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615화 (615/649)

615화. 아는 것이 힘

그렇게 장목화는 갑자기 불어난 두 갈래 붉은 빛을 응시하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동시에 여세를 몰아 뒤로 몸을 젖힌 그녀는 발을 굴려 땅에 붙은 몸을 밀었다.

콰릉!

은백색 로봇 체내에서 부풀어 오른 거대 화염이 수많은 부품을 사방팔방으로 날려버렸다.

폭발이 어느 정도 사그라들 즈음, 로봇이 있던 자리엔 온전치 못한 금속 몸통과 하반신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두어 차례 휘청거리던 그것들은 곧 바닥에 쓰러졌다.

쿵!

용여홍은 공격 준비를 멈추고 은색 홀 가장자리의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한 거야?”

조금 전 로봇은 약 1초 정도 이상 현상을 보였었다. 그러나 지금의 성건우는 전자파를 조종할 수 없었다. 오직 간섭만 가능했다.

이내 성건우는 금속 골격에 뒤덮인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억지로 꽂아 넣으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녀석의 신호 수신기 하나를 방해해 그 부분에 고장을 냈거든. 녀석이 자체 검사 상태에 들어갈 수 있게.”

그는 또 누구를 흉내 내는 건지 굉장히 여유로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렇게 정확하게?”

용여홍은 의혹을 숨기지 않았다.

‘이게 전자파 방해로 할 수 있는 일인가?’

어느새 또 인격이 바뀐 성건우는 조금 전의 자세를 거두고 웃으며 실험실 입구로 걸어갔다.

“녀석의 신호 수신기가 어느 모델인지 알아내고 거기 상응하는 고장 코드와 중단 메커니즘을 떠올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어.

평소에 난 겐한테 각기 다른 모델의 수신기를 자극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했었거든. 지금 내 수준으로도 로봇에게 짧게나마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넌 대학 때 배운 거 벌써 다 잊은 거야? 평소에 겐이랑 얘기도 안 해봤어? 친구야, 뭐니 뭐니해도 아는 게 힘이야. 몰라?”

구조팀원 중 구세계 로봇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당연히 게네바였다. 일찍이 구세계 로봇 하나와 함께 다녔던 백새벽도 그만은 못했다.

말하자면 이는 종족의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용여홍은 살짝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자신은 어떤 방면에선 정신질환이 있는 친구보다도 노력하지 않았다는 걸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물론 그게 그의 목표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윽고 성건우가 친구를 보며 따스하게 웃어 보였다.

“각기 다른 적에 어떻게 대응할지 최대한 연구해야 격한 전투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 나랑 팀장님도 그래야 하니까 넌 더 그래야 하지 않겠어? 우리는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지만, 너는 죽음을 두려워하잖아.”

‘나도 무섭다고!’

장목화는 속으로 대꾸하면서도 이 순간 사뭇 진지한 성건우를 방해하진 않았다. 그저 지금은 감정을 중시하는 성건우이리라 추측할 뿐이었다.

떨리는 심장 때문에 용여홍의 표정도 점차 진지해졌다. 그는 곧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뒤이어 백새벽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이미 실험실 입구까지 잠입한 상태였다. 조금 전 장목화가 때맞춰 전자파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고성능 흡착식 폭약을 던졌을 것이었다.

실험실 입구에 선 성건우는 백새벽을 보다 실험실 안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곤 안도와 실망감이 동시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안에서도 ‘불법 침입’이라는 경고음이 울려 퍼지면서 여러 로봇이 뛰쳐나올 줄 알았는데.”

‘아, 듣기만 해도 무서워지는 그런 말은 제발 얘기도 꺼내지 말아줄래?’

용여홍은 친구가 말하는 대로 상상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다시 개인용 바주카포에 탄약을 새로 채워 넣은 장목화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깨어있는 로봇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야. 겐은 이미 암호를 대고 들어갔어. 그리고 소스 브레인은 이런 로봇에 누구보다 잘 대처할 테고.”

그녀의 말은 조금 전 성건우가 그랬던 것처럼 까불지만 않으면, 경비 로봇 앞으로 다가가 도발하지만 않으면 그 로봇도 아무 이유 없이 행동력을 되찾지는 않을 거란 뜻이었다.

그러자 백새벽이 일렀다.

“가장 무서운 건 그들이 이미 소스 브레인의 노예가 됐을 상황이죠.”

당연히 그 부분을 생각하고 있던 장목화가 약간 쓰게 웃었다.

“정말로 그런 상황에 봉착한다면 방법은 하나야. 도망치기!”

성건우가 방금 보인 능력과 구조팀의 장비로 처치할 수 있는 구세계산 로봇은 서너 대뿐이었다. 그 이상은 힘에 부쳤다. 그마저도 소스 브레인을 포함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 * *

간단한 검사를 마친 구조팀은 성건우, 용여홍을 필두로 대문을 통과한 뒤 그 비밀 실험실에 진입했다.

이곳의 벽 역시 전부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일부분은 절연 페인트가 발려 있어 색이 달랐다.

구조팀은 느릿하게 앞으로 나아가며 양측 방을 살폈다.

앞부분 방들은 사무실처럼 별 특별한 데가 없었다. 대량의 컴퓨터와 소량의 종이 자료만 있을 뿐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장목화는 따로 그것들을 살펴보거나 챙길 생각이었다.

그렇게 3, 40미터 나아갔을 무렵, 복도 양쪽에 딸린 방에 실험 장비들이 보였다. 그중 더러는 평범했지만 몇몇은 장목화도 한동안은 그 용도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특이했다.

구조팀은 곧 이 구역 끝에 이르렀다. 전방의 방은 단단히 닫혀 있거나, 살짝 열려 있어서 한눈에 그 안쪽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성건우는 별생각 없이 앞의 문을 건성으로 툭 밀어 열었다.

천장의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난 방에는 거대하고 밀폐된 원통형 유리 용기가 하나하나 자리해 있었다.

각각의 용기는 연노란색 액체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안에는 벌거벗은 남녀의 시신이 하나씩 담겨 있었다.

용기의 형태 때문에 똑바로 서 있는 시신들은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던 그때, 성건우가 불쑥 웃음을 터뜨렸다.

“이 사람들도 조금 전에 그 로봇처럼 갑자기 고개를 들고 눈에 빛을 발하지는 않겠죠?”

용여홍은 이미 친구 성건우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그러니 친구가 이 상황에 소름 끼치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저렇게까지 무서운 얘기를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만약 성건우가 전에 경비 로봇들을 상대로 했던 기대가 그나마 합리적인 범위 내의 상상이라면, 구세계 SF영화처럼 현실이 될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었다면, 지금 상상한 광경은 영락없는 공포 영화였다.

또한 모든 이들이 알고 있다시피 구조팀원 중 공포 영화를 가장 혐오하는 사람은 바로 이 용여홍이었다.

“불길한 소리 하지 마!”

결국 장목화가 적당한 이유를 찾아 성건우를 저지하곤, 동시에 방 안의 상황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원통형 유리 용기에 봉해진 시신은 방부제에 담겨 완전히 썩지는 않았지만, 곳곳은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일어 차마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그들 몸에는 또렷한 변이의 흔적이 남아있진 않았다. 오염을 당한 것 같지도 않았다.

장목화가 보기엔 꼭 반고 바이오에서 의사를 양성할 때 쓰는 카데바처럼 보였다. 잠시 좀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이 비밀 실험실은 인체에 집중하고 있었던 건가?”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구세계 파괴 전 이 실험실과 회사의 전신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반고 바이오가 구세계 파괴 전 어떤 형식으로 어느 조직에 속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반 직원은 물론이고, 장목화 같은 관리층의 자식도 잘 알지 못했다. 그에 대한 자료는 이사급 이상만 열람할 수 있었다.

지하 빌딩에 막 들어갔을 당시 반고 바이오의 전신에 속해 있던 직원은 일부에 불과했고, 그 외의 나머지는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구세계 파괴 이후 방사능 오염, 급격한 기후 변화, 무심병의 확산, 그리고 통제를 잃은 사회를 피해 그곳으로 따라 들어간 거였다.

또한 반고 바이오 전신의 직원들은 혼란의 시대에 이미 함구령을 받았기 때문에 누구도 관련 정보를 유출하지 못했다.

장목화는 다시 혼잣말하듯 성건우의 의혹을 추측해보았다.

“둘 다 유전자 연구를 하고 있었나? 호움 난임 센터는 여기 산하에 지어진 기구인 거야. 그래서 불임 치료뿐만 아니라 유전자 우화, 선천성 질병 예방 등의 영역에도 연루된 거지.”

호움 난임 센터와 이 비밀 실험실은 같은 도시에 자리해 있었다. 장목화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연상이 갔다.

용여홍은 점점 살을 덧붙이는 장목화, 성건우의 이야기에 간담이 진동하듯 떨리기 시작했다.

‘그, 그런 얘기는 하지 말죠. 전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달지기의 벼락을 맞고 싶지도 않고, 회사에서 쫓겨나 가족과 영영 헤어지고 싶지도 않아요.’

백새벽도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복도에 서서 좌우를 둘러봤다.

“지금은 그런 문제로 토론할 때가 아니에요. 꾸물거렸다가는 뜻밖의 일이 생길지 몰라요.”

그러자 성건우가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두드리며 박수를 대신했다.

장목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속 앞으로 가면서 겐을 찾아보자. 앞으로는 비슷한 광경을 발견하더라도 대충 보고 아무 위험이 없다 싶으면 그냥 지나치는 거야. 심층적인 정보 수집이야 돌아오는 동안에 상황이 허락한다면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을 마친 그녀는 솔선수범하여 팀원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때, 성실한 성건우가 성실하게 호기심을 표했다.

“지금 바로 돌아가요?”

“…….”

장목화는 그를 팩 노려본 뒤 자포자기한 듯 말했다.

“얼른 앞장이나 서.”

“네, 팀장님!”

곧장 진지해진 성건우는 방을 나와 가볍게 앞쪽으로 뛰어갔다.

“천천히! 천천히! 뜻밖의 상황도 경계해야지!”

장목화가 못 말린다는 듯 소리쳐 타일렀다.

* * *

구조팀은 빠르게 이전의 속도를 되찾았다.

이동 중 성건우와 용여홍은 복도 양측 방문을 열어 그 안에 잠재돼 있을지 모를 위험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부제에 담긴 인체가 보존된 몇 개 방을 지나치니, 복도에 딸린 방 안의 상황도 확 바뀌었다.

이곳의 방들은 실험실이라기보다는 병실에 가까웠다. 문마다 번호가 붙어 있었고 방에는 1인용 침대와 옷장, 심박수, 맥박, 혈압과 산소포화도 등을 확인하는 기기, 호흡기, 각종 응급 장치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방들의 침대엔 남루한 옷차림의 백골이 한 구씩 누워있었다.

얌전히 누운 그들의 자세는 거의 일치했다. 천수를 다하고 죽음을 맞았는지 흐트러진 부분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환자인가?”

용여홍이 추측했다.

‘실험 대상이 된 환자?’

방들을 10여 초 정도 관찰하던 장목화는 뭔가 생각에 잠겨 물었다.

“근데 저 사람들, 너무 얌전히 죽은 것 같다는 생각 안 들어? 꼭 죽은 후에야 침대 위로 옮겨진 것처럼 자세가 똑같잖아.”

그런 상황을 비교적 많이 봐온 백새벽이 말을 받았다.

“음, 만약 습격을 받아 죽은 거라면 약간 웅크려 있거나 자리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어야겠죠.”

용여홍도 동조했다.

“몸을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중병이 들어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가 마지막 숨을 내뱉은 듯한 모습이네요.”

성건우 역시 백골들을 몇 차례 살피다 몹시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식물인간?”

순간 장목화의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들이 불붙듯 활활 타올랐다.

그녀는 바로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방민서랑 이진용의 아들, 또 강소월처럼 지원자 신분으로 실험적 치료를 받으러 온 식물인간?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북방 회사로 의심되는 북방의 모처로 보내졌다는 건데⋯⋯.

전부 식물인간인 이 사람들은 구세계 파괴 후 그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져서 이렇게 천천히,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 걸까?”

눈앞의 상황과 여러모로 맞아떨어지는 설명이었다.

백새벽도 장목화의 가설이 약간 비약적이기는 하지만 받아들일 만은 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연구를 했던 건 북방 회사만이 아니었던 걸까요?”

“아마도.”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호움 난임 센터가 정말로 이 비밀 실험실과 어느 정도 연관돼 있다면, 그곳과 북방 회사가 손을 잡고 개최한 유전자 영역 세미나에 이 비밀 실험실 사람도 참관하지 않았을까? 심지어는 강연을 진행했을지도 몰라.’

해당 세미나에서 강연했던 이들의 직책 정보와 연구 방향 등을 빠르게 회상하던 장목화는 갑자기 그대로 굳어버렸다.

특수한 이름 하나를 떠올린 탓이었다.

특별 게스트 목록에 포함돼 있었지만 음역된 애쉬랜드어 이름만 있었을 뿐, 그 외의 다른 정보는 없던 사람.

이두형!

시선을 거둔 장목화가 재차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기는 적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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