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641화 (641/649)

641화. 구세군의 어음

식사는 게네바를 제외한 모든 인간에게 필수였다.

장목화도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고 뻗대기를 좋아하는, 속 좁은 사람이 아니라 솔선해서 팀원들과 차에서 내린 뒤 땔감을 찾았다.

태양열 충전기에 축적된 에너지와 배터리는 최대한 아끼는 게 좋았다.

이를 보고 성영희가 손을 휘휘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여기 불 같이 쓰면 되지.”

그녀의 부하들은 이미 불을 피운 상태였다.

“좋아.”

게으름을 피울 수 있다면 굳이 그걸 거절할 사람은 없었다.

늘 성실한 장목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쪽으로 걸어가 주위를 둘러본 후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부하들이 엄청 적극적이네!”

그들은 성영희가 뭐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할 일을 척척 해냈다.

바닥에 책상다리하고 앉은 성영희가 웃으며 답했다.

“얘네들한테는 이게 복지거든. 변경 거점에서는 매해 정해진 휴가 기간에만 집에 돌아갈 수 있어. 그 외에 나머지 시간은 그곳에 박혀 있어야 하고, 멋대로 나오는 것도 불가능해. 임무 수행을 이유로 우베이에 한번 다녀오는 건 우리 모두가 바라는 거야.

내가 오늘 오전에 함께 갈 사람을 고를 때 다들 얼마나 적극적으로 자원하고 나섰는지 알아? 이것도 작년에 퍼스트 시티의 습격을 받았을 때 큰 공로를 세운 사람 순서대로 고른 거야.”

점심 식사를 준비 중인 두 남자와 여자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성영희의 말에 동조했다.

그 말을 듣고, 성건우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작년에 있었다던 습격은 꽤 심각했나 봐?”

순간 170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키에 얽은 얼굴을 가진 한 남자 구세군이 겁먹은 표정을 드러냈다.

“맞아. 성 대장님도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평안이가 대장님을 구하려고 총을 세 발이나 맞아가며 사력을 다한 덕에 무사했지. 우린 걔가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는데, 젊고 건강한 녀석이라 다행히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왔어.”

‘그렇구나.’

장목화는 성영희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다 지난 일인데, 뭐.”

성영희가 웃으며 부하들을 달래곤, 장목화를 쳐다보았다.

“퍼스트 시티 지폐는 얼마나 가지고 있어?”

“얼마 없어. 대부분은 물자로 교환해 버렸거든.”

장목화가 솔직하게 답하며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성영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우리 구세군에서는 퍼스트 시티 화폐를 인정하지 않아. 남은 지폐는 지하 암시장에 가서 각종 어음으로 바꾸는 수밖에 없는데, 그 환산 폭이 상당히 크거든.”

구세군의 일상적인 거래에서는 주로 어음이 이용되었다. 지폐는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었다.

“우리도 그 부분을 고려했어.”

장목화의 성격상 아무런 예습도 하지 않고 구세군의 세력 범위에 냅다 뛰어들었을 리는 없었다.

구조팀과 성영희 팀이 점심 식사를 거의 마쳐 갈 즈음, 동쪽에서 웬 군용 지프 한 대가 요란한 소리로 달려왔다.

그러다 성영희를 본 건지 군용 지프는 즉시 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췄다.

뒤이어 보조석에서 내린 검은 제복 차림의 남자는 탁 트인 지대를 우회해 빠르게 걸어오며 큰소리로 외쳤다.

“성 대장, 전할 말이 있어!”

남자는 또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제야 구조팀을 발견했다.

“이 사람들은?”

“내 친구들이야.”

성영희가 간단히 소개했다.

남자도 더 이상의 질문을 늘어놓는 대신 문서 한 건을 건넸다.

“성 대장, 내부자 두 명이 군사 물자를 훔쳐 달아났어. 퍼스트 시티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으니 너희 거점에서 특별히 신경 써야 할 거야.”

순간 표정이 엄숙해진 성영희는 문서를 펼쳐 한동안 내용을 확인한 뒤 다시 문서를 돌려주었다.

“난 우베이로 가야 해. 미안하지만 가던 길을 마저 가서 지금 거점을 지키는 전사들한테 이 상황을 알려줘.”

“그래.”

문서를 받아든 남자는 가볍게 뛰어 군용 지프로 돌아갔다.

구조팀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못 본 척, 못 들은 척, 식사에만 집중했다.

* * *

이윽고 다시 여정에 오른 후에야 장목화는 전방의 녹색 산악자동차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도난당한 군사 물자, 굉장히 중요한 것 같은데⋯⋯.”

용여홍은 이번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역시 간단한 사건은 아님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두 내부자가 그저 평범한 군사 물자를 훔친 거라면 구세군도 이를 그렇게까지 중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각 변경 거점과 중요 초소에 전보를 보내 범인들의 생김새, 신장, 옷차림, 찾아야 하는 물자만 알리기만 해도 충분했다.

또 이 길을 지나는 사람에게 사진이 붙은 수배지를 나눠줄 수도 있었다. 지금처럼 각기 다른 변경과 중요 초소에 전문 인력까지 파견하면서 일일이 통지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대체 뭘까?”

운전 중인 백새벽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성건우도 흥미진진하다는 듯 추측에 나섰다.

“군용 외골격 장치? 구세군에서 발굴한, 혹은 직접 개발한 비밀 무기?”

게네바가 눈으로 붉은빛을 번득였다.

“군사 물자라는 건 그저 그들을 찾아내기 위한 구실이자 허울일 가능성도 있어. 그들이 훔친 것은 군사 물자가 아닐지도 몰라.”

장목화가 콧소리를 냈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어휴, 근거 없는 추측은 그만두자. 아무 단서도 없고 구체적인 상황도 모르는데, 소설 쓰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

“맞아요, 맞아!”

맞장구치던 성건우는 곧바로 자기 자신에게 반박했다.

“소설을 쓰는 것도 나름대로 느낌 있지 않아?”

“하, 구세계 콘텐츠를 섭렵해서 그런지 어휘력이 상당히 풍부해졌네.”

장목화는 사실 팀원들이 구세군 내 도난 사건으로 토론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긴 여정의 무료함을 달래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 *

점점 더 평탄해지는 길을 따라 1시간 반 정도 달리니 이제는 구름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잡초가 우거진, 끝없이 넓은 황야가 나타났다.

차 속도를 늦춘 성영희는 구조팀의 지프와 나란히 서서 차창을 열었다.

“우베이까지 최소한 8시간은 더 가야 해. 우린 이따가 거점을 찾아 휴식을 취하고 내일 아침에 다시 출발할 건데, 괜찮지?”

“괜찮아. 8시간만 더 가면 된다고?”

장목화는 일단 대답부터 한 뒤 의혹을 드러냈다.

그녀는 구세계 고해상도 지도를 본 적도 있고, 현대의 유적 사냥꾼들이 만든 조악한 지도를 연구한 적도 있었다. 이곳에서 우베이까지는 위드 시티에서 레드스톤 마켓 정도는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위드 시티에서 레드스톤 마켓까지 날씨가 좋으면 며칠 내로 도착할 수도 있지만 궂은 날씨와 잦은 사고 때문에 우회로로 가게 되면 몇 주 만에 도착하게 되기도 했다.

성영희는 전방의 도로를 보며 약간 자부심 어린 말투로 답했다.

“신력이 시작된 후 20년 동안 우리는 우베이와 구름산을 잇는 주요 도로를 완벽하게 수리하고 복원했어. 지금도 계속 유지보수 해오고 있고.

심각한 오염으로 문제가 많아서 우회해야만 하는 몇몇 지역 말고는 그냥 도로를 따라 달리기만 하면 돼.

우리 구세군 창립자 중 한 명인 이자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 ‘식량은 혈액이고, 공업은 뼈대라면, 도로는 그 모든 것을 잇는 신경이다.’”

짝! 짝! 짝!

성건우가 힘껏 손뼉을 쳤다.

장목화 역시 구세군과 여타 세력의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세간에는 이미 타락했다고 알려졌지만 도로 중건에 있어서는 퍼스트 시티 등의 대형 세력보다 훨씬 월등했다.

보통 구세군이 아닌 다른 대형 세력은 수시로 이런 표현을 했다.

‘구세계부터 남은 도로 중 억지로나마 이용할 수 있는 길은 많잖아! 조금 돌아가면 어때!’

‘도로를 수리할 물자가 어디 있어? 차대가 높은 차량을 많이 만들어내기만 하면 황야에서도 달릴 수 있다고!’

‘도로를 잘 닦아봤자 노예들이 도망치기에만 편하다니까!’

퍼스트 시티에서도 여태 각 대형 거점 내부의 거리와 주위 장원으로 통하는 도로만 새롭게 손보고 수시로 유지보수를 하고 있었다. 황야 초소와 변경 거점을 포함한 다른 곳에서는 구세계부터 남은 도로와 나름 평탄한 황야에만 의탁할 뿐이었다.

거기다 수많은 오염 구역, 무인 구역, 위험 구역의 존재와 극단적인 기후 영향으로 일단 바깥에 나오면 이동 시간과 비용이 급격히 늘어났다.

“역시 구세군이야!”

장목화도 감탄했다. 보아하니 성영희와 부하들도 이러한 사실을 상당히 기뻐하는 것 같았다. 이미 타락했든 어쨌든, 그들은 구세군의 과거 행위와 성취를 매우 뿌듯해했고, 고맙게 생각했다.

* * *

오후 3시를 넘겼을 무렵, 두 자동차가 한 거점에 도착했다.

구세계의 한 농장을 에워싸고 새롭게 지어진 곳이었다. 높다란 담장 밖으로 드넓게 펼쳐진 들에는 무성하게 자라난 작물이 황금빛으로 옷을 갈아입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구조팀은 구세군의 경험 많은 전사이자 변경 거점의 대장인 성영희 덕분에 통행증과 소개서 없이도 곧장 거점 내부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다시 구세군들을 따라 구석진 곳에 자리한 유류 창고에 이르렀다.

차에서 내린 성영희가 검은 제복 안에서 둘둘 말린 흰 손수건을 꺼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펼치자 안에서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각기 다른 색의 카드 더미가 나타났다.

“이게 50리터짜리 기름 어음이네⋯⋯.”

간단히 더미를 보던 성영희는 옅은 노란 플라스틱 카드를 집어 들었다.

장목화는 약간 투명한 카드 표면에 쓰여 있는 ‘기본 휘발유’, ‘50L’, ‘물자 총괄 위원회’ 등의 글자를 발견했다. 형태가 완전하지 않은 붉은색 도장도 하나 찍혀 있었다.

곧이어 유류 창고관리자는 그 플라스틱 카드를 받아 들더니 녹색 산악자동차에 주유를 시작했다.

성건우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성영희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가 들고 있는 플라스틱 카드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구세군의 어음이야?”

성영희가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맞아, 기름 어음, 돼지고기 어음, 소고기 어음, 양고기 어음, 생선 어음, 쌀 어음, 밀가루 어음, 옷감 어음, 옷 어음⋯⋯. 너희도 앞으론 물자를 어음으로 교환해두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필요한 걸 구할 때 더 편해.”

“오오오-!”

성건우가 알겠다는 듯 크게 호응했다.

이내 장목화가 웃으며 앞으로 두 발짝 나섰다.

“일단 네가 가진 거랑 좀 교환해도 될까?”

“좋아. 어제 너희가 먹던 그 산채 돼지고기 통조림이랑 교환하자. 냄새가 엄청 좋더라고. 침이 줄줄 흐르더라니까.”

성영희는 거절은커녕 농담까지 덧붙였다.

장목화가 가볍게 웃었다.

“그건 구세군에서 생산된 거야. 누군가 변경 너머로 전한 밀수품인데 우리도 운 좋게 구한 거였어.”

이야기하는 사이 그녀는 성영희와 부하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은 밀수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협상을 거친 끝에 구조팀은 이미 물린 통조림과 압축 비스킷을 어음으로 교환했다. 개중에는 그램 단위의 돼지고기 어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옆에서 거래의 전 과정을 지켜보던 용여홍은 성영희가 들고 있는 여러 어음 중 ‘목재 벌목 어음’을 발견했다.

“이건 뭐야?”

고개 숙여 가리킨 것을 확인한 성영희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구세군의 모든 자원은 세력 전체의 것이야. 나무를 벌목해 목재를 만들려 해도 어음이 필요하지.”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는 지프 지붕에 달린 태양열 충전기를 가리켰다.

“태양열로 충전할 때도 어음이 필요해?”

장목화가 진지한 그를 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 뭐 햇볕에 타도 어음을 내야 하느냐고 묻지 그러냐?’

성영희도 뜻밖의 질문에 흠칫 놀란 듯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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