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9화. 자해공갈
노인은 손을 휘휘 흔들더니 고개를 숙이고 발아래 길만 보면서 한 걸음씩 주차장 측면 출구로 향했다.
그를 따라 몸을 틀어 호텔 후문 쪽을 돌아본 용여홍, 백새벽은 전에 본 적 있는, 정수리가 약간 벗겨진 중년의 호텔 지배인이 그곳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텔 지배인의 얼굴에는 난감한 듯 일그러진 표정이 걸려 있었다.
바로 그때, 느릿하게 밖으로 향하던 노인이 한번 더 외쳤다.
“알루미늄 냄비 찾아 쓰는 거 잊지 마!”
호텔 지배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백새벽, 용여홍 앞으로 빠르게 다가오더니 염려 가득한 눈으로 이야기했다.
“저 사람 말은 듣지 마십시오. 저 사람 머리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본인 관자놀이까지 가리켜가며 설명을 곁들였다.
백새벽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의혹을 드러냈다.
“저 사람 대체 누굽니까? 좀 이상한 느낌이 들던데요?”
‘팀장님한테 아주 잘 배웠네, 아니면 회사에 들어오기 전부터도 이렇게 연기를 잘했나?’
지금 용여홍의 관심은 다른 데에 쏠려 있었다.
이내 호텔 지배인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저 사람은 우리 구세군 창립 시기에 가입해 여태까지 살아온 노전사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대규모의 전쟁을 겪고, 죽고 다친 사람들을 봐왔다면 전쟁 트라우마 증후군이었나? 아무튼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혼란의 시대와 신력 초기에 그걸 중시하는 이가 어딨었겠습니까. 그때는 그저 목숨만 붙어있으면 다행이었는데요.
이런 전쟁이 계속 거듭되면서 저 사람은 천천히 거칠어지고, 난폭해졌습니다. 주의력도 떨어졌고요. 저 사람도, 저 사람들 전우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더러는 폭음을 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구세군 자원 중 상당 부분이 저 사람들한테 들어가고 있거든요.
그 정도에 그쳤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겁니다. 하지만 저 사람처럼 외상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은 퇴역한 뒤부터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의심증이 더 심해졌어요. 그들은 자신들을 해하려 하는 이가 있다고, 일선의 위원들과 처장들이 이상을 잊고 타락했다고 믿었죠.
지금이 무슨 시대인지도, 전과는 이미 문제가 달라졌다는 것도 모르고요. 어떻게 살아남느냐에서 어떻게 모두의 적극성을 동원해 더 나은 발전을 해야 하느냐를 고민해야 하는 때가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후 저 사람들은 정신병에 걸린 것처럼 비밀 통제에 반하는 조직을 설립하더니 모두가 냄비를 써 배후 세력의 뇌 통제를 피해야 한다고 떠들어댔습니다. 이, 이게 정신병에 걸린 자들이 아니고서야 할 수 있는 짓입니까?”
용여홍은 외상 증후군이 아니라 외상 장애가 옳은 표현이라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중년의 호텔 지배인이 그런 단어를 알고 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훌륭했다. 이를 통해 구세군이 일찍부터 일반 교육에 힘써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 백새벽의 머릿속에 번뜩 의문이 떠올랐다.
‘일개 호텔 지배인이 어째서 전과는 이미 문제가 달라졌다는 걸, 어떻게 살아남느냐에서 어떻게 모두의 적극성을 동원해 더 나은 발전을 해야 하느냐를 고민해야 하는 때가 됐다는 걸 알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녀는 생각과는 전혀 관련 없는 질문을 던졌다.
“지배인님, 저 사람은 어떻게 호텔 주차장까지 올 수 있었던 건가요?”
호텔 지배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사람과 전우들은 부근의 요양원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저들 같은 베테랑이 호텔에 강제로 들어오려 한다면 저희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저 사람은 원래 길을 지나다니던 청년들을 가로막고 뇌 통제와 타락 등에 대해 떠들어대길 좋아했습니다. 그러다 누구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이제는 우리 호텔에 묵는 외부인들로 목표를 바꾼 거죠.
수시로 이곳에 들어와 실수로 뭔가에 부딪힌 양 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누군가 와서 부축해주면, 그 기회를 틈 타 상대에게 뇌 통제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거예요.”
‘아아…….’
용여홍은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그제야 그는 자신과 백새벽이 정말로 자해 공갈에 당했음을 깨달았다.
노인은 일부러 지프에 부딪히고 누군가 와서 부축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친 데도 없는데 줄곧 주저앉아있었던 이유는 지나치게 일찍 일어났다가는 아무도 낚지 못하기 때문인 듯했다.
‘어쩐지, 작은 흰둥이가 묻는 말에 술술 잘도 답하더라니. 게다가 알아서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했지.’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너무 바보 같고 순진했던 것 같았다.
백새벽 역시 몇 초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미간을 살짝 구겼다.
“무역하러 온 상인과 입경한 유적 사냥꾼들이 정말 부축하러 와주나요?”
다년간 황야 유랑자로 살아온 그녀는 그들에게 남을 도우려는 착한 마음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오수혁 같은 부류는 실제로 매우 작은 편이었다.
그 말에 호텔 지배인이 웃었다.
“구세군의 일원이 되기 위해 자신의 선량함을 내보이려 하는 사람이 아주 많으니까요. 하하, 좋은 일을 하다 보면 거주 연한이 단축될 수도 있거든요. 물자 총괄 위원회에서도 이를 격려하고 있고요.”
‘그렇구나.’
용여홍은 꽤 좋은 정책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할 이야기는 없었다. 그와 백새벽은 심강태라는 이름을 가진 호텔 지배인과 작별한 뒤 정상적인 통로로 3층 방으로 돌아갔다.
* * *
장목화, 성건우가 돌아오자 백새벽은 먼저 그 냄비를 쓴 노인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듣던 성건우는 갑자기 용여홍을 쳐다보았다.
“네가 알루미늄 냄비를 쓰고 한번 실험해보는 게 어때? 내가 너를 통제할 수 있는지 없는지 보는 거야.”
“됐어.”
용여홍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안 될 일이야. 알루미늄 냄비를 온몸에 두르고 용접해서 단단히 봉하지 않는 이상, 전자파 차단 효과는 일어나지 않아.”
게네바는 과학적인 각도에서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래도 한번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장목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 역시 각성자 능력이 전자파를 캐리어로 이용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용여홍은 다시금 약간 긴장하고 말았다.
그 사이 백새벽은 호텔 지배인의 오만한 말도 전했다.
그 얘기를 듣고선 장목화는 그저 웃으며 대꾸했다.
“이해도 돼. 그 노인은 수시로 호텔에 그 짓을 하러 왔으니 분명 그 사람한테도 뇌 통제, 타락 등에 관한 이야기를 했겠지.
호텔 지배인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면 구세군의 이익을 어느 정도 팔아넘길 수 있는 사람이니 분명 그 이야기를 듣고 죄책감을 느꼈을 거야.
아무 일도 없을 때는 그런 질책 앞에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수시로 생각하고 있었을걸?
그런 상황에선 라디오를 듣고, 상부에서 내려온 문서를 읽고, 주위 사람들과 얘기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조리 정연한 설명이 만들어지기 마련이야.”
이제 시간이 꽤 된 것을 확인하고 장목화가 다 함께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으려던 그때였다.
갑자기 방 안과 복도, 그리고 바깥의 거리 높은 곳에 달린 스피커가 울리기 시작했다. 모두 다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스피커에선 음성 변조로 만들어진 듯한 남성의 음성이 전방으로 퍼졌다.
- 난 게임마니아다. 이제부터 너희와 게임을 하나 해보려고. 난 이미 우베이 모처에 핵탄두 하나를 숨겼다. 사흘 내로 못 찾아내면 터질 거야. 다들 힘써봐. 우베이가 하루아침에 화염과 연기 속에 폐허가 되지 않길 바란다면.
남성의 목소리는 그 몇 마디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치직-
스피커에선 남은 여운만 이어질 뿐이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있던 용여홍은 방송이 끝나자마자 벌떡 기립했다.
상황의 발전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핵탄두를 획득한 그 사람은 우베이를 날려버리고 10만여 명을 지옥으로 보내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방송을 하이잭해 이 상황을 널리 떠벌리기까지 했다. 우베이 시민들의 공황과 절망을 즐기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미친 자였다!
소형화된 수소 폭탄이 그런 사람의 손에 들어가다니, 이보다 끔찍한 재난도 없을 것 같았다.
“팀장님, 어쩌죠?”
용여홍이 장목화를 바라보았다.
현재 그는 과도하게 긴장하지도,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사고 능력도 멀쩡했다. 오랜 경험 덕에 이제는 이런 상황도 침착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가 장목화를 찾은 건 그녀가 방금 언급한, 우베이 물자 위원회 황 위원이 했다는 말 때문이었다.
황 위원은 구조팀에게 내일이나 모레 중 제8 연구원에 관한 정보를 줄 것이고, 그 후 상세한 검사만 받으면 우베이를 떠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이 순간 구조팀은 구세군과 직접 반목하고 본인들 능력만으로 우베이를 억지로 벗어날 것이 아닌 이상 이 문제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장목화는 곧장 답하는 대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급하게 굴지 말자. 내 생각에 이 일은 너무 갑작스럽고 이상해 보여.”
“맞아요, 맞아요.”
성건우가 동조했다.
그리고 백새벽은 장목화의 생각을 짐작해보려 애썼다.
“게임이 시작된 시간이 너무 이상하죠?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애매한 시간이에요. 정말로 군대가 우베이에 들어와 계엄령을 내리고 누구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도록 할 거였다면 어젯밤 계엄이 떨어지자마자 게임 시작을 선포했어도 됐어요. 이런 일은 오래 끌수록 실패할 확률만 높아지잖아요.”
성실한 성건우가 말했다.
“몇 분 전에야 우베이 전체 방송 시스템을 단기적으로 통제할 기회를 잡았는지도 모르지? 이전까지는 선포하고 싶었어도 그럴 수 없었던 거야.”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며 선포하기에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위험이 컸다. 세상에 그런 걸 좋아하는 것도 반 지성교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 말에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는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아. 정말 우베이를 폭발시켜 욕망을 만족시키는 게 목표였다면 몰래 했으면 되는데. 그게 더 성공률이 높아.”
성건우는 바로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였다.
“아니죠, 아니죠. 그냥 단순한 미친놈일 수도 있잖아요. 폭발 전 인간들의 추악함과 절망한 모습을 즐기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요.”
처음에 장목화는 그런 미친놈이면 본인 행동을 통제하지도 못하고, 그런 계획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미친놈은 극소수라 답하려 했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니 애쉬랜드에는 각성자라는 존재도 있었다.
정신 건강을 대가로 바친 각성자에게는 능력도, 행동력도 있었다. 다크 버전 성건우가 바로 그 예시였다.
주위를 둘러보며 잠시 뜸을 들이던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내 말은, 방송으로 게임 시작을 알려서 패닉 상태가 확산되면 우베이 물자 총괄 위원회에선 긴급 동원령을 내려 주민들과 물자를 차례로 우베이에서 내보낼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사흘이면 이 도시를 텅 비우기도 충분해. 때가 되면 설령 수소 폭탄이 폭발하더라도 건물만 날려버리는 데 그칠 텐데, 과연 그 미친놈이 거기서 만족할까?”
용여홍도 점진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성실한 성건우는 논리에 근거해 논쟁을 이어갔다.
“그 미친놈이 모든 사람을 터뜨려 죽이고 싶은 건 아닐 수도 있어요. 단순히 한 차례 혼란을, 여러 사람이 당황해하는 걸 보고 싶어 할 수도 있죠.”
진짜 환자인 그의 말에 팀원들 모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 방면에서는 성건우가 바로 전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