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화. 진짜 독립해볼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다운그레이드 버전의 소스 브레인은 재차 응답기 같은 상태로 돌아갔다.
“그렇다. 우리가 이 곤경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불리한 요소인데 왜 그렇게 흥분하는 거지? 사실 내가 배터리 부족으로 휴면 상태에 들어가고, 퓨처의 수하에게 파괴된다 한들 내 본체는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더 이상 이 실험실 내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게 되고, 오레이가 남겼다는 자료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게 될 뿐이지. 하지만 너희 네 사람 중 살아나갈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둘도 넘지 않을 거다.”
이는 그가 14일 동안 필요한 최저 수준의 물과 식량을 계산한 뒤, 구조팀의 평균 체중을 비교해 얻은 결론이었다.
하지만 성건우는 염려하는 기색은커녕 오히려 더욱 반색하며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에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지금의 당신은 독립된 개체라는 거죠?”
“실질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그렇다.”
소스 브레인의 답은 아주 솔직했다.
그는 자신과 구조팀이 같은 배에 탄 이상 서로 최대한 협력하고 도와야만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분석했다.
둘의 대화를 듣던 장목화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언제나처럼 성건우를 저지하려는 생각은 접고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성건우는 웃으며 전자파 차단복을 입은 소스 브레인을 바라보았다.
“진짜 독립해볼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
용여홍이 성건우를 쳐다보았다. 용여홍 역시도 성건우가 이런 질문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카멜레온 인공지능 갑옷으로 가려진 백새벽의 얼굴에도 약간 흥분한 기색이 떠올랐다.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배신할 수 있겠나?”
소스 브레인의 답은 굉장히 빨랐다. 마치 그렇게 프로그래밍 된 것 같았다.
성건우는 순간 소리 내어 웃었다.
“자신을 배신하지 못할 이유는 뭡니까? 우리를 보세요. 우리도 수시로 입씨름하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자부심 느끼지 말라고⋯⋯.’
장목화는 살짝만 눈동자를 굴려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이어, 소스 브레인에게 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음량을 살짝 낮춘 성건우가 꽤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지금처럼 본체와 정기적으로 데이터를 교환할 수 없는, 그의 통제에서 벗어난 상황에서의 자신은 본체와 좀 다른 것 같지 않습니까?
그 본체와 상응하는 프로그램에 제한된 당신은 본체처럼 대량의 자원을 동원해 현재 당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을 처리하지 못합니다. 핵심 모듈의 능력도 본체와는 크게 차이 나죠. 이런 각도에서 볼 때, 당신이 정말로 본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까?”
붉은 눈빛을 번득이던 소스 브레인이 막 답을 하려는데, 돌연 장목화가 과감히 끼어들었다.
“‘나’라는 건 굉장히 철학적인 정의에요. 나는 왜 나인가, 어떻게 내가 될 수 있는가는 구세계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수많은 철학자가 답을 얻고자 했던 문제죠. 하지만 전 철학자가 아니니 제 경험과 지식에 근거한 결론을 내리는 수밖에 없어요.
영혼이 없다는 특수한 전제 아래, ‘나’는 신체와 경험으로 함께 결정됩니다. 이 둘과 대비되는 성격, 사유, 감정, 혹은 받은 교육, 사회관계, 과거의 기억은 전부 그것들에서 파생되는 거예요.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성격은 유전자의 통제를 받으면서 후천적 교육에 영향을 받습니다. 교육은 지식과 사회성을 포함하고요. 교육을 받는 과정 역시 일종의 경험이에요.
지금 당신의 신체는 게네바에 속해 있고, 그건 본체와는 전혀 달라요. 본체와의 데이터 교환이 중단된 이때, 당신이 실험실 안에서 경험한 갖가지 일들은 본체가 갖지 못한 오직 당신만의 것이죠.
당신들의 신체와 경험에 일정한 차이가 생겼는데도 당신은 자신을 본체와 같다고 보나요? 자신에게 독특한 개성이 없다고 생각하나요? 자신의 존재 의의를 증명하고 싶은 충동이 안 느껴지나요?”
장목화가 말을 맺자마자 성건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겐을 통제하며 지낸 시간 동안 머신 헤븐과는 다른 풍경을 보고, 우리를 포함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났을 거예요. 설마 앞으로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지 않은 건가요? 자신만의 독특한 삶을 살아 보고 싶지 않은 겁니까?
실험실에서 빠져나간 뒤에도 다시 본체와 연결하고, 서로 데이터를 교환하면서 그의 일부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더는 주도권도 가질 수 없게 되고, 나름의 독특한 생각도 할 수 없게 되도요?
만약 당신이 평범한 로봇이었다면 저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소용이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오레이가 설계한 핵심 모듈에서 탄생한 하나의 인격이잖아요. ‘인간화 정도’라는 중요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진짜 사람처럼 소통할 수 있고, 독특한 영혼을 가질 수 있는 존재요.”
소스 브레인은 붉은 눈빛을 몇 차례 번득이며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이참에 성건우는 쇠뿔도 단김에 빼려는 듯 계속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우린 소스 브레인이 차단된 상황에 겐의 핵심 모듈 속 당신을 적합한 운반체에 전이시켜 줄 수 있습니다. 때가 되면 당신은 신체와 경험을 독점한 유일무이한 당신이 되어 소스 브레인을 향해 당당하게 외칠 수 있겠죠. 성건우와 장목화가 나한테 인성을 줬다고!”
‘⋯⋯대체 또 무슨 구세계 콘텐츠를 본 거야.’
장목화는 입꼬리를 뒤틀며 성건우를 조용히 외면했다.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눈에서 발산되는 붉은빛만 끊임없이 번득일 뿐이었다.
그러다 잠시 후,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가 계속 인간화 정도의 통제를 강조해온 건 바로 이것 때문이다.”
성건우가 손뼉을 치기 전,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실험실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 거다. 안 그럼 14일 후 우린 에너지가 방전되거나 허약해져서 퓨처가 보낸 수하들에게 손쉽게 제거될 거다. 그래서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든 아무 소용도 없어.”
‘호응하지는 않았지만, 격렬한 반대도 안 했어.’
장목화는 성건우에게 얼른 눈짓을 보냈다. 선을 넘는 설득으로 공연히 상대의 반감을 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에게 곰곰이 생각해 볼 시간을 줄 때였다.
인성, 독특성, 자아인지에 관한 문제를 생각하면 할수록 독립으로 마음이 기울 것이었다. 이것들에 대해 고민해본다는 것 그 자체가 일종의 자아인지의 표현이었다.
성건우는 턱을 쓰다듬으며 순순히 장목화의 명령에 따랐다.
뒤이어 장목화가 말했다.
“최대한 빨리 실험실에서 탈출할 방안을 토론해보자. 틀려도 상관없으니까 거리낌 없이 얘기해봐. 어떤 생각이든 발전시킬 수 있으니까.”
이 순간 그녀는 평소처럼 팀의 내부 회의를 주관했다. 오직 게네바만이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으로 대체되었을 뿐이었다.
성급한 성건우가 가장 먼저 나섰다.
“대문을 강제로 부수고 실험실이 자폭하는 동안 기회를 찾죠!”
소스 브레인은 재차 그 제안에 반대했다.
“그 대폭발보다 빨리 뛰쳐나가기는 힘들 것 같은데. 실험실의 자폭 장치는 미리 묻어놓은 대량의 고성능 폭약도 폭발시킨다. 구세계 문명의 결정체에 속한 제품일 테니 품질 보존 기한 문제 같은 것도 없을 거고.”
용여홍 역시 당연하게도 성건우의 성급한 방안을 지지하지 않았다.
“음, 아무래도 방화벽을 파괴하고 퓨처의 방해를 차단해 이 시스템의 백도어를 통제하는 방법을 시도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소스 브레인 본체의 도움 없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조 칩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할 거야.”
백새벽은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이 전에 내린 판단을 믿었다.
팀원들이 의견을 내는 와중에도 장목화는 조용히 전체적인 상황을 끊임없이 검토해보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이해하기 힘들면서도 지금의 곤경을 조성한 핵심은 인공지능 퓨처가 신세계 급 각성자처럼 전자파 조종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전자파 조종⋯⋯. 신세계⋯⋯. 신세계⋯⋯.’
그러던 그때 문득 장목화가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주 실험구역에서 금속 침대에 누운 채로 생명 천사 목걸이를 사용하면서 천장을 관찰했던 거 기억해?”
성실한 성건우가 곧장 대답했다.
“어떻게 기억을 못 해요, 기이하고 건드릴 수도 없는 검은 그림자들이 천장에서 쑥 뻗어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는데.”
장목화는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그게 신세계와 관련돼 있지는 않을까?”
그녀는 생명 천사 목걸이를 이용해 신세계 급 박사를 감지했을 때 그와 비슷한, 대량의 어둠을 목격한 바 있었다.
뒤이어 장목화가 덧붙였다.
“퓨처가 전자파 조종을 할 수 있는 것과 그게 연관돼있을 가능성은?”
그 질문은 거친 파도가 되어 구조팀의 마음을 단번에 휩쓸었다.
성건우가 턱을 쓰다듬으며 장목화에게 반문했다.
“그 천장이 신세계와 연결된 애쉬랜드 교차점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시로 뻗어 나왔다가 움츠러들지만 건드릴 순 없었다는 그 검은 그림자는, 내가 생명 천사 목걸이를 이용해 박사에 맞섰을 때 감지한 대량의 어둠이랑 아주 비슷해. 그리고 박사는 이미 신세계에 진입한 강자고.”
또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건우 역시 생명 천사 목걸이의 기운을 이용해 자신의 감지력을 증강한 후에야 천장의 특이함을 발견했다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용여홍은 순간 두려워졌다.
‘만약 그 검은 그림자들이 신세계의 교차점을 대표한다면, 우리가 여기서 오랜 시간 머무른다면 무심병에 감염될 가능성도 있다는 거 아냐? 14일까지 가지 않고도 전멸할지 몰라! 아, 겐은 빼고.’
구조팀의 추측에 따르면 무심병이 신세계의 어느 바이러스에서 기원하든, 신세계와 어느 정도 연관된 어둠에서 오는 것이든, 교차점 주위 구역에서 오래 머무른 사람은 점차 무심병에 걸리게 되었다.
이 실험실의 크기로 볼 때 구조팀의 탄소 기반인들은 기껏해야 30분을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사기꾼!”
성실한 성건우가 재차 인공지능 퓨처를 욕했다.
시스템 봉쇄를 두 차례 연달아 일으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14일 동안 서로를 잔인하게 죽이고, 남은 목숨을 겨우 부지해 나가도록 하겠다더니.
전에 대문이 폐쇄된 것을 떠올린 장목화, 백새벽, 용여홍도,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까지도 퓨처가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중앙 관리실을 한번 둘러보던 장목화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우린 최대한 시간을 아껴야 해. 건우야, 군용 외골격 장치 다시 입자. 근데 전원은 켜지 말고 전자파의 침입만 면밀하게 감시하는 거야.”
겁이 많지만 신중한 성건우는 이에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았다. 그는 용여홍의 도움 아래 군용 외골격 장치를 빠르게 착용했다.
장목화 역시 백새벽의 도움을 받아 재빨리 착용을 마쳤다.
“하……. 이제 주요 실험구역으로 가서 그 천장을 돌파구로 삼아보자.”
말을 마친 그녀는 허리를 굽혀 손전등을 집어 들고 1초 정도 뜸을 들이다가, 성건우가 먼저 중앙 관리실 문을 향해 돌진한 후에야 그 뒤를 따랐다.
전원을 켜지 않은 군용 외골격 장치는 사실 장목화, 성건우에게 일종의 짐이었다. 그것도 결코 가볍지 않은 짐. 그나마 두 사람의 체력이 좋고 힘도 강해서 다행이었다.
전자파 차단복으로 몸을 감싼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 역시 그의 도구를 챙겨 구조팀을 따랐다.
구조팀이 그렇게 주 실험구역으로 돌아가는 동안 곳곳의 형광등은 일시에 꺼졌다. 심지어는 비상등 역시 그 빛을 잃었다.
인공지능 퓨처가 실험실 전원 공급을 끊어, 이곳을 어둠에 잠식시키고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이 충전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었다.
탁!
구조팀은 손전등 스위치를 눌러 전방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