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러면 안 됐는데 (4)
‘시간 감각 사라지기 딱 좋은 던전’이란 문장이 머릿속을 점령할 즈음, 기존에 밝혀진 부분은 전부 훑어볼 수 있었다.
「❖ 하수도를 더럽히는 것
∎ 악마 제거 62 / ??
∎ 보너스: 유품 찾기 6 / 13
∎ 보너스: 사망한 모험가의 흔적 회수 5 / ??」
퀘스트도 이만큼 진행했다. 전체 진행도까지는 알 수 없으나, 발견한 유품이 절반에 다다른 걸 보면 너무 늦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서브 미션도 얻었고.
“막혔나.”
사각.
나는 지도를 꺼내 지금 훑은 길을 체크했다. 지도는 이제 거의 다 밝혀져서, 한 길밖에 남지 않았다.
아마 저곳에 보스몬스터와 유품이 몰려 있거나, 아니면 길이 뚫려 있는 식으로 추가 맵이 나올 확률이 높다.
“쯧.”
나는 입에 물었던 펜 뚜껑에 펜을 집어넣고 지도를 잘 접었다.
잉크가 마르길 기다린다? 별로 소용 있는 행위는 아니었다. 지도는 이미 고블린의 피로 젖어서 다소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피가 직접적으로 튄 게 아니고, 지도를 꺼낼 때 손에 묻은 피가 옮겨 묻은 것에 가까움에도 그렇다.
그래도 알아볼 수 있으면 됐지. 거의 다 찾기도 했고.
나는 그렇게 접은 지도를 품에 넣으며, 막다른 길 끝부분을 수색했다. 이런 데에 아이템이나 회수해야 할 오브젝트가 있다는 걸 학습한 까닭이다.
「❖ 하수도를 더럽히는 것
∎ 악마 제거 62 / ??
∎ 보너스: 유품 찾기 7 / 13
∎ 보너스: 사망한 모험가의 흔적 회수 7 / ??」
역시나 인부의 시체와 모험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저는 뻑뻑한 눈가를 피에 절은 손등으로 꾹꾹 눌렀다.
“찾기 더럽게 힘드네…….”
회수 가능한 오브젝트는 윤곽선이나 반짝이 처리로 따로 표시해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맨 처음 들어간 골목길에서 군화 굽에 뼈 부러지는 소리 듣고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시체가 왜 없지, 왜 없지 하며 헤맸을 거다.
더불어 아이템 표기가 안 떠도 인벤토리에 들어가나 시험해 보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회수하지 못했겠지.
저는 그런 사소한 불만을 품으며 발견한 시체를 더듬었다.
시체 자체를 가져가기엔 무게와 부피가 문제되는 까닭이다. 펜던트나 반지, 모험가 패 등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자질구레한 물건이 내가 챙길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쪽은 유품도 가질 수 없었는데.’
그러고보니 이 직업. 악마가 몸에 깃든 직후, 폭주해서 집은 물론이거니와 가족들 시체까지 날아가지 않았던가? 집이 통째로 날아갔으니 유품도 못 거뒀을 테고.
원작 설정이 그렇단 거지 리메판까지 그러리란 법은 없지만…… 오프닝 영상을 고려하면 이 설정도 살려 놨을 것 같다.
조금 불쌍하다.
캬르르륵!
“후…….”
뭐, 그런 사연 덕분에 컨셉질에 과몰입할 수도 있는 거지만!
나는 펜던트를 곱게 들었다. 유품조차 가질 기회 없던 캐릭터가 남의 유품을 함부로 대할 것 같지도 않고, 도의적으로도 그게 맞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컨셉질 자체가 인의를 무시할 설정이 아니라면, 가능한 갖추고 싶다. 오롯이 그게 옳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와라, 벌레 놈들…….”
그보다도, 이것보다 더 쩌는 대사 어디 없으려나.
나는 펜던트를 거두자마자 뒤에서 다시 등장한 고블린을 향해 검을 들었다.
“네놈들이 기어 올라온 고향 땅으로 다시 보내 줄 테니……!”
하, 몇 달을 고심해서 준비한 대사들인데도 영 아쉽다. 좀 더 오글거리고 간지 나는 말이 분명 있을 텐데!
서걱!
고블린들이 또 한 번 검날에 베여 나갔다. 악마들이 둥지를 틀며, 괴상한 뿌리 같은 게 자란 통로는 아롱거리는 주홍빛 등불에 따라 번들거렸다.
끼익끽!!
쥐와 고블린의 울음소리가 돌림노래처럼 웅웅웅 굴 속에 울려 퍼졌다. 썩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닌지라 귀가 괴로웠다.
그렇지만 냄새도 이겨 낸 마당에 이깟 소리에 질 이유 있나?
더불어 이 부분은 짜증을 참을 필요 없다. 소리의 근원지들을 잡는 것이야 말로 임무였으니까! 캐붕을 내지 않고 화풀이가 가능하단 소리다.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는다!”
죽어라 이 자식들아! 외적으로는 내 증오의 대상으로서, 내적으로는 내 귀를 위해 죽어라! 으학학.
콰직!
나는 등장하는 고블린들의 머리통을 족족 깨부수며 앞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내가 왔던 길목과, 유일하게 가보지 않은 길목의 갈림길에 섰을 때.
나는 몸에 절여진 피를 털어 내며 망설이지 않고 발을 내디뎠다. 곧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끼이이익!!
드러난 거대한 공간은 검고 질척한 가닥들로 뒤덮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엔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존재했는데, 그중 눈에 띄는 건 딱 한 마리였다.
콱, 콱!
홍해처럼 갈라지는 고블린들 사이로, 지팡이를 쥔 고블린이 걸어 나왔다.
「홉고블린│고블린이 다량의 마기를 섭취하고도 생존했을 때 탄생하는 돌연변이. 보통의 고블린보다 높은 지능과 특별한 힘을 가진다.」
올리브색 대신 새빨간 살갗에, 덩치도 고블린보다 배는 큰 홉고블린. 보통은 이마저도 잡몹으로 등장할 때가 많으나, 초반인 지금은 한 구역의 보스로 자리해도 이상하지 않다.
“읍읍!”
한데 끽끽거리는 울음 사이에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껴 있다.
나는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고블린들의 뒤쪽, 아이 하나가 꽁꽁 묶여 있는 게 보였다.
“네놈들이 마지막인가 보구나…….”
그에 동정이 들기보단 그냥 감회가 새로웠다. 원작에서도 잡혀간 아이를 구하거나, 내버려 두거나 선택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내 선택? 당연하게도 구한다 쪽이다.
원작 플레이 때는 악마 사냥에 눈 돌아간 컨셉으로 안 돕고 안 구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덜한 형태로 잡았으니까.
더불어 그 시절과 달리, 머리가 굵어진 지금은 미성년자 보호에 열을 올리게 된지라. NPC라도 그건 크게 다르지 않다. 애들은 행복해야 했다. 무조건.
“읍읍!”
뭐, 구하는 건 구하는 거고 몰입은 몰입이다. 마침 오프닝 영상에서 본 막냇동생이랑 비슷한 나이대겠다, 이입하기 딱 좋았다.
“가증스런 악마들아.”
공간이 넓어서 롱소드가 아닌 트루 투헨더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롱소드를 검집에 집어넣고 등으로 손을 가져갔다. 몸에 각인되다시피 한 감각을 따라 손가락을 오므리면, 이제 딱딱한 무언가가 손에 사로잡힌다.
스르렁
1.6m에 달하는 검이 쑤욱 뽑혀 나왔다.
“영광으로 알아라.”
끼이이익!
제가 검 뽑는 걸 뭐라 판단한 건지. 홉고블린이 들고 있던 지팡이를 올려 들었다.
벽쪽에 물러나 있던 고블린 몇 마리가 툭 튀어나오며 내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쫄 패턴 보스인가 싶다.
“네놈들의 죽음이 이 자리에 섰으니.”
하지만 수십 개의 게임을 클리어한 게이머를 얕보면 곤란하지.
“나의 검에게 승리를, 저 하늘에 영광을……!”
나는 검을 두 손으로 쥐고 하늘을 향하도록 똑바로 세웠다. 기사 흉내였다.
아무렴, 해당 직업은 주변에서 먼저 ‘악마기사’라는 별명을 붙여 준다. 내 닉네임이 저게 아니었어도 일부 NPC는 악마기사라고 호칭해 준단 소리다.
그런데 이유 없이 저런 별칭이 붙었을까? 그럴 리 없다. 서사와 개연성을 중시하는 내 입장엔 적어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의, 사람들이 저런 이칭을 부여할 만큼 기사처럼 보이는 모습이 있을 거라 판단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것이었다.
아, 물론 과하게 기사같이 굴 의향까진 없다.
솔직히 악마 잡는 과정에마저 기사도를 챙길 거면 그냥 기사했겠지. 악마 잡겠답시고 기사의 길을 관둔 애가 기사도를 전부 챙길 리 없다.
그러니 기사로서의 버릇은 딱 이 정도만. 싸움은 악귀처럼.
나는 바로 달려 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양손이 틀어쥔 트루 트헨더가 종횡무진 허공을 그었다.
크기가 너무 거대해서 다루기가 퍽 까다롭다가도, 다른 게임에서도 몇 번 써본 기억과 게임 보정이 합쳐지니 그럭저럭 다룰 만했다.
끼익!
손잡이와 칼날을 붙잡고 덤벼드는 고블린을 막은 후, 검신을 잡았던 손을 살짝 떼어, 손가락으로만 검신을 훑듯이 아래로 미끄러트렸다.
그렇게 패링훅Rarrying Hooks을 지나 리캇소Ricasso─크로스가드 위쪽, 날이 서지 않은 도신─부분까지 손이 닿았을 때, 그걸 단단히 잡고 휘둘렀다. 손잡이는 왼쪽으로, 리캇소를 붙잡은 손은 오른쪽으로 움직여 휘두르는 형식이었다.
서걱!
떨어지던 고블린을 반으로 가른 후, 검을 빠르게 고쳐 잡았다. 순차적으로 검 자루를 뒤집어 잡은 손이 투헨더를 바닥에 내려찍었다.
콱!
다리를 할퀴려던 고블린 하나의 머리가 꿰뚫렸다.
나는 고블린을 짓밟고 검을 빼낸 후, 다시금 휘둘렀다. 네 마리째 고블린이 사망했다. 보스 놈이 일시적으로 부른 쫄은 전원이 제거된 순간이었다.
하면 다음 쫄이 튀어나오기 전에 어서 딜을 넣어야지.
양쪽 굴에 숨은 고블린들이 튀어나오는 동안, 나는 앞으로 전진했다. 쫄들과 함께 나를 공격하려던 녀석이 질겁하며 옆으로 슬슬 몸을 빼려 들었다.
그런데 투헨더는 무려 1.6m짜리라서 말이다.
나는 고블린들이 막아서기도 전에 투헨더를 휘둘렀다. 방어를 도외시하며 휘두른 검은, 보스 홉고블린이 들어 올린 지팡이와 그 몸뚱이를 베어 넘겼다.
와, 이 게임 무기 파괴도 되나 봐. 목재 무기 들면 안 되겠다.
일단 쫄들이 튀어나왔으므로 나도 몸을 물렸다. 뒷걸음질 치며 회수한 검이 방패가 되어 고블린들의 몸뚱이를 막아 세웠다.
그때 등에 달라붙은 고블린 하나가 드러난 목덜미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줄여 둔 통각 수치 덕에 따끔한 정도의 충격만 다가왔다.
“같잖은…….”
별개로 HP가 꽤 닳아서, 나는 냉큼 그것을 붙잡아 던졌다. 그렇지만 그 잠깐 사이에 허벅지에도 한 마리가 더 붙었다.
한 방 컷이긴 한데, 너무 작고 많아서 참 귀찮기 그지없다.
“순순히, 죽어라 버러지들!”
허벅지에 붙은 걸 먼저 처리하면, 양쪽에서 달려드는 놈들이 양어깨에 들러붙을 것 같다. 때문에 나는 찌푸린 눈으로 날뛰듯 검을 휘둘렀다.
뛰어오던 두 마리가 댕겅 양단되었다.
그런 후에는 허벅지에 손톱을 박아 넣는 작은 악마를 낚아채 바닥에 던졌다.
콰직!
군화가 고블린의 머리통을 짓밟아 그대로 부쉈다. 근접체술을 찍은 보람이 있었다.
끼익끽!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고블린 쫄이 영 끊기질 않았다. 아마 보스가 계속 지시 내려서 그렇겠지.
하면 녀석을 죽이는 걸 우선으로 삼자.
나는 남은 HP를 확인한 뒤 땅을 박찼다. 그리곤 리캇소와 손잡이를 단단히 쥔 채 사방으로 휘둘렀다.
장대한 검신이 표적 없이 휘둘러지며 달려드는 고블린들을 견제했다.
그렇게 네 번쯤 휘둘렀을까? 고블린들에게 둘러싸여 후퇴하던 보스를 따라잡았다. 중간중간 달려든 고블린이 옷을 찢고 살갗에 상처를 냈지만 큰 부상은 아니었다.
콱!
보스를 공격하기 직전, 나는 달려들던 고블린 하나를 내려찍었다.
뒤쪽에 있던 녀석들까지 해서 두 마리가 동시에 관통, 덕분에 칼날은 거의 고정되다시피 한 채다.
바라던 바였다. 나는 손잡이와 리캇소에서 손을 떼어 낸 후, 왼손으로 허리춤의 롱소드를 잡았다.
무기를 버리는 것 자체는 망설임이 없었다. 아까 실수로 무기를 놓쳤는데, 그 자리에 그대로 남더라고.
부드럽게 뽑혀 나온 칼날이, 나옴과 동시에 고블린 한 마리를 베고, 그 너머를 노렸다.
촤악!
핏줄기가 뺨과 목덜미, 그리고 코트 아래 조끼와 셔츠를 적셨다. 고블린 몇 마리가 몸에 손톱을 박도록 허용하는 대가로 얻어 낸 보스 홉고블린의 핏물이었다.
끼익!
끽끽끼!!
머리를 꿰뚫은 대가인가. 아니면 무기의 승리인가. 보스 홉고블린이 단숨에 절명했다.
「공포와 혼란│눈앞에서 우두머리가 살해당할 경우 일부 적들은 겁에 질려 도망치거나 전의를 상실합니다.」
심지어 상급자가 죽었다고 고블린들은 동요하기까지 했다.
“약해빠진 것들.”
보스 홉고블린으로부터 검을 뽑은 뒤 공포에 질린 것들을 발로 차고 검으로 갈랐다.
그 과정에서 트루 투헨더도 회수했다. 널찍한 공간에서 다량의 적을 처치하는 데는 롱소드보다 투헨더가 더 나았다.
“지옥으로 꺼져라.”
보스를 처치하니 그 쫄들은 금방이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음산한 목소리를 뱉으며 녀석들을 하나하나 도살했다. 도망가려는 녀석들 역시 절대 놓치지 않았다.
놓쳤다가 퀘 완수 안 되면 고달파진다.
“시시하기 짝이 없군.”
녀석들을 전부 죽인 후, 검에 묻은 피를 털며 중얼거렸다.
사실 싸울 땐 시시함 따위 절대 못 느꼈지만 원래 허세란 게 그렇다. 없는 말을 지어내거나 과장하면서 시작되는 거지.
“이딴 것들을 처리 못 해 지금까지 방치해 놨다니…….”
그래도 그냥 허세만 부리면 재미없으니까, 캐릭터 성격을 약간 곁들인다.
약한 부분을 숨기기 위해 강한 척하나, 실상 마음 약하단 설정을 반영해 조금 씁쓸한 목소리로. 약간의 안타까움이 느껴지게 사근대는 거다.
“칫…….”
마지막엔 안타까움의 혀 차기까지, 좋아! 완벽해! 올해의 과몰입상은 내 거다!
“읍…….”
그즈음 해서 한쪽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제야 구해 줄 대상이 있다는 걸 상기했다. 딱히 잊었던 건 아닌데 너무 뒷전으로 미뤄 둔 모양이다.
“꼬마, 운이 좋았군.”
나는 짐짓 서늘한 표정으로 아이가 붙잡힌 벽에 다가갔다. 아이는 식물의 뿌리인지 모를 가닥에 의해 벽에 매달린 상태였다.
우드득.
손으로 그것들을 전부 잡아뜯었다. 손아귀 힘이 생각보다 세서 민망한 일 없이 쑥쑥 걷어 낼 수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구해 낸 아이는 오프닝 영상의 동생보단 좀 큰 듯했다. 그래도 가슴팍에 겨우 올 만큼 작았지만.
죽은 동생은 이보다 더 작았을 것이다.
“…고마워할 필요 없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괜히 더 이입됐다. 이보다 더 작은 애가 죽었는데, 걔가 내 동생이고, 죽인 놈은 내 팔에 깃들었다?
안 미친 게 용하지. 나 같아도 악마 놈들 다 때려죽이겠다고 칼 뽑을 듯.
“약한 것들을 보호하는 건…….”
어쨌거나 지금은 대사를 치는 중이다. 죽은 동생이 생각나는 아이를 두고, 구하지 못한 예전과 달리 그래도 구해 낸 입장으로.
그 상황의 심정은 어떨까?
“기사로서, 당연한 일이니까.”
나는 목소리 끝을 살며시 떨며, 손을 들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 위해서였다.
다만 내가 오른손잡이에 가까운 양손잡이라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이 먼저 들렸다.
안 될 말이었다. 내가 잡은 컨셉은 이 오른손을 끔찍하게 여겨 주력 손조차 바꿔 버렸다. 그런 와중에 이 손으로 타인과, 심지어 아이와 접촉할 리 없다.
“기사…… 기사님이세요?”
잠시 고민이 들었다.
아이에게도 싸가지로 갈까, 아니면 아이에겐 친절하게로 할까.
역시 후자가 맞지 않을까? 약한 척하기 싫어서 가시 세운 게 예의 밥 말아먹은 지금 상태니까. 과거엔 노인와 아이 같은 약자를 보호하는 기사 지망이었고.
그러니 아이에게까지 그러진 않을 거 같단 말이지. 밀어내는 거라면 또 모를까.
“그래.”
금방 결론을 내렸다.
목소리에는 알알이 서리를 끼워 두되, 말투만 좀 부드럽게 하자. 목소리가 냉랭하면 말투가 멀쩡해도 대부분 인성 터진 놈이라고 여기더라.
물론 이쪽을 택한 이유엔 꼭 캐릭터 해석만 있진 않았다. 여기 NPC들이 너무 잘 만들어져서, 어른이라면 모를까 애한테까지 인성질 부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좀 더 컸다.
애들은, 애들은 무조건 보호받고 행복해야 한다…….
“…왜 여기 붙잡혀 있던 거지.”
“엄마가…… 엄마가 하수도 청소를 하러 간 날부터 돌아오지 않아서…… 그래서 엄마를 찾으러 왔어요. 죄송해요…….”
아이고 아기야. 엄마 찾으러 왔다가 붙잡힌 거였니. 아저씨 운다 울어.
“…그건, 네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꼬마. 넌 어른들을 믿고 기다렸어 했어.”
“죄송해요…….”
“내게 사과하지 마라. 사과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다.”
게임이라도 이런 건 착잡하다. 위험한 세계관이라서 종종 죽어 나가는 부모나, 남겨지는 자식들이나.
음, 게임이 끝나면 간만에 엄마 아빠한테 안부 인사나 드릴까.
덕분에 오랜만에 효도할 생각도 들었다. 게임의 순기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