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화. 미래인 성건우
데이비스 일행이 정말 고등 무심자 둘을 만나고도 도망치는 데 성공했는지, 그들을 죽이고 승리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이 9호 폐허에서 살아 돌아왔으며, 풍성한 수확을 얻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유적 사냥꾼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데이비스는 일행과 중앙 근처 자리를 찾아 앉더니 주위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 내용은 이번에 9호 폐허에서 겪은 일들이었다.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그 폐허 상황과 두 고등 무심자의 능력과 기이한 점을 설명하며, 무심자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를 낱낱이 표현했다.
9호 폐허로 가서 모험하고 싶어 하는 유적 사냥꾼들 시선은 점점 그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시로 한 마디씩 끼어들거나 데이비스 일행을 치켜세우면서 유용한 정보를 더 많이 알아내려 했다.
데이비스가 두 고등 무심자와 어떻게 싸우고 겨뤘는지, 그들의 기이한 영향에서 벗어나 폐허로부터 탈출하기까지 무용담을 끝내자, 모닥불가 어디에서는 박수갈채까지 터져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던 용여홍은 그 박수 세례의 주인을 발견했다. 성건우가 어느새 그들 틈에 끼어 초롱초롱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근처의 유적 사냥꾼들 역시도 느닷없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가 곧 성건우를 따라 손뼉을 쳤다.
데이비스 일행도 처음은 멍한 얼굴이었다가 결국은 사람들의 반응에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이런 장소에서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약간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충분히 자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남들의 관심에서 비롯되는 이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생김새가 예쁘장한 여성 유적 사냥꾼의 눈빛이 달라진다는 것도 그런 이득 중 하나였다.
애쉬랜드에서 태어나 황야에서 자란 이들은 늘 죽음과 가까운 처지를 인정하고, 기회가 된다면 육체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일에 있어 주저하지 않았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데이비스는 가장 먼저 손뼉을 치기 시작한 성건우를 향해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상대가 굉장히 눈치 빠르고, 눈썰미 있고, 영특하다고 생각했다.
격려를 받은 성건우는 더욱 힘껏 손뼉을 쳤다.
* * *
데이비스 일행의 모험기를 듣고 9호 폐허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구조팀은 통조림과 압축 비스킷을 이곳 거점에서 유행하는 맑은 물을 대체할 옅은 맥주와 염장을 해 겨우내 보존한 야생 짐승 고기로 바꿨다.
이곳에서 구한 음식으로 이루어진 저녁 식사는 그다지 특별하거나 맛있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느낌은 있었다.
배불리 먹고 마신 성건우가 웃으며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방금 그 고기, 어떤 동물인지 알아?”
용여홍은 능숙하게 대처했다.
“몰라. 얘기해 줄 필요도 없고!”
알아봤자 비위만 상하고 음식만 낭비될 뿐이었다.
무엇보다 더 기분 나쁜 건 성건우는 보통 정답도 아닌 걸 제멋대로 댄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비위가 상한 용여홍이 먹은 걸 토해내면 그제야 뭐 아닐 수도 있다고 덧붙이는 식이었다.
연이어 장목화가 성건우를 재촉했다.
“좋아, 이제 지프에 가서 눈 좀 붙여. 오늘 네 임무는 그 여객선에서 522호 방 주인을 찾는 거야.”
성건우도 그에 다시 흥미가 동했는지, 곧장 지프로 가볍게 뛰어갔다.
* * *
심령의 복도 912호, 여객선 배경의 트라우마 안.
성건우는 몇 차례 진입과 출입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여객선에 오른 첫날의 저녁 무렵으로 다시 돌아갔다.
도착한 후엔 갑판에 머무르지 않고 곧장 선실 입구로 향했다.
외부에 있는 승객과 선원들에게는 이미 질문을 다 마쳤고, 그들 중에 522호 방 주인은 없었다는 걸 분명히 확인했었다.
그렇게 복도로 들어간 성건우는 느껴지는 인간 의식을 따라 순서대로 선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 과정에 첫째 날 이후에 물어봤던 사람들을 만나면 곧장 미안하다고, 문을 잘못 두드렸다고 말하면서 상황을 마무리했다.
반면,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에 대한 기억이 잘 나지 않으면 그와 친구를 맺으면서 질문하는 과정을 신중하게 반복했다.
어느덧 5층까지 이른 성건우가 한 방문을 두드렸다.
이번에 문을 열고 나타난 건 젊은 남자였다. 나이는 20대, 키는 180센티미터 정도로 보였다. 그는 도안이 그려진 검은색의 낙낙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머리가 지저분하게 눌려 있는 것이 방금 막 잠에서 깬 듯했다.
“당신은?”
남자가 파란 눈으로 성건우를 슥 훑으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동시에 한 손은 슬그머니 허리 뒤로 향했다. 거기에 있는 뭔가를 꺼내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성건우는 여유롭게 웃었다.
“우리가 이렇게 같은 배에 탄 건 우리 애쉬랜드인 말로는 인연이고, 당신 같은 레드리버인 말로는 운명이지. 운명에 따라 만나게 됐으니 우리는 부모만 다른 형제인 셈이야.”
궤변에 가까운 사유 유도 아래, 남자의 표정이 점차 누그러졌다. 남자는 즉각 허리 뒤로 가져간 오른손을 거두고 약간 원망 섞인 얼굴로 말했다.
“나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지난 이틀간 진짜 수많은 무심자한테 쫓겨서 눈 한번 못 붙였다가 이제 겨우 잠든 건데.”
성건우가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너한테 중요하게 물어볼 게 있어서. 아, 참. 이름이 어떻게 돼? 같은 배에 탄 부모만 다른 형제가 워낙 많아서, 기억이 잘 안 나네.”
그의 말에 설득된 젊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 원래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진 레드리버어로는 존이라고도 하고. 근데 난 우리나라 특색이 있는 요한이란 발음이 더 좋아. 질문이 뭔데?”
이 틈에 또 장목화를 흉내 내며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성건우가 짐짓 여유로운 자세로 물었다.
“아이언마운틴 시티 폐허에 가봤어?”
미묘한 표정 변화를 보인 요한은 순간 대답 대신 반문을 했다.
“그건 왜 물어?”
성건우의 눈동자에 흥분한 빛이 어렸다.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에 가본 거야?”
그의 질문은 어느새 애쉬랜드어로 바뀌어 있었다.
요한은 그 말을 알아들은 듯 얼굴에 충격과 경계가 동시에 드러났다.
“어떻게 알았어?”
단 한 번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비밀이었다.
또한 그는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에 가서 기이한 일을 겪은 이후로 일반인을 초월하는 기이한 능력도 얻었었다.
‘드디어 522호 방 주인을 찾았어!’
성건우는 비로소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는 그를 따라 몇 차례 더 혼란스러운 밤을 견디기만 하면 이 트라우마를 통과할 수 있을 터였다.
이내 목소리를 잔뜩 낮춘 성건우가 조용히 말했다.
“비밀 하나 알려줄게. 난 미래에서 왔어. 나이 든 너랑 교류한 적 있고.”
“그럴 리가!”
요한이 내뱉듯 외쳤다. 상대가 자신을 놀리는 건 아닌지 의심도 들었다.
성건우는 여전히 확 낮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똑똑히 알뿐만 아니라 네가 얼마 후 거기로 다시 돌아가게 될 거란 것도 알아. 마음속 두려움을 해결하려는 거지만 시도 한 번에 성공을 거두진 못해⋯⋯.”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성건우는 요한의 트라우마 속 첫 번째 경험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요한은 당시 주위에서 그 일을 목격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건우의 말을 듣고는 마음이 약간 동했다.
‘이 사람, 정말로 미래에서 온 것일지도 몰라! 하지만⋯⋯.’
요한은 빠르게 한 가지 문제를 떠올렸다.
“미래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 능력도 있으면서 난 뭐 하러 찾은 건데?”
그만한 능력이 있다면 세상 정도는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순간 성건우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시공을 뛰어넘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만약 내가 역사에 간섭해 원래는 발생해야 하는 일을 막거나, 발생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일으킨다면, 나비 효과가 일어나 미래가 변하게 되고, 내 존재도 사라져버리겠지.
내가 이 역사로 돌아온 건 몇 가지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야. 이 비밀은 미래 인류에게 굉장히 중요해. 우리가 무심병을 철저히 이겨낼 수 있을지, 인류 문명을 다시 빛나게 할 수 있을지에 관계돼 있다고!”
“그렇구나⋯⋯.”
모종의 깨달음을 얻은 요한이 중얼거렸다.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로 구세계 파괴를 겪은 그는 살면서 SF영화를 적잖게 봤던 만큼 성건우한테 쉽게 설득되었다.
‘미래인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던 거구나. 스스로를 구할 방법을 계속 찾고 있었어. 그걸 위해 타임머신을 발명하고, 전문가를 현재로 보내 무심병의 비밀을 수집하고 있었던 거야!’
성건우가 다시 입을 열기 전, 요한이 먼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미래는 어때?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 해냈어? 여명을 찾기까지는 얼마나 남은 거야?”
“말하자면 길어.”
성건우는 교과서 내용을 열심히 떠올리며 대형 세력이 점차 형성되고 확립되던 혼란의 시대 말기에서 신력 초기 사이의 상황을 대략 한번 설명했다.
너무도 상세한 그 이야기에, 정상적으로는 절대 지어낼 수도 없는 내용에 요한은 성건우가 미래인이라는 걸 확실히 믿게 되었다.
요한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작아졌다.
“나한테 물으려던 게 뭐야?”
흠칫 놀랐던 성건우가 얼른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이 여객선에는 아주 무시무시한 사건이 발생해. 넌 여기서 살아남는 소수의 생존자가 되고. 앞으로 며칠간 널 따라다니면서 네가 무슨 일을 겪는지 보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고 해.”
“이 여객선에 아주 무시무시한 사건이 발생한다고?”
요한은 퍽 놀란 눈치였다. 그는 이미 끔찍한 일을 겪고 골든코스트로 도망쳐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또 다른 위험을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성건우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객선에 발생한 사건과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에 숨겨진 이상 현상은 구세계 파괴 원인, 그리고 무심병의 기원이랑 연루돼 있어. 그리고 넌 그 두 사건을 모두 겪은 사람이야. 말하자면 시대의 아들인 거지.”
“그런가⋯⋯.”
요한은 순간 드높아진 자신의 이미지를 느끼고 어깨가 조금 무거워졌다.
“그렇다니까.”
성건우는 매우 진지했다.
이내 잠시 침묵하던 요한이 입을 뗐다.
“방으로 들어와. 여기서 같이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
* * *
얼마 지나지 않아 싸늘한 밤이 찾아왔다.
이 방에서는 일부 선현만 내다보이는 관계로 바깥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에 요한이 성건우에게 말했다.
“문 열어보자. 현재 상황이 네 설명대로인지 확인해야겠어.”
그는 이미 미래인 성건우가 시공을 뛰어넘어 진상을 조사하고 구세계 파괴 원인을 찾아내려 한다는 이야기를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심층적인 확인은 하고 싶었다. 앞으로 며칠간 그의 상황과도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성건우는 역사를 바꿀 수 없는 게 아니라 감히 바꿀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만약 중간에 무슨 사고라도 생겨서 원래는 살아남았어야 할 이들이 다 죽게 된다면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미래는 다시 시작될 것이었다. 타임머신을 발명하고 조사원을 보낼 과학자가 생길지도 미지수였다.
게다가 앞으로의 조사원은 당연히 그 바뀌어 버린 역사를 유지하려 할 터였다. 안 그럼 새로운 미래가 시작돼 그 조사원의 존재가 소멸될 것이었다.
거의 30분 동안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고심했던 요한은 그래도 현재 상황을 확인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진지하게 몇 초간 고민하던 성건우가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안전에 유의해야 해.”
요한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 뒤에 자리한 성건우는 엄숙한 표정을 풀고 점차 흥분하기 시작했다. 눈빛엔 기필코 임박한 사건을 목격하고 말겠다는 강한 의욕도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