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1화. 트라우마의 근원
둔덕 위의 바리케이드와 끊임없이 몰려드는 무장 인원을 살피던 살리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일단 주방에 숨어있다가 전투가 끝날쯤에 다시 나오자.”
그는 자신들이 무심자들에게 발각돼 포위라도 될까 봐 염려했다. 그럼 일행 중 능력자가 있어도 수적으로 너무 열세였다.
동시에 스페시 섬 주민들이 자신들을 무심자로 오해해 죽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감히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성건우가 알기론 신력 이전 시대의 생존자들은 무심병을 더더욱 잘 알지 못했다. 그들은 수시로 일어나는 재난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각종 극단적인 행위를 불사했다고도 했었다.
일반적으로는 승객이고 선원이고 대부분 다 무심병에 걸린 여객선에서 몇몇이 운 좋게 살아남았다 한들 바이러스를 가졌을지는 또 모르는 일이었다. 확실히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옳았다.
그냥 그들을 내버려 둬서 병을 확산시키느니 죽이는 게 나았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요한과 살리 등은 독특한 능력이 있는 각성자였다. 성건우도 그 사실을 몰랐다면 그들이 살아서 섬에 올라도 격리 조치를 받게 될 가능성은 없으리라 생각했을 터였다.
생존자 무리가 조심스럽게 선실로 돌아가는 사이 성건우는 사방이 빠르게 흐릿해졌다가 다시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앞에는 갑판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 갑판 위 승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성건우는 어느새 여객선에 처음으로 오른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이것도 트라우마 통과로는 못 쳐준다는 건가?”
턱을 긁적이던 성건우의 표정이 빠르게 묵직해졌다.
“그럴 만도 해. 522호랑 912호 방 주인은 아직 살아있어. 그건 그들이 당시 무심병에 걸리지도 않고 스페시 섬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는 거겠지.
그리고 방금 우리는 숨겨진 결말을 막 활성화하고 최후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만 알아냈을 뿐, 상응하는 두려움을 해결하지는 못했어.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이 두려움이 두 방 주인의 트라우마로 변했다는 거야.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 갑자기 무심자가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걱정했고, 나중에야 그 두려움을 천천히 극복했어. 어쩌면 그들은 한동안 다시 배에 오를 용기를 못 냈을지도 몰라.”
성건우가 다시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트라우마를 제대로 통과하려면 해결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어. 첫째론 현실에서 여러 번 배를 타보고, 무심자와 여러 번 접촉해 보는 거야. 그러면서 무심병 감염을 두려워하지 않는 감정과 상태를 이 안으로 들이고 변화를 확인하는 거지.
둘째는 이 트라우마 속 승객과 선원이 어째서 실제 사람처럼 나와 상호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알아내야 해. 셋째는 밤에 발생하는 이상 상황의 근원을 밝혀내는 거고.”
말을 마친 성건우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했다.
“아, 오늘은 정신력을 너무 많이 썼다.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 다시 하자.”
* * *
지프 안.
성건우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다시 잠들려는 대신 일어나 앉아 정면을 쳐다보았다. 앞 좌석엔 창밖에서 스며드는 흐릿한 모닥불 빛과 밤하늘 별빛에 기대 웅크려 앉은 장목화가 있었다.
불모지 13호 유적에서 무력감과 불안함을 느낀 장목화는 지난 며칠간 ‘쥐 죽은 듯 고요한 회사’를 배경으로 한 심령 섬 안에서 고군분투했다.
더 강해지고 싶은 마음으로 가족, 친구, 동료, 그리고 현재의 삶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깨부수려 최선을 다했다.
그녀도 자신이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그 두려움을 발목을 붙잡는 족쇄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으로 바꾸려 노력할 뿐이었다.
한 차례씩 조정을 거치면서 점점 좋은 성과를 내는 중인 장목화는 곧 정확한 방향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이내 그녀의 눈이 뜨였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린 장목화와 성건우의 눈이 딱 마주쳤다.
장목화가 먼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밤이잖아, 사람 좀 안 놀라게 하면 안 되냐? 막 기원의 바다에서 나와서 잠들려고 하는데 어둠 속에서 뭔가가 날 주시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왜, 이번 탐색에서는 무슨 수확이라도 있었어?”
성건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522호 방 주인 요한을 찾은 경과와 마지막 날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장목화는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
“결국 대다수를 휩쓴 무심병이 발발한 거구나. 혹시 그 전까지의 혼란은 어둠 속 침식의 표현이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침식된 힘이 점차 쌓이며 무심병이 폭발한 걸까?”
구조팀의 현재 수확과 판단에 근거한 추측이었다.
성건우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럼 여객선에 신세계와의 교차점이 있다는 뜻일까요? 그 교차점의 영향 덕분에 배에 탑승해 있던 사람들과 상호 활동이 가능했던 걸까요?”
“그래, 다음번에 한 번 찾아봐. 지금은 잠부터 자자!”
장목화는 성건우가 또 몸 상태도 생각하지 않고 당장 시도하려 할까 봐 일부러 힘주어 이야기했다.
성건우도 언제나처럼 괜한 고집 피우는 대신 차 문을 가리켰다.
“네, 일단 볼일부터 보고요.”
장목화가 의아해했다.
“자기 전에 다녀오지 않았어? 얼마나 지났다고 또 가?”
성건우는 성실하게 답했다.
“여객선에서 뭘 많이 먹고 마셨거든요. 신체적인 반응이 올 수밖에요.”
“⋯⋯.”
장목화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 * *
차에서 내린 성건우는 게네바를 불러 주차장 야영지 가장자리로 향했다.
바로 그때였다. 주위를 슥 둘러보던 그는 곁눈으로 기이한 광경을 봤다.
어느 사냥꾼들은 끊임없이 양팔을 휘두르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침으로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왁!”
놀란 성건우가 탄성을 내뱉으려 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건 침으로 맺힌 거품 뿐이었다.
“무슨 일이야?”
게네바 역시 이상 상황을 발견했으나, 이러한 상황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 정상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성건우도 게네바와 소통하고 싶었다. 다만 그럴수록 더 많은 거품만 만들어져서, 꼭 물 밖의 언덕 위로 던져진 한 마리 물고기가 된 느낌이었다.
한편, 불침번을 서던 용여홍도 성건우, 게네바가 멈춰 있는 걸 발견했다. 흐릿한 모닥불 빛에도 거품을 만들어내는 성건우의 모습이 보였다.
‘또 병이 도졌나?’
용여홍은 딱히 놀라지도 않다가, 다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니야, 또 병이 도지다니. 구조팀에 가입한 이래로 건우는 늘 병에 걸려 있었어. 단 한 번도 정상인 적이 없었다고!’
판단을 내린 즉시 용여홍이 모닥불 맞은편으로 움직이려 했다. 그런데 기함할 일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다리는 꿈쩍도 할 수 없었고, 양손은 절로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에서 떨어지더니 앞뒤로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왜 이러지?’
용여홍은 분명 내뱉듯 외쳤다. 그렇지만 그 말은 머릿속에서만 울려 퍼진 말일 뿐, 현실의 그는 입으로 거품만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도 이제는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연이어 용여홍이 황급히 백새벽을 돌아보며 주의를 주려 했으나 몸은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허리가 마음대로 굽혀지더니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인사만 하기 바빴다.
사실 백새벽은 용여홍보다 조금 더 일찍 문제를 알아차렸다.
불침번을 서던 그녀는 내내 이리저리 서성이며 주위를 관찰했지만, 지금은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양팔만 앞뒤로 흔드는 중이었다. 꼭 악몽이 현실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주차장 야영지 안의 다른 사냥꾼들 역시 이성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예기치 못한 동작을 취하는 구조팀을 멍하니 지켜보고민 있었다.
경험이 그다지 풍부하지 않은 이들은 자신이 번호가 붙은 유적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비슷한 기이한 일을 겪고 있는 모양이라고 의심했다.
반면 경험이 많은 이들은 어느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와 특수한 고등 무심자가 몰래 영향을 발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사냥꾼들은 굉장히 초조해했지만 얼굴에는 과장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별빛이 흐릿한 밤하늘 아래, 몇 군데 피워진 모닥불이 타오르고 주위에선 활짝 웃으며 양팔을 휘두르거나, 춤추듯 다리를 차올리거나,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 * *
지금 지프 안에 있는 장목화는 심령 세계에서 두려움으로 이루어진 섬을 극복하고자 적잖은 정신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그녀는 성건우가 묘사한 여객선 상황에 대해 생각하며, 약간 상기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성건우가 빨리 돌아와 잠들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다시 기원의 바다에 진입하기는 힘들어서 그런 방법에 의지해 곧장 잠들 수는 없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머리를 굴리던 그때, 장목화는 바깥이 무서우리만치 고요해진 것을 감지했다.
보통 이런 야영지에서는 한밤중이라도 이렇게까지 조용하지는 않았다.
마음에 드는 짝을 찾아 시끄럽게 이야기하며 으슥한 곳에 들어가는 이들도 많았고,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로 요란하게 신음을 하는 이들도 많았으며, 불침번을 맡아 옅은 맥주를 홀짝이며 경계와 수다를 떠는 이들도 많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 이런저런 소리가 들려왔건만, 지금의 야영지는 마치 무음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적막했다.
무의식적으로 대시보드를 향해 손을 뻗은 장목화는 그곳에 놓아둔 개인용 바주카포를 집어 들려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뻗은 건 손이 아닌 왼쪽 다리였다.
장목화는 입꼬리를 뒤틀며 뭔가 잘못되었음을 확신했다. 그녀가 뒤틀려고 했던 것도 사실은 입꼬리가 아니라 눈썹이었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먼 곳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게네바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목화는 바로 무슨 상황인지 묻고 싶었지만, 입에서는 소리가 아닌 거품만 만들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손으로 몸을 받치고 창문 밖을 내다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손바닥 대신 오른발이 뻗어졌다.
오른발이 밟은 곳은 보조석과 대시보드 사이의 깔개였다. 이로 인해 장목화의 자세는 굉장히 비뚤어지기는 했으나 어쨌든 몸은 곧추세워졌다.
그녀는 어깨를 차창에 기댄 채 힘겹게 밖을 내다보았다. 시선이 닿는 곳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기이한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장목화는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성건우가 말한, 그 여객선에서 밤마다 일어났던 이상 현상과 같았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또렷한 차이점이 있었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여객선 승객들은 모두 무의식 상태로 혼란과 광기에 어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야영지의 사냥꾼들은 활짝 웃고 있기는 했으나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아는 듯 눈에는 초조한 빛이 가득했다.
‘비슷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 이상 현상이라는 건가?’
장목화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야영지 안의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 대부분, 혹은 모두가 무심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과연 그렇게 되면 구조팀의 누구라도 무사할 수 있을까?
‘안돼!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장목화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만약 이 상황의 본질이 정말로 그 무시무시한 여객선 위의 혼란과 비슷하다면, 어둠의 힘이 이 부근의 어느 교차점을 통해 현실로 침식하고 있다는 뜻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이 야영지 안에 신세계와 이어지는 교차점이 있다는 건가? 정말 그렇다면 그 교차점을 찾아 어느 정도 망가뜨리기만 해도 이 영향을 일시적으로나마 없애고 다들 여기서 벗어날 틈이 생길지도 몰라.
그럼 신세계와 이어지는 교차점은 어디에 있을까? 육안으로는 볼 수 없을 텐데. 하지만⋯⋯. 그래, 육식주를 통해서든, 생명 천사 목걸이를 통해서든 어둠을 감지할 순 있어. 우리가 박사랑 퓨처에 대항했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