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629화 (629/649)

629화. 선장의 구애

사진 속 주인공은 상당히 아름다운 여자였다.

갈색의 긴 머리와 매혹적인 파란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활짝 웃는 미소가 참 밝고도 매력적이었다.

각기 다른 사진 속에서 그녀의 나이도 점차 달라졌다. 가장 오래된 사진에선 열일고여덟 살 정도로 치어리더 유니폼 차림이었고, 제일 나중에 찍은 사진은 스물다섯에서 여섯 살 정도로 모자와 미니스커트 차림에 라켓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 사람이 선장의 여신인가?”

갑자기 요한의 등 뒤에서 성건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요한은 몸을 반쯤 돌리며 상대를 힐난했다.

“어떻게 아무 기척도 없이 다가온 거야?”

“여기 카펫이 깔려있으니까.”

성건우가 성실하게 설명했다.

그는 다시금 사진들로 시선을 돌리며 상기된 호기심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짝사랑했나?”

성건우의 말투에 요한은 사촌 누나 한 명이 떠올랐다. 구세계가 파괴되지 않았을 때, 누나는 이런 모습으로 어느 연예인에 대해 얘기하곤 했었다.

요한도 곧 사진들을 자세히 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선장에게 욕을 했다.

“짐승!”

“왜?”

성건우가 눈을 번득였다.

요한은 바로 사진들을 가리켰다.

“이렇게 어린 여자를 여신이라고 부르잖아! 자기 나이는 생각도 안 하나?”

선장은 최소한 마흔은 넘어 보였다.

성건우는 요한을 잠시 훑어내리다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질투하는 거야?”

“지, 질투할 게 뭐가 있어?”

요한이 강경하게 반문했다.

솔직히 그는 약간 질투하고 있었다. 사진 속 여자는 연예인만큼 예뻤다. 그런 사람이 선장과 감정 교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그는 구세계 파괴전, 내성적인 성격 탓에 여자 친구는 단 한 명도 없던 사람이었다.

성건우는 어느새 사진을 살피고 있었다. 사실 눈치가 그래 보였던 거지, 요한이 정말 질투하는지는 별 관심도 없어서 사진만 유심히 관찰했다.

“하긴. 근데 이거 변색 된 정도로 보면 꽤 오래된 사진인 것 같아.”

요한은 그제야 모종의 깨달음을 얻었다.

‘이 사진들, 구세계 파괴 전에 찍은 것들이겠구나. 당시에는 선장도 20대 청년이었겠지.’

게다가 사진 속 여성의 나이도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가장 오래된 사진 속 앳된 모습처럼 그때는 선장도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는다면 애정도 얼마든 충분히 생길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요한은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서사를 짰다.

“선장은 이 여자를 짝사랑하고 있었지만, 여자한테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그래서 선장은 몰래 이 사람 사진을 모으며 홀로 환상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러다 구세계가 파괴되고 두 사람은 더 이상 연락할 수 없게 됐어. 이후 선장은 혼란한 상태에 처할 때마다 환각을 보며 마음에 억눌러 놓았던 갈망을 표출하는 걸까?”

성건우는 그의 말에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그럼 여신님은 내 몸 안에 계신다는 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어?”

요한 역시 저도 모르게 토론의 분위기 속에 빠져들었다.

“환상 속 광경일지도 모르지. 우리 문화권에서는 ‘두 사람의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합쳐진다’란 말로 애정을 표현하곤 하거든.”

“내 생각은 달라.”

성건우가 고개를 저었다.

요한이 자신을 돌아보자 그는 바로 설명에 나섰다.

“일단 두 사람이 연인이 아닌 건 확실해. 안 그럼 선장이 독사진만 가지고 있을 리는 없겠지. 사진 중에 두 사람이 함께 찍힌 사진은 없잖아.”

“맞네!”

요한이 미래인의 추리력에 감탄했다.

기세를 몰아 성건우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구세계 파괴 후, 상대를 짝사랑하던 선장은 여자를 구하려고 했어. 하지만 다른 남자랑 동고동락하며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여자를 보게 된 거야.

어마어마한 질투와 실망으로 선장은 질서가 사라진 종말의 환경 속에 이성을 잃고 말았어. 바로 자기 여신이랑 그 사람 남자 친구를 죽인 거야.

그 후에 먹을 게 부족해지자 선장의 눈은 여신의 시신으로 향하게 되고⋯⋯. 자기 몸속에 여신이 있다고 말하는 건 그 때문인 거야.”

음산한 미소를 짓는 성건우를 보며, 요한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속이 다 울렁거리는 이야기였다.

지금껏 요한은 운이 꽤 좋은 편이었다. 구세계 파괴 후 여태껏 먹을 걸 찾는 데 실패한 적이 없었다. 제일 오래 굶은 시간도 사흘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그토록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짓을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요한은 미래인의 추측이 지나치게 어둡고 극적이라 생각했다.

“즈, 증거 있어?”

성건우는 상대에게 한 수 가르치듯 대꾸했다.

“이게 바로 대담한 가설이라는 거야!”

“⋯⋯.”

요한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여신님은 내 몸 안에 계신다는 말은 여전히 으스스했다. 성건우의 추측을 완전히 부정할 수만도 없었다. 그래서 요한은 한발 물러났다.

“계속 단서를 찾아보자.”

두 사람은 다시 흩어져 각자 한쪽을 맡아 방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러다 요한은 또다시 질투가 치밀어올랐다. 방에는 술 저장고도 있었다. 그것도 구시대의 이름난 술들이 아주 많이 저장돼 있었다.

“제기랄, 히터는 안 틀어줬으면서 여기선 에너지를 펑펑 쓰고 있었네!”

요한이 분통을 터뜨렸다.

자비 없는 선장 때문에 그를 비롯한 승객들은 겨울날과 바닷바람의 민낯을 제대로 마주해야 했었다.

“몸에 축적된 지방이 많아서 본인은 별로 안 추웠나 봐.”

어느새 이쪽으로 돌아온 성건우가 말했다.

요한은 또 선장의 몸을 한번 보고 그 추측을 받아들였다.

구세계가 파괴된 이후, 식량이 매우 결핍된 상황에서 그만한 몸매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건 자원의 결핍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내 요한이 다시 대화 주제를 본론으로 돌렸다.

“무슨 단서라도 찾았어?”

성건우가 진지하게 물었다.

“선장이 사탕 먹는 걸 좋아하고, 휴지를 보통 사람보다 많이 썼다는 것도 단서로 쳐줘?”

“아니.”

요한이 단호하게 답했다. 그는 실망감도 감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맡은 쪽에도 유용한 단서는 없었고, 이 방의 탐색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성건우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저 사람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아.”

그 엄숙함에 전염된 건지 요한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시도해보자.”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성건우가 돌연 또 흥분한 얼굴로 돌아섰다.

“왜 그 여자가 당신의 여신이라고 생각해?”

‘밤에 일어나는 이상 현상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던 거 아니었어?’

요한은 도저히 성건우의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내 막 또 한 차례 아리아를 마친 선장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 여인의 아름다움은 이른 아침 태양과 같고, 그 여인의 선량함은 순결한 천사 같지. 난 일찍이 중병을 앓게 되는 바람에 골수 이식이 필요했는데, 마침 나한테 맞는 골수를 가진 그 사람이 나서줬어.”

‘그렇구나. 그래서 여신이 자기 몸 안에 있다고 한 거였어.’

역시 그 어처구니없는 추측이 맞을 리가 없었다. 좋아하던 여자의 살을 먹은 것도, 그녀와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합쳐진 것도 아니었다.

“정말 천사네!”

성건우가 선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는 밤에 발생하는 이상 현상에 대해 물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선장의 눈빛에 혼란이 어렸다. 무의식적인 상태에 처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 상태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여인은 치어리더팀의 팀장이기도 했어. 활발하고, 열정적이고, 테니스도 잘 치고, 춤도 잘 췄지⋯⋯.”

“대단하네!”

성건우가 감탄했다.

계속해서 선장의 말이 이어졌다.

“머리도 좋았어. 얼굴만 예쁜 사람이 아니었다고. 대학교 다닐 때 논문도 발표했었으니까. 졸업 후에는 어느 실험실에 들어가 연구자가 됐고⋯⋯.”

내내 활짝 웃고 있던 성건우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손을 들어 가만히 턱을 쓰다듬던 그는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반문했다.

“연구자?”

흰색 침대보를 걸친 선장은 아리아를 부르듯 성건우의 반문에 답했다.

“지혜와 미모를 겸비한 그 여인은 천사이자 여신이지. 그 여인은 운동장의 장미이자 실험실의 수정이야!”

“……대체 오페라를 얼마나 본 거야?”

성실한 성건우가 물었다. 그 질문에는 또렷한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선장은 그에게는 신경 쓰지 않고 재차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계속해서 구애하려는 듯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 여신, 이름이 뭐야?”

옆에 있던 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성건우가 쓸데없는 데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 감정이 지금 상황에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야?’

그렇지만 요한도 여신에 관한 질문이 아니면 지금 혼란한 상태의 선장은 그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요한 역시 꾹 참고 얌전히 듣기만 했다. 아무 쓸모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화제를 통해서라도 단서를 얻어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성건우의 질문을 들은 선장은 천장에서 시선을 떼더니 환하게 웃었다.

“다피티르 오스라.”

거의 동시에 성건우와 요한은 창밖의 어둠이 더 짙어지는 걸 느꼈다.

내내 불어오던 겨울날의 바닷바람도 한순간에 다 멎어버린 것 같았다.

아마도 이는 두 사람의 환각, 혹은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한 착각에 불과한 듯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자 모든 것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손을 들어 턱을 쓰다듬던 성건우가 요한에게 말했다.

“네가 한번 해봐.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안 나네.”

“그런 것 같다.”

요한은 약간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자신에게는 아무 방법도 없는데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상대를 보고 있어야 하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한발 앞으로 나선 요한은 몇 가지 질문을 떠보듯 던졌다. 하지만 여신에 관한 질문이 아니면 선장은 정말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리아를 부르며 구애를 하거나 눈물을 흘리며 기억을 회상할 뿐이었다.

요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사람한테서 문제의 근원을 알아낼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러자 동정심이 넘치는 제도 선사가 그에게 위로를 건넸다.

“다른 데 숨어있다가 날 밝으면 다시 찾아봅시다. 당신은 내내 정상이었으니 마지막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당신까지 끌고 들어가진 않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

요한은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선을 몇 개 그리며 구시대에 믿었던 신을 향해 기도했다.

* * *

쌀쌀한 밤, 선장실을 떠난 두 사람은 근처의 빈방에 숨어들었다.

성건우가 이 트라우마에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오자 예상했던 대로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이때 여객선의 스피커에서는 오늘 목적지인 스페시 섬에 접안할 예정이니 모두 짐을 잘 챙겨뒀다가 순서대로 하선하라는 안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던 요한은 눈을 비비며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나가볼래?”

배 안의 상황을 살피고 위험의 징조가 있는지 확인하자는 제안이었다.

“좋아!”

성건우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대해왔던 양 즉답하곤, 대담하게 문을 열고 나가는 요한의 뒤를 바짝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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