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626화 (626/649)

626화. 핏빛 황원

작은 풀조차 자라지 못하는 거대하고 울퉁불퉁한 땅, 그 위로 구조팀의 지프가 지나고 있었다. 지프 안은 고르지 못한 땅 때문에 마치 철썩이는 바다 위의 배처럼 요동을 치는 중이었다.

- 나는 실패로 인해 외롭게 죽고 싶지 않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속, 뒷좌석 가운데 자리의 성건우는 한 손으로는 게네바의 강철 어깨를, 한 손으로는 용여홍의 어깨를 끌어안고 박자에 맞춰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짜증이 난 용여홍은 친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공간의 제약 때문에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운전석은 장목화 차지였다. 오랫동안 운전대를 잡지 못해 손이 근질근질한 탓에 오늘은 꼭 운전대를 잡겠다고 나섰다. 곁에선 백새벽이 든든한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주고 있으니 특별히 문제될 것도 없었다.

장목화는 백새벽을 흘긋 보며 방향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뒤, 피식 웃으며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최근에는 그 노래에 꽂혔나 보네. 계속 트는 걸 보니까.”

성건우는 계속 몸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근데 이 노래 가사랑 제목은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상이 없는 사람은 슬퍼하지 않아, 이게 낫지 않아요? 우리 팀이랑도 더 잘 어울리고. 아, 돌아가면 내가 직접 불러서 녹음해야겠네!”

장목화가 키득거렸다.

“놀고 있네, 진짜.”

“그럼요, 매번 위험한 임무를 경험하며 점점 때맞춰 즐겨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돼요. 평소에 최대한 즐겁고 만족스럽게 살아야 한다고요.”

어느 성건우일지 모를 성건우의 말투에는 철학적인 느낌이 어려 있었다.

이내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백새벽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야유랑자들도 대부분 다 그렇게 생각해.”

그들이 육체적으로 방종한 삶을 살거나 자동차를 개조하는 데 공을 들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뗐던 용여홍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곧이어 성건우는 친구 어깨에 둘렀던 손을 내리고 제 허벅지를 쳤다.

“방금 깨달았는데 이 노래를 그렇게 바꾸면 구세군 상황에 더 적합한 것 같아! 타락한 그들에게 더는 전과 같은 이상이 없다잖아?”

순간 장목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구세군 세력 범위를 통과할 때 그들을 자극하면 안 돼.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평안하게, 안정적으로 빙원 타이 시티에 도착하는 거니까. 전의 그 암살자는 아직 죽지 않았어, 알지? 그 여자 배후의 박사도 우리를 이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우리는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행적을 숨겨야 해.”

그녀는 행여 성건우가 허투루 들을까 거듭 강조해 덧붙였다.

성건우도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만약 우리가 박사라는 어둠의 앞잡이, 악몽의 수족을 해치운다면 우딕이 잃은 지능도 돌아올 수 있을까요?”

지프 안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만 더 선명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난 만큼 우딕이 원상태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현재 구조팀의 힘을 다 합쳐도 박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직 신세계에서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 상대의 신체가 제8 연구원 안에 여전히 자리해 있는 상황인데도 그랬다.

장목화도 마음이 슬퍼졌다. 용여홍, 백새벽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하룻밤 새 우딕의 평화롭던 가정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오직 사유 유도뿐이었다.

몇 초 후, 솔직한 게네바가 성건우의 질문에 답했다.

“내 생각에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 같다.”

운전 중인 장목화는 대답보다 긴 한숨을 뱉었다.

그 사이 게네바의 말이 이어졌다.

“그와 같은 비극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걸 막으려면 악몽을 제대로, 완전히 흩어버리고 어둠을 쫓아내야 해.”

성건우가 몸을 홱 틀어 게네바를 바라보았다.

“겐, 네가 그런 말을 다 하다니! 많이 컸구나.”

짝짝짝!

성건우가 감격의 손뼉을 쳤다. 조금 전의 상심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용여홍은 친구의 감정이 이렇게나 빨리 바뀐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 답은 하나뿐이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내 인간화 정도는 더 높아져야지.”

게네바는 이번에도 솔직하게 성건우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이때 뭔가를 떠올린 장목화가 말했다.

“맞아, 야. 너 전에 첫째 날로 돌아가서 여객선에서 최대한 빨리 522호 방 주인을 찾겠다며.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 수확이 없는 거야?”

순간 무거워진 표정을 드러낸 성건우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 잊어버렸네.”

“⋯⋯그럼 오늘 밤에 시도해봐.”

장목화도 환자와 입씨름 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냐며 애써 마음을 추스르곤, 하늘 가장자리에 걸린 붉은 석양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흰둥아, 네가 얘기한 그 거점은 얼마나 더 가야 해?”

현재 구조팀은 새로운 경비를 받아 상응하는 물품을 준비하고 통조림과 압축 비스킷 등 식량도 보충해, 퍼스트 시티를 떠나 동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지금 지프는 이미 핏빛 황원에 이르렀다. 이곳은 퍼스트 시티 가장자리에서 벗어나 구세군 영역에 진입하는 데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이 핏빛 황원의 핏빛이란 이곳의 흙색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었다. 혼란의 시대에 대량의 사상자를 냈던, 거듭된 전쟁에서 기인한 말이었다.

지하자원이 풍부한 데 반해 경작할 땅은 적은 이 황원은 분쟁이 생기기 아주 쉬운 곳이었다.

퍼스트 시티가 세력 범위를 넓혀 모든 것을 독점하기 전, 핏빛 황원의 크고 작은 세력들은 정말 피로써 이 가치 있는 토지들을 붉게 물들였었다.

전방 지형을 한번 살피던 백새벽이 말했다.

“30분 정도 더 가면 도착이에요.”

아직 황원 안쪽 지대가 아닌 이 일대는 엄밀히 따지자면 퍼스트 시티 주위 구역이었다. 일찍이 이곳에 와봤던 백새벽은 퍼스트 시티에 속한 그 거점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오가는 유적 사냥꾼이 많은 그 거점은 상대적으로 번성한 편이었다.

* * *

태양이 지평선 위로 떨어졌을 무렵, 구조팀 앞에 그 거점이 나타났다.

구세계 당시 이 거점은 비교적 원교에 위치한 쇼핑센터였다. 오늘날 그 안에 있던 물건들은 일찍이 다 사라졌지만, 광대한 면적의 주차장과 짧은 거리 몇몇을 구성하는 건물들은 보존이 잘 돼 황야유랑자의 거점이 돼 있었다.

이곳 건물들은 2, 3층 높이로 높지 않았다. 핵심 구역에 가까운 것들은 전부 주택이었고, 가장자리에 자리한 것들은 전부 보루로 개조되어 꽤 견고한 방어선을 조성해뒀다.

핏빛 황원 안쪽에 자리한 여러 폐허, 대량의 광산, 그리고 퍼스트 시티와 연결된 이곳은 매우 중요한 무역 노드였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면적이 넓은 주차장에는 각기 다른 개조를 거친 차량들이 상당히 많이 세워져 있었다.

차가 세워져 있지 않은 공백 구역은 유적 사냥꾼들이 서로 교류하고 거래하는 장소였다.

거점 안의 주민들은 수시로 나와 자신이 수집한, 가치 있는 물건을 팔았고, 주로 맥주나 식량으로 교환했다.

이 구역은 오염도가 심각해서 지하수도 음용할 수 없는 상태라, 맑은 물보다는 잘 빚어진 옅은 맥주가 오랜 시간 가지고 다니기 더 적합했다.

이곳에는 유적 사냥꾼이 워낙 많아선지 구조팀의 방문이 큰 반향을 일으키진 않았다. 그저 거대한 바다에 떨어진 돌 하나 마냥 놀랍도록 잔잔했다.

게다가 이곳 사냥꾼 팀들도 동료로 로봇을 데리고 있어, 게네바도 그리 눈에 띄진 않았다. 다만 구조팀을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는 것만은 광고가 됐다.

“저쪽이 시끌벅적한데요!”

성건우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잔뜩 흥분해 멀지 않은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은 공백 구역이었다. 중간에 피워진 모닥불 주위로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더러는 이성에게 추파를 던졌고, 더러는 자신이 가진 물건을 펼쳐놓고 판매하는 중이었다.

상인으로 추정되는 몇몇은 유적 사냥꾼들 사이를 오가며 물건을 싸게 구입하려 했으며, 또 더러는 한데 모여 색이 옅은 맥주를 마시며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장목화는 성건우를 저지하려다가 웃으며 말했다.

“가보자. 가서 사람들을 보고, 하는 이야기도 들어보자. 또 유용한 소식을 얻게 될지, 특색있는 음식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성건우가 가장 먼저 튀어 나갔다.

뒤이어 구조팀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구조팀이 막 모닥불 구역에 도착했을 무렵,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마치 누군가 소음기라도 장착한 것 같았다.

장목화는 큰 키 덕분에 거점에서 나온 몇 사람을 발견했다.

앞장서 다가온 건 180센티미터에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검은 머리를 전부 뒤로 빗어넘긴 남자였다. 남자의 얼굴은 마른 편이었고 얼굴선도 또렷했다. 그리고 아래턱부터 귓가까진 수염이 나 있었으며 눈동자는 회갈색이었다.

짧은 침묵이 흐르던 그때, 모닥불가의 한 유적 사냥꾼이 크게 웃었다.

“데이비스, 듣자 하니 이번에 무시무시한 녀석을 맞닥뜨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던데?”

데이비스가 바로 검은 트렌치코트 차림의 장년 남자였다.

남자는 자신에게 말을 건 유적 사냥꾼을 힐긋 보더니 함께 웃었다.

“정말 무시무시했지. 고등 무심자가 무려 둘이나 있었으니까. 그래도 우리는 돌아왔어. 9호 폐허에 감히 발을 들이지도 못한 너희들과는 다르게!”

9호 폐허는 핏빛 황원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이었다. 그곳에는 오늘날까지도 유적 사냥꾼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위험한 지역이 많이 남아있었다.

퍼스트 시티 정부 조직에서도 몇 차례 작전 끝에 어느 정도 수확을 얻기는 했으나 그 이후론 그곳에 대한 흥미를 잃은 듯 그대로 방치 해두고 있었다.

고등 무심자 두 명이라니, 데이비스의 답을 들은 유적 사냥꾼들은 분분히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용여홍은 덤덤했다. 예전이라면 혼백을 빼놓고 등골에 식은땀을 흘리게 할 정도였겠지만, 불모지 13호 유적에서의 일을 겪고 난 지금은 그 정도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어쩌면 늪 1호 폐허에서 있었던 일이 불모지 13호 유적에서 있었던 일보다 더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오하명은 봉인되어 있었지만, 수종이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당시 건우가 수종이와 친구가 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그 결과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용여홍이 이런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성건우는 데이비스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머릿속은 트렌치코트를 좋아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자신도 한 벌 마련해야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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