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2화. 시도
장목화와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이 조용히 사담을 나누는 사이, 성건우는 반원형 홀 가장자리의 오하명을 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넌 퓨처랑 이웃이니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
“그렇지.”
오하명의 말은 아무런 답도 되지 않았다. 그저 단순한 대꾸일 뿐이었다.
하지만 성건우는 지켜야 할 체면 같은 건 없다는 듯 계속 캐물었다.
“퓨처는 어떤 사람, 아니, 인공지능이야?”
오하명이 웃었다.
“녀석은 말년에 기계 승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오레이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방안으로 만들어낸 걸작이야. 만약 달지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오레이는 허공에 하나의 신을 만들어냈을지도 몰라.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백억 명 신도들에게 동시에 호응할 수 있는 완전무결한 신.
아니지, 아니지, 달지기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라도 허공에서 그런 신을 만들어내지는 못했겠지.
너희, 오레이가 남긴 자료를 찾으려던 거 아니었어? 소스 브레인을 포맷하는 방법 외의 나머지 부분은 퓨처에 그대로 구현돼있어. 지금의 너희는 그냥 그걸 해독해낼 수 없을 뿐인 거야.
난 너희가 정말로 그것의 원리를 알아내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어.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지.”
작고 둥근 테의 안경을 쓴 오하명은 사뭇 느긋해진 말투와 함께 기록대 옆의 등받이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있었다. 마치 극장의 귀빈석에 앉아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한 자세였다.
그곳에는 오직 그의 인영만 존재했다. 그 등 뒤 부근에는 그늘이, 멀리 떨어진 곳에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한참 고민하는가 싶던 성건우가 매우 성실하게 답했다.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네.”
중요한 정보라고는 한 톨도 없었다.
한편 소스 브레인은 장목화의 말대로 어느 연결부 근처에 쪼그려 앉아 한 도구를 이용해 빠르게 침입했다. 쓸모없는 정보를 홍수처럼 들이부을 준비였다.
장목화는 소스 브레인이 준 그 도구를 받아 성건우 곁으로 돌아왔다.
전자파 방해기였다. 소스 브레인이 오하명의 방해를 피하려 준비한 것인데, 영향 범위는 단 몇 미터에 불과했고 효력도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소스 브레인이 장목화와 상의 끝에 이 도구를 내놓은 건, 성건우로 하여금 이를 이용해 퓨처에게 앞으로의 시도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장목화는 이게 과연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순 없지만 지금은 어떤 방법으로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성건우는 전자파 방해기를 바로 켜는 대신 그냥 옆에 내려두고 비어있는 금속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뒤이어 육식주를 꺼낸 그는 그 안에 의식을 주입하면서 육식주의 기운으로 자신의 감지력을 강화했다.
사실 성건우의 감응 범위는 육식주보다 더 넓었다. 그가 육식주를 통해 강화하고자 하는 건 강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 육식주는 미약한 청록색 빛을 발했다.
그리고 성건우는 천장에 피어오르는 검은 그림자들을 다시 만났다. 수축했다 뻗어 나오길 반복하는 그림자들이 꼭 일렁이는 수초처럼 보였다.
“육식주로도 감지할 수 있어요.”
성건우의 보고에, 천장에 불을 비춰주던 백새벽이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구조팀이 가진 특수한 물건은 적지 않은 편이었다.
이내 용여홍과 함께 뜻밖의 상황을 경계 중인 장목화가 물었다.
“포착하고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일정한 의식이 느껴져?”
“한 덩어리 어둠 같아서 직접 움켜쥘 수는 없어요.”
참 독특한 비유에 약간 긴장한 용여홍의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그냥 아니라고 대답할 순 없는 거냐?’
곧이어 장목화가 따로 분부하지도 않았지만 그대로 육식주를 거둔 성건우는 호수 색의 옥부처를 꺼내 들었다.
그는 능숙하게 그 안에 의식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옥부처는 빛을 발산하지 않았고, 성건우 역시 천장 위의 검은 그림자를 감지할 수 없었다.
“이건 더 안 되네⋯⋯.”
중얼거리며 일어나 앉은 그가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다음 방안으로 넘어가자.”
장목화가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조금 전 언제 좌절했냐는 듯 다시 흥분한 성건우는 바로 모래시계처럼 생긴 전자파 방해기를 켰다.
치직-
용여홍은 곁눈으로 홀 가장자리의 오하명 인영이 왜곡되고 늘어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 인영이 사라지진 않았다.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이 틈을 타 장목화는 군용 외골격 장치를 켜고 성건우에게도 똑같이 하라고 지시했다.
군용 외골격 장치가 완전히 활성화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성건우는 양손을 전술 배낭에 넣어 뭔가를 찾으려는 듯 뒤적거렸다.
그로부터 10여 초 후, 손을 거둔 그가 육식주를 왼 손목에 차고선 조금 전 전술 배낭에서 찾은 물건을 확 뽑아 들고 천장을 겨눴다.
매우 조잡한 방전 장치였다. 작은 나무 판처럼 보이는 그 위엔 고성능 배터리가 여러 개 박혀 있었고 각각의 배터리 사이는 회로로 연결돼 있었다.
자세를 잡은 성건우가 제대로 그것을 켜기 전, 장목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손 엄지를 세웠다.
그녀를 주시하던 소스 브레인은 그 신호를 보고 앞으로의 시도가 효과가 있을지는 전혀 고민하지 않고 쓸모없는 대량의 정보를 퍼부었다.
다음 순간, 성건우는 천장을 향해 펄쩍 뛰어올랐다. 수많은 전광이 발산됨에 따라 반원형 홀 안은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졌다.
장목화는 온 실험실이 흔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살짝 현기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백새벽과 용여홍도 마찬가지였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 구조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모를 시선들이 자신들에게 향하는 걸 느꼈다.
그때였다.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이 펄쩍 뛰어오르며 외쳤다.
“자폭 신호가 나타났다!”
장목화는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했다. 이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늦은 반응이었다.
“뛰어!”
그녀가 곧장 명령을 내렸다.
장목화의 힘찬 외침에 백새벽은 곧바로 돌아서 실험실 출구와 이어지는 복도로 돌진했다.
이번엔 제자리에서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동료를 기다리지 않았다.
이렇게 어수선하고 성건우, 용여홍이 언제 따라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백새벽이 장목화를 위한 길잡이가 되어야 했다. 본래 모든 게 상황에 따른 대처가 필요한 법이었다.
쿵! 쿵! 쿵!
거의 동시에 냉동창고 쪽에서 뭔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 실험구역에서 물러나 있던 경비 로봇들이 모종의 기척에 깨어나 불법 침입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몰려드는 듯했다.
그러나 망가진 금속 대문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고, 그 앞에 층층이 쌓인 각종 장애물이 그 구역과 구조팀을 격리하고 있었다.
장목화는 백새벽을 뒤따라 달리며 군용 외골격 장치를 방해할지 모를 퓨처를 경계하는 한편 그 장치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속도를 높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50여 초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그보다 더 짧을지도 몰랐다.
한편 천장을 향해 뛰어올랐다가 떨어지기 시작한 성건우는 한 손에는 육식주, 다른 손에는 그 간이 방전 장치를 쥐고 있었다.
이때 천장에서 뻗어 나왔다가 움츠러들기를 반복하던, 그 건드릴 수 없는 어둠은 이미 완전히 사라졌고 이제는 까맣게 탄 흔적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성건우는 그 천장에서 여전히 스며 나오는 모종의 적막을 감지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의 힘이 다시 침식해 들어올 것 같았다. 열린 틈이 그렇게 쉽게 닫힐 리는 없었다.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억지로 몸의 균형을 조정한 성건우는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한 뒤 곧장 용여홍에게 달려가 친구를 겨드랑이에 끼웠다.
콰광!
냉동창고 구역의 경비 로봇들이 구조팀이 망가뜨려 놓은 금속 대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금세 균열이 일어난 문짝은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쿵! 쿵! 쿵!
장목화는 이제 백새벽의 옆까지 따라잡았다. 하지만 장목화는 동료를 들쳐메는 데 급급해하는 대신 군용 외골격 장치에 딸린 전자파 무기를 겨눴다. 방향은 수십 미터 정도 떨어진 실험실 출구 쪽이었다.
탕!
그 무기에서 쏘아져 나간, 은백색 전광에 휩싸인 탄환 한 발이 금속 대문 정중앙에 명중했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탄환에 맞은 부분을 중심으로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동심원을 그리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뒤이어 성건우의 겨드랑이에 끼워진 용여홍이 레이저 발사기를 사용했다. 고도로 응집된 붉은빛 한 줄기는 전자파 무기에 명중 당한 부분에 정확히 떨어졌다.
그 부분은 소리소문없이 완전히 뚫려버렸고, 주위 구역 역시 녹아내리려는 조짐을 보였다.
속도를 늦춘 백새벽과 나란히 달리던 장목화는 이를 보고 개인용 바주카포를 어깨에 얹었다. 보조 칩 덕에 머릿속에선 탄도의 궤도가 그려졌다.
콰릉!
그녀가 발사한 바주카포는 연속으로 공격당한 실험실 대문을 강타했다.
격렬한 폭발음 속, 수많은 균열로 뒤덮여 있던 금속 대문은 그대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으며, 수많은 금속 파편이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콰광! 콰광!
냉동창고 구역의 경비 로봇들 역시 그 문과 가장 안쪽의 장애물 두 겹을 뚫고 나왔다. 붉은 눈빛을 번득이는 로봇들은 높이 뛰어오르거나 그대로 돌진하면서 주 실험구역으로 향했다.
이때 이미 백새벽을 팔로 감아 안은 장목화는 성건우, 용여홍,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의 뒤를 따라 두 차례 연달아 점프하면서 반쯤 무너져 내린 대문 근처에 이르렀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허리를 굽힌 그들은 장애물을 훌쩍 뛰어넘었다.
콰광! 콰광!
주 실험구역까지 쫓아온 경비 로봇들은 실험실 대문을 마주한 채 여러 발의 유탄을 발사했다.
하지만 구조팀은 높이 뛰어오르거나 몸을 굴려 일찍이 공격들을 피했다.
* * *
구조팀은 빠르게 지면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돌아갔다.
자폭 신호가 생성된 지 겨우 10초가 지난 때였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실험실 안의 경고등이 하나둘 밝혀지며 자극적인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를 본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이 열심히 달리며 일렀다.
“신호에 대한 응답 지연 시간이 예상보다 더 단축될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그는 이 방화벽에 대해 깊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뜻밖의 상황이 발생한 건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 순간 용여홍, 백새벽, 장목화는 이를 악물었다. 오직 성건우만이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듯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금속과 벽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동료를 한 명씩 안은 장목화와 성건우는 계단 측면의 벽을 발판으로 삼아 몸을 날려 민첩하게 위층으로 향했다.
그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이런 동작을 반복하면서 계단을 뛰어올랐다. 아래쪽에서는 시뻘건 눈빛을 번득이는 경비 로봇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빠르게 1층으로 간 구조팀은 계단에서 튀어 나가 대리석 타일이 깔린 홀에 진입했다.
콰르릉!
지하에서 퍼진 천둥소리 같은 폭발음과 함께 온 건물이 휘청거렸다.
먼지들도 흩뿌려지며 벽돌도 한 조각씩 무기력하게 떨어져 내렸다.
콰르릉!
지면과 벽체에는 또렷한 균열이 일기까지 했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건물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을 느끼고 온 힘을 다해 홀 너머의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붕 떠오른 상태에서 동시에 제트 장치를 켠 그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매섭게 떠밀린 듯 허공을 가로질렀다.
덕분에 속도도 빨라지고 체공 시간도 늘어나서, 건물의 정문 밖으로 튀어 나가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정원 가장자리에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