헉!”

하여간 범죄자들은 곱게 대해 주면 좋게 가지를 않는다. 그러라고 보호해 주는 인권이 아닌데 말이지.

“윽…….”

넘어진 인간의 손을, 정확히는 쥐어진 단검을 걷어찼다. 손을 좀 밟긴 했지만 원하던 바는 이뤘다. 단검이 몽둥이와 마찬가지로 바닥까지 굴러갔다.

“그따위 칼날로 날 죽일 수 있다 생각했나?”

난 허리를 잠깐 숙여 NPC의 뒷덜미를 건틀릿으로 움켜쥐었다. 아픈지 악 소리를 내긴 했는데 그냥 무시했다.

저 강도 놈은 안 죽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했다.

“이봐.”

습격자의 목덜미를 쥔 채 성큼성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카운터에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NPC 하나가 있었다.

쾅!

그에 난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보이는 의자 하나를 걷어찼다. 쿠당탕탕! 의자 넘어지는 소리가 홀 안을 메아리쳤다.

“에구머니나!”

성질 피워서 죄송합니다. 그치만 보안 안 챙긴 건 당신들이니까 안 죄송합니다.

“뭐, 뭔?”

난 끌고 내려온 도둑놈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 점원이 그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공포영화 연출가가 좋아할 만한 비명 소리였다. 찰지다.

“무, 무슨 일이야……!”

여관 전체가 곧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중 일부는 방에서 고개를 내밀거나 홀까지 튀쳐나오기도 했다.

“사, 살인……!”

아니, 그. 내가 머리에 피가 묻어 있는 건 맞지만 이건 굳은 피인데.

지금 뒤집어쓴 피라면 굳었을 리가 없잖아요. 대체 어떻게 NPC를 프로그래밍하면 실제 인간처럼 사실관계를 오해하기까지 하지?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보지, 저걸 두고 죽었다 소리 지르는─.”

난 검을 치켜들며 끙끙대는 강도를 가리키려 했다. 몸을 일으키려는 것 자체가 산 사람의 행동이었으니, 오해 말라는 의미였다.

「적의를 품은 대상이 반경 10m 이내에 존재합니다.」

“그 잠깐 새에 살인을 벌인 건가!”

울리는 알림과, 들어 본 목소리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거다.

“역시, 자아를 유지하는 좀비 따윈─!”

얘, 숲에서 마주쳤던 걔 맞지?

“문답무용!”

부웅!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메이스가 나 있던 자리를 내려쳤다. 간발의 차로 피하긴 했지만 조금 아슬아슬했다. 판금갑옷을 벗고 방패를 내려 둔 사제는 실로 빨랐다.

“넌……!”

“이번에야말로 널 제거하겠다!”

대체 왜 여기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오해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진짜 골 때리는 NPC가 아닐 수 없다. 만날 때마다 상황이 이러기도 쉽지 않은데.

아니면 이것도 스토리인가? 스토리라고 하기엔 너무 작위적이고 운에 맡긴 거 같긴 한데.

아무렴 플레이어가 거기서 안 깨어났으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분명 따라오면 죽여 버린다 했을 텐데……!”

아니면, 깨어나지 않는 게 맞는 흐름이었나. 도둑맞은 돈주머니를 협력해서 찾는 식으로 간다든가 하는 거지.

그것도 지금처럼 플레이어가 색적스킬을 먼저 찍으면 망하는 전개인지라 확률은 좀 낮지만.

“더러운 악마!”

“…이번에야말로 네 턱을 자르고 혀를 뽑아 주마!”

별개로 저 사제 양반 나오면 과몰입 스위치가 켜져서 너무 재밌다. 어떻게 나올 때마다 콤플렉스 자극하는 말만 골라서 할 수 있지.

“신의 이름으로 죽어─!?”

“잠까안!”

나와 인퀴지터가 충돌하려는 순간, 바닥에서 희고 푸른 사슬이 튀어나오며 몸을 묶었다.

바인딩binding. 마법사 직군의 스킬로 적들을 묶어 마법 부릴 시간을 벌게 해주는 CC기다.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풀리되 저항하면 시간을 더 단축할 수 있다.

뭐어, 그래도 최소한 2초 정도는 묶여 있겠지만 말이다. 원작에서 그랬으니까.

“잠깐 멈추시게!”

그래도 저항은 해봐야지 하며, 투헨더에 스킬을 두르고 휘둘렀다. 귀에 아크메이지의 외침이 닿은 것과 거의 동시였다.

“아, 아크메이지님, 왜─.”

콰앙!

제 움직임에 기어코 사슬이 박살 나고, 투헨더가 바닥과 충돌했다.

쩌억!

투헨더의 검날에 따라 쪼개진 나뭇바닥은 홀 절반을 가르지르는 골을 만들어낸 채다. 바닥에 내팽겨쳤던 도둑은 간신히 그 골의 경로에서 빗겨 나, 몸을 벌벌 떨었다.

“흐어어억!”

“괴, 괴물……!”

“…….”

…오, 음…… 그러니까…….

이게, 이게 되네. 원작에선 PVP 개사기라며 너프 좀 먹이란 소리를 꾸준히 듣던 기술이 이렇게 쉽게 부숴지네…….

잠시간의 고요가 나와 아크메이지 사이를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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