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화. 질문
반고 바이오 직원 장목화에게 핵탄두는 그리 낯선 물건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형 세력 몇 곳에서 구세계가 남긴 핵탄두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기술 역시 장악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핵탄두 사용 기록이 있는 듯한 혼란의 시대를 제외하면 신력 이래 구세계 사람이 제작한 진정한 의미의 대규모 살상 무기는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저 위협 수단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일찍이 반고 바이오 정보 요원들은 시간이 흐르며 구세계에서 남은 핵탄두가 점차 그 효력을 잃고 사용할 수 없게 된 건 아닐지 의심했었다. 퍼스트 시티든, 구세군이든 그걸 다시 만들어낼 능력은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성영희가 핵탄두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그것이 지금 이 도시에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알았는데, 장목화의 충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핵탄두?”
용여홍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가 아는 한, 그 무기는 하늘을 파괴하고 땅을 멸할 수 있었다. 구세계에서도 그것으로 폐허가 된 도시가 여럿 있다고 했었다.
또한 구세계 파괴에 관한 갖가지 소문 중 핵탄두는 무심병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자주 언급되는 악몽의 원천이었다.
누구라도 그 핵탄두를 폭발시킨다면 온 우베이가 그 여파에 휩쓸릴지 몰랐다. 그럼 그 안에 자리한 구조팀도 높은 확률로 무사하긴 힘들 것이었다.
백새벽도 내뱉듯 물었다.
“폭발 당량이 어떻게 되는데?”
그녀는 폭탄을 이야기할 때 당량을 확인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방사능을 생성하거나 화학 오염을 초래하는 것들은 예외였다.
“우라늄을 이용해서 만든 거야? 아니면 플루토늄? 그것도 아니면, 어, 수소의 동위원소?”
반면 성건우는 기억 저편의 원소 이름까지 떠올리며 호기심을 보였다.
성영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나도 잘 몰라. 그런 소문을 들은 것뿐이야. 난 지금 주의를 주려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호텔에만 있는 것에 싫증 느끼지 말라고.”
“더 이상 싫증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아. 도망치고 싶을 뿐이지.”
성건우가 성실하게 답했다.
‘맞아! 맞아!’
용여홍은 속으로 미친 듯이 외쳤다. 당장이라도 우베이를 떠나 핵탄두의 위력 범위 밖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이내 성영희가 위로를 건넸다.
“황야에 떠도는 소문들을 마냥 믿으면 안 돼. 핵탄두 위력은 그렇게까지 크진 않아. 단순히 하나만으론 도시 하나가 파멸되진 않는다고. 게다가 훔칠 수 있는 핵탄두라면 분명 소형 폭탄이겠지. 당량도 아마 보통 핵탄두의 몇 분의 1밖에 안 될 거야.”
‘하지만 지금의 우베이를 구세계 대도시랑 비교할 순 없지. 규모로 보면 10분의 1 정도 될까 말까 한데.’
장목화는 속으로 중얼거릴 뿐, 실제로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우베이는 퍼스트 시티처럼 상대적으로 잘 보존된 폐허 도시 위에 새로 지어진 도시였다. 하지만 이곳과 퍼스트 시티의 인구 사이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현재 사용되는 부분도 폐허에서 위에린 강에 인접한 구역이었다.
침묵에 빠진 구조팀원들을 보고 성영희가 덧붙였다.
“오늘 우리 우베이 물자 총괄 위원회의 한 위원을 만날 건데, 더 엄격한 검사를 받고 싶은 거면 너희를 데리고 미리 도시를 떠나줄 수도 있어. 걱정하지 마. 군용 외골격 장치랑 인공지능 갑옷에 관해선 이미 상부에 보고했으니 문제는 없을 거야.”
‘그래! 좋아!’
용여홍이 서둘러 답하려는데, 돌연 뒤에서 공명정대한 대답이 들려왔다.
“안 되지! 어떻게 싸움터에 이르러 도망갈 수 있겠어? 여기엔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는데!”
성건우의 답에, 성영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나쁜 말도 좋은 말도 네가 다 해버리면 어쩌라는 거야?’
뒤이어 장목화가 얼른 목을 가다듬었다.
“너희 우베이 물자 총괄 위원회 위원이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해?”
성영희는 주제가 본론으로 돌아온 것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응, 그 위원은 군사 물자 통계랑 분배를 관장하고 있어. 너희가 불모지 13호 유적에서 겪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대.”
용여홍은 순간 의아해졌다.
‘왜지? 우리가 그 사람한테 군사 물자를 바칠 것도 아닌데.’
그러나 구세계를 꽤 깊이 이해하는 장목화는 그 이유가 짐작되었다. ‘군사’와 ‘통계’가 함께 등장한다면 그는 정보기관을 대표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이름이야 하나의 코드에 불과한 법이었다.
“문제없지.”
성건우는 모두 가족 같은 사이인데 거리낄 필요 같은 건 없다는 듯 장목화를 대신해 솔선해서 답했다.
장목화는 언제나처럼 그를 팩 노려본 뒤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가는 거야?”
성영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군용 외골격 장치랑 인공지능 갑옷은 못 가져가. 음, 2명은 여기 남아 그걸 지키는 게 낫겠다. 우리 구세군 치안은 꽤 좋은 편이고 도난 사건도 별로 없는데 이 호텔에 묵는 대부분이 외지에서 온 유적 사냥꾼이니까. 너희도 그들 행동 스타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거 아냐.”
대부분의 유적 사냥꾼은 황야에서는 강도를, 비교적 큰 거점 안에서는 좀도둑을 겸하곤 했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는 백새벽, 용여홍, 게네바에게 말했다.
“너희는 여기 남아서 물자를 좀 지켜줘. 나랑 야는 성 대장 따라서 그 위원을 만나고 올게.”
솔직한 마음으론 각성자를 각각 한쪽에 나눠두고 싶었다. 그러나 성건우가 잃어버린 핵탄두를 찾아 우베이 시민들을 구하겠다고 발작할 경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조팀 세 팀원은 곧장 알겠다고 대답했다.
* * *
장목화, 성건우는 성영희의 녹색 산악자동차에 올랐다.
방향을 이리저리 틀며 나아갔을 무렵, 전에 방문했던 우베이 관리 위원회 빌딩이 나타났다.
하지만 성영희는 더 우회해 그 옆 거리의 한적한 정원에 이르렀다.
정원 깊은 곳에는 3층짜리 건물이 한 채 있었다. 그리고 그 문에는 ‘우베이 물자 총괄 위원회’라고 쓰인 현판이 세로로 걸려 있었다.
녹색 산악자동차는 문을 지키는 당직 병사들의 검문을 받고, 무기를 제출하고, 등록까지 한 후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먼저 정원 한쪽에 주차한 성영희가 장목화, 성건우를 데리고 서쪽 동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검은 구세군 제복 차림의 한 청년과 몇 마디 한담이 이어졌다.
돌아서서 복도 모퉁이 너머로 사라진 청년은 몇 분 뒤에 다시 돌아왔다.
“황 위원님은 접견실에 계십니다. 따라오시죠.”
장목화와 성건우는 성영희를 따라 공개돼 있거나 공개돼 있지 않은 3개 초소를 지나친 끝에, 문이 살짝 닫혀 있는 접견실에 도착했다.
* * *
접견실 상석에는 한 노인이 앉아있었다. 그 역시 구세군의 검은색 제복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견장은 없었다.
성영희는 공손하게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으며 예를 취했다.
“전 인류를 위해!”
성건우도 당연히 그녀를 따라 하고 싶었지만, 장목화의 왼손이 더 빨랐다. 성건우의 오른손은 장목화의 손에 꼭 붙잡혀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성영희가 말을 이었다.
“황 위원님, 서시월, 장우병씨 왔습니다.”
키가 170센티미터에 못 미치는 황 위원은 기세가 당당하고 강력했다.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심연처럼 깊었고 주위를 둘러볼 때면 감히 말도 붙이기 어려웠다.
척 봐도 피와 백골이 난무한 세월을 숱하게 경험한 사람으로 보였다.
나름대로 백발을 깔끔하게 빗은 남자는 그 어떤 것에도 지탱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성영희와 같은 자세로 인사에 호응했다.
이내 황 위원이 자신의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앉게.”
성영희는 장목화와 성건우에게 앉으라고 손짓한 뒤 접견실을 떠났다.
자리에 다시 앉은 황 위원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눈빛이 형형했다.
남자는 소리 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긴장할 것 없어. 당시 우리는 모두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어떻게 현지인과 외지인을 구분하겠나?”
그리고 주위를 슥 한 번 둘러보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성격이 급해져서 말이야. 굳이 쓸데없는 말은 말고 본론부터 말하지. 그 비밀 실험실에 신세계와 교차점이 있다는 건 어떻게 발견했나? 정상인은 물론, 각성자도 대부분 그걸 감지도 못 하는데.”
장목화는 고개를 돌려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물은 건 전에 그녀가 한 진술 속 허점에 속했다. 물론 그 허점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성건우는 묵묵히 전술 배낭을 풀더니 그 안에 평범해 보이는 은제 천사 펜던트 목걸이를 꺼냈다.
“이걸 가지고 있거든요.”
대답은 장목화가 먼저 앞섰다. 그것도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이야기였다.
황 위원은 생명 천사 목걸이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성건우가 친절하게 물었다.
“손에 들고 검사해보시겠습니까?”
황 위원은 그를 한 번 훑어본 뒤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답했다.
“그러지.”
이것이 함정일 수도 있다는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는 눈치였다.
성건우는 양손으로 소파를 잡고 일어난 뒤, 한쪽 발로 콩콩 뛰어 황 위원 앞으로 다가갔다.
깨금발이었다.
그러나 식견이 넓은 황 위원은 그의 모습에 아연실색하는 대신 잠시 고민하다가 생명 천사 목걸이를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지 중 하나에 마비가 오는 게 이것의 대가인가?”
정말로 생명 천사 목걸이를 받아들고 살펴보는 황 위원을 보며, 장목화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이 사람도 각성자네. 안 그럼 도구를 쥔 상황에서 대가만 경험할 뿐 뭘 발견하지는 못할 테니까.’
몇 초 후, 황 위원은 여전히 앞에 한쪽 발로 서 있는 성건우에게 생명 천사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 아니었군. 그 도구의 기운은 확실히 특이해. 신세계의 교차점을 찾는 데 도움을 주겠어.”
그는 그 도구를 어디서 찾았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구세군에 그 정도의 기품은 아직 남아있는 듯했다.
하지만 구조팀 내부 첩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성건우는 장목화를 등지고 있는 이 기회를 틈타 자발적으로 고백했다.
“제8 연구원의 어느 특파원에게서 얻은 겁니다.”
황 위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8 연구원의 특파원?”
그의 목소리에선 충격이 조금 묻어나왔다.
“그렇습니다.”
성건우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뒤쪽 소파에 앉은 장목화는 이미 굳어있었다. 더는 성건우를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리 중요한 정보도 아니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황 위원은 곰곰이 고민하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오레이가 남긴 건 구세계 파괴 원인, 그리고 신세계의 특정 비밀과 연루돼 있으니 제8 연구원의 특파원을 만난 건 아주 정상적인 흐름이야. 그의 저지를 피했을 뿐만 아니라 도구까지 하나 빼앗았다는 건 자네들 실력이 무척 강하다는 뜻이겠지.”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한참 약했는데요.”
성건우가 바른말을 했다.
제8 연구원의 특파원을 잡아 생명 천사 목걸이를 손에 넣었을 당시만 해도 성건우는 심령의 복도에 진입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장목화도 아직 각성자가 아니었을뿐더러 인공지능 갑옷 두 대도 없었다.
사실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칸나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당시 그녀는 아비아를 보호하는 가상 세계의 주인을 묶어두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던지라 그녀의 도움은 셈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