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난 그걸 몰랐고 (1)
서북쪽 숲까지는 마차를 타고 체감 열 시간 넘게 달려야 했다.
좀 많이 지옥이었다. 탑승감도 탑승감이지만 게임사가 스킵 기능을 아예 안 넣어 주는 바람에.
더구나 나는 그놈의 가오를 위해 팔짱끼고 다리도 꼬고 눈까지 감아 가며 불편한 자세를 취한 상태였다.
금방 도착하겠거니 하며 아무 생각 없이 한 자세로 몇 시간을 이동하게 된 거다.
덕분에 나는 내가 정신과 시간의 방에 들어갔나 했다.
도착한 지금에서야 해가 뉘엿뉘엿 지는 걸 보면 현실에선 두세 시간 정도 소요된 게 분명한데 느끼기엔 열 시간이 뭐야, +n시간을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라면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다만, 나는 나조차 놀라울만큼 그 악조건을 끝까지 견뎌 냈다.
물론 인내심의 승리보다는 그냥 악에 받친 쪽에 가까울 거다. 체감 한 시간쯤 이동했을 땐, 그 한 시간 버틴 게 아까워서, 체감 두 시간쯤 이동했을 땐 또 그 두 시간이 아까워서 버틴 거니까.
각설하고 내릴 때도 비슷했다. 인내한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불편한 티 하나 낼 수 없었다.
하여 나는 경외에 가까운 눈초리들을 얻어 냈고, 그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위안만 되었다.
심해진주 이 개…….
* * *
나는 썩은 얼굴로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티코네 마을」
「❖ 서북쪽 숲에 도사린 위험
∎ 서북쪽 숲까지 이동
∎ 서북쪽 숲에 숨은 악마 수색」
별것 없는 내용이었으나, 온몸이 두드려 맞은 양 아프니 이 텍스트마저도 괜히 기분이 나빴다.
젠장, 이동 시스템 개같아도 안 망하겠다던 말 취소한다. 이동 시간이 N시간인 것도 문제인데, 탑승감이 이 따위다?
패치 안 하면 게임 무조건 망한다. 오랜 팬인 나마저도 게임 때려 치고 싶어졌으니까, 뉴비들은 대부분 박차고 나갈 거라고!
“저 나으리…….”
나는 결국 검을 어깨에 걸치는 척하면서─너무 길어서 앉을 땐 검집에서 빼야 했다─허리를 좀 폈다. 버틴 게 아깝다며 이 악물고 태연한 척했지만, 더이상은 무리였다.
우득. 허리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는 길은, 평안하셨는지…… 헤헤.”
나는 그 소리에 얼굴을 더 구기며 고개를 힐끗 돌렸다. 마부가 손을 싹싹 비비며 저를 보고 있었다. 딱 봐도 팁을 바라는 눈치였다.
“무슨 답을 바라는 거지?”
왜 하필 나를. 그런 생각은 불필요하다. 떠나기 전, 마부를 찾아 준 소년한테 팁을 꽤 많이 줬으니까.
그러니 그걸 목격한 마부가 내게 기대를 거는 것 역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니긴 한데.
“나는 네놈이 제공한 서비스의 대가를 치렀다. 어쩌면 그 이상을.”
저따위 탑승감에서 팁을 받으려는 게 사람 새끼냐. 도둑 새끼지.
원래도 줄 생각 없었지만 그 인고의 시간을 겪어 놓고 추가금 내줄 생각은 더더욱 없다. 나는 표정을 와락 굳혔다.
“다른 용건이 없다면, 꺼져라.”
혹시 몰라 손에 힘도 쥐었다. 왼손이 뿌드득 소리를 내자 마부가 힉 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꼴 좋네.
나는 콧바람을 살짝 뱉곤 몸을 틀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어째 슬슬 물러났다.
타이밍상 우연 같진 않은데…… 마부만 으른다는 게 너무 효과가 좋았나 보다. 진심이 들어간 게 영향을 끼쳤나.
“후.”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을 뿐, 컨셉에 어긋나는 장면은 아니니까.
나는 체면이 상하지 않는 최소한의 선에서 목을 두둑두둑 풀며 전진했다. 목표는 마을을 가로질러, 저 너머로 보이는 숲에 들어가는 거다.
“그, 그쪽엔 여관이 없는데……!”
그즈음 용기 있는 누군가가 내게 외쳤다. 딱히 바란 조언은 아니었으나 그 씀씀이 자체는 참으로 고마웠다.
“진짜 없는데…….”
하지만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잠을 안 자도 멀쩡한 게 국룰이다. 취침 기능의 존재와는 별개였다.
그런고로 여관에 들러 자고 갈 생각 없다. 피곤해진다면 취침 모드로 돌리기야 하겠지만, 아직 버틸 수 있는데 굳이?
꼬박꼬박 자면서 할 거면 풀다이브를 왜 해.
마차에서 버티는 동안 닳은 정신력이야 사냥 같은 거 하면 채워진다. 내가 지친 건 지루함 때문이지 실제로 피로해진 게 아니니까.
“숲에 들어갈 거라면 그만두시오.”
한데 여기 사람들. 너무 착하다. 생면부지일 텐데 나서서 신경도 써주고.
“악마가 나오고 있소.”
하지만? 나는 지금 까칠한 도시 남자…… 가 아니라 싸늘한 싸가지였다.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그를 지나쳤다. 남자가 발끈해서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악마가 나온다고 하지 않소! 그런 숲에 낮도 아니고 밤에 들어가려는 거요!”
그것에 걸음을 아주 살짝 늦췄다.
“낮이든 밤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지?”
대게 낮보다 밤의 몬스터가 강한 편이긴 하지. 피통을 늘리거나, 공격력을 더 올리거나 하는 식으로 밸런스를 잡아 둘 때가 있으니까.
“밤이란 이유로 지옥에서 올라온 버러지들 따위에게 진다면, 그거야말로 문제겠지.”
근데 그래 봤자다. 사냥을 주로 삼는 게임의 경우 둘의 난이도 차이를 심하게 잡지 않는다.
거기에 예구(예약 구매)로 받은 무기 공격력이면 최소한 중반부 몹까진 통할 듯한데, 그걸로 초반부 밤의 몬스터 하나 못 잡을까?
나는 오랜 게임 경력을 통해 그런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어두워져 가는 숲을 향해 발을 뻗었다.
빛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울창한 수림이 내 몸을 집어삼켰다.
* * *
“사실, 악마의 목에 70만 갈이나 걸려 있다 들었을 때, 처음엔 너무 과장된 금액이 아닌가 했습니다.”
한 여인이 제 앞을 가로막은 고블린의 몸뚱이를 메이스로 내려찍었다.
느슨하게 묶어 한쪽 앞으로 내린 적발은 그 색이 너무도 붉어, 피가 튀었는지 아닌지조차 구분할 수 없다.
“그러실 만하지요. 겉으로 드러난 피해자 자체는 적지 않습니까.”
여인이 연 길을 풍채 좋은 노인이 따라 걸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 아래에는 보편적인 인간의 얼굴이 아닌, 사자를 닮은 얼굴이 있다. 보드랍게 자라난 흰 털이 우아한 듯 고상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도…… 제 생각이 너무 짧았던 것 같습니다. 직접 당하지 않아도, 살아갈 터전을 빼앗긴다면 그 또한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을.”
“그것을 아신 것만으로 충분하십니다. 신전에서 갓 나와 세상을 알아 가는 상황 아니십니까.”
노인의 발언에 여인은 살풋 아미를 그러모았다. 그 자신을 두고 품은 못마땅함이자, 도통 풀릴 기미가 없는 현 사태를 향한 약간의 분노였다.
“어린 양들을 위해서라도 암약하는 악을 빨리 뿌리 뽑아야 할 텐데, 당최 보이질 않는군요.”
“그러니 현상금이 이토록 불어난 것이겠지요. 조급해하지 마세요. 마음이 급하면 될 일도 안 되곤 합니다.”
“압니다. 하지만…….”
그녀는 며칠을 헤매어도 나오지 않는 악마의 존재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만큼 답답한 속이었다. 신전에서 계시를 받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늘. 처음 겪어 보는 바깥세상은 이다지도 복잡하고 어려웠다.
정해진 일과도 답도 없다. 오롯이 혼자서 판단하고 결정하며 나아가야 했다.
“후, 아크메이지님의 말씀대로, 제가 이리 군다 해서 악이 모습을 드러내진 않겠지요. 정신 차리고 다시 한번 숲을 훑어보겠습니다.”
“옳은 판단이십니다.”
여인은 또다시 튀어나온 고블린을 메이스로 으깨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 짙은 마기는!”
그것에 화답하듯, 지금껏 숲을 돌아다니며 느껴 본 적 없던 짙은 악의가 그녀의 감각에 닿았다.
“아크메이지님!”
“예, 저도 느꼈습니다. 먼저 가시지요, 인퀴지터.”
“실례하겠습니다!”
여인은 지팡이 챙기는 노인을 뒤로하고 한달음에 마기의 근원으로 향했다.
“찾았다, 악마!”
그 끝에 있던 것은, 허리춤에 등불을 내걸고 거대한 검을 어깨에 짊어진 사내였다.
건틀릿이 채워진 듯한 오른손에서 진득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인간이 되어 감히 신을 배반하다니!”
그에 그녀는 더욱 참을 수 없었다.
인간이 되어 마기를 몸에 품다니. 악마와 계약한 게 아니고서야 저럴 수 없다. 신을 등지고 인류를 배신했다는 소리다.
“신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겠다!”
처형해야 마땅할 변절자를 절대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그녀는 방패를 단단히 틀어쥐고, 메이스에 신성력을 실었다.
“……?”
문득, 안대에 가려져있지 않은 음울한 눈동자가 그녀와 시선을 얽었을 때.
까앙!
검과 메이스가 부딪쳤다.
* * *
「색적│적을 골라내는 것은 전투의 기본이라. 적의를 인지할 수 있게 된다.
효과: 적대적 대상이 10m 내로 근접할 시 가장 가까운 이에게 표적마크 제공.」
밤이라 악마가 잘 안 보여서, 생활 계열 스킬 중 ‘색적’을 한 번 찍어 본 참이다. 반경 10m 내에 적대적 대상이 있으면 표시해 준다는 말만 믿고.
「적의를 품은 대상이 반경 10m 이내에 존재합니다.」
“……?”
그런데 이렇게 찍은 색적스킬을 바로 써먹게 될 줄이야.
“인간이 되어 감히 신을 배반하다니!”
심지어 대상은 내가 원했던 악마도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겠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겨우 억누르며 투헨더를 휘둘렀다. 메이스를 검으로 저항하는 건 검날을 망치는 길임을 잘 아나, 지금은 달리 방도가 없었다.
까앙!
들려온 소리를 보아 그나마 ‘완벽한 쳐내기’가 발동됐다.
타이밍에 맞춰 무기를 쳐냈을 경우, 피해량을 90%만 제거해 주는 일반 ‘쳐내기’와 달리, 피해량을 100% 제거해 주는 방어 계열 스킬이었다.
덕분에 나는 당혹감을 감추고 빠르게 다음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언제 공격이 들어와도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준비였다.
“교단인가.”
동시에 머리도 열심히 굴렸다.
등장한 상대는…… 신의 이름 운운하는 외침이나 메이스 끝에 머물던 흰 빛으로 보아 아무리 봐도 사제 쪽 직업 같다.
방패에 판금까지 착용해 놓고도 굼벵이처럼 굴지 않는 걸 보면 레벨도 좀 높은 것 같고.
“그래, 네놈을 처단하기 위해 왔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정체를 파악하고 나니 더 얼떨떨해졌다. 사제가…… 왜 나를?
새 퀘스트나 갱신 표시가 안 뜬 걸 보면 이벤트나 스토리 같진 않은데.
그럼 필드보스인가? 그러나 필드보스라고 하기엔 맵과 영 어울리는 디자인이 아니다. 사제가 숲을 지킨다는 설정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관련 백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역시 스토리나 이벤트? 원작에선 이런 거 없긴 했는데 리메이크판은 또 몰라서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어안이 벙벙하다.
“내가 아는 교단은 신의 이름 아래 선행과 자비를 베푸는 자들이었거늘, 오늘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나 보군. 무턱대고 폭력을 휘두르는 걸 보면.”
흠. 그래도 일단 나온 이상 즐기기나 할까. 내가 뭐 돌아돌아 살려고 컨셉충 하는 것도 아니고.
“악마 따위가 폭력을 논하는가!”
별개로 대사 들어보니까 뭔가 대화의 핀트가 어긋난 건 확실했다.
왜 멀쩡한 인간 두고 악마라 소리 지르는 건지.
날 악마로 오해라도 한 건가? 대체 뭘 보고?
내가 악마와 관련된 게 대체 뭐 있기에…….
하다못해 저주템도 안 들고 있는…… 데……?
어…….
설마 내 오른팔?
“……!”
깨달음은 순식간이었고, 표정을 싸하게 굳힌 건 컨셉충의 본능이었다.
아무렴 악마가 깃든 팔을 보기 싫어서 건틀릿을 꼈다는 설정이다. 악마를 증오하지만, 동시에 팔에 깃든 악마를 보며 나는 아직도 인간인가? 라며 고뇌한다는 설정이라고.
그런 애가 사제한테 악마 소리 듣는다? 야, 이거 버튼 눌리는 스위치 아니냐고! 무조건 눈 돌아간다고!
“날 악마라 부르지 마라, 광신도!”
절대 못 참지. 핏대 세워 가며 바락바락 소리 질러 줘야지!
안 그래도 나 자신이 인간인지 몰라서 방황하는 자존감 Min이 이걸 어떻게 넘겨!
“감히, 악에 넘어간 변절자 따위가!”
적이 나보다 렙 높은 데다가 상성도 점한 사제라는 사실? 알 바 아니었다. 이런 류의 게임은 레벨로 반드시 승패가 판가름 나지 않을 뿐더러, 죽더라도 다시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컨셉충에겐 죽는 것도 컨텐츠다. 어느 쪽이든 즐겁다.
“순순히, 심판을 받아라!”
나는 신나서 씰룩이려는 입꼬리를 익숙히 억누르며 사제의 메이스를 피했다. 그리곤 제 검이 하늘을 향하도록 똑바로 세워 약속한 의식을 치뤘다.
“나의 검에게 승리를, 저 하늘에 영광을……!”
“꼴에 기사 흉내인가!”
어, 꼴에 기사 흉내다. 근데 정식 서임 받은 진짜 기사는 아니라서, 싸움까지 고결하게 굴진 않을 거다?
나는 허리춤에 달린 전등을 꺼, 어둠속으로 녹아들었다.
저쪽은 버프기로 인해 몸 전체가 빛나는 반면, 나는 그렇지 않은 까닭이다. 전등을 끄면 시계가 좁아지겠으나 저쪽과 달리 나는 상대를 포착할 수 있다.
“이 교활한……!”
역시나 상대는 곧바로 타깃을 잃었다. 겉보기엔 내가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 혀를 잘라 신께 바쳐 주마……!”
그럼 기습자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줘 볼까. 공격이 박히기는 할까 싶다마는.
“브레이커……!”
「브레이커│무기에 마력을 두른 채 전방 넓은 범위에 강력한 마속성 내려치기를 행한다.
효과: 마력 10 소모. 전방 범위에 들어온 적을 540%의 대미지로 공격.」
색적스킬 이전에 찍었던 공격스킬, 브레이커가 투헨더에 검은 이펙트를 더하며 밤공기를 쪼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