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9화. 성영희
거점에 들어올 생각이 없는 듯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야영지를 마련하는 구조팀을 보고 구세군들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건우 역시 그 모습을 보고, 동료들을 돌아보며 감탄을 표했다.
“꽤 괜찮은 녀석들이네!”
용여홍은 언제나처럼 친구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성건우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인적 드문 구석진 변경 거점에서 우리처럼 기름기 좔좔 흐르는 외부인을 만났어. 그럼 병사들 보통은 어떻게든 욕구를 채우려고 기회를 엿보려 하지 않겠어? 근데 저 병사들은 우리가 공격 의지를 안 보이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 이 얼마나 선량하고 인자한 태도야!”
백새벽도 동조했다.
“퍼스트 시티 여러 황야 거점에서도 그런 일들이 수시로 발생해. 유적 사냥꾼이나 밀수 상인들은 차라리 강도단이나 무심자, 변이 생물과 뜻밖의 위험을 맞닥뜨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런 거점을 우회하려 할 정도거든.”
퍼스트 시티 황야 거점 병사들 눈에 들었다가는 가진 재산을 모두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마저 위태로워졌다.
게다가 반격이라도 해서 정규군 몇을 다치게 하거나 죽였을 경우, 나머지 정규군까지 전부 죽여 입을 다물게 하면서 완전 범죄를 도모하지 않는 이상에는 퍼스트 시티 현상 수배범 목록에 오르는 게 수순이었다.
그때, 장목화가 무심한 얼굴로 성건우의 아름다운 환상을 깨뜨렸다.
“지나치게 화려한 우리 이력 때문인지도 모르지.”
퍼스트 시티에서 몇 번이고 내린 현상 수배와 총합 1만 오레이에 달하는 현상금 아래에서도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남은 구조팀은 분명 쉬이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다 장목화는 순간 성건우의 표정이 아이처럼 무너져 내린 것을 보았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외부에서는 구세군이 이미 타락했느니 어쩌니 해도 아직 어느 정도의 선은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 무고한 사람들을 향해 거리낌 없이 공격하는 수준은 아닌 거지. 음, 퍼스트 시티의 군사 기지였다면 어떻게 병사들이 농부를 겸직하며 돌아가면서 경작을 하겠어? 그들은 분명 황야 유랑자를 노예로 잡아들여서 일을 시켰을걸.”
“맞아요.”
백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애쉬랜드에서 어느 정도의 질서를 회복한 곳은 일부 구역뿐이었다. 변경이나 황야 거점은 그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다.
다시금 웃음을 찾은 성건우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진해서 개울가로 가 수질을 검사했다.
* * *
구조팀이 땔감을 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그때, 군사 거점의 강철 대문이 열렸다.
안에서 걸어 나온 건 한 쌍의 남녀였다.
약 165센티미터 정도에, 서른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는 성숙하고도 매력적이었다. 검은 머리칼과 짙은 갈색 눈동자, 약간 굵은 눈썹과 이목구비도 그리 모나지 않았고, 피부색은 장목화와 비슷한 건강한 밀색이었다. 다만 햇빛을 많이 봐서인지 약간 더 어둡긴 했다.
깔끔하고 단정한 단발머리는 귀를 겨우 가릴 정도였고 검은색 제복을 착용한 몸은 통통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표준적인 체형이었다.
여자는 옆에 있는 젊은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어오고 있었지만 기질로 보나 태도로 보나 누가 봐도 상급자인 듯했다.
열일고여덟 살 정도 된 듯한 남자의 입술 위로는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자라 있었다. 생김새는 평범한 편이었고, 상당히 앳되어 보였다.
이윽고 구조팀 근처에 이른 두 사람은 약간 거리를 둔 채 섰다.
먼저 그 소년 같은 남자가 자발적으로 옆에 있는 여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우리 변경 거점의 성 대장님이시다.”
여자는 웃으며 거리낌 없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성영희라고 한다.”
약간 사투리 억양이 어린 자기소개에 장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 역시 오른손을 내밀어 상대와 악수했다.
“아까 확성기로 우리에게 경고했던?”
성영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우리 변경 거점에서 해야 하는 일이거든. 의심스러운 사람을 그냥 지나 보낼 수는 없지. 서시월이라고 했지? 아마도 가명이겠지만 상관없어. 이름은 그냥 하나의 보드일 뿐이니까.”
뒤이어 그녀는 옆에 있는 남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정평안.”
“좋은 이름이네!”
성건우는 또 박수 세례로 그 소년을 당황하게 했다.
“평안하게 살았으면 하는 부모님 바람이 어린 이름이지.”
성영희가 간단히 설명했다.
장목화 역시 팀원들을 소개했다. 물론 그녀가 댄 이름은 다 가명이었다.
게네바로 말할 것 같으면 평범한 로봇인 척하고 있었고, 평범한 로봇에게는 이름 없이 코드 번호만 있었으므로 굳이 소개할 필요도 없었다.
적당한 한담이 끝나자 성건우는 책임감 넘치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만약 퍼스트 시티가 이곳을 돌파구로 선택한다면 겨우 수십 명이 지키는 이런 작은 거점이 제대로 막아낼 수 있을까?”
마치 구세군에서 나고 자란 구성원 같은 모습에, 성영희는 꼭 시찰 온 상급자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우리가 그들을 막아낼 수 있는지 없는지,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지?’
그래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마도 막긴 힘들겠지. 우리의 주요 임무는 조기 경보를 하고 몇 가지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거야. 작년에 이 거점은 퍼스트 시티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어. 우리는 예보를 하고 곧장 여길 포기하고선 몇 개 조로 나뉘어 깊은 산으로 물러났어. 그리고 도중에 기회를 찾아 적을 교란하면서 진격 속도를 늦췄고. 사람이 살아있는 한 새로운 거점이야 다시 지을 수 있으니까.”
성영희의 답은 비교적 상세했다. 종합하면 구세군의 거점은 각기 다른 적에 대적하는 여러 방안을 마련해뒀으니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실력이 강한 구조팀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대응이었다.
그때, 성건우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깊은 산으로 물러나는 게 더 어렵고 위험하지 않나?”
성영희는 순간 흠칫 놀랐다.
“그렇지.”
그녀도, 곁에 있는 정평안도 당시 겪은 갖가지 어려움이 떠오른 듯했다.
몇 초 후, 성영희가 주도적으로 물었다.
“왜 빙원으로 가려는 거야?”
‘아까도 빙원에 신경을 쓰는 것 같더라니.’
장목화는 할 말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구세계가 파괴되기 전, 지금의 빙원 일부는 비교적 기후가 정상적이었어. 도시들도 많았지. 하지만 이후 급격한 기후 변화로 빙원이 확장되면서 그런 구역들마저 집어삼켰어.
빙원의 기후적인 제약과 경작 가능한 토지의 결핍 때문에 그곳에는 황야 유랑자도, 유적 사냥꾼도 많지 않아. 상대적으로 여러 폐허 도시가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그곳을 탐색한다면 수확도 꽤 얻을 수 있을 거야.”
성영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우리 구세군도 보통은 한여름에 팀을 조직해 그곳에 물자 수집을 하러 가거든. 음, 지금 출발하면 딱 한여름에 도착하겠네.”
그 후 입을 달싹이던 그녀는 한참 뒤에야 망설이며 이야기했다.
“빙원에 도착하면, 혹시 누구 좀 찾아봐 줄 수 있겠어?”
“어떤 사람을요?”
자비로운 제도 선사가 물었다.
성영희가 낮게 웃었다.
“우리 남편. 이름은 기강호고, 연구자야. 우리는 원래 매해 두 번 만났었는데 남편이 답사대에 참가해 빙원으로 간 재작년부터는 못 만나고 있어. 비밀 임무를 수행하러 간다고 했거든. 임무 수행에 성공하면 나랑 우베이에서 함께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 이후로 소식이 끊겼어. 남편이 속한 부대에서도 보안 규정 때문에 상세한 답을 줄 수 없다고 하고.”
옆쪽의 정평안은 대장이 파견과 조정에 관해서까지 이렇게 자세히 설명할 줄은 몰라서 굉장히 난감한 얼굴을 했다.
한동안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그렇구나⋯⋯. 신경이야 써볼 수 있지. 큰일도 아닌데.”
성영희가 진심 어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기, 그 사람 사진이 있어. 막 결혼했을 때 우베이에서 찍은 거야.”
우베이는 구세군의 가장 핵심적인 도시 중 하나였고, 그곳에서 생산된 우베이6과 우베이7은 애쉬랜드에서 상당히 흔히 볼 수 있는 권총이었다.
성영희는 검은 제복 안쪽 주머니에서 컬러 사진 한 장을 꺼냈다.
20대 남자의 사진이었다. 마르고 까무잡잡한 남자는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고, 머리는 뒤로 다 빗어넘긴 단정한 스타일이었다.
성영희가 진지하게 덧붙였다.
“거의 10년이 다 된 사진이야. 지금은 더 성숙해졌고 머리도 이렇게 단정하지 않아.”
이내 성건우가 손을 뻗자, 성영희는 사진을 건넨 뒤 잠시 뜸을 들였다.
“만약 빙원 어딘가에서 이 사람을 만나면 꼭 전해줘. 여전히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성영희의 말투는 어느새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문제없지!”
성건우가 단호하게 답했다. 그러곤 찾을 사람의 인상을 머릿속에 아예 다 새기려는 듯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알았어.”
장목화도 대답했지만 속으론 한숨이 나왔다. 여태 듣거나 경험했던 일로 보면 2년이나 소식이 끊긴 사람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장목화는 성영희의 기대를 단칼에 꺾고 싶지 않았다. 애쉬랜드에서 살아가려면 때론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환상을 품어야 할 필요도 있었다.
또한 장목화는 성건우가 이렇게나 흥분한 이유 역시 이해할 수 있었다. 성건우는 분명 몇 년간 실종된 상태인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야외에서 구세계 파괴 원인 조사 임무를 수행하다가 사라진 그의 아버지는 소식 하나 들려온 적이 없었다.
구조팀에 가입한 이래, 성건우는 줄곧 아버지의 흔적을 수색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약간의 단서를 통해, 신력 이후 무심병의 폭발로 파괴된 어느 도시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추정 중이었다.
남편을 찾아달라는 정영희의 부탁, 성건우도 동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지금의 성건우는 아마도 감정을 중시하는 녀석일 것 같았다.
곧 성건우에게 기강호의 사진을 넘겨받은 장목화는 조금 전의 성건우처럼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한 번 찾아볼게.”
사진은 다시 성영희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구조팀에게 사진을 아예 넘긴 게 아니었다. 사진은 그렇게 성영희의 제복 안주머니에 조심히 담겼다.
백새벽은 갖가지 이유로 그 사진 한 장만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성실한 성건우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결혼사진은 없어?”
민감한 질문을 막는 역할인 장목화는 그를 채 저지할 새도 없었다.
기강호의 이야기를 할 때까지도 예의 바른 웃음을 유지하고 있던 성영희의 표정이 순간 아득하게 변했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슬픔으로 뒤덮였다.
“작년에 산 안쪽으로 물러나면서 퍼스트 시티 녀석들에게 쫓기는 동안 격전이 벌어졌거든. 그러다 계곡에 떨어져 버렸어.”
‘줄곧 몸에 지니고 있었구나.’
장목화는 의도적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혹시 거점에 복사기가 있어?”
성영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올해는 없어. 작년에 거점을 포기했을 때 퍼스트 시티 녀석들이 가져가 버렸거든. 올해 들어 내가 계속 신청하기는 했는데 상부에서 비준을 안 해줬어. 물자가 엄청 부족한가 봐. 안 그럼 사진을 복사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괜찮아. 여기 서시월 씨, 되게 머리 좋아. 기억력도 뛰어나고.”
성건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장목화의 장점을 자랑했다.
그 후로 몇 마디 대화가 더 이어지다가 성영희와 정평안은 거점의 대문으로 돌아갔다. 도중에 정평안은 약간 복잡한 표정으로 몇 번이고 구조팀을 돌아보기도 했다.
이내 그들이 대문을 통과해 거점 안으로 들어가자 백새벽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정평안이라는 녀석, 성 대장을 좋아하네.”
“설마!”
용여홍이 내뱉듯 외쳤다.
‘나이 차가 꽤 나는데? 진원이랑 주슬기보다 더……. 거의 열 살 차인데?’
생각해 보면 양진원과 주슬기도 회사가 맺어준 인연이었다.
장목화가 웃었다.
“열일고여덟 살 정도 되는 애면 누나를 좋아할 법도 하지. 여긴 외딴 변경 거점이잖아. 정평안이 매일 만나고 부대끼는 사람은 매우 제한돼 있어. 이곳의 남녀 비율 역시 불균형적일 거고.
언제나 마음 졸이고 있어야 하는 위험한 상황에선 호르몬 분비가 활성화돼. 내내 성숙하고 믿을 만한 여자 곁에 있다면 저도 모르게 좋아하게 될 수도 있지. 성영희는 되게 예쁜 사람이기도 하잖아, 안 그래?”
“엄청 잘 알고 계시네요!”
성건우는 당장이라도 손뼉을 칠 듯한 기세로 감탄했다.
“조금만 더 확장하면 전문적인 심리학 논문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게네바도 성건우의 말에 동조했다.
‘맞아, 맞아⋯⋯.’
용여홍은 속으로만 맞장구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