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2화. 규율
장목화는 금세 방안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도구는 모두 성건우의 전술 배낭 안에 들어있었다. 그 전술 배낭은 당연히 성건우가 메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곧바로 이 생각을 성건우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입으로 거품만 만들 뿐, 지프 안에 갇혀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쿵! 쿵! 쿵!
그 사이 게네바가 달려왔다. 그의 어깨에는 성건우가 걸쳐져 있었다.
지능인 게네바는 이 자리에서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소수 중 하나였다. 그 외의 다른 이들 역시 전부 로봇이었다.
다음 순간 손바닥을 내민 게네바가 지프 보조석 문을 당겨 열더니, 성건우를 장목화 앞에 내려놓았다.
“야가 너랑 얘기하고 싶어 해!”
게네바가 빠르게 말했다.
‘뭐야, 건우는 말을 할 수 있는 건가?’
장목화의 표정만으로 의혹을 눈치챈 건지 게네바가 얼른 덧붙였다.
“발로 이쪽을 가리켰어.”
‘발로?’
순간 장목화의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 찼다.
그 후 그녀는 성건우가 발을 이용해 오랫동안 청소된 적 없는 시멘트 바닥에 단어와 물음표 하나를 쓰는 것을 보았다.
「여객선?」
모래 먼지가 부연 바닥에 쓰인 그 단어를 본 순간, 장목화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뭘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도 바로 한쪽 발을 뻗었다.
이를 통해 그녀는 손으로 하려는 동작이 발로 구현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지금 이 혼란에 아무 규율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신경이 잘못된 위치에 연결돼있는 것 같았다.
장목화는 아주 어색하게 발을 움직여 비뚤비뚤한 글씨로 뭔가를 적었다.
「교차점, 도구」
현재 상황이 전에 말한 적 있는 신세계의 교차점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며, 도구를 이용해 그 교차점을 찾아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글을 다 쓴 장목화는 힘겹게 다리를 뻗어 성건우 어깨에 메여 있는 배낭에 걸어보려 했다.
하지만 굳이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금세 의중을 알아차린 게네바가 즉각 성건우의 전술 배낭을 벗긴 뒤 장목화에게 건네주었다.
동시에 장목화는 양발을 맞부딪혀 신발과 양말을 벗는 성건우를 보았다.
맨발의 성건우는 발로 손을 대체해 지퍼를 당겨 전술 배낭을 열었다.
옆에 있던 게네바는 붉은 눈을 번득이며 빠른 분석에 들어갔다.
“교차점⋯⋯. 도구⋯⋯.”
성건우의 노력까지 결합한 끝에 게네바는 얼른 결론을 내렸다.
“육식주와 생명 천사 목걸이를 꺼내주면 되는 거냐?”
성건우와 장목화가 동시에 눈을 깜빡였다.
게네바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성건우의 전술 배낭을 뒤져 육식주와 생명 천사 목걸이를 꺼내주었다.
그러곤 구조팀의 평소 습관에 따라 육식주는 성건우에게, 생명 천사 목걸이는 장목화에게 건네주었다.
성건우는 손을 쓰는 대신 오른발을 들어 염주를 집었고, 장목화는 뻣뻣하게 목걸이를 받아 목에 걸었다.
지금 장목화의 동작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이번에 마비가 찾아온 곳은 그녀의 오른발이었다.
뒤이어 두 사람은 모두 각각의 도구에다 동시에 의식을 주입했다. 의식 주입은 신경과 관련이 없었으므로 전혀 어렵지 않았다.
모닥불들의 춤사위 아래, 장목화와 성건우는 곧 야영장 어딘가에서 잉크처럼 피어올라 사방으로 확산되는 어둠을 발견했다.
희미한 별빛이 박힌 밤하늘보다 훨씬 더 짙은 어둠이었다.
‘역시.’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때, 성건우는 뭔가 기이한 동작을 취했다.
몇 차례 조정을 거쳐 규율을 찾아낸 성건우는 몸을 뒤집으면서 양손으로 땅을 받치더니, 물구나무를 선 채 어둠이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그 광경을 목격한 장목화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게네바는 금속 목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깨달음을 얻은 듯 중얼거렸다.
“어쩐지, 발로 육식주를 집더라니⋯⋯.”
이후 그는 장목화를 돌아보았다.
“도와줄까?”
장목화는 눈부터 깜빡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게네바의 도움으로 물구나무를 서는 데 성공한 그녀는 마비된 오른발과 왼발을 한데 묶었다. 목에 걸린 목걸이는 거의 떨어져 내릴 듯했다.
그들 셋으로 이루어진 일행은 곧 목적지를 향해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장목화는 그 어둠의 근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데이비스라는 유적 사냥꾼으로부터 기인하고 있었다. 핏빛 황원 9호 폐허에서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바로 그 유적 사냥꾼으로부터!
* * *
모닥불 옆, 데이비스는 구세계 군용차 머리 부분에 기대앉아있었다.
검은 트렌치코트 차림에 구레나룻까지 연결된 수염을 기른 남자의 눈빛에는 당황하고 두려운 기색이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반대로 지금 과장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거기다 입에서는 수시로 거품이 부글부글 올라왔으며, 눈은 경련이라도 하듯 빠르게 몇 번씩이나 깜빡이고 있었다. 양손까지 끊임없이 위아래로 흔들고 있는 그의 몸은 아예 허상의 어둠에 뒤덮여 있었다.
그의 왼쪽 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어둠은 안개처럼 때로는 물 같이 일렁였으며, 때로는 밤처럼 깊고 짙은 색을 보였다.
‘저 사람은 핏빛 황원 9호 폐허에서 막 돌아온 유적 사냥꾼이잖아. 저 사람도, 동료들도 고등 무심자 두 명에게서 벗어났다고 했었지. 그 폐허에서 뭔가 대단한 걸 얻은 건가? 신세계와 이어지는 물건? 번호가 붙은 폐허는 절대 만만한 곳이 아닌데.’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성건우는 구세계 체조를 시연하듯 물구나무를 선 채 두 다리를 벌리더니 그중 하나로 데
이비스를 가리켰다.
그 뜻을 이해한 게네바가 데이비스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게네바는 어둠의 근원을 보지 못했기에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지능인의 최대 강점이 무엇인지는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다.
무차별 대입 공격!
일단 데이비스의 트렌치코트에 끼워진 선글라스를 가리킨 게네바는 장목화와 성건우가 꼼짝도 하지 않자 다음으로 기계식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이렇게 한 번씩 확인을 거친 끝에 이번엔 검은 트렌치코트의 왼쪽 주머니를 가리켰다.
짝짝짝!
성건우가 박수하듯 맨발을 서로 부딪쳤다.
이 순간 장목화는 자신이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저 기괴한 장면을 보지 못해서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래도 그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성건우가 그 무시무시한 여객선에서의 혼란을 현실로 가져온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부분은 성건우가 맞부딪히는 발 한쪽엔 육식주가 걸려 있다는 점이었다.
긍정적인 반응을 확인한 게네바는 눈으로 붉은빛을 한번 번득인 뒤 금속으로 만들어진, 골격 형태의 손바닥을 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곧 그 안에 들어있던 한 가지 물건을 찾아냈다.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빛 은제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가로가 짧고 세로는 긴 십자가로, 표면에는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박혀 있었다.
그 순간 게네바가 거두려 했던 팔이 허공에 멎어버렸다.
반쯤 쪼그려 앉아있던 그는 눈으로 붉은빛을 끊임없이 번득였지만 은흑색 몸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목화와 성건우는 낡았지만 정교한 그 목걸이에서 밖으로 흘러넘치는 어둠을 확인했다. 어둠은 바람 한 점 없는 밤의 호수처럼 얌전했다.
이 광경을 본 성건우는 입술에 연달아 거품을 만들어냈다. 게네바를 불러 깨우고 싶었다. 말하려고 하면 거품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대체되는 걸 알았으니, 정말로 진지하게 거품을 만들어내려는 것이었다.
이 동작이 부디 말하려는 동작으로 대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더 복잡한 대응 규칙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입을 벌린 그는 정말로 소리를 내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다 짧은 음절에 불과했다.
“푸! 푸! 푸!”
그 소리는 장목화가 듣기에 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속으로 걱정도 됐다.
지금 게네바는 성건우의 외침에 그 어떤 호응도 하지 못했다. 악령에 씌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누군가 정지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데이비스의 옆에 멍하니 쪼그려 앉아있을 뿐이었다. 꼭 눈 부분에 등이 달린 조각상으로 변한 것만 같았다.
‘지능 로봇이라도 신세계 교차점과 접촉하면 영향을 받는 건가?’
머리를 굴린 장목화는 양손을 움직여 물구나무를 선 자세로 빠르게 데이비스와 게네바에게로 다가갔다.
성건우도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듯 말하려는 시도는 완전히 포기하고 두 손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 사냥꾼들에게는 너무나 우스워 보일 광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얼굴에는 전부 숨길 수 없는 충격과 공포가 어려 있었다.
마침내 게네바 곁에 이른 장목화는 한동안 조정한 끝에 겨우 오른손만으로 자신의 몸을 지탱했다. 그러고는 왼 다리를 들어 올리려는 의도로 땅에서 왼손을 뗐다. 그 순간, 장목화가 왼손을 거두고 약간 망설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성건우가 불모지 13호 유적 비밀 실험실에서 대량의 전류로 신세계 교차점에 충격을 가해 한동안 그걸 망가뜨렸던 것처럼, 전기 뱀장어형 생체 공학 의수에 저장된 고압 전류로 십자가 목걸이에서 흘러나오는 어둠을 잠시 제압하고 싶었다. 그 위험을 이전시킬 시간을 벌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사뭇 달랐다. 적어도 불모지 13호 유적의 비밀 실험실에 있던 신세계 교차점은 인간들을 혼란에 빠뜨리진 않았다. 그저 인공지능 퓨처가 전자파를 조종하는 통로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비교적 무해했던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신세계 교차점은 부근의 인간들에게 대대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마치 그 안에 모종의 의식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러니 고압 전류로 충격을 가할 때 그것이 실험실의 교차점처럼 수동적으로 당하고만 있으리라 보장할 수는 없었다. 장목화의 시도는 어쩌면 더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럼 구조팀 식구들 전체가 여기서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장목화는 다시 머리를 굴렸다. 이보단 양발로 핸들을 돌리고 액셀을 밟으며 차를 몰아, 이 야영지에서 멀리 벗어나는 게 더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다만 그러려면 정지된 게네바는 일단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로봇이 무심병에 걸릴 리는 없으니 이 이상 현상이 사라진 후에 구하면 될 터였다.
물론 도망치는 방법에도 잠재된 위험은 있을 수 있었다. 이미 어둠에 영향을 받거나 침식된 구조팀원들은 세상 끝까지 도망치더라도 이어질 무심병의 폭발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몇 초간 고심하던 장목화는 이를 악문 채 결정을 내렸다.
‘어쨌든 일단 고압 전류로 충격을 가하는 방법을 시도해보자! 도망으로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잖아! 고압 전류의 충격이 오히려 이상 현상을 가중한다고 해도 그때 다시 도망쳐도 늦지 않아.’
이러한 생각으로 동료를 잃을 수도 있다는 부담을 안은 장목화는 힘겹게 왼손을 들어 십자가 목걸이를 겨누었다.
파직-
쏘아져 나간 은백색 아크 줄기들은 마치 거대한 뱀처럼 뒤엉키더니 그 기이한 물건을 쥔 게네바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군용차 앞부분에 기대앉아있던 데이비스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있어 장목화가 뭘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시야에 들어찬 은백색 전광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십자가 목걸이에 떨어진 고압 전류에, 그곳에서 퍼져나가던 어둠은 격렬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순간 장목화는 끝없이 높은 곳에 자리한 어느 존재의 시선이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것을 느꼈다. 이에 온몸의 피는 얼어붙고 사고는 느릿해졌다.
하지만 그 느낌도 그녀를 침식했던 어둠이 물러나면서 생긴 환각인지 금세 사라져버렸고 모든 것은 곧 원상태로 돌아왔다.
주위의 사냥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던 데이비스가 내뱉듯 외쳤다.
“얼른 그 목걸이 버려!”
어둠이 이미 십자가 목걸이 안으로 물러났음을 확인한 장목화 역시 게네바를 재촉했다.
“5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버려! 묻어버릴 수 있으면 더 좋고!”
현재 미세한 전류에 휩싸인 게네바는 타르난에서 아내와 딸을 다시 만나는 꿈을 꾼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도 슬픔에 젖어있던 그의 귀에 장목화의 목소리가 꽂혔다.
게네바는 곧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수십 미터 떨어진 곳으로 도약했다. 그러곤 낡은 십자가 목걸이를 쥔 채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처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돌진하는 동안 게네바는 자체적으로 장착된 전기 충격 모듈로 손에 쥔 물건을 조준했다. 뭔가 이상한 낌새라도 보이면 곧장 조치를 취할 준비였다.
단 2분여 만에 게네바는 5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콰릉!
이 자리에서 그는 유탄 한 발을 발사했다. 그 여파로 심각하게 오염된 잡초가 무성한 황야에 얕은 구덩이가 하나 파였다.
게네바는 그 구덩이에 십자가 목걸이를 던져넣었다.
그 물건과 떨어진 게네바는 더 이상 급하게 굴지 않았다. 침착하게 진흙과 돌을 찾아 파인 구덩이를 꼼꼼하게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