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613화 (613/649)

613화. 게네바 구하기

몇 초 후 그녀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혹시 그 비밀 실험실을 찾으러 폐허에 들어간 거 아닐까?”

순간 용여홍은 얼마나 놀랐으면 그 자리에서 펄쩍 뛸 뻔했다.

“설마! 겐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 지능 로봇인 겐은 오하명한테 조금도 저항하지 못한다고!”

“우리는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네.”

성실한 성건우가 반박했다.

“그야 이전까지는 그럴 줄 몰랐으니까⋯⋯.”

용여홍이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오하명이 지금껏 보인 능력은 구조팀이 어느 정도 예방할 수도 있고 피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구조팀도 오하명이 봉인된 상태여도 자신들을 압도하는 실력의 소유자임을 철저하게 깨달았다.

장목화는 저도 모르게 그 독창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와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고,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목을 가다듬던 그녀는 말하려는 성건우를 막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난 작은 흰둥이 추측에 동의해.”

“하지만⋯⋯.”

용여홍은 게네바가 그렇게 경솔하게 불모지 13호 유적에 들어갔으리란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겐은 성건우가 아니지 않은가.

백새벽도 용여홍의 마음을 읽은 건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

“어쩌면 지금의 겐은 소스 브레인에 통제당하고 있는지도 몰라.”

용여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럴 리가! 우리는 그때 이후로 겐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어. 비밀 실험실이나 오레이 유언, 소스 브레인 포맷 등등 일언반구도 안 했잖아. 게다가 소스 브레인은 여기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고⋯⋯.”

중계기 역할을 할 위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내 백새벽은 성건우, 장목화를 한 번씩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랑 그런 얘기를 했을 때부터 이미 소스 브레인이었는지도 몰라.”

‘……!’

용여홍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뒤이어 장목화 역시도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가 아비아와 접촉해 오레이의 유언을 전달한 뒤부터 겐의 핵심 모듈 속 소스 브레인의 인격은 점점 늘어났을 거야. 겐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인지했다 해도 통제돼 버린 거지. 정말 그런 거라면 우린 그간 때로는 겐과, 때로는 소스 브레인과 교류한 거야.”

용여홍은 게네바와 다시 만난 이후부터 있었던 갖가지 일을 떠올렸다.

“그런 느낌은 저, 전혀 없었는데⋯⋯.”

장목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스 브레인이잖아.”

머신 헤븐 내 모든 로봇의 근원. 게다가 그 인격은 게네바의 핵심 모듈에 숨어있었고, 게네바는 프로그램에 따라 운행되고 있었다. 그러니 소스 브레인은 게네바의 각종 반응같은 건 힘들이지 않고 흉내낼 수 있었을 터였다.

“인격 분열이 일어난 후에도 우리처럼 이렇게 모두가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하나로 똘똘 뭉치는 경우는 거의 없죠.”

성건우의 목소리에는 자부심과 슬픔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그 슬픔은 게네바의 처지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그러자 성실한 성건우가 바로 반박하고 나섰다.

“황금 엘리베이터 문 앞을 막고 있던 녀석은 벌써 잊은 거냐?”

그 말에, 유약하고 겁이 많지만 음험한 성건우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꼭 그렇게 빈정거려야겠어?”

결국 장목화가 오른손으로 아래를 누르는 동작을 취했다. 그녀의 오른손이 자유로운 건 생명 천사 목걸이는 이미 성건우에게 되돌려주어서였다.

“싸우지 마. 일단 바닥에 남은 흔적을 찾아 겐의 행적을 확인하자.”

지능 로봇 게네바는 합금으로 만들어졌고, 일부는 골격 구조로 이뤄져 있지만 무게는 여전히 묵직한 편이었다. 그 때문에 이동할 때는 반드시 바닥에 자국이 남기 마련이었다.

한 차례 검사를 진행한 끝에 구조팀은 게네바가 정말로 동굴 출구를 통해 불모지 13호 유적에 진입했음을 확인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던 그때, 용여홍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겐은 왜 이 상자들을 출구 쪽으로 옮겼지?”

성건우가 호응했다.

“엇? 프로그램에 고장이 났나 보다. 두 인격이 싸운 거지.”

이 방면으로는 그만한 경험자가 없었다.

하지만 백새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잠시 좀 머뭇대며 말했다.

“아마 겐은 우리가 위험을 맞닥뜨리고 동굴로 돌아왔을 때 최대한 빨리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면서 공격, 철수 능력을 높이길 바랐을 거야.”

그러니 이 상자들을 꽤 멀리까지 옮겨놓은 것일 터였다.

성건우는 침묵했고,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동조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럴 필요 없었겠지. 겐이 우리를 지원해줄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게네바는 불모지 13호 유적에 들어가 있었다.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감정을 추스르며 한숨을 내쉰 장목화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이제 어쩌지?”

팀장 장목화는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해 먼저 팀원들 의견부터 구했다.

역시 성건우가 제일 처음으로 망설임 없이 외쳤다.

“겐을 구해와야죠!”

표정이 약간 풀어진 백새벽도 나섰다.

“전 어떤 동료도 포기하지 않아요.”

우리라 칭하지 않은 건, 다른 동료들에게 자신의 의견만 강요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예. 곧 밤이지만요.”

용여홍은 호응부터 한 뒤 난관을 지적했다. 밤을 맞은 불모지 13호 유적은 훨씬 더 위험했다.

“가장 위험한 오하명이 우리한테 손댈 리 없는데 겁날 게 뭐 있어?”

성급한 성건우는 그 즉시 동굴 밖으로 달려가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건 여러 오하명 중 한 명일 뿐이잖아⋯⋯.”

용여홍이 그와 논리적으로 맞섰다.

‘만약 오하명이 간헐적으로 발작하거나 하면 어쩌려고?’

성급한 성건우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 사람 발목을 붙잡고 늘어질 다른 오하명이 있으니 괜찮아! 멍청한 아우라에 대한 대비책만 잘 마련해 놓고 최대한 버티면 곧 우리 아군으로 돌아올 거라고.”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사실 오하명은 봉인돼 있어서 능력 발휘에 한계가 있어. 그에게 상응하는 환경을 바꾸고 전자파 신호를 보낼 기회만 주지 않으면 아까 전 같은 상황을 다시 경험하리란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물론 그에게 다른 방법이 없을 때를 전제로 한 이야기지만. 하……. 우리한테 전자기 펄스 폭탄이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네. 이런 적을 마주한 상황에서는 그게 아주 큰 효과를 발휘했을 텐데.”

현재 애쉬랜드에서 전자기 펄스 폭탄이 유용하게 쓰일만한 곳은 없었고, 그렇기에 그것을 생산하는 세력도 극히 드물었다.

구세계에 남아있던 것들이 있긴 하지만, 이미 품질 보장 기간이 지나버렸거나 망가진 상태라 지금은 오직 오렌지 컴퍼니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퍼스트 시티에 오래 머물렀던 데다 반고 바이오라는 뒷배를 업고 있으며, 연합 공업과도 연줄이 있는 이 구조팀 역시도 전자기 펄스 폭탄 판매자와 접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엇보다 장목화의 생체 공학 의수에 저장된 고압 전류는 이미 대부분 소진이 된 터라 회복을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성건우는 두말하지 않고 자리에 쪼그려 앉더니 군용 외골격 장치가 든 상자를 열어 손전등 불빛을 비춰보았다.

곧 그가 안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겐이 고성능 배터리를 남겨두고 갔네요. 우리가 원래 가진 거랑 더하면 간이 방전 장치를 만들 수 있어요. 중요한 순간엔 꽤 유용할 거예요.”

인공지능 갑옷에도 고성능 배터리가 필요했지만 소모량이 많지 않아서 하나만 있어도 제법 오랫동안 쓸 수 있었다.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너랑 작은 빨강이한테 부탁 좀 하자.”

이 말만으로도 그녀의 태도는 확실히 드러났다.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이던 장목화는 정색을 한 채 더 명확하게 말했다.

“하늘이 완전히 컴컴해질 때까지는 대략 2시간 정도 남았어. 위험에 빠진 동료를 두고 이곳을 떠날 수도 없고.”

짝짝짝!

성건우가 손뼉을 치며 감개무량하다는 듯 대꾸했다.

“자기 동료 하나 못 구하는데 어떻게 전 인류를 구하겠어요?”

‘또, 또 그새를 못 참고 영웅 놀이에, 모두의 대표자 놀이에 심취하셨군.’

장목화는 아래위로 성건우를 한번 흘기다 화제를 전환했다.

“이번에는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자.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오하명이 발작하지 않는 쪽에 걸어보는 거야.”

그 말을 듣고 용여홍이 재차 미간을 구겼다.

“겐 그러니까, 소스 브레인은 오하명에 통제될 건 걱정 안 했을까요? 오하명이 우릴 처치할 생각이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 리는 없는데⋯⋯.”

구조팀도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겨우 오늘 오후의 일이었다.

장목화가 신중하게 말했다.

“소스 브레인만의 방법이 있겠지. 어쨌든 그는 행동에 나섰잖아.”

짝! 짝!

이번엔 두 번 손뼉을 친 성건우가 장목화의 평소 역할을 가로챘다.

“좋아, 낭비할 시간 없어. 하늘이 캄캄해질 때까지 꾸물댈 거야?”

백새벽, 용여홍은 급히 움직여 서로의 군용 외골격 장치 착용을 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 무장을 한 구조팀은 다시 동굴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석양빛에 타는 듯했고, 까마귀 울음도 수시로 하늘가를 채웠다.

노을에 잠긴 폐허 도시는 장엄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적막하고 슬펐다.

하지만 용여홍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지 않고 집중해 좌우를 둘러보았다. 당장이라도 그 비밀 실험실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물어보고 싶었다.

구조팀은 아비아에게 비밀 실험실의 구체적인 위치까지 얻어내진 못했다. 아비아는 불모지 13호 유적은 와본 적도 없고 이곳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기계적으로 할아버지 오레이가 했던 말만 반복했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도시를 전혀 모르는 구조팀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오후에 서점에서 도시 지도를 찾은 덕에 어느 정도 판단은 할 수 있었으나 시간이 부족한 탓에 심층적인 분석과 추측까진 나아가지도 못했었다.

용여홍이 보기에는 게네바가 남긴 자국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또 가장 효율적인 방법 같았다.

그는 그 지능 로봇이 홀로 퍼스트 시티에 남아있었을 때 몰래 애쉬랜드 13호 유적의 도시 배치도를 수집해 그 위험하고도 비밀스러운 실험실의 위치를 파악해 냈으리라 믿었다.

물론 구세계의 여러 자료가 저장된 소스 브레인은 어쩌면 진즉부터 그 지도를 장악하고 있었는지도, 그 이상의 정보만 결핍돼 있었는지도 몰랐다.

용여홍이 막 입을 떼려던 그때였다.

콰릉!

폐허 도시 어딘가에서 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지도 경미하게 진동했고 수많은 새도 각기 다른 건물 지붕에서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북쪽이야. 그 실험실도 그쪽에 있는 것 같아.”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장목화가 빠르게 폭발 구역을 파악했다.

순간 그 말에 백새벽이 뭔가를 연상해냈다.

“겐이 일으킨 걸까요?”

장목화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

“그럼 목표 지점을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성건우는 만족해하며 과장된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었다.

뒤이어 고개를 돌린 그가 용여홍에게 물었다.

“혹시 목표 지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거기로 가보려 한다고 몰래 우리 욕했던 거 아니지?”

뜨끔한 용여홍이 강경하게 부정했다.

“아냐! 뭐,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국 쪽은 아니네. 약간 빗겨났어.”

그 역시 폭발음이 들려온 쪽을 바라보며 만족감을 표했다. 비밀 실험실은 결국 오하명이 봉인된 곳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쉿.”

성건우가 입술에 검지를 대며 용여홍의 입방정을 단속했다.

용여홍도 이번엔 이성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겐도 확실히 그쪽으로 갔네. 출발하자.”

계속해서 동굴 주위의 각종 흔적을 관찰하던 장목화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팀장으로서 마음은 앞장서 동료들을 이끌고 싶었으나 몇 걸음 걷다가 점차 속도를 늦춰 성건우, 용여홍이 자신을 앞지르도록 했다. 군용 외골격 장치에 GPS와 내비게이션이 있지만,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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