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630화 (630/649)

630화. 접안

어느 정도 복도를 따라 걷던 그때, 두 사람은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오는 둥그스름한 몸매의 선장을 발견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십 대 중년 남자의 웃음은 온화했고 눈빛은 또렷했다. 집착에 잠식돼 있던 어젯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인사를 받은 요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는커녕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끼며 몸서리를 쳤다.

어젯밤 아리아를 하며 구애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기억을 회상하는 선장은 아직도 선명했다. 그러나 그 혼란스럽고 무의식적인 상태의 사람은 어디로 가고, 날이 밝자마자 선장은 아무 문제도 없는 상태로 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선 누구라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요한에게 상대는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괴물처럼 느껴졌다. 햇빛 아래에선 인간 행세를 해도 밤이 되면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괴물.

“안녕하세요.”

오직 성건우만이 열정적으로 선장의 인사에 응했다.

그 사이 고민하던 요한이 떠보듯 물었다.

“선장님, 지난 며칠간 뭔가 좀 이상한 점을 느끼진 않으셨습니까?”

선장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모든 건 정상이었습니다. 무심병에 감염된 사람도 없었고요.”

요한은 더 이상의 질문을 하는 대신 얼른 작별을 고한 뒤 성건우와 함께 그의 선실로 향했다. 서둘러 짐을 싸고 갑판으로 먼저 나가 있다가 배가 접안하자마자 이 기이하고 무시무시한 공간에서 벗어날 작정이었다.

이동 중 그들은 일찍이 만난 적 있는 다른 사람들과도 마주쳤다.

미친 듯 식당차를 밀며 수시로 뒤돌아보던 그 겁에 질린 선원은 예의 바른 미소로 고갯짓으로 인사해왔고, 광기 어린 공격성을 보이던 남자 승객은 갑판 파라솔 아래 여유롭게 앉아 구세계에서 유행하던 소설을 읽고 있었다.

또 울고 웃기를 반복하던 여자도 뱃전에 기대 서서 미래를 기대하듯 온화한 표정으로 파란 바다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밤을 잠식했던 추위 역시 태양에 밀려 종적을 감춘 상태였다. 이제는 뜨듯한 온기마저 느낄 수 있었다.

이 강력한 대비에 요한은 겁을 먹었다. 상황이 정상적일수록 어젯밤의 혼란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겉보기에는 정상인 광경이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더 위험할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깊어졌다.

선장의 여신 다피티르를 마주한 상황에, 그녀의 발아래와 등 뒤의 어둠에 가려진 촉수들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안 돼! 이대로 접안할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어!”

선실로 돌아오자마자 요한이 내뱉듯 외쳤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뭐라도 해야만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맞아, 맞아!”

성건우가 동조했다.

전에도 여객선에서의 마지막 날을 여러 번 경험했지만 늘 배가 뭍에 닿기 전에 여객선에 처음으로 올랐던 그날로 다시 돌아가곤 했었다.

만약 요한을 따라 계속 어딘가 숨어있기만 했다가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책략을 선택했다가는, 전과 같은 결과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반드시 뭔가 다른 수를 써야만 했다.

긴장한 표정의 요한이 한참의 고민 끝에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대낮이 밤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적어도 밤에는 어떤 사람이 비정상이고, 정상인지 알 수 있잖아. 능력만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을 수 있어. 근데 지금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왜 끝내 뭍에 이르는 데 성공하는 사람이 몇 사람밖에 안 되는지 아무것도 몰라.”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사실 이 단락의 역사는 흐릿해. 왜냐하면 당사자인 네가 이와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침묵하고 있거든.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

그가 전에 알려준 결말은 성건우, 장목화가 한 추측에 지나지 않았다.

요한은 성건우를 잠시 응시하다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넌 정말 솔직하구나. 사기꾼이 아니야. 근데 내 생각에 미래의 내가 시종일관 이 일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결국 무슨 일이 벌어지기는 했을 것 같아. 최소한 여태 겪은 일 중에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되는 일은 없거든.”

‘미안, 거짓말인데. 난 실제로 미래의 널 만난 적이 없어.’

성실한 성건우는 이렇게 답하려 나섰지만, 성건우들이 합심해 심령 방의 바닥으로 잠시 내던져 놓았다.

요한이 다시 자문자답하듯 말을 이었다.

“좀 황당한 아이디어가 하나 있어. 밤이 안정적으로 느껴진다면 여객선이 접안하기 전까지 밤과 비슷한 환경에 숨는 거야.”

짝짝짝!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그런 뒤 곧장 제안했다.

“커튼을 치면 되지 않을까?”

요한은 고민했다.

“아니야, 그래도 너무 밝아. 너도 최근 날씨를 파악하고 있겠지만, 낮에는 버틸 수 있어도 밤에는 꽤 춥잖아.”

“그렇다면 추우면서도 어두운 곳을 찾아야겠네.”

성건우가 중점을 파악해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요한이 답을 찾았다.

“주방 냉동창고!”

에너지 소비에 인색한 선장은 오직 그곳만 온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좋아! 두꺼운 옷 좀 챙겨가야겠다.”

성건우가 의욕적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곰처럼 껴입은 두 사람은 무기를 가지고 몰래 주방에 잠입해 냉동창고에 들어갔다.

요한은 검은 장갑을 낀 두 손을 비비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진짜 춥네. 추위를 잊으려면 독한 술이 한 병 필요할 것 같아.”

며칠 여정을 거친 이때, 냉동창고 안은 이미 적잖게 비어있었다.

성건우는 손전등으로 냉동창고 안쪽 깊은 곳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그렇게 숨어들 있을 필요 없어.”

그 말에 요한도 비로소 냉동창고에 존재하는 몇몇 인간 의식을 느꼈다.

이내 남자 넷, 여자 세 명이 각기 다른 곳에서 걸어 나왔다. 요한이 감지한 인간 의식의 수와 다른 걸 보면 몇몇은 능력자인 듯했다. 또 거기엔 요한의 지인인 바람둥이 살리도 있었다.

“넌 왜 여기에 있어?”

요한이 먼저 묻자, 살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영성 직감이 알려주더라고. 밤과 비슷한 환경이 더 안전할 거라고. 게다가 여기엔 먹을 것도 있잖아.”

순간 흥분한 성건우가 물었다.

“영성 직감?”

살리는 약간 당황했다.

“아하하, 농담이야. 구시대 당시에 난 신비학 애호가였거든.”

양측 모두 한가로이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어서, 춥고 어두운 냉동창고에 각자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아 여객선이 접안하기만 기다렸다.

그리고 성건우는 또 한 차례 트라우마에서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여객선에 막 올랐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는지 확인했다.

전과 달리 주방 냉동창고로 돌아온 성건우는 바로 살리의 소리를 들었다.

“여객선이 접안한 것 같아.”

요한은 얼른 그의 동료, 미래인 ‘성’을 찾았다.

“성, 얼른 나와!”

“갈게, 가!”

성건우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옷을 두껍게 껴입은 아홉 명이 냉동창고 문을 열고 주방으로 나왔다.

그 순간, 주방에 있던 선원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눈동자는 혼탁했고 흰자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었으며,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씹어 삼키려는 듯 흉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심병!

그들은 전부 무심병에 걸려 있었다.

혼탁하고 충혈된 그 비이성적인 눈들이 성건우, 요한의 무리를 응시했다.

이미 이들은 무심자들 때문에 해변으로 쫓긴 뒤 여객선에 오른 사람들이었지만, 아무리 경험이 있다고 해도 그 상황에 덤덤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발끝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머리까지 한기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무심병에 감염된 선원들은 이들에게 무슨 생각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칼을 집어 들거나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면서 달려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두 주방에서 일하던 이들이라 총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냉동창고 입구에 서 있던 사람들은 구세계 파괴 이후로 끈질기게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여태 적잖은 경험을 해온 덕에 다들 머리에 하얀 서리를 얹은 채 추위에 바들바들 떨면서도 빠르게 반응해 손에 쥔 무기를 들어 올렸다.

“능력 사용에 주의해야 해!”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일렀다.

퍼뜩 정신을 차린 요한은 막 사용하려던 나태를 중단했다. 순간적으로 방금 그 외침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까닭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무심병이 폭발한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이전까지 며칠 밤에 걸쳐 발생한 혼란과 광기 어린 상황과 관련 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렇다면 무턱대고 능력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역시 혼란에 빠질지도, 심지어는 무심병에 걸릴지도 몰랐다.

탕! 탕! 탕!

다다다-

성건우를 비롯한 이들이 방아쇠를 당겼다. 대량의 총알이 난사되며 그들에게 달려들던 주방 선원들도 픽픽 쓰러졌다.

요한은 사방으로 튀는 피와 바닥에 쓰러진 시신들을 보다가 남들에게 뒤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주도적으로 외쳤다.

“밖으로 나가서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아. 기회가 생기면 최대한 빨리 이 여객선을 따라 섬에 상륙하자!”

그도 이제 더는 이 기이하고 무시무시한 여객선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성건우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요한과 생각이 같은지 약속이나 한 듯 무기를 들고 주방에서 빠져나갔다.

“그러면 안 돼! 아무런 전술도 없잖아!”

성건우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의 뒤를 쫓아 달리며 통한스러워했다.

그들에게 조금의 협동성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이 상태에서 냅다 뛰쳐나갔다가는 서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도 단번에 몰살될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 그들은 한 무리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요한과 살리를 비롯한 이들에게 경험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태 각자 싸우면서 경계만 했던 사이에 팀워크란 게 있을 리는 없었다.

다행히 복도에는 무심자가 없었다. 오랫동안 버려진 듯 텅 비어있었다.

주방에서 뛰쳐나온 이들은 순조롭게 1층의 소형 갑판까지 도착했다.

그 무렵, 귓가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총성이 파고들자 그제야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낮추고 사방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다다다-

기관총을 난사하는 듯한 소리는 여객선 밖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고개를 틀어 성건우를 바라본 요한은 상대가 이미 납죽 엎드린 채 갑판 가장자리를 향해 기어가고 있는 걸 발견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도 이내 성건우를 따라했다.

설리를 비롯한 이들도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가 그 신중한 태도에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팔꿈치로 몸을 받치며 빠르게 갑판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현제(舷梯)를 건너 뭍으로 가고자 아래쪽 대형 갑판 위에 새까맣게 모여있는 사람들이었다.

족히 일이천 명은 될 법한 그들은 머리 색은 각기 달랐지만 눈빛은 똑같이 혼탁했다. 수시로 야수의 것 같은 포효를 내지르는 그들 중 무기를 쥔 자들은 유리한 자리를 선점한 채 부두로 미친 듯 사격을 하고 있었다.

무심병!

이 모든 승객과 선원이 무심병에 걸린 모양이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요한과 살리 무리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몸은 굳은 듯 뻣뻣해졌다. 벼락이라도 맞은 모양새였다.

사실 이들에게 이런 광경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구세계가 파괴되었을 당시 많든 적든 목격한 적 있는 모습들이었다.

밀집된 총소리와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포효, 다시 세계의 종말이 강림한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거의 동시에 성건우는 주위가 실체를 갖춘 듯 묵직해지는 걸 느꼈다. 그는 마치 912호 방 주인이 된 듯 당시 심경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었다.

일단 냉동창고에 숨어 무심병에 걸리지 않고 한 차례 재난을 피한 걸 다행으로 여기고 기뻐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을 비롯한 이들이 대체 어떻게 이성을 유지한 건지, 앞으로 이와 비슷한 일을 맞닥뜨리면 저 무심자들처럼 될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미지의 안개 속에선 누구도 감히 뭔가를 확신할 수 없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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