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화. 키 포인트
요한은 성건우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저녁 되면 춥지 않아?”
“춥지.”
성건우는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금 혼자 조용히 중얼거렸다.
“모든 승객이 여객선에 오른 그날 저녁 무렵 찬 공기가 남하하면서 기온이 대폭 떨어졌어. 순환은 그 순간부터 시작돼. 이후 낮에는 괜찮지만 밤이 되면 뼛속까지 파고들 정도의 추위가 찾아오고. 낮에는 정상이지만 밤에는 혼란스러워져. 마지막 날 어둡고 추운 냉동창고에 숨으면 무심병에 감염되는 결말을 피할 수 있어⋯⋯.”
순간 요한은 멍한 표정을 보였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는 애쉬랜드 문학 애호가인 아버지를 둔 덕에 어린 시절 그 언어를 익혔었다. 애쉬랜드인 위주로 이뤄진 아이언마운틴 시티 주위에서 간신히 살아남고, 끝내 제2 식품회사에 들어가 뜻밖의 기회를 얻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딱 하나였다.
‘이 녀석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내 성건우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몇 가지 질문으로 키 포인트를 찾아냈어. 그럼, 모레 보자고.”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성건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손을 가슴에 얹고 허리를 굽히는, 어디에서 배웠는지 모를 방식으로 인사를 했다.
그 사이 빠르게 옅어지던 성건우는 요한의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요한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정말로 미래인이었나? 모레 보자는 건 무슨 뜻이지?’
진출입 네 번 끝에 성건우는 여객선에 접안하던 그날 낮으로 왔다.
요한과 살리가 이 시간쯤 이미 냉동창고 안에 숨어들었으리라는 걸 알고 있어서, 성건우는 곧장 그곳으로 돌진해 금속 문을 두드렸다.
쿵! 쿵!
주방 선원들은 성건우가 일찍이 사유를 유도해둔 관계로 성건우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한참을 두드렸는데도 호응하는 사람이 없자 성건우는 알아서 그 문을 열고 냉동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그는 잊지 않고 두꺼운 옷을 껴입고 담요와 이불을 두르고 있었다.
냉동창고의 문을 닫은 성건우는 손전등으로 이곳저곳을 비춰보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익숙한 자리에 앉아있는 요한을 찾아냈다.
“또 만났네.”
성건우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몇 초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요한은 이내 멍하게 물었다.
“너, 너는 이틀 전의 그?”
아직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기 전이라, 그날의 기억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아니면 누굴 것 같은데?”
곰처럼 껴입은 성건우가 반문했다.
반가움에 기뻐하던 요한은 좌우를 두리번거린 뒤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그때 어둡고 추운 냉동창고에 숨으면 된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 이곳으로 왔어. 밖에서는 정말로 무심병이 폭발하는 거야?”
그는 지난 이틀간 성건우가 했던 헛소리를 내내 곱씹고 되뇌었었다.
“여객선이 접안할 때쯤 자연스럽게 알게 돼.”
성건우는 꼬리뼈 쪽으로 옮겨둔 마비된 오른 다리를 끌고 아직 식량이 좀 남아있는 구석으로 향했다.
살리를 비롯한 이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괴물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 전전긍긍하며 바르르 몸서리를 쳤다.
만약 성건우가 공격 의도를 보였더라면, 심지어는 그들에게 눈길 하나라도 줬더라면 즉각 냉동창고 밖으로 튀어 나가 다른 곳으로 숨었을 터였다.
물론 저런 괴물이 주방의 냉동창고를 은신처로 택했다는 건 이곳보다 나은 곳이 없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었다.
요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성건우의 독특한 모습은 못 본 척했다. 이미 습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건우는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트라우마에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면서 시간대를 여객선이 접안하는 순간으로 옮겼다.
다시 냉동창고에 이른 성건우가 방송이 흘러나오는 사이 그대로 돌진해 문을 벌컥 열었다.
냉동창고 밖에선 무심자가 된 주방 선원들이 휙, 고개를 돌렸다.
성건우는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반 바퀴 우회해 그들을 벗어났다.
그렇게 분초를 다퉈가며 그가 찾으려 하는 건 어둠의 근원, 선장이었다.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는 않았다.
탕! 탕! 탕!
요한을 비롯한 이들이 무심자에게 사격하는 가운데, 주방에서 튀어 나간 성건우는 육식주의 감응에 의지해 점차 짙어지는 어둠으로 이동했다.
도중엔 어쩔 수 없이 앞길을 막아서는 무심자를 쏘기도 했다. 뛰어난 사격 실력의 성건우는 단 한 번 오차도 없었다. 무조건 백발백중이었다.
성건우는 선실에 도착해서야 마침내 선장의 인영을 발견했다.
둥근 몸집의 선장은 옆쪽 유리에 기대서서 무심병의 창궐로 혼란스러워진 아래쪽을 응시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인간 의식이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성건우는 상대가 이미 죽었다고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무심자에게도 인간 의식은 있었다.
어쨌든 갖가지 조짐이 선장이 무심병에 감염됐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 그는 어둠의 근원이자 신세계와 이어지는 교차점이었다. 만약 무심병이 정말로 그것에서 비롯되는 거라면 그가 그 병을 피할 순 없을 터였다.
다음으로 선실 안의 여러 선원도 전부 무심병에 걸려 있었다. 굽은 등, 혼탁한 눈동자, 충혈된 눈을 가진 그들은 선장을 공격하진 않았다. 본래 극심하게 굶주린 상태가 아니라면 아무리 무심자라도 동족을 사냥하진 않았다.
탕! 탕! 탕!
왼손에 아이스모스를, 오른손에는 연합202를 쥔 성건우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무심자 몇을 쓰러뜨렸다.
그 총성에 선장이 느릿하게 이쪽을 돌아보았다.
충격과 공포에 점철된 표정을 한 선장의 눈은 약간 충혈돼 있기는 했지만 눈동자는 맑았다. 현재의 그는 아직 무심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성건우는 어둠의 근원이 여전히 그의 체내에 있음을 똑똑히 보았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성건우는 곧 장목화처럼 친절하게 웃어 보였다.
“전 당신을 구하러 왔습니다!”
한동안 성건우를 관찰하던 선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당신은 무심병에 걸리지 않았군요⋯⋯.”
뒤이어 그의 표정이 약간 무너져 내렸다.
“조금 전만 해도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을 잇던 선장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성건우는 아무 호응도 없이 연합202를 거두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퍽!
그러곤 선장의 귀 뒤에 주먹을 꽂았다.
선장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부근에 쓰러진 무심자의 옷을 찢어 선장을 꽁꽁 포박한 성건우는 상대를 들쳐메고 원래의 길을 따라 주방으로 달려갔다.
요한을 비롯한 이들은 이미 이곳을 떠나며 도중에 만난 무심자를 다 정리했었다. 덕분에 성건우도 냉동창고로 돌아가는 길이 상당히 순조로웠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육식주와 생명 천사 목걸이에 아무 문제도 없음을 확인한 그는 반쯤 열린 문을 지나 어둡고 추운 냉동창고로 들어갔다.
의식을 잃었던 선장은 얼음물에 내던져진 듯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헉!”
선장이 깨어났지만, 냉동창고 금속 문은 성건우가 이미 닫아둔 상태였다.
거의 동시에 성건우는 온 여객선 아니, 온 세상이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시야에 보이는 어둠도 썰물처럼 속속들이 선장의 체내로 밀려들더니 한 덩어리로 뭉쳐져 서서히 사라졌다.
우지끈하는 허상의 소리와 함께 이 트라우마가 그대로 갈라졌다. 유리 파편들은 아래로 추락하며 뒤에 숨겨져 있던 짙은 검은색 허공을 드러냈다.
허공 속에는 어렴풋한 도시 하나가 자리해 있었다. 또한 그 도시 안에는 구름을 뚫을 듯 높은 탑이 서 있었다.
쩌적!
결국 온 트라우마는 완전히 붕괴해 버렸고, 타오르는 노을처럼 붉고 옅은 안개 한 줄기는 성건우에게로 날아들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직접 잡아챈 성건우가 안개를 작은 덩어리로 뭉쳤다.
이 트라우마가 완전히 사라지자 짙은 검은색 허공도 밤하늘에 완전히 녹아들며, 여러 개 돌기둥으로 떠받쳐진 신전 유적 하나가 나타났다.
912호 방 주인의 두 번째 트라우마였다.
그걸 힐긋 살피던 성건우는 시원스럽게 방을 떠나 현실로 돌아갔다.
* * *
“어우, 좀 춥네.”
일어나 앉은 성건우가 목을 움츠렸다. 그러면서 트렌치코트에 꽂아둔 선글라스를 집어 든 뒤, 그것에 트라우마의 붉은 안개 덩어리를 주입했다.
“어떻게 됐어?”
문을 열어둔 지프에선 장목화가 제일 먼저 걱정과 호기심을 드러냈다.
성건우는 선글라스를 보조석에 던져두고는 웃으며 답했다.
“해결했어요, 도구도 하나 얻었고요.”
“어떻게 해결했는데?”
용여홍도 상당한 호기심을 표했다.
이내 성건우는 그가 했던 생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며 ‘추위’라는 키 포인트를 강조했다.
“그러니까 어둠은 추위를 두려워한다는 거야, 안 두려워한다는 거야?”
백새벽이 의아해했다.
추운 밤에 빠르게 흘러나와 여객선의 모든 승객에게 영향을 미치고 대부분을 혼란한 상태에 빠뜨린 걸 보면 어둠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듯했다.
하지만 냉동창고를 피하고, 그 안에 숨은 사람들한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게다가 성건우가 최후에 선장을 그 냉동창고에 집어넣자 어둠은 안쪽으로 움츠러들다가 점차 사라지기까지 했다.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던 장목화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내 생각에는 두려워하는 것 같아. 하지만 추위의 정도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이는 거야. 일반적인 저온 상태에서 어둠은 그 추위로 인한 조급함 때문에 밖으로 나와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쳐. 하지만 냉동창고 수준의 극심한 저온 상태에서는 도주와 회피를 선택하는 거지.”
“이전의 어둠들도 그랬을지 모르겠군⋯⋯.”
게네바는 장목화의 설명에 동조하며 생각을 확장해 나갔다.
성건우는 턱을 긁적였다.
“추위를 무서워하는 거, 작열하는 문 영역 특징 같지 않나요? 그 어둠은 다피티르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요?”
“작열하는 문의 각성자에만 국한해서 생각할 수는 없지.”
장목화는 성건우의 추측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다만 허점을 만들지 않도록 주의시킬 뿐이었다.
한동안 이야기하던 그때, 성건우가 불쑥 앞 좌석의 선글라스를 가리켰다.
“써봐요.”
“내 거야?”
장목화가 농담하듯 물었다.
“네.”
성건우의 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대꾸하려던 장목화는 선글라스를 집어 들다가 순간 몸서리를 쳤다.
“좀 추운데⋯⋯.”
그녀의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거의 여름이 다된 시기라, 그녀의 옷은 비교적 얇고 가벼운 편이었다.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가는 추위에 대한 두려움, 능력은 혼란 야기일 거예요. 아마도요.”
그도 그 능력의 정확한 이름을 알 방도는 없었다.
장목화는 일단 선글라스를 내려놓았다. 두꺼운 옷을 입은 다음에 다시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시 성건우에게 물었다.
“트라우마를 통과했으니 네 능력도 적잖게 업그레이드됐겠지?”
성건우는 조금의 겸손도 떨지 않았다.
“당연하죠! 진짜 많이 업그레이드됐어요. 구체적인 건⋯⋯.”
한창 말하던 성건우가 돌연 용여홍을 쳐다보았다.
용여홍 역시 그 눈빛만으로도 친구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조건 반사적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성건우가 웃었다.
“나중에 적당한 트라우마를 찾아서 시도해볼게요. 현실이랑 크게 다르지 않아서.”
용여홍의 표정이 멍해졌다.
“⋯⋯전에는 그렇게 말한 적 없잖아.”
성건우는 진지한 얼굴로 설명했다.
“전에 들어갔던 트라우마, 그러니까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를 배경으로 한 그 트라우마 속 방 주인은 당시 각성자가 아니었어. 그래서 그곳에서는 인간 의식을 감지할 수 없었고,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도 제한이 많았지. 그때까지만 해도 트라우마에서는 능력을 확인할 수 없는 줄 알았던 건데, 여객선을 배경으로 한 트라우마는 현실이랑 꽤 가깝더라고.”
‘일리 있는 말이긴 한데, 어쩐지 나를 놀리는 것 같은 느낌인데.’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냥 실험 대상이 될 운명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