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637화 (637/649)

637화. 업그레이드

이내 장목화가 혼란의 기운이 녹아든 선글라스를 보며 말했다.

“기원의 바다는 현실에 직접 대응하지 않아. 거기서 실험으로 얻은 결과는 부정확해. 근데 난 이 선글라스의 영향 범위가 얼마나 큰지, 몇 사람에게나 대적할 수 있는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 이미 심령의 복도에 진입한 각성자와 기원의 바다에 머물러 있는 각성자, 그리고 일반인한테 각각 다른 효과가 나타나는지도 알아봐야 하고⋯⋯.”

“어⋯⋯.”

순간 용여홍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팀장님, 그렇게 착하던 사람이 어느새 건우한테 물들어버린 건가요?’

장목화는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심령의 복도 급 실험 대상은 야겠지? 기원의 바다 급은 나. 그때는 건우한테 이 도구를 사용해달라고 해야겠지. 그럼 여홍아, 일반인 실험 대상으로는 누가 좋을까? 너? 아니면 작은 흰둥이?”

용여홍의 머릿속엔 구세계 콘텐츠 속에 흔히 등장하는 뭔가가 자연스럽게 그려지고 있었다. 등에 달린 검고 사악한 날개를 펼치는 악마…….

“제가 할게요.”

그래도 용여홍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점점 장목화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결국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작은 빨강아, 넌 진짜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단순하고 제일 잘 속는 사람이야!”

“어⋯⋯.”

당황한 용여홍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다.

역시, 백새벽도 한창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다시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굳이 왜 직접 실험해? 야한테 도구를 주고 그 기운을 갖고 다른 트라우마에 들어가 실험해보라고 하면 되지. 건우가 업그레이드된 능력을 실험하는 거랑 비슷한 거야. 그냥 건우가 현실로 돌아오면 건우를 실험 대상 삼아서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는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만 확인하면 되잖아.”

짝짝짝!

성건우는 이 훌륭한 속임수에 박수를 보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용여홍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선을 아는 장목화는 이쯤에서 상황을 수습하려고 얼른 덧붙였다.

“동료를 믿고 팀을 위해 희생하려는 너의 그 숭고한 정신은 잘 알겠어. 정말 대단하다, 작은 빨강이!”

‘……팀장님, ‘양치기 소년’ 이야기 잘 알고 있는 거죠? 계속 이런 농담을 하면 정말로 필요할 때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요.’

속으로만 한숨짓던 용여홍은 엄지를 치켜든 장목화를 보며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요.”

관심 있는 상대에 대한 걱정 때문에 다른 건 생각도 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답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장목화는 곧장 게네바를 돌아보며 화제를 전환했다.

“이건 진심인데, 겐 너는 실험 대상이 되어줘야겠어. 혼란의 기운이 전자파까지 교란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거든.”

그러자 게네바가 프로그램에 따라 답했다.

“일단 물질 간섭이 가능한지 확인하며 하나씩 배제하는 것도 방법이야.”

장목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배제할 수 없을지도 몰라. 두 가지 모두 가능할 수도 있으니까. 무전기 같은 전자 기기도 실험 대상으로 삼을 수야 있지만 그걸론 가장 정확하고 직관적인 반응을 얻을 수 없잖아. 야가 트라우마 안에서 진정한 지능인을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좋아, 문제없지.”

게네바도 그 설명을 받아들였다.

이후 성건우는 한 차례 시도를 거쳐 결론을 도출해냈다.

트라우마 안에서 확인한 결과, 그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1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문학청년-억지쟁이의 범위는 150미터로 늘었고, 사지 동작 불능과 전자파 방해는 모두 200미터에 달했다.

또 물질 간섭의 영향 범위까지 100미터가 됐지만, 사유 유도의 영향 범위는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말을 똑바로 들을 수 있는 정도가 기준이었기 때문에 통화나 방송 등을 통해 멀리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선글라스 안에 주입된 혼란의 대가는 추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한여름이라도 털옷을 껴입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기운을 이용한다면 100미터 범위 안에 있는 10명을 혼란과 광기, 무의식의 상태에 빠지게 할 수 있었다. 능력 발휘를 중단해도 그런 상태는 약 2분 정도 지속되었다.

일반인과 기원의 바다 급 각성자가 받는 영향에는 또렷한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의 경우 영향이 지속되는 시간과 혼란의 정도가 확연히 떨어졌다.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에게 이 영향이 지속되는 시간은 15초에 불과했고, 그 능력 아래서도 일정한 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환각을 일으키기는 쉬워서 그것을 실제로 여기거나 그걸 상대로 특정 행동을 하기는 했다.

즉,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는 혼란의 기운에 영향을 받아도 진정한 무의식 상태에 처하거나 완전히 미쳐버리지는 않고 현실과 환각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데 그칠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를 노린 공격을 가해도, 공격자가 그의 환각에 대체되지 않는 한 얼마든 충분히 대항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팀장님한테 아주 적합한 거죠.”

성건우가 장목화를 보며 진심 어린 눈으로 말했다.

장목화에겐 공간 환각과 물품 인식 불능, 두 가지 환각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기원의 바다 급이라 일반적인 상황에선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에게 환각의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상대가 홀로그램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거나 짧은 순간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목표가 혼란한 상태에 처해 있을 경우, 그녀의 환각은 전혀 다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장목화는 웃음을 터뜨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게나 나한테 주고 싶어 한다니 어쩔 수 없지, 기꺼이 받아들일게.”

거절해봤자 감정을 중시하는 성건우의 마음만 상하게 하고 말 것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웃음 지으며 한 가지를 덧붙였다.

“근데, 이 기운은 내 장갑에 고정해두는 게 좋겠어. 쓰기 더 편하게.”

장목화가 털 장식이 붙은 검은색 가죽 장갑 한 세트를 꺼내 들었다.

계획에 따르면 구조팀은 한여름에 빙원 타이 시티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 지역에서는 가장 좋은 계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원하는 일정에 딱딱 맞춰서 일이 진행되리라 보장할 순 없었다. 이에 장목화는 팀원들에게 상대적으로 각종 물자를 마련하기 좋은 퍼스트 시티에서 알아서들 준비를 해두게 한 바 있었다.

성건우가 이 간단한 요구를 거절할 리 없었다. 그는 심령의 복도를 이용해 혼란의 기운을 오른손 장갑에 이전시켰다.

도구에는 이제 ‘혼란한 오른손’이란 이름이 붙었다.

“전자파를 교란할 수도, 물질을 간섭할 수도 없다는 게 안타깝네.”

장목화가 장갑을 집어 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숨을 내쉬고 싶었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뜨거운 숨 한 모금조차도 귀했다.

이때 옆에 있던 성건우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노래 불렀다.

“덜덜덜, 덜덜덜, 겨울바람에 얼어 죽겠네⋯⋯.”

장목화는 늘 그랬듯 성건우를 한번 쏘아본 뒤 장갑을 전술 배낭에 쑤셔 넣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어젯밤 일을 겪고 지금 내가 마주한 섬을 극복하는 데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어. 그래서 지금 바로 시도해보려고.”

반대하는 팀원은 아무도 없었다.

* * *

기원의 바다 안, 죽은 듯 적막한 반고 바이오 지하 빌딩 내부.

자신의 집 밖에 선 장목화는 누군가와 대화하듯 중얼거렸다.

“한 가지 알아낸 게 있어. 애쉬랜드에 있는 한 뜻밖의 상황을 피할 순 없다는 거야. 아무 짓도 하지 않든, 최선을 다하든, 여러 가지 뜻밖의 사고를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근처에 있는 사람이 어느 유적에 가서 찾아온 어떤 물건 때문일 수도 있고, 무고한 사람이 일찍이 받았던 어떤 수술 때문일 수도 있어⋯⋯.

우리가 일일이 다 통제할 수는 없다는 거야. 심지어 동료, 친구, 가족이 아무 문제도 보이지 않다가 갑작스럽게 무심병에 감염될 가능성도 있어.”

잠시 뜸을 들이던 장목화의 표정이 점차 진지하고 엄숙해졌다.

“난 가족이랑 친척, 친구, 동료를 잃는 게, 지금의 삶을 잃는 게 두려워. 근데 내가 두려워한다고 그것들을 잃지 않게 되는 건 아니야! 내가 무심병의 기원을 찾아내지 못하면, 구세계 파괴 원인을 알아내지 못하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런 두려움 속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야 해! 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할 거야. 더는 그런 것들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도록!”

솔직한 마음을 표출한 장목화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난 이따가 중요한 위치에 폭약을 설치하고 내 손으로 직접 이 지하 빌딩을 폭파해버리겠어. 두려움은 내 앞길을 막지 못해. 그저 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돼줄 뿐이지!”

약 30분 후, 지하 빌딩에서 외부로 통하는 주차장 문 앞에서 선글라스를 낀 장목화가 대문을 향해 나아갔다. 심지어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어렸을 적 꿈을 아직 기억하니, 영원히 지지 않는 꽃 같은⋯⋯.”

콰르릉!

그녀의 등 뒤와 발밑에서 폭발음이 터지며 지면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온 섬을 무너뜨릴 듯한 충격과 피어오른 연기 속에, 보일 듯 말 듯 이글거리는 화염에도 장목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섬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폭발이 완전히 잠잠해졌을 무렵, 그녀는 자신이 이미 이 두려움을 극복했음을 깨달았다.

* * *

기원의 바다를 떠난 장목화는 업그레이드된 능력을 시험해보았다.

이제 공간 환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7명으로 늘었고, 영향 범위도 30미터로 확장되었다.

물품 인식 불능으로는 한 번에 두 목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고, 범위는 20미터, 제한 시간은 90초였다.

자극 장애로는 여전히 한 번에 하나의 목표를 상대로, 한 종류의 반응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지속 시간은 2분으로 연장됐으며 최대 영향 범위는 15미터에 달했다.

* * *

성건우, 장목화의 능력이 업그레이드된 후, 구조팀의 여정이 재개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2주가 지났을 무렵, 적잖은 우회로를 지난 끝에 구조팀은 마침내 퍼스트 시티와 구세군의 경계선에 다다랐다.

경계선을 이룬 건 기복을 이루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산맥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 산맥의 이름은 구름산이었다.

이를 우회하려면 서북쪽으로 가 화이트 기사단의 세력 범위를 관통하거나 지세가 완만한 대평원에 닿을 때까지 동남쪽으로 가야 했다.

그곳은 퍼스트 시티와 구세군이 대치 중인 전선이자 퍼스트 시티 동쪽 군단의 방어 구역이었다.

구세계의 구름산은 넘지 못할 천연 요새가 아니었다. 양쪽을 잇는 다리도, 터널도 많았다.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다리는 무너져 내렸고, 터널들은 다 매몰돼 막혀 버린 탓에 산을 넘을 수 있는 길은 몇 개만 남아있었다. 그마저도 퍼스트 시티와 구세군 사람이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내 백새벽이 핸들에서 손을 뗀 뒤 전방의 입산로를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구름산을 넘을 수 있어요. 특별히 엄격한 검문을 받지도 않을 거예요. 비교적 등급이 낮은 구세계 도로인데, 산을 휘감듯 나 있어서 터널과 다리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아요. 길 곳곳은 이미 무너져 내린 상태지만 차 한 대 정도는 어렵게나마 다닐 수 있거든요.”

일단 고개를 끄덕이던 장목화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작은 흰둥이 너 여기 와본 적 있어? 왜 그렇게 잘 알아?”

“그야 지도를 읽을 줄 아니까요.”

그 질문에 답한 이는 백새벽이 아닌 성건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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