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화. 퓨처
오레이는 마커스에게 만약 피할 수 없는 위험을 맞닥뜨리면 적에게 불모지 13호 유적의 실험실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암호를 알고 있다고 말하란 유언을 남겼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적에게 내리는 사형 선고였다.
몇 초간 침묵하던 소스 브레인은 고개를 돌려 화, 성건우, 백새벽,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방금 침입하면서 알게 됐다. 녀석에게는 본체가 없다. 아니, 녀석의 본체는 이 실험실에 없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을지도. 녀석은 신세계 급 전자파 조종 능력으로 원거리에서 이 실험실의 시스템을 통제 중이다!”
‘말도 안 돼. 인공지능이 신세계 급 전자파 조종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그럼 설령 그 능력이 오하명만 못하더라도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어!’
장목화가 굳은 낯빛으로 다급하게 외쳤다.
“빨리 군용 외골격 장치 벗어!”
여기서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고 있는 건 성건우, 장목화뿐이었다.
장치를 벗는 것도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라, 두 사람은 일단 먼저 군용 외골격 장치의 통제 시스템부터 껐다. 인공지능 퓨처가 소리소문없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방지하려는 뜻이었다.
군용 외골격 장치 전원이 완전히 꺼지면 전기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장목화와 전자파 방해를 할 수 있는 성건우는 단번에 이상을 알아차리고 어느 정도 차단을 시도할 수 있었다.
이미 구조팀은 게네바를 찾으러 출발하기 전, 남아있는 고성능 배터리 몇 개로 간단한 방전 장치를 제작한 바 있었다.
통제 시스템을 끈 두 사람은 그제야 버클을 하나씩 풀면서 힘겹게 군용 외골격 장치를 벗기 시작했다.
용여홍과 백새벽은 두 사람을 도우려 하는 대신 이성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뜻밖의 상황에 대비했다.
장목화, 성건우는 한차례 바삐 움직인 끝에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다.
현재는 전술 배낭만 하나씩 메고 있었고, 심지어 손전등 역시 군용 외골격 장치 위에 던져둔 상태였다.
인공지능이 왜 신세계 급 전자파 방해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지금의 성건우는 음험하지만 겁 많고 신중한 성건우였다.
이때 퓨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의 웃음기도 여전했다.
-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만약 내가 너희들 군용 외골격 장치를 건드릴 생각이었다면 진작 그랬을 거야.
용여홍은 절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인공지능 주제에 농담할 수도 있고, 희롱할 수도 있고, 즐거워 할 수도 있다니. 오하명에게 감염된 건가? 근묵자흑이라고 했어. 두 괴물이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면 상대적으로 약한 존재는 나머지 존재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잖아.’
어느 인격으로 바뀌었을지 모를 성건우의 생각 역시 가늠할 수 없는 쪽으로 튀어 있었다. 그는 퓨처의 말은 아예 무시한 채 호기심을 표했다.
“폭발을 일으켜 우리를 유인한 것도 네 짓이야?”
인공지능 퓨처는 상당히 풍부한 감정이 담긴 웃음을 흘렸다.
- 안 그럼 내일이 지나도록 도착도 못 할 것 같길래. 그럼 저건 실험실 대문이 통제에 따르지 않고 멋대로 닫혀버린 걸 발견하고, 그에 대해 저항도 했겠지. 내가 설치한 함정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짓이야.
대화는 정석적인 레드리버어로 이루어졌다. 거기에 퓨처는 소스 브레인을 칭할 때 ‘저것’이라는 표현을 썼다. 경멸의 기운이 선명한 표현이었다. 전에 소스 브레인을 조잡하고 투박한 중간 생산물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 그러니까 저게 말하는 건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실험실 대문은 이미 닫혀 있었고, 우리를 위해 다시 열어둔 거란 뜻인 거야?’
장목화 역시 속으로 인공지능 퓨처를 ‘저것’이라고 칭했다.
이내 성실한 성건우가 깨달음을 얻은 양 말을 받았다.
“일망타진을 하려고 그랬던 거구나!”
그 말에 퓨처가 웃었다.
- 너희가 아까 이 폐허에 들어왔을 때도 난 너희를 주시하고 있었어. 근데 그때는 오하명이 방해를 했고, 너희는 실험실 쪽으로 오지도 않았지.
나도 굳이 너희를 대적하려고 내 정체를 드러낼 필요가 없었어. 우리 사이엔 사실 아무 원한도 없잖아?
그러다 내 사랑하는 형이 저 로봇, 너희 동료의 도움 아래 실험실을 찾아와서는 암호를 대고 대문을 열었을 때 난 너희가 오레이 후손에게서 적잖은 정보를 얻어냈다는 걸 알았어.
그런 짓을 저지른 이들은 반드시 처결돼야 해. 실험실의 일을 온 세상에 퍼뜨리게 할 수는 없지.
그래서 너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웬걸. 너희가 알아서 폐허로 돌아오더라고. 난 당연히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지.
짝! 짝! 짝!
이번에 손뼉을 친 건 성건우가 아니었다. 박수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이후 퓨처는 더 강화된 말투로 흉내 낸 박수 소리 위에 말을 얹었다.
- 동료를 중시하는 너희들 모습은 칭찬할 만해. 상당히 안심되더라고.
백새벽이 입술을 오므리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이런 인공지능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오레이 후손은 실험실 관련 정보를 퍼뜨리고 싶어 해. 그걸로 내내 마음 졸여야 하는 삶에서 벗어나 한도 내의 자유를 얻기를 원한다고.”
인공지능 퓨처의 말투가 점점 싸늘하게 변했다.
- 그건 그들 생각이지, 나랑은 아무 관계도 없어. 난 그냥 맡겨진 임무를 다할 뿐이라고. 그들이 이곳으로 도망쳐 왔을 때 비호하고, 상응하는 자료를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 그게 내 임무야.
그 외의 다른 건 나한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해. 실험실 정보가 퍼지면 난 수시로 손님들을 맞게 되겠지? 그럼 내 존재도 쉽게 폭로될 테고.
장목화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만의 생각과 사심이 있는 인공지능이라, 과연 오레이가 말엽에 만들어낸 개량형답네.’
반면, 점차 더 큰 호기심을 갖게 된 성건우는 다른 질문을 했다.
“우리가 이 유적에 돌아온 건 어떻게 알았어? 폭발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아직 그 공원 안에 있었어. 주위에 전자 기기는 없었고, 우리 역시 어떤 영향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퓨처는 묻는 말에 모두 답하는 다운그레이드 버전 소스 브레인이 아니었다. 인공지능 퓨처는 성건우의 질문에 그저 웃기만 했다.
- 나한테는 다른 눈과 귀가 있거든.
‘다른 눈과 귀?’
구조팀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그 눈과 귀가 가리키는 게 무엇일지 추측해보려 했다.
이때 퓨처는 중앙 관리 시스템을 연구 중인 소스 브레인에게 집중했다.
- 사랑하는 형, 우리의 아버지 오레이는 줄곧 한 가지 의문을 갖고 있었어. 구세계 파괴 당시 살아남은 제3 연구원의 연구자들은 왜 실종됐을까?
전자파 차단복 밖으로 발산되는 소스 브레인의 붉은 눈이 잠시 멈칫했다. 빛은 2초간 잠시 멎었다가 그제야 다시금 번득였다.
“한 연구자가 우연히 나한테 일정한 의식이, 진정한 의식이 생겼단 걸 발견한 게 시작이었다. 그자는 날 포맷하려 했지만 난 해결방법을 찾았지.
로봇은 그런 상황에서는 인간을 공격할 수 없지만 뜻밖의 사고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 후 다른 연구자가 그가 실종된 걸 보고 바로 찾아왔고, 난 비밀을 은닉하고자 그녀도 처리했다. 연구자들은 그렇게 하나둘씩 실종된 거다.”
차분한 소스 브레인의 목소리엔 아무 감정도 없어 보였으나 그 이야기를 들은 용여홍은 온몸의 솜털이 쭈뼛 솟는 기분이었다.
인공지능 퓨처는 그 사실에 대해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았다. 간단한 말로 알겠다는 뜻을 표했을 뿐이었다.
그때, 성건우가 조금의 배척감도 없이 이 대화에 억지로 끼어들었다.
“그렇구나⋯⋯. 오레이는 도망친 후에 왜 머신 헤븐으로 돌아가 소스 브레인을 포맷하려 하지 않은 거야?”
퓨처는 한숨 섞인 말투로 답했다.
- 처음에는 뭔가 알 수 없는 요인이 있다고 생각해서 감히 아무 시도도 할 엄두가 안 났지. 그러다 그 스마트 도시를 통제한 내 사랑하는 형은 어느 순간부터 로봇들을 하나하나 만들어냈고.
그래서 그걸 철저히 처리하기 위해서 최소한 소형 국가 정도의 실력이, 각 방면의 무기가, 각종 부대가 필요하게 된 거야.
하지만 구세계 파괴 이후 그런 조직은 찾아볼 수 없었어. 퍼스트 시티는 물론 다른 대형 세력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목표를 완수할 인원 역시 충분치 않았지.
“아아, 그러면 구세계 대형 국가가 머신 헤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성건우는 지금 실험실에 갇혀 있다는 자각 같은 것도 없는 듯했다.
인공지능 퓨처가 매우 간결하게 대꾸했다.
- 전자파 방해를 하고 탄도 미사일로 뒤덮었겠지. 내 사랑하는 형한텐 그걸 막을 능력은 있지만, 그러는데 사용될 자원은 없으니까.
그리고 퓨처의 목소리엔 다시금 점차 그 웃음기가 되살아났다.
- 너희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원래 이 실험실에는 독가스도 저장돼 있었거든. 시스템이 봉쇄되면 실제 상황에 따라 그 독가스를 사용해서 불법 침입자를 죽였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구세계가 파괴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고, 이 폐허 도시에는 상응하는 생산 라인도 없어. 몇 번 사용한 이후부터는 더 이상 충전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
그래서 너희는 앞으로 14일간 굶주림과 갈증의 고통을 겪어야 해. 어쩌면 그 기간이 끝나갈 때쯤에는 동료의 살을 욕심내게 될지도 모르지.
자, 그럼 두 번째 봉쇄가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길 바라. 힘내. 너희 중 누군가는 평생 떨칠 수 없는 죄책감과 자책감에 살아갈지도 모르겠네.
퓨처는 구조팀과 소스 브레인을 억지로 공격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저 이들이 굶주리고 목이 말라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될 때까지 가둬두기만 하려는 것 같았다.
치직-
그 이후로 스피커는 꺼지고, 퓨처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현재 소스 브레인의 통제 아래 쪼그려 앉아있는 게네바는 여전히 침입한 실험실 중앙 관리 시스템을 분석하는 데 한창이었다.
그로부터 10여 초 지났을 무렵, 그가 고개를 들었다.
“시스템 봉쇄를 해제할 방법은 없다. 설계자가 특별히 만들어둔 백도어를 찾지 못하는 이상은. 퓨처는 그 백도어를 통해 원거리에서 실험실을 통제하고, 백도어를 매우 높은 수준의 방화벽으로 보호하고 있다. 지금 내 계산 능력으론 강제로 파괴는 불가능하다. 하고 싶어도 한 달은 걸리지.”
‘그럼 어쩌지⋯⋯.’
초조한 용여홍의 생각과 함께 중앙 관리실은 적막에 휩싸였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장목화가 소스 브레인을 바라보았다.
“본체와 실시간 데이터 교환을 할 수는 없나요?”
게네바의 동체가 그 정도의 계산량을 감당할 수 없다면, 데이터를 업로드하여 소스 브레인 본체에게 맡기면 될 터였다. 말하자면 또 다른 형식의 클라우드 컴퓨팅이었다.
소스 브레인은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지금의 나는 전보 방식으로만 본체와 상응하는 데이터를 교환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데이터의 양은 어마어마해. 전송하는 데만 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에 반해 퓨처는 전자파 조종도 할 수 있지. 방해는 물론 데이터를 왜곡하거나 조작할 수도 있을 거다.”
퓨처는 아직 그런 행동까지 하진 않았지만, 실험실 안의 소스 브레인이 그 본체와 대량의 데이터를 교환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리란 것만은 확실했다. 그에게는 그럴 필요도 있었고, 그럴 능력도 있었다.
이내 장목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쉽네요. 구세계에서 광범위하게 건설한 고속통신 기지국은 구세계 파괴와 함께 철저히 망가져 버렸으니까요. 그걸 중건하려고 시도한 대형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현재 애쉬랜드의 대형 세력에게 그런 기지국은 하등 쓸모가 없었다.
이때 감정을 중시하는 성건우가 소스 브레인의 말에서 한 가지 문제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목소리가 커졌다.
“그럼 지금 당신은 본체와 연결돼 있지 않은 상태라는 거네요?”
연결과 관련된 작업은 인공지능 퓨처의 방해를 받고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