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화 (3/389)

◈3화 그러면 안 됐는데 (3)

“일단…… 얼마 전 하수도에 문제가 생겨 인부를 여럿 보냈소. 한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지 뭐요. 한 번 더 사람을 붙여 보낸 결과, 하수도에 악마 소굴이 자리 잡았다더군.”

당황도 잠시. 중년 NPC가 먼저 입을 열어 상황을 설명했다.

딱 봐도 전투 및 아이템 습득 등등을 알려 주기 위한 튜토리얼 파트였다. 원작과 동일한 덕에 그리움마저 물씬 들었다.

그때도 그랬는데. 참 좋았지. 2주년 기념 패치 전까지는.

“그래서, 바라는 건 하수도 청소인가?”

“그렇소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인부들을 찾아 줬으면 하오. 물론 먼젓번 보낸 인부들이 지금껏 살아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소. 하지만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 그들의 시신이나, 하다못해 유품이라도 거둬 줬으면 하는 거요.”

인부라. 이건 서브 퀘스트인가?

나는 슬쩍 퀘스트창을 열었다. 혹시나 갱신되었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퀘스트창엔 아직 적혀 있는 게 없었다. 수락한 후에야 퀘스트가 뜨나 보다.

“앞서 악마사냥꾼들을 몇 보내 봤지만 죄다 당해서 오더군. 신전에도 연락을 했지만 시간이 걸린다는 답만 돌아오고. 해서 실력 좋다는 놈을 부른 건데…… 흥, 할 수는 있겠나? 그런 비리비리한 몸으로.”

“어, 어르신!”

“그딴 약한 것들과 나를 비교하지 마라.”

“오만함하곤…….”

오…… 그렇게 보이길 바란 건 맞지만, NPC에게 그런 평가를 받으니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기분이 나쁘다가도 놀랍고, 이 상황이 재밌다가도 현실적인 반응이 돌아오다보니까 괜히 변명하고 싶어지는 거다.

“어르시인…….”

“너는 누구 따까리야?”

하지만 잘 만들어 봤자 NPC는 NPC지.

나는 너무 현실적인 NPC를 두고 하는 컨셉질의 찜찜함을 그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러자 그것을 대신하듯 기분이 좋아졌다.

유저들은 “님 뭐 하심?”이라든가 “와 컨셉 지리시네요.” 따위로 종종 산통을 깨트리곤 했는데, 쟤네들은 그럴 일 없다는 걸 깨달은 까닭이다.

이걸로 더 재밌게 컨셉질할 수 있다.

“크흠, 하면 의뢰를 받으실 건가요, 모험가님?”

“그래.”

“그럼 계약서 작성에 들어가겠습니다.”

사무관 이즈렌이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우다다다 적어 나갔다.

“의뢰 목표는 하수도에 존재하는 모든 악마 제거. 희망 사항으로는 들어간 인부의 유품 회수가 있습니다. 아, 들어간 인부는 몇 명이죠?”

“13명일세.”

“네. 하면 기한은…….”

“최대 기한은 한 달. 그리고 의뢰 시작일은…… 먼 길을 달려온 만큼 여독을 풀 수 있도록 이틀의 여유 시간을 주겠소.”

“네.”

사무관과 중년 NPC 사이의 질답이 이어질수록 퀘스트 내용이 짧게, 구체적으로 요약되어 빠르게 정리되었다. 그냥 퀘스트창에 띄우면 될 걸 굉장히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의뢰였다.

“보상은 40만 갈. 중개비 5%를 떼면 38만 갈이 되겠습니다. 자, 그럼 모험가님. 의뢰를 진행하실 건가요?”

돈 뭐 이렇게 많이 줘? 와중에 중개비를 떼 가는 건 또 뭐고?

나는 사무관 이즈렌의 정리를 보며 팔짱 낀 상태의 손가락을 토독 쳤다. 중개비로 5%나 처먹는 게 괘씸하긴 하지만, 게임의 설정이라면 뭐 어쩔 수 없다. 저거 싫다고 퀘스트를 거절할 수도 없고.

나는 펜을 뺏어 들어 서명란에 서명했다.

“네, 계약 성립되었습니다. 임무 완수 보고는 저희 길드를 통해 해주세요. 길드 건물에 오셔서 저를 찾으시면 됩니다.”

사무관이 웃으며 노인네의 서명도 받아 냈다. 그러자 시야 한구석에 창이 떠올랐다.

「❖ 하수도를 더럽히는 것

∎ 악마 제거 0 / ??

∎ 보너스: 유품 찾기 0 / 13」

과연, 계약을 수락해야만 퀘스트창에 퀘스트가 등록되는 게 맞는 모양이다.

“…상회의 이름으로 여관을 잡아 놨소.”

그때, 사무관에게 회수되는 서류를 보던 중늙은이가 발언했다. 듣던 중 제법 반가운 말이었다.

“이틀치 값만 치뤄 놨으니 그 이상 머물 거라면 네놈 돈으로 해야 할 거야!”

별개로 저 노인네는 왜이리 삐딱해.

“이쪽도 길게 끌고 갈 생각 없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응하면서 살풋 미간을 모았다.

이틀치? 이틀치라…… 그러고 보니 아까 이틀 내로 시작하랬지.

계약서를 작성할 때도 생각했지만 시간제한이 존재하는 튜토리얼은 처음이다. 튜토리얼을 이틀이나 끌고 갈 의지는 없으니까 별로 상관은 없지만.

여러가지로 파격적인 사항을 많이 넣은 것 같다.

“하수도의 위치는, 어디지?”

오버했을 때 어떤 전개가 나오는지 안 궁금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리메이크 판은 게임과 현실의 시간을 3: 1로 잡아 놓았다. 현실의 8시간이 게임 속 하루란 소리다.

즉 이틀이 지나려면 16시간이 흘러야 한다. 그럴 바에야 그냥 튜토리얼 하고 만다. 나는 어서 이 게임의 참맛을 즐기고 싶었다.

“바로 돌입할 것이오?”

“하수도의 벌레 새끼들에게 이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란 소린가?”

경멸하듯 그들을 보았다. 다른 게임과 달리 혼자 연극하는 기분이 덜 들어, 대사가 아주 술술 나왔다.

잠깐 고개를 돌렸던 중년 NPC가 찔끔하며 다시 앞을 보았다.

“…내가 안내해 주겠소.”

나이스으. 그럼 어서 가보자고.

* * *

잠깐 들른 여관은 원작이랑 똑같았다. 저장과 회복 기능이 주였다.

「여관│여관에서 잠을 자면 지금까지의 내용이 저장되며 체력 일부가 회복됩니다.

여관 내에선 체력 회복 속도가 증가합니다.」

그 외 기능도 있긴 했는데, 별로 쓸모 있진 않았다. 물건 보관의 경우 도난의 확률이 있었고 목욕이나 식사는 추가금이 들었으니까.

맡길 아이템도 없고 돈도 없는 입장에서는 아직 신경 쓸 필요 없는 기능이었다.

“여긴가?”

해서 바로 하수도로 갔다. 하수구와 이어진 강에서는 구리구리한 듯 시큼한 듯 복잡한 악취가 났다.

하지만 잡은 컨셉이 있는데 냄새에 패배해서야 쓰나.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는 캐릭터는 어떤 구린 냄새가 나도 코를 막지 않는다.

그런고로 나는 코도 붙잡지 않은 채 평온히 있었다. 옆에서 코를 단단히 틀어막은 상인이 그런 저를 괴물 보듯이 했다.

“과연 괜찮겠소?”

와, NPC가 걱정해 준다.

나는 가슴 따땃해지는 감상과 함께 눈초리를 치켜세웠다.

대충 한 번만 더 왈가왈부하면 네놈을 먼저 안 괜찮게 만들어 주겠다는 눈빛인데…… 물론 표정이 구현될 리도 없고 NPC가 그걸 인식할 리도 없으므로 대답을─.

“커험…… 그럼 이걸 가져가시오.”

─안 해도 되네?

심장이 웅장해지기 직전이 되었다.

설마설마했는데 플레이어도 자유분방한 표정 구현의 대상이고, 심지어 NPC들이 그런 표정을 인식하고 맞춰 대응함을 이제야 확신한 까닭이다.

게임 진짜 미쳤다, 미쳤어. 어떻게 이런 기술력이 튀어나왔지?

하. 표정 연기도 같이 하는 버릇 들여서 다행이다. 크게 표정 망가진 적 없겠지.

나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른 채 인상을 구겨 보며 손을 뻗었다. 상인이 건네는 무언가가 내 손에 낚아채였다. 접힌 종이였다.

“하수도 지도요. 한데 악마들이 들어찬 이후로 길이 일부 변형되고 막혀서…… 완전히 같진 않을 거요.”

나는 종이를 부스럭대며 펼쳤다. 배배 꼬인 길 초반부에는 빨간색 잉크로 이것저것 표기되어 있었다.

어느 길은 막혀 있고, 어느 길에는 악마 둥지가 있었고, 어느 길부터는 뭐뭐가 나온다 등등.

“초입 부분은 다녀간 악마사냥꾼들이 가져온 정보이외다.”

미니맵 기능이 없더니만 이런 식으로 정보를 주는 모양이다. 길치들은 꽤 골머리를 앓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길을 잘 찾는 축인지라 상관없지만.

어쨌거나 있어서 나쁠 건 없다.

나는 종이를 다시 접어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너무 현실 같았던 나머지 깜빡하고 한 행위였는데, 의외로 가능했다.

꼭 인벤토리가 아니어도 보관할 수 있는건가? 진짜 쩐다.

“펜.”

아, 혹시 종이에 이미 표기된 것처럼 나도 뭘 따로 표기할 수 있을까? 보통 게임이라면 시도도 안 해보겠지만, ‘영웅전설’ 리메이크판은 달랐다. 이 게임이라면 왠지 가능할 거란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요구한다면 NPC가 줄 거라는, 정말 막연한 믿음도.

“여기 있소.”

헐, 미친 이게 진짜 되네.

나는 퀘스트 아이템이나 보상이 아니고서야 물건을 주지 않는 NPC가, 말 한 번에 순순히 펜을 내미는 광경을 보았다. 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몇 번째 말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심해진주는 신이다.

“그럼, 부탁하오.”

펜을 코트 안주머니에 고정하며 상인을 힐끗 보았다.

“대가를 받기로 한 이상 실패는 없다.”

나는 그 말을 남기고, 하수도 입구─정확히는 연결된 강을─향해 미끄러져 내려갔다. 물론 오수에 빠질 의향은 없으므로 내려선 건 하수구 옆에 난 길이다.

철컹

미리 열어 둔 철창문이 열리고, 본격적으로 하수도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클 필요가 있나 싶은 크기의 하수관이었다.

「타타라: 지하 하수도」

게임이니까 이해하는 거지, 원래였으면 엄청 조그맣지 않을까.

나는 두웅, 하는 종소리를 들으며 그따위 잡념을 떠올렸다. 손은 가방을 뒤적여 무언갈 꺼내는 중이다.

「등불│어두운 공간을 밝혀 길을 인도하는 빛. 허리춤에 장비하면 양손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까 인벤토리를 점검할 때 확인해 둔 아이템이다.

설명대로 허리춤에 등불을 내걸자 어두운 하수도가 밝아졌다. 대부분의 광원이 그렇듯이, 약간의 뜨듯함이 느껴졌다. 핫팩을 끼고 있는 것 같아서 나쁘지 않았다.

코트에 가려져서 빛이 애매하게 비친다는 부작용만 제외하면.

“바깥에 걸어야 하나.”

결국 나는 등불을 코트에 내걸었다. 그래도 거는 방향에 따라 나머지 방향이 덜 비친다는 건 여전했다. 전보단 나았지만.

찌익.

찍.

지도를 짬짬히 확인하며 안으로 진입하니, 슬슬 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팔뚝의 반만 한 크기의 놈들은, 오물이 묻어 더러운 걸 감안해도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예컨대 피부가 썩어 살점이 드러난 부분이라거나, 그를 넘어 뼈와 내장이 달랑거린다든가. 자그만 몸의 자그만 눈인데도 시뻘건 게 너무 잘 보인다든가.

푸욱!

전부 악마화되서 그런 거다.

나는 심드렁히 검을 내질렀다. 원하던 대로 투헨더가 쥐를 꿰뚫다 못해 반으로 뚝 잘랐다.

문제가 있다면 빌어먹을 현실성 때문에 투헨더가 쥐를 넘어 바닥을 긁고 벽까지 살짝 쳤다는 점일까.

깡!

선명한 소리에 불안감이 확 들었다. 이거 혹시 날 나가는 거 아니야?

나는 양단된 시체를 발로 밀어내며 트루 투헨더를 살폈다. 등불 빛을 받아 새빨간 광이 흐르는 검날은 보기만 해도 베일 것 같다.

「파괴의 트루 투헨더│길고 곧은 도신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부수고 망가트리는 대검. 적대하는 모든 것에게 공포를 선사한다.」

무기 정보를 살펴보니 일반적인 설명 외에도 상세 수치가 기록되어 있다. 공격력, 내구도, 예기 따위였다.

공격력이야 그렇다치더라도 내구도와 예기는 아마 100이 시작이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그중 예기가 99로 떨어져 있다.

역시나였다. 이런 류의 게임은 벽만 쳐도 내구도나 예기가 떨어졌다.

“공간이 너무 협소한데…….”

양손검을 계속 쓰자니 공간이 너무 좁아서 내구도 다 깎아 먹게 생겼다.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투헨더를 등에 걸고 가방을 뒤졌다. 예구로 받은 파괴의 트루 투헨더 외에도, 시작 무기로 받는 무기가 하나 더 있던 까닭이다.

「롱소드│가장 널리 쓰이는 대표적인 검. 평균에 맞춰 제작된 검신과 손잡이, 가드와 폼멜의 밸런스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대응할 수 있도록 한다.」

나는 롱소드의 검집을 허리춤에 달고 검을 뱅글뱅글 돌려 봤다. 전투 보정은 잘되고 있는지, 검이 손에서 잘도 돌아갔다.

서걱!

쥐도 잘 베였다. 초반몹들답게 시작 무기로도 한 방컷이 되는 듯했다. 시작이 좋다.

쮜직!

돈이나 아이템을 떨구지 않는 점은 다소 열받지만…… 뭐 초반 몹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나중에 가면 주겠지. 퀘스트 보상도 돈 엄청 줬고.

끼이이이익

안으로 꾸역꾸역 진입하니 슬슬 진짜 악마들이 내는 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슬쩍 고개를 들이밀거나 기습을 준비하는 녀석도 있었다.

「고블린│무리를 이룬 채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떠돌이 악마. 작고 약한 이 악마들은 굉장히 어리석지만, 방심해서 좋을 건 없다. 」

목격한 순간 떠오르는 창과 함께, 고블린들은 하수도 벽과 천장을 기며 다가왔다.

PC로 플레이할 때도 좀 징그럽다는 인상이었는데 VR인 지금이라고 덜하진 않았다.

“더러운 악마 새끼들이…….”

어찌 됐건 몹을 상대할 때도 컨셉에 충실해야 제대로 된 컨셉충이다.

나는 단숨에 과몰입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곤 롱소드의 자루를 단단히 붙잡은 채 앞으로 뛰쳐나갔다.

많고 많은 고블린 중 한 놈을 시선 중간에 넣자, 그 고블린 몸에 빨간색으로 표적마크가 떠올랐다.

팔, 다리, 몸통, 머리. 그중 내가 노린 건 몸통이었다.

「부위와 타격│모든 적에게는 부위가 있으며, 부위마다 받는 피해가 다릅니다. 일부 적은 부위에 따라 강도가 달라, 특정 부위를 피해 공격해야 될 수도 있습니다.

한 부위에 데미지를 한계까지 축적시킬 경우 《부위 파괴》를 할 수 있습니다.

유효한 부위를 찾아 공격하세요.」

짤막하게 시스템 설명이 떠올랐다. 시간을 멈춰 주거나 하지 않아서 읽을 시간은 없었다. 게임 경험 어디 안 가는지라 힐끗 보기만 해도 내용이 파악되어 별 필요 없긴 했지만.

서걱!

창이 삭제됨과 동시에 칼날이 고블린의 몸통을 반으로 갈랐다. 쥐 때도 생각했지만, 리메이크 판이 예상보다 수위를 더 높게 잡았다.

동시에 난이도가 꽤 낮다는 느낌도 들었다. 튜토리얼이라곤 하지만 한 방에 부위 파괴라니.

잡몹이라서 그런 거라고 다독여 보긴 하지만, 어딘가 찝찝함이 남는다. 난이도가 너무 높은 것도 싫지만 너무 낮아도 재미가 없는데.

“전부 죽어라, 쓰레기들.”

가부간, 머리로는 차갑게 사고하면서도 얼굴과 입으로는 경멸을 표했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컨셉질을 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었다.

촤악!

두 번째로는 천장에서 뛰어내리던 고블린의 머리를 꿰뚫었다. 발로 녀석의 몸통을 차 검을 뽑아내면 이제 마지막 고블린을 해치울 수 있다.

벽에서 튀어오른 녀석을 스텝 한 번으로 피한 후 바닥에 착지한 몸뚱이를 검으로 찔렀다. 등골을 찌른 후 발로 몸뚱이를 밟고, 다시 찌른다.

현실성인지 뭔지 HP표기를 안 해주는 탓에 혹시 몰라 행한 추가타였다. 바르작거리며 몸을 떨던 고블린이 결국 바닥에 엎어졌다.

「LEVEL UP!」

좋아, 실력 안 죽었고.

한동안 작품을 마무리하느라 게임을 끊었던걸 고려하면, 이 정도는 준수한 실력이라 본다.

나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녀석들의 시체를 발로 치웠다. 레벨업 창이 눈앞을 가리다가 금세 뿅 사라졌다.

“스킬창.”

‘영웅전설’은 원작이든 리메이크 판이든 레벨이 오르면 자동으로 스텟이 올라가는 시스템이라, 스텟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오직 확인해야 할 건 스킬이었다.

“공격, 방어, 생활…….”

온라인 게임 출신이라 그런가, 스킬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만렙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킬 다 찍으려면 고생 깨나 할 성싶다.

「근접체술│전사의 기본 소양. 적의 공격에 일정 확률로 대응할 수 있다.

효과: 전투 보정」

나는 고민하다가 방어스킬을 우선했다. 공격스킬이 죄다 액티브형인 것도 있고, 아직까진 평타 일격으로도 몹이 잡히는 까닭이다.

더구나 이건 화려한 스킬이 주가 되는 게임이 아니라, 기본 움직임의 비중이 더 큰 게임이었다. 적어도 회사는 그렇게 발표했다.

그러니 지금도, 나중에도 활용이 가능한 방어스킬이 낫다.

그렇게 스킬 포인트를 적당히 분배하고, 나는 가야 할 길로 고개를 돌렸다. 고블린 잡을 땐 몰랐던 갈림길이 보였다.

주섬주섬 지도를 꺼내 들었다. 왼손으로 검을 다뤘기에, 꺼낸 손은 당연히 오른손이 되었다. 철갑이 둘린 손이 어색하게 종이를 들었다.

왼쪽으로 가면 막힌 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정상 루트인가.

나는 어느 쪽으로 갈지 금세 판단을 내렸다.

이럴 땐 무조건 왼쪽이다! 어떤 아이템이 있을지 모르는데 진행부터 하는 건 어림도 없지!

죽어도 아이템은 다 먹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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