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8화. 결정은 네 몫이야
검은색 긴 팔 티셔츠 차림의 요한은 문 앞으로 다가가도 나가는 데 급급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틀고 일단 나무판으로 만들어진 벽에 착 달라붙어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저 멀리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근처는 고요했다.
요한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려 바깥을 내다보았다.
카펫이 깔린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시간에는 다들 식당에 가 있겠지?”
요한의 등 뒤에서 성건우가 여유롭게 물었다.
요한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똑같을 순 없어. 먼저 가는 사람도 있고, 좀 늦을 수도 있겠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엘리베이터 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선원 제복을 입고 있는 그는 식당차 하나를 끌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겁에 질린 얼굴로 수시로 뒤를 돌아보는 그는 무시무시한 생물에게 쫓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요한의 눈엔 상대의 뒤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밖으로 한 발 나선 요한은 그 선원과의 소통을 시도해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그런데 선원은 요한과 성건우를 투명 인간 보듯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식당차를 끌며 1층 갑판으로 달려갔다.
요한은 여객선에 탄 사람 중 극소수를 제외하곤 다들 밤이 되면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상태에 진입하게 된다는 성건우의 말을 다시금 믿게 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방과 비스듬히 마주한 방문이 뒤로 당겨지면서 적잖은 틈을 벌렸다.
그 안에서 고개를 쏙 내민 건 상의를 벗은 레드리버인 남자였다. 그는 극도로 공포에 일그러진 얼굴로 계속 뒤돌아보며 달리는 선원을 바라보았다.
이후 그는 정상인 같은 요한과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요한은 그 남자의 방에서 거의 벗은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노출이 심한 옷차림의 여성이 고개를 마구 흔들며 울고 웃는 모습을 목격했다.
쾅!
남자는 방문을 바로 닫았다.
“저 사람도 멀쩡하네.”
요한이 퍽 실망스럽다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누군데?”
성건우가 호기심을 드러낸 순간, 요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름은 살리. 저 사람도 능력자야. 여자 희롱하는 걸 좋아하는 부류.”
이 시대에 각성자를 부르는 호칭은 통일돼 있지 않았다. 그들, 혹은 스스로를 능력자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었다.
“저 사람 질투해?”
성실한 성건우가 물었다.
요한의 안색이 바로 어두워졌다.
“그럴 리가! 질투할 만한 부분이 어디 있다고.”
성실한 성건우는 성실하게 감탄했다.
“오, 질투심이 꽤 강하네.”
요한의 표정이 구겨짐과 동시에 인격이 바뀐 성건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근데 네가 질투를 느낄 만한 부분이 하나도 없는데. 넌 시대의 아들이잖아. 구세계 파괴 원인 관련된 일을 두 번이나 겪고도 살아남은 시대의 아들.”
요한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방금 네가 한 농담, 하나도 안 웃겼어. 동료한테 거짓말하냐고 묻는 건 정말로 안 좋은 거야.”
“맞아, 맞아.”
성건우가 호응했다.
그렇게 잠시 마음을 다스리며 생각하던 요한이 목소리를 낮췄다.
“살리는 능력자야. 나도 그렇고. 우린 둘 다 네가 말한 혼란스럽고 광기 어린 상태가 아니야. 어쩌면 능력자는 영향을 안 받는 건지도 몰라.”
“음, 그건 그냥 네 생각일 뿐이야.”
대답을 듣고 요한이 혼란에 빠진 듯하자, 성건우가 다시금 설명했다.
“내 경험에 따르면 능력자도 밤중에 능력을 쓰면 저런 상태에 감염돼. 무질서하거나 광기 어린 모습으로 변한다고.”
“경험?”
요한이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하지만 금세 또 알겠다는 뜻을 표했다.
시공을 초월해 현재에 이른 미래인 성건우는 이런 작업이 처음이 아닐 수도 있었다. 전에 언젠가 무턱대고 능력을 사용했다가 혼란스러운 상태에 감염되면서 강제적으로 미래로 되돌아간 모양이었다.
“다른 곳에도 가볼래? 식당 상황이 꽤 다이나믹할 것 같은데.”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성건우가 종용했다.
하지만 요한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은 뭘 검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앞으로 며칠은 밤이 되면 선실에 숨어서 밖으로 나가지 말자. 낮에도 최대한 그러는 게 좋겠어. 수시로 숨는 장소를 바꿔야 하기도 할 거고.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가는 대신 주방에 몰래 숨어드는 거야.”
“좋아.”
성건우는 약간 실망한 듯 풀이 죽었다가 갑자기 또 박수했다.
“너 진짜 신중하다!”
칭찬받은 요한의 표정은 점차 원래대로 돌아왔다.
* * *
그렇게 성건우는 몇 차례의 진출입을 반복한 후, 요한과 마지막 날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깥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어두운 주방 구석에 웅크린 두 사람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났을 무렵, 여태까지 오랫동안 고민한 듯한 요한이 입을 벌리더니 느릿하게 말했다.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무시무시하고 기이한 사건을 그냥 숨기만 해서 피할 수 있을까?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
“난 모르지.”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이에 요한이 화들짝 놀랐다.
“미래의 나를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여기서 내가 끝내 어떻게 도망쳤는지 안 물어본 거야?”
“네가 답을 거절했어.”
성건우는 문제의 책임을 당당히 상대에게 떠밀었다.
“내가 답을 거절했다고?”
재차 생각에 빠진 요한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신이 이 상황을 헤쳐나온 과정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토대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듯했다.
결론은 아주 쉽게 도출되었다. 만약 단순히 어딘가에 숨어 마지막 날까지 버티다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었다면 굳이 말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요한이 주방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성건우에게 말했다.
“네가 그랬지. 이 배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 극소수였다고. 지금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혼란과 광기에 잠식돼 있지만 날이 밝으면 정상으로 돌아와. 그리고 여객선은 내일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이고.
저 사람들은 결국 어떤 무시무시한 일을 겪게 돼서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는 걸까? 그 일, 우리한테도 발생하진 않을까?”
고민하던 성건우가 성실하게 답했다.
“모르겠어.”
요한은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선장실에 가봐야겠어. 이 여객선 주인이잖아. 지금과 같은 이상 상황이 원래부터 있던 거라면 그 사람도 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거야.”
“결정은 네 몫이야. 난 역사에 간섭할 수 없어.”
성건우는 표정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
결심한 요한은 옷을 단단히 여민 뒤 주방 출구로 향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이 해역은 남쪽인데도 밤이 되면 여전히 추웠다.
요한의 뒤를 따라나선 성건우는 무엇인지 모를 옷을 집어 몸에 두르며 이 겨울밤의 추위에 대항했다.
두 사람은 감지되는 인간 의식에 의지해 혼란과 광기에 빠진 승객들과 선원을 우회했다. 특히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은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그들은 마침내 선장실에 이르렀다.
굳게 닫힌 문 안에선 수시로 고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요한은 퍽 실망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선장도 혼란과 광기에 찬 상태로 변했나?”
그렇다면 무엇을 물어봤자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하리라는 뜻이었다. 공격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요한은 길게 망설이지 않고 손잡이를 돌리려 했다.
그런데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할게!”
성건우가 문을 걷어차서라도 열려는 듯 의욕적으로 나섰다.
그를 보고, 요한의 눈에 의혹이 번졌다.
“역사에 간섭할 수 없다며?”
성건우는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내가 문을 안 열면, 넌 포기할 거야?”
“하긴.”
요한은 또 금세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성건우가 문을 걷어차서 연다고 한들 역사는 바뀌지 않을 것이었다.
쾅!
성건우가 오른발로 문을 냅다 차서 열었다.
요한은 곧장 안쪽 상황을 들여다보았다.
얼굴과 배가 상당히 둥근, 이 혼란의 시대에도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은 듯한 40대 남자가 흰색 침대보를 걸친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는 갑자기 열린 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아리아를 부르듯 목소리를 높이기 바빴다.
“오, 나의 여신님! 제 사랑을 받아주십시오!”
‘이 사람도 미쳤네.’
고개를 틀어 성건우를 바라보던 요한이 망설이다 말했다.
“우리가 알아서 찾아보자. 이 방에 무슨 단서가 숨어있을지도 몰라.”
성건우는 그 제안에 응하지 않고 선장을 보며 친절하게 이야기했다.
“당신의 여신님은 여기 없어.”
순간 홱 돌아선 선장의 얼굴에 광기와 집착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목청을 높였다.
“여신님은 내 몸 안에 계셔!”
그 말을 들은 요한은 몸서리를 쳤다. 구세계가 파괴되기 전, 어린 시절에 어쩌다 실수로 공포 영화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중요한 건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선장이 성건우의 말에 대꾸했다는 점이었다.
지금껏 요한과 성건우가 만난 혼란과 광기에 찬 상태의 사람들은 애초에 교류가 불가했다. 아무 말도 없던 건 아니었지만 그냥 헛소리에 가까운 말만 할 뿐, 선장처럼 묻는 말에 답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대부분은 숨어있었던지라 요한이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본 건 아니었다. 그래서 선장 같은 사례가 특수한 건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건 요한의 관심 분야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궁금한 것은 단 하나였다.
‘선장과 대화가 가능한 걸까? 나랑 미래인이 저 사람 입을 통해 뭔가를 들을 수 있을까?’
정신을 차린 요한은 허공을 향해 사랑을 갈구하는 선장을 떠보았다.
“밤에 발생하는 이상 상황의 근원이 뭔지 알아?”
휘이-
겨울밤 찬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밀려들었다.
요한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선장은 전의 아리아를 반복했다.
“오, 나의 여신님! 제 사랑을 받아주십시오!”
요한의 미간이 구겨졌다.
동시에 그의 곁에 있던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 매력이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네.”
“이게 매력과 무슨 상관인데?”
요한이 투덜거렸다. 혹시 여신과 관련된 주제만이 선장을 혼란, 광기, 무의식 상태에서 조건 반사적인 반응을 하게 하는 걸까? 정말 그렇다면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요한이 성건우에게 말했다.
“이 사건의 배후 원인을 알아내고 싶다며. 그러니까 흩어져서 이 방을 수색해보자. 뭐라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
“좋아!”
성건우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양 응했다.
이내 요한은 방 중앙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사랑을 갈구하거나 이리저리 서성이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선장을 무시한 채 곧장 책과 종이 등이 놓인 붉은색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의 책들은 전부 구세계 파괴전에 유행하던 것들이었다. 그중 몇 권을 읽은 적 있는 요한은 그것들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조심스럽게 그 책들을 집어 들고 탈탈 털어보며 안에 뭔가 끼워져 있는지 확인했다.
그 순간, 그의 예상대로 책장 사이에 끼워져 있던 것들이 떨어졌다.
책상 위로 팔랑팔랑 떨어진 건 약간 누렇게 변색한 사진 몇 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