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화. 관객은 연극에 끼어들면 안 되는데
마침내 구조팀은 주 실험구역으로 돌아갔다.
바로 그때였다. 손전등으로 사방을 비춰보던 백새벽이 갑자기 소리쳤다.
“전의 그 경비 로봇들이 보이지 않아요!”
주 실험구역에는 원래 휴면 상태의 경비 로봇 몇몇이 곳곳에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기기와 백골, 탁자와 의자만 남아있었다.
순간 전자파 차단복에 가려져 적잖이 약해진 소스 브레인의 붉은 눈빛이 한 차례 번득였다.
“그 경비들은 분명 퓨처의 통제에 따르고 있을 거다. 말하자면 그의 수하와 다름없어. 녀석은 이곳에 있던 조수들이 우리의 최후 저항에 파괴되거나 망가지지 않기를 바랐겠지. 그래서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거다.”
이것은 인공지능에 대한 그의 이해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일단 그들의 행방을 찾아 어느 정도 손을 봐야겠어. 안 그럼 중요한 순간에 튀어나와 훼방을 놓을지도 모르잖아.”
장목화는 손전등을 이리저리 돌리며 그 경비 로봇들을 찾기 시작했다.
한 차례 빠른 수색을 거친 장목화와 백새벽은 주 실험구역 맞은편, 냉동창고로 통하는 금속 문이 닫힌 것을 발견했다.
이때 병실과 사무실, 시체 저장실의 검사를 맡았던 용여홍도 주 실험구역으로 돌아와 자신이 확인한 것들을 보고했다.
“복도 양쪽 방에 로봇은 없어요.”
그는 혹시 퓨처에 영향받은 전자 제품이 왜곡된 정보를 전달할까, 무전기 대신 면대면 보고를 택했다. 이 방면에서 용여홍은 매우 신중한 편이었다.
이내 용여홍의 옆에 선 성건우가 덧붙였다.
“14호 병실에도 지원자의 개인적인 물건은 없네요.”
그건 경비 로봇을 찾는 일과는 무관한 일이었으나 성건우는 조금 전 겸사겸사 병실까지도 수색한 모양이었다.
주 실험구역에서 사라진 그 지원자, 혹은 실험 대상은 14호 병실 환자일 가능성이 컸다.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전등 불빛을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금속 문으로 돌렸다.
“보아하니 경비 로봇들은 다 냉동창고 구역에 들어간 것 같아.”
“제가 다 날려버릴게요!”
성건우가 의욕적으로 나섰다.
잠시 망설이던 장목화는 고개를 틀어 소스 브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이 말했다.
“그로 인해 발생할지도 모를 연쇄적인 반응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깎아 먹진 않을지 걱정된다.”
몇 초간 고민하던 백새벽이 말을 받았다.
“그냥 저 안에 가둬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럼 저들은 우리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일단은 저 문부터 열어야 하니 기척을 낼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우리도 아주 쉽게 그 기척을 미리 감지하고 준비할 수 있잖아요.”
짝! 짝! 짝!
성건우는 항상 늦는 법 없이 제때 손뼉을 쳤다.
“훌륭해!”
장목화도 칭찬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새벽은 그 칭찬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설명했다.
“유적 사냥꾼 일을 할 때 이런 방법을 써서, 경쟁자들의 방해에서 효과적으로 벗어난 적이 있었거든요.”
그녀가 이야기하는 사이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과 성건우는 동시에 그 금속 문을 향해 다가가더니, 도구를 이용해 정교한 전자 및 기계 구조를 망가뜨렸다.
장목화는 용여홍과 함께 부근의 대형 기기들을 그쪽으로 밀면서 문을 막았고, 백새벽도 알아서 조용히 주위를 관찰하며 뜻밖의 상황에 대비했다.
곧 냉동창고로 통하는 금속 문은 완전히 망가진 데다가 갖가지 장애물로 막혀버리기까지 했다.
뒤이어 장목화가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저 빈 침대 주위, 천장 형광등까지 포함한 모든 전자 제품도 망가뜨리자. 퓨처가 저것들을 이용해 우리 행동을 염탐할지도 모르잖아.”
“좋아요!”
성건우는 곧장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쳐들더니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소리가 울려 퍼지는 사이 빈 침대를 중심으로 반경 5미터 안의 범위에서는 총알이 허공을 가르고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 구역의 모든 것이 망가졌다. 멀쩡한 건 구조팀의 군용 외골격 장치와 인공지능 갑옷, 손전등 뿐이었다.
한숨을 토해낸 용여홍은 손전등으로 빈 금속 침대를 비췄다. 그렇게 한동안 주위의 어둠과 적막을 느껴보던 그는 돌연 한 가지 문제를 떠올렸다.
“구세계 파괴 당시 실험실의 연구자 대부분은 살아남아 이곳에서 도망쳤어요. 그들에게 더 이상 관련 비밀을 지켜야 할 이유는 없었죠. 그런데도 왜 오레이를 제외한 누구도 이곳을 알지 못했던 걸까요?”
용여홍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웃음기 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답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심자로 변했거나, 무심자에게 먹히면서 전부 이 폐허 도시에서 죽음을 맞았으니까.”
“그렇구나⋯⋯.”
막 고개를 끄덕이려던 용여홍은 자신의 질문에 답을 한 것이 성건우도, 다운그레이드 버전의 소스 브레인도 아님을 깨달았다.
순간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장목화, 성건우, 백새벽,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 역시도 동시에 손전등을 어딘가로 돌렸다.
그리고 그들은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회색 정장 차림에 둥글고 작은 테의 안경을 낀 오하명을 보았다. 주 실험구역 가장자리에 놓인 어느 의자에 앉은 그는 미소를 지으며 구조팀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관객은 연극에 끼어들면 안 되는데. 하던 일이나 계속해.”
오하명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를 구하러 온 거 아냐?”
퍽 실망한 기색의 성건우를 보고 오하명이 가볍게 웃었다.
“도자(道者)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흘러가는 대로 둘뿐이고, 반자(反者)는 그러지 않지. 오랫동안 봉인된 나로서는 뭐라도 재미있는 상황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어. 너희가 대체 그 녀석한테 어떻게 저항하고 이곳을 빠져나갈지 보러 온 거야. 계속하라니까? 난 없는 셈 치고.”
‘퓨처보다 더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존재인 네가 지켜보고 있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장목화는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성건우 곁으로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일단 육식주와 옥부처를 사용해 봐. 만약 그 검은 그림자가 감지되지 않거나 포착할 수 없으면 상응하는 능력을 이용하고, 고성능 배터리와 너희들이 만든 간이 방전 장치를 꺼내는 거야.
퓨처가 신세계 교차점을 통해 전자파 조종을 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만큼, 우리는 대량의 전류로 그 교차점에 충격을 가해야만 어느 정도 효과를 낼 수 있어. 급할 것 없어. 내가 소스 브레인과 소통을 마치면 그때 해.”
그녀는 퓨처가 감청이라도 할까 봐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상태였다.
그 후 전자파 차단복으로 온몸을 감싼 소스 브레인에게 다가간 장목화는 다시금 사담을 나눌 때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퓨처의 방해가 배제되면 그 방화벽 파괴에는 얼마나 걸릴까요?”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이 답했다.
“최소 3주.”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을 이었다.
“그럼 안 되겠네⋯⋯. 통제까지는 하지 않고 실험실의 통제 시스템을 어지럽혀 자폭 장치를 못 쓰게 만드는 데까지는요?”
소스 브레인이 솔직하게 답했다.
“그것도 마찬가지다. 자폭 장치와 통제 시스템은 병행 관계다. 후자가 마비되더라도 누군가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문을 열려고 하거나 실험실 내부가 기준치 이상으로 파괴될 경우 곧장 활성화되지. 게다가 그것 역시 그 방화벽으로 보호되고 있다.
하지만 퓨처의 방해가 없을 경우 난 실험실의 중앙 관리 시스템과 연결해 방화벽에 쓸모없는 데이터를 대량으로 전송하면서 그 자원을 소모 시킬 수 있다. 그럼 자폭 장치도 곧바로 활성화 신호를 받지는 못해.”
장목화의 눈빛이 확 밝아졌다.
“얼마나 지연시킬 수 있죠?”
“내가 지금 통제하는 이 신체의 자원 배치와 그 방화벽의 종합 능력을 토대로 계산해보면 지연시킬 수 있는 시간은 최소 56초, 최대 63초다.”
이 실험실의 각종 시스템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소스 브레인은 순간적으로 그 수치를 계산해냈다.
장목화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1분이네. 힘에 부치기는 하지만 그 정도면⋯⋯.”
뒤이어 그녀가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시작해!”
장목화가 시작하라고 말해도 성건우는 그냥 금속 골격으로 뒤덮인 손을 들어 턱을 쓰다듬을 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안전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만약 우리 방안이 정말로 효과를 발휘한다면, 그래서 그걸 몰래 지켜보고 있던 퓨처가 ‘안 되겠다, 자폭 장치를 앞당겨 활성화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어쩌죠?”
‘이론적으로 우리는 이미 이 구역의 모든 전자 기기를 파괴했어. 숨겨져 있는 것까지 전부. 퓨처는 우리가 뭘 하는지 볼 수 없을 거고,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도 못할 거야. 게다가 내가 일부러 귓속말까지 했는데. 음, 그래. 이렇게 경험해본 적 없는 적을 마주한 상황에서는 더 신중해야 하니까.’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는 재차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 근처로 다가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지금 바로 실험실 중앙 관리 시스템에 침입해 쓸모없는 데이터를 이용해 공격하는 방식으로 자폭 장치의 신호 수신 통로를 막아주세요. 지금 말고 이따가 신호를 주면요. 제가 오른손 엄지를 들어 올리면 그때 시작입니다.”
소스 브레인은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장목화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중앙 관리 시스템은 전원이 끊긴 탓에 이미 꺼졌다. 자폭 장치는 그것과 병행하는 또 다른 시스템이지. 그것의 전원 제공 방식은 방화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만약 성건우 말대로 퓨처가 자폭 장치를 앞당겨 활성화하기로 했다면, 전자파 조종 능력을 이용해 방화벽 뒤에서 바로 거기 신호를 줄 수도 있어. 그럼 쓸모없는 데이터를 아무리 많이 전송해도 그 일을 지연시킬 수는 없다.”
쓸모없는 데이터로 데이터 통로를 막을 때 사용되는 건 그에 상응하는 계산 자원이었다. 하지만 퓨처는 전자파 조종을 통해 자폭 장치 내부에 직접 신호를 전송하면서 그 절차를 우회할 수 있었다.
‘너희 인공지능은 정말 골칫덩어리구나.’
장목화는 자신의 전기 뱀장어형 생체 공학 의수 속 보조 칩을 더 편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컴퓨터 관련 지식을 독학하는 데 공을 들인 적은 있으나 따로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었다.
그저 얄팍한 지식만 파악하고 있을 뿐, 심층적인 연구를 하지는 않았던지라 소스 브레인의 말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저도 모르게 속으로 빈정거리던 그녀는 다시금 겸손하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소스 브레인도 게네바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 장목화의 전문 분야가 이쪽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조금 전 정확한 설명보다는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한 상태였다.
몇 초간 침묵하던 그가 말했다.
“방법이 없다. 우리가 최단 시간 내에 자폭 장치에 연결된 고성능 폭약을 찾아내고 정확한 회로를 끊어낸다 해도 퓨처는 그것들을 폭발시키라는 신호를 전송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너희들의 방안이 유효하기를, 퓨처가 한동안 전자파 조종을 하지 못하거나 그런 능력으로 실험실 내의 각종 장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 전엔 우리가 한 말을 못 들었기를, 우리가 뭘 하려고 했는지 못 봤기를, 그래서 자폭 장치를 앞당겨 활성화하지 않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지.”
‘정말?’
무기력해진 장목화는 문득 성건우의 달지기 상징 모음집을 떠올렸다.
평소 그녀는 분석과 계획에 철저해서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해두려 했다. 지금처럼 달지기들의 비호에 운명을 맡겨야만 하는 때는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