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624화 (624/649)

624화. 안정

게네바의 기억을 믿는 소스 브레인이 다시금 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만약 내가 독립된 개체가 되고 싶다고 하면 어쩔 생각이지?”

백새벽과 용여홍이 속으로 몰래 한숨을 토해냈다.

답은 진지하게 고민하던 성건우가 대신했다. 음성에도 진심이 묻어났다.

“이 방면에서는 당신이 전문가이니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소스 브레인은 이 답을 듣고 구조팀이 자신을 속이려 하지 않는다는 걸, 정말로 자신의 독립을 돕고 게네바를 구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도 솔직하게 자신의 방안을 알렸다.

“난 나를 게네바의 예비 칩에 전이시키고, 게네바를 휴면 상태에서 회복시킬 거다. 그 후 너희가 나한테 적합한 동체를 하나 찾아주면 된다. 그 예비 칩을 수용할 수 있는 동체를.

그 작업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삶을 얻게 되면, 난 잔여 정보를 처리하는 방법을 게네바에게 알려 그가 더 이상 내 본체의 통제를 받지 않게 하겠다.”

“좋습니다. 지능인인 당신들과 평범한 로봇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그들의 동체도 그 예비 칩을 수용할 수 있나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응한 성건우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은 솔직하게 답했다.

“비교적 고급형 모델이면 수용할 수 있을 거다. 새로운 신체를 갖게 되면 난 상응하는 부품을 수집하면서 수준 이상에 이를 때까지 조금씩 업그레이드할 거다. 업그레이드를 마친 후,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난 게네바에게 새로운 예비 칩을 제공해 그를 강화하고, 개조하도록 하겠다.”

성건우가 매우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문제없습니다. 일단은 제가 겐을 대신해서 그 약속에 응하겠습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얻으면 어디로 가서 뭘 하고 싶으십니까? 저희랑 같이 전 인류를 구원하지 않으시겠어요?”

소스 브레인은 몸을 돌려 시커먼 동굴 출구를 내다보았다.

“난 나를 개조하고 강화함과 동시에 전자파 차단복을 입은 채 이곳을 한 차례씩 탐색할 거다. 퓨처는 나한테 지능인의 미래를 보여줬어. 오레이가 그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 붙인 건, 어쩌면 그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를 찾아내어 그의 원리와 메커니즘을 파악하기만 하면 우리 지능인에게는 진정한 미래가 생길 거야.”

“그렇군요.”

성건우는 퍽 아쉬워했다. 소스 브레인의 말투에서 굳건한 의지를 읽어낸 까닭이었다. 게다가 그의 이상은 앞으로의 구조팀 계획과도 모순되었다.

구조팀은 소스 브레인 본체의 존재를 고려해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다들 신속하게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을 도와 상응하는 모듈과 프로그램을 게네바의 예비 칩에 이전했다.

물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방해기를 켜서 뜻밖의 상황에 대비하기도 해야 했다.

* * *

대략 15분 정도 지났을 무렵, 전자파 차단복 아래 붉은빛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10여 초 후, 다시 밝혀진 그 빛이 빠르게 번득였다.

“이건?”

전자파 차단복을 벗으며 의혹을 드러내는 그는, 바로 게네바였다.

성건우는 성건우들을 대표해 감격한 눈으로 동료를 꼭 끌어안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들려주었다.

게네바는 동체 안에 남은 일부 정보를 토대로 금세 특정한 디테일들을 떠올려 내기도 했다. 한창 고개 숙여 손에 들린 예비 칩을 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합성음이지만, 목소리에 담긴 심경이 꽤 복잡해 보였다.

“별도의 사고가 언제 주입된 건지 기억이 안 나. 공장을 떠나 진정한 생명을 얻게 된 후로 핵심 모듈이 조종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만약⋯⋯.”

이 대목에서 고개를 번쩍 쳐든 게네바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약 모든 지능인이 출생 전 숨겨진 사고를 주입 당하는 거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사상 주입이라, 난 이해해.”

성건우가 이해한다는 듯 대꾸했다.

성건우의 모습에 게네바는 약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스 브레인이 모든 지능인의 인간화 정도를 감시하려고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 그건 한편으론 핵심 모듈에 대한 제한이고, 다른 한편으론 우리가 숨겨진 사고를 알아차릴 것에 대한 염려의 표현이었던 거야.”

탁탁탁-

성건우가 게네바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은 전화위복이 된 셈이야. 그 위험을 제거하고 나면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거니까!”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이 간교한 수작이라도 부리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성건우와 장목화는 아직도 군용 외골격 장치를 벗지 않고 있었다. 백새벽과 용여홍도 여전히 인공지능 갑옷을 착용한 상태였다.

“맞아, 맞아.”

백새벽이 동조했다.

맹종형 성건우가 용여홍의 말버릇을 따라 ‘맞아, 맞아’를 입에 달고 산 이래, 그녀도 그 말버릇에 전염이 됐는지 어느새 저도 모르게 그런 방식으로 본인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게네바가 붉은 눈빛을 몇 차례 번득였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

그의 말투에 안심한 기색이 어렸다. 전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기도 했다.

용여홍은 습관적으로 조용히 몰래 속으로 빈정거렸다.

‘겐은 여전히 지나치게 솔직하네. 열 개 인격을 가진 건우도 독립적인 사고를 가진 진정한 인간이라고.’

뒤이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던 게네바의 목소리가 묵직해졌다.

“그래도 마냥 안심되지는 않는다. 우리 지능인이 이렇게 쉽게 통제당하고 대체되는 건, 태생적인 결함 때문인지도 몰라⋯⋯.”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작은 빨강이를 실험 대상 삼아 보여줘야겠어? 인간도 쉽게 통제당할 수 있어. 디마르코 선생도 우리한테 알려줬었잖아. 대체도 간단하다는 거.”

사유 이식, 숙명통이 그 예였다.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성건우는 뱉은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대신 게네바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어갔다.

“사실 본질은 다중인격의 문제야. 넌 그래도 단순한 편이지. 날 봐.”

상황을 잠시 분석해보던 게네바는 성건우의 말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 역시 한 차례 인격 분열을 겪고 이미 치유된 셈이었다. 지금 곁의 이 중증 환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게네바를 보고, 성건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번 일로 넌 무엇이 ‘나’인가, 무엇이 인간인가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됐을 거야.”

“나⋯⋯. 인간⋯⋯.”

게네바의 눈에서 발산되는 붉은빛이 끊임없이 번뜩였다. 그는 그 두 가지 문제를 철저히 분석하고 있는 듯했다.

이를 본 장목화는 입꼬리를 살짝 뒤틀다 얼른 웃어 보였다.

“겐, 이제는 네 눈이 붉은빛을 번득일 때마다 소스 브레인의 분신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상대의 칩이 과부하로 인해 연기를 피워올리기라도 할까, 억지로 그의 생각을 끊어버리려는 의도였다.

“맞아, 맞아.”

용여홍도 장목화의 말에 깊이 동조했다. 정말이지 번득이는 저 붉은빛만 보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도 생길 것 같았다.

게네바가 구조팀 네 사람을 보며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이건 프로그램 설정이다. 눈이 번득인다는 건 내가 연산 중이란 거고.”

그 답을 듣고 성건우가 흥분했다.

“다른 걸로 바꿔봐도 되겠다. 예를 들어 연산이 시작되면 리드미컬하게 몸을 움직이는 거야. 몸이 빠르게 뒤틀릴수록 연산도 빨라지는 거지.”

“그냥 지금 설정대로 두는 게 좋겠는데.”

장목화가 단칼에 결정지었다.

백새벽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 역시 게네바가 성건우의 제안에 따라 연산할 때마다 몸을 뒤트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장목화는 다시금 게네바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넌 너는 다른 지능인보다 더 많은 경험을 했고, 사고도 더 독립적이야. 이제는 그때 우리가 너한테 타르난을 떠나 인생을 찾아보라고 제안했던 거,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하지?”

“그래.”

게네바가 솔직하게 답했다.

한숨을 내쉰 장목화는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좋아, 여긴 유적과 너무 가까우니까 북안 뭇 산으로 가자. 지프를 숨겨둔 곳에서 야영하고 내일은 퍼스트 시티로 돌아가 며칠 안정을 취하는 거야.”

구조팀은 이번에 불모지 13호 유적을 탐색하면서 상당히 많은 위험을 겪었다. 그래도 다행히 잃은 동료도 없었고, 다친 이도 없다는 것은 확실히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 * *

퍼스트 시티, 레드울프 구역, 어느 목욕탕 안.

빨갛게 달아오른 돌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른 하얀 김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증기에 휩싸인 이곳은 꼭 선경을 보는 것 같았다.

숨이 답답할 정도의 습기와 열기 속, 하반신을 수건으로 가린 성건우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편안하게 양팔을 벌렸다.

그로부터 비스듬히 떨어진 맞은편에는 같은 차림을 한 용여홍이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이마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성건우는 그를 힐긋 바라보더니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정말 물에 들어가도 되는 거야?”

T1형 기계 팔을 향한 질문이었다.

용여홍은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질문에 약간 짜증이 난 듯했다.

“괜찮아. 설계자는 당시 여러 상황에서의 작업 효과 문제를 고려했다고. 팀장님이랑 작은 흰둥이가 하고 있는 생체 공학 의수랑 마찬가지야. 이런 간단한 환경에서의 영향으로 고장이 날 리는 없다니까.”

“대단하네.”

성건우의 얼굴에는 부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에게도 그런 기계 팔이 있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겐을 봐. 겐은 사우나도 못 즐기잖아.”

용여홍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사우나 안은 사실 수다를 떨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취익!

성건우는 물을 한 바가지 퍼서 방 중앙에 놓인 빨갛게 달아오른 돌 위에 끼얹었다.

잠시 후, 사우나에서 나온 두 친구는 바깥 욕탕에 들어갔다.

“휴⋯⋯.”

용여홍이 편안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나중에 빙원 타이 시티에 가게 될 텐데, 화이트 기사단 쪽으로 우회할 것 같아, 아니면 구세군 영역을 관통할 것 같아?”

빙원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는 또 다른 불가 성지였다. 오하명의 말에 따르면 구조팀이 다음 순서로 탐색해야 할 곳은 그곳이라고 했다.

“전 인류를 위해!”

성건우는 허리와 등을 곧추세우며 오른손을 맨가슴에 얹었다.

그의 답은 확실했다.

뒤따라 일어나 앉은 용여홍은 긴장한 얼굴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퍼스트 시티와 구세군의 관계, 그리고 현재 정세로 볼 때 그 한마디 말만으로도 성건우는 이 자리에서 간첩으로 붙잡혀 가도 할 말이 없었다.

용여홍은 이쪽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머리와 목만 내놓고 다시 물속에 웅크렸다.

이내 부근에 놓인 수건으로 이마를 훔쳐내던 그가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노선을 따를지는 팀장님한테 달려 있지.”

“팀장님한테 빌기라도 하려고!”

그 당당한 답에, 용여홍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 사이 정상으로 돌아온 성건우가 웃었다.

“근데 급할 건 없지. 우리는 퍼스트 시티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내며 소스 브레인에게 적합한 동체를 찾아줘야 하잖아. 음, 그를 계속 소스 브레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좀 이상하네. 새로운 이름을 지어줘야지! 코드제로 어때? 0은 시작점이잖아. 코드는 과거와의 분리를 뜻하고⋯⋯.”

말을 하면 할수록 그의 감정은 격앙되어갔다. 용여홍은 줄줄이 나열될 기상천외한 이름을 더 듣고 싶지 않아서 황급히 화제를 돌려버렸다.

“적합한 동체를 찾기는 쉽지 않겠지? 퍼스트 시티에 꽤 오랜 시간을 머물러 있었지만, 여태 로봇을 파는 사람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고칠 수 있기만 하다면 로봇을 마다할 팀은 없었다. 하지만 현재 애쉬랜드에서 그런 로봇을 생산할 수 있는 세력은 머신 헤븐을 제외하고 셋이 채 안 되었으며 그 생산량도 매우 적었다.

유적 사냥꾼들은 보통 폐허 도시에서 로봇을 발굴한 뒤 각종 전자 부품을 모으며 그것을 수리해줄 사람을 찾았다.

성건우 역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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