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634화 (634/649)

634화. 뉴오리진

하늘이 막 희끄무레하게 밝아올 무렵, 불침번을 마치고 겨우 1시간 정도 누웠던 성건우가 벌떡 일어나 차 문을 열고 내려선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아침 먹을 준비해야지, 아침 먹을 준비⋯⋯.”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트렁크 쪽으로 향했다. 후딱 아침을 해결하고 금방이라도 야영지를 떠날 기세였다.

“야! 잠 좀 자자!”

보조석에서 장목화가 고개만 쏙 내밀었다.

밤새 또 무슨 문제가 생길까, 그녀는 겨우 쪽잠만 자고 일어나 용여홍과 백새벽에게 휴식을 취하게 했었다.

두 사람 대신 성건우와 함께 불침번을 섰던 장목화는 이른 새벽까지 아무 일도 없자. 그제야 동료들을 깨우고 잠을 보충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성건우가 의미심장하게 설명했다.

“여기 오래 머물러 있을 순 없어요.”

장목화가 막 그 이유를 물으려는데, 백새벽이 데이비스 일행을 데리고 차 머리를 빙 돌아왔다.

흠칫 놀랐지만, 장목화는 곧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약간 쭈뼛거리며 머리를 긁적이던 데이비스는 평소처럼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자고 일어나서야 어젯밤에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너희한테 고맙다는 말을 못 했다는 게 생각나서. 너희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랑 동료들은 이미 무심자가 됐을지도 몰라.”

“우리는 우리를 구한 것뿐이야.”

장목화는 그 일을 공로로 여기지 않았다.

“어쨌든 진심으로 고마워. 혹시 뭐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도 있어?”

데이비스의 태도는 매우 단정했다. 상대는 감사 인사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어도 자신들은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경험이 풍부하고 실력도 강한 팀과 좋은 인연을 맺어서 나쁠 것도 없었다. 이는 여태껏 황야에서 유적 사냥꾼으로 살아남은 그의 생존 철학이었다.

‘우리한테 필요한 도움……. 너희가 과연 줄 수 있을까 싶네.’

장목화는 전에 알파의 동체를 구하느라 꽤 많은 경비를 지출했던 건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래서 웃으며 거절할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성건우가 끼어들었다.

“정말 고맙다면 지금 입은 트렌치코트 좀 줄래?”

데이비스의 키는 180센티미터로, 성건우보다 5센티미터 정도 작았다.

“어?”

데이비스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상대가 이런 요구를 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었다. 동시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장목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목화는 그저 미소로만 응할 뿐이었다. 겨우 어제 처음 만난 낯선 이에게 우리 팀원이 환자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데이비스는 잠시 고민을 해보다가 웃으며 입고 있던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벗었다. 그러곤 주머니 안에 든 물건을 꺼내지도 않고 그대로 성건우에게 건넸다.

“좋아, 좋아.”

성건우는 조금도 사양치 않았다.

그래도 알아서 주머니에 든 물건을 데이비스에게 돌려주기는 했다. 물건은 지폐 몇 장, 동전 여러 개, 라이터 하나, 총알이 가득 찬 탄창 하나였다.

“감사의 뜻은 잘 받았으니 더는 신경 쓰지 마. 어쨌든 다들 무사하잖아.”

장목화가 성건우를 도와 상황을 적당히 마무리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데이비스가 웃으며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돼?”

장목화가 웃었다.

“그건 알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안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잖아.”

퍼스트 시티를 근거지로 삼는 유적 사냥꾼팀이 퍼스트 시티에서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건 수배범들과 많이 접촉해봐야 좋을 게 없었다. 혹여나 나중에 진상을 알게 된다면 골치만 아파질 뿐이었다.

양심이란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애초에 막강한 실력자인 구조팀을 잡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버려 두자니 구조팀과 접촉한 걸 목격한 사람이 많이 있으니 퍼스트 시티 질서의 손에 변명하기도 어려워졌다.

‘신비주의 콘셉트인가?’

데이비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그도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고 신중하게 작별을 고했다.

데이비스 일행의 방해로 잠이 완전히 달아난 장목화는 보복이라도 하듯 성건우에게 아침을 차리게 했다.

성건우는 세상을 얻은 듯 기쁜 얼굴로 데이비스의 트렌치코트를 걸친 뒤 본인 소유 선글라스를 꼈다. 그리곤 트렁크에서 채소 통조림, 소고기 조리 통조림을 2개씩 꺼내고, 빵도 몇 조각 꺼내 모닥불가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든든히 아침 식사를 마친 구조팀은 현상 수배범인 걸 알아차린 건지 아닌지 모를 주위 사람들의 시선 속에 이 주차장 야영지를 떠났다.

* * *

오늘 지프의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바로 백새벽이었다.

먼저 동북쪽으로 쭉 나아간 구조팀은 곧 황원 깊은 곳에 이르렀다.

낡아빠진 도로는 드문드문 이어졌고, 폐기된 광산을 빙 우회하자 장목화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동물도 거의 없는 땅을 발견했다.

그녀는 백새벽에게 속도를 늦추고 숨을 만한 곳을 찾아 정차하라고 한 뒤, 뒤돌아 나머지 팀원들에게 지시했다.

“겐은 핸드폰을 복원하고 데이터를 추출해 봐. 우리는 인공지능 갑옷이랑 군용 외골격 장치를 입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할게.”

팀원들이 모두 준비를 마치자 게네바는 작업에 돌입했다.

잠시 후, 금속 머리를 든 그가 합성음으로 이뤄진 목소리로 말했다.

“복원할 수 있는 건 일부에 불과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인데.’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어떤 데이터도 복원되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컸다.

높은 경계심을 유지하고 있던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것들이야? 대강 얘기해줘 봐.”

게네바는 눈으로 붉은빛을 번득이기 시작했다.

“첫째는 핸드폰 주인이 구세계 파괴전에 2시간 동안 통화했던 기록이야. 번호는 ‘택배 회사’란 이름으로 저장돼 있어. 두 번째는 그로부터 45분 전, 국제전화 한 통을 받은 기록이 있어. 번호는 저장돼 있지 않지만 뉴오리진에서 온 것만은 확실해.”

‘뉴오리진⋯⋯.’

장목화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반고 바이오 안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구세계 파괴전의 대륙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뉴오리진이 애쉬랜드인 위주로 이루어진, 대륙 동북쪽에 자리한 나라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국가의 영토는 오늘날의 빙원 일부를 포함한 구세군 북부에 걸쳐져 있었던 셈이었다.

장목화가 그 나라의 이름을 듣고 미묘한 느낌을 받은 건 뉴오리진이 애쉬랜드 대륙 최북단에 자리한 소수 국가이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레 연상되는 것이 북방의 모처, 북방의 어느 병원, 북방 회사, 빙원 타이 시티였다.

게네바의 설명이 이어졌다.

“세 번째는 핸드폰 메모장에 저장된 주소야. 뉴오리진 플란 성 타이 시티 인혜 병원⋯⋯.”

“타이 시티? 인혜 병원?”

용여홍이 내뱉듯 외쳤다.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타이 시티는 구조팀의 다음 목적지로, 그곳의 제1 고등학교는 불가 5대 성지 중 하나였다. 더불어 식물인간이 된 방민서, 이진용의 아들이 실험적인 치료를 위해 이송된 병원이 바로 그 인혜 병원일 가능성이 컸다.

후자는 방민서와 이진용의 핸드폰에서 복원한 데이터에 기반한 추측이었다. 부부는 당시 근처에서 아들을 보살피기 위해 인혜 병원 부근의 하버 홈랜드에 방을 빌려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인혜 병원이 타이 시티에 있었구나⋯⋯.”

백새벽도 하나하나의 정보가 연결되는 것을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방민서와 이진용이 거주했던 장하시 연합 철강 공장도, 빙원 타이 시티도 모두 불가의 5대 성지였다.

이때 성건우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근데 타이 시티 불가 성지는 왜 인혜 병원이 아니라 제1 고등학교지?”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지⋯⋯.”

간단히 대꾸한 장목화가 흥분한 기색으로 게네바를 돌아보았다.

“주소 뒷부분에 다른 정보는 없어?”

“있을 거야. 근데 그 부분 데이터는 이미 완전히 파괴됐어. 지금은 이 주소 정보가 기록된 게 국제전화를 끊은 뒤라는 것만 판단할 수 있을 뿐이야.”

게네바가 솔직하게 말했다.

장목화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분석을 시작했다.

“국제전화를 끊은 뒤 이 주소를 적었고, 수십 분 후 택배 회사에 전화했다는 거지. 그 국제전화는 핸드폰 주인에게 뭔가를 찾아낸 뒤 뉴오리진 플란 성 타이 시티 인혜 병원에 보내라는 내용이었을까?”

그녀가 찾아낸 뒤라는 단서를 붙인 건 핸드폰 주인이 무려 45분이라는 시간을 들인 끝에야 택배 회사에 전화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건 뭐였을까요?”

용여홍이 의혹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와 장목화는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십자가 목걸이?”

그 물건은 핸드폰 주인의 유골 앞에 놓여있었다고 했다.

“그럴 가능성이 크네요.”

백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기이한 그 물건이 신세계와 연결돼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그것이라면 불가 성지와 충분히 관련돼 있을 수 있었다.

순간 흥분한 성건우가 말했다.

“그 십자가 목걸이를 찾아와야 할까요?”

장목화는 오른손으로 그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

이내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정색을 한 채 말했다.

“오늘의 수확은 타이 시티에서의 작전에 또 다른 방향이 생겼다는 거야. 지금까지 찾아낸 모든 단서가 과거를 가리키고 있어.”

용여홍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요. 빙원으로 가기 전에 9호 폐허를 돌아보면서 그 집에서 뭘 더 찾을 수 있을지 확인해야 할까요?”

한동안 고심하던 장목화가 답했다.

“일단 그럴 필요까진 없고. 9호 폐허는 아주 위험한 곳일 거야. 게다가 지금 우리한테 가치가 있을 만한 물건은 데이비스 팀이 다 챙겨갔을 거고.”

용여홍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그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일단 한발 물러섰던 것이었다.

뒤이어 게네바는 복원된 나머지 데이터도 하나하나 다 말해주었다. 지능인은 당연하게도 찾아낸 데이터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방법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더 이상 팀원들의 눈을 반짝이게 할만한 정보는 없었다.

데이터 복원 작업을 마친 뒤, 성건우는 곧장 육식주와 생명 천사 목걸이를 가지고 잠들었다.

일단 심령의 복도에 두 도구의 기운을 끌어들인 뒤 전처럼 마비된 다리를 옮기고 새로운 다리를 만들어낸 그는 퍽 기이한 자세로 912호에 들어갔다.

* * *

지난번 여객선에 오른 첫날로 되돌아온 성건우는 바로 그날 밤의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승객과 선원 대부분이 혼란과 광기에 차 있었다.

성건우는 생명 천사 목걸이를 차고 육식주를 쥔 채 본인의 의식을 육식주에 주입했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는 밤과는 전혀 다른 어둠이 떠올랐다. 실체가 없는 그것은 가볍게 일렁이며 소리 없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짝! 짝! 짝!

성건우는 자신을 향해 손뼉을 쳤다.

‘역시, 이 여객선에는 신세계의 교차점이 있었던 거였어!’

곧장 방을 떠난 그는 어둠을 따라 그것의 근원을 찾아 나섰다.

이동 중 거친 공격성을 드러내는 혼란자를 수시로 맞닥뜨리기도 했지만 인간 의식 감지력과 민첩한 움직임 덕분에 미리 피

할 수 있었다.

몇 차례 실패를 겪은 끝에 성건우는 마침내 어느 문 앞에 이르렀다.

문 뒤에는 잉크처럼 짙은 어둠이 자리해 있었다.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던 성건우는 소리 내어 웃었다.

“선장실이네⋯⋯.”

동시에 그는 마비되지 않은 왼쪽 다리를 들어 문을 걷어찼다.

쿵!

방 안의 선장은 언제나 그렇듯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며 아리아를 부르듯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전과 다른 점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성건우의 눈에 비친 그에게서는 어둠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몸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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