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1화. 흰빛
‘정말로 이상 현상이 발생한 건가?’
용여홍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호움 난임 센터라는 불가 성지의 이상 현상은 정말로 생식 재료 냉동 창고에 숨겨져 있었다.
순간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성건우가 조금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장생, 보리⋯⋯. 생식 재료⋯⋯. 성유물⋯⋯.’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비롯되는 연상을 막으려 애썼다. 이 자리에서 달지기의 벼락을 맞아 죽고 싶진 않았다.
‘아이, 이게 다 건우 저 자식 때문이잖아!’
그 사이 성건우는 반쯤 폭파된 철문에 막 들어서자마자 그 자리에 멈춰서 청록빛을 내뿜는 물건을 알아서 꺼냈다.
그건 호수 같은 색의 옥부처가 아닌, 성건우가 전에 벗어버린 육식주였다.
제2 식품회사에서 발생한 이상 현상과 융합한 이 도구는 나뭇결이 드러난 표면에서 옅은 청록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성건우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장하시 연합 철강공장의 옥부처는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에서 시간을 되돌려 과거에 있던 광경을 보여줬어. 식품회사를 대표하는 육식주는 호움 난임 센터에서 이상 현상을 보이고 있고.
그러니까, 반드시 그 순서를 따라야 한다는 건가? 호움 난임 센터의 무언가, 혹은 특정 이상 현상이 다음 불가 성지의 중요 구역을 여는 열쇠가 되나?”
“음, 그 문제는 이 유적을 떠난 뒤에 다시 이야기해보자.”
장목화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은 시간적으로도, 장소적으로도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성건우의 추측이 매우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5대 불가 성지 탐색은 하나하나 단단히 연결된 듯했다. 그 돌파구를 제대로 찾아야지, 순서를 뒤죽박죽 뒤섞을 수는 없었다.
장목화는 다시 육식주를 손바닥에 받쳐 든 성건우를 바라보다가, 조금 전 들은 질문을 생각했다.
‘다음 탐색지는 어디일까? 빙원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 아니면 대강시 임해 마을 어귀 늙은 회나무 아래?’
그렇게 머리를 굴리던 그녀는 순간 주목할만한 문제를 하나 발견했다.
‘만약 정말로 건우 말처럼 불가 성지 탐색에 순서가 있는 거라면, 우리 팀은 왜 그 순서를 틀리지 않고 그대로 따라왔던 거지?’
이번 임무를 계획할 때 복귀 도중이 아닌, 퍼스트 시티로 향하는 중에 굳이 먼 길을 돌아가면서까지 식품회사를 방문하기로 한 건 성건우가 522호 방의 트라우마를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한 차례씩 시도를 거친 끝에 깨운, 그 안에 잠재된 괴이한 기운이 육식주와 융합된 걸 떠올려보면 이는 그저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 몰랐다.
522호는 성건우가 심령의 복도에 진입한 후 두 번째로 들어간 방이지만, 더 엄밀히 따지자면 그가 탐색한 첫 번째 방이었다.
지나치게 많은 우연은 더 이상 우연이라 볼 수 없었다.
장목화가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손전등을 꺼낸 성건우는 불을 비춰가며 냉동 창고 안의 광경을 살폈다.
창고 내부는 철판으로 여러 구역이 나뉘어 있었고, 각각의 구역에는 가스통 같은 물건이 종횡으로 하나하나 놓여 있었다.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단단히 봉해져 있었는데, 다름 아닌 생식 재료가 보관된 액체질소 용기였다.
현재 손전등 불에 육식주의 빛이 섞인 까닭인지 그 용기들은 기이한 청록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만은 달랐다. 그건 마치 옅은 안개에 한 겹 뒤덮여 있는 듯 하얬다.
가슴팍에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걸고, 한 손으로는 육식주를 굴리며 다른 한 손엔 손전등을 쥔 성건우는 천천히 그 특이한 용기로 다가갔다.
“설마⋯⋯.”
이미 문 앞에 이르러 있던 장목화도 그 광경을 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은 감히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녀와 정확히 반대로 용여홍의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설마 정말로 장생이나 보리의 생식 재료가 그 액체질소 용기에 보관돼있는 건 아니겠지? 구세계 파괴와 무심병 폭발이 연구해서는 안 될 것을 연구하고, 신과 인간을 결합해 새로운 생물을 탄생시키려 한 사람들 때문에 발생한 건 아니겠지?’
역시 멍한 표정을 드러내고 있던 백새벽은 금세 사방을 감시하며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뜻밖의 상황을 경계했다.
태산이 무너져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을 듯한 성건우는 무시무시하고도 중요한 때일수록 더욱 담담해졌다. 그는 청록빛 아래에서도 흰색 안개에 뒤덮여 있는 듯한 그 액체질소 용기 앞으로 한 걸음씩 꿋꿋이 다가갔다.
그 자리에서 한 10여 초 자세히 관찰하던 그가 묵직하게 말했다.
“이 용기는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개봉됐네요.”
냉동 창고 안의 다른 액체질소 용기는 모두 단단히 밀봉되어 있었다.
용여홍은 순간 기이한 생각을 하나 떠올렸다.
‘살아난 생식 재료가 알아서 번식한 뒤 용기를 열고 줄을 지어 이곳을 당당히 떠난 건 아닐까.’
뒤이어 장목화가 침착하게 말했다.
“안에 뭐가 남아 있는지 봐봐.”
성건우는 손전등으로 용기 안쪽을 비춰보았다.
그의 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아무것도 없어요.”
동시에 성건우는 육식주를 쥔 손을 뻗어 액체질소 용기에 갖다 댔다.
그 순간, 용기 안에서는 흰빛이 한 줄기씩 피어올랐다.
허상의 빛은 한 차례 선회한 뒤 곧장 성건우의 체내로 날아들었다.
그 흰빛들의 융합 목표는 육식주가 아닌 성건우였다.
순식간에 성건우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마치 영혼이 강제로 육신에서 뽑혀 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기원의 바다에 이르러 있는 걸 발견했다.
바로 성건우 자신의 기원의 바다였다.
* * *
아래론 미약한 빛을 번득이는 허상의 바다와 보일 듯 말 듯 한 섬들이, 위론 옅은 흰색 안개로 뒤덮인 하늘과 거대하고 어두운 틈 한 줄기가 보였다.
이때 성건우들은 알아서 분열돼 각각 흰빛들 한 줄기에 휘감겼다.
빛에 휘감긴 그들의 체내에서는 얼굴들이 하나씩 튀어나왔다. 지금보다 더 많은 성건우들로 분열하려는 것 같았다.
“안돼!”
어느 성건우일지 모를 성건우가 큰소리로 외쳤다.
바로 그때였다. 수종의 심령 세계로 통하는 어두운 틈 안에서 수많은 그림자가 살아나더니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보이지 않는 장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려는 모양새였다.
그러자 흰 빛줄기들이 그대로 멈추었다. 뒤이어 천적이나 원수를 맞닥뜨린 듯 성건우들로부터 빠르게 벗어나 허공에서 하나로 합쳐지더니 저 어두운 틈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대로 충돌한 그림자와 흰빛은 서로에게 섞여들면서 틈을 채웠고 그 이상 어떠한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성건우들은 한동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합체했다.
그중 둘을 날개로 삼은 성건우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틈 근처에 이른 그는 낮춘 목소리로 수종이를 몇 차례 불러보았다.
역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잠시 기다려보던 성건우는 한 손을 뻗어 그 틈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흰빛과 검은 그림자가 뒤섞여 형성한 어둠을 어루만지고, 손가락으로 살짝 찔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반응은 없었다.
성건우는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게 다야?”
다음으로 그는 퍽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왜 더 버티지 못한 거지? 조금만 더 버텼다면 우리의 수는 적어도 세 배로 늘어났을 텐데.”
흰빛에 휩싸여 있었을 당시 성건우들은 분열하고 있었다. 그건 성건우 민주협의회의 구성원이 대폭 늘어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틈이 정말로 원상태를 회복했음을 확인한 성건우는 기원의 바다를 떠나 눈을 번쩍 떴다.
* * *
“어떻게 된 거야?”
이미 성건우 곁에 다가와 있던 장목화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때 성건우의 왼손에 쥐어진 육식주는 더 이상 청록빛을 발산하지 않았다. 그것과 닿았던 액체질소 용기 주위의 옅은 안개도 사라진 상태였다.
“기원의 바다에 들어가서 수종이가 남겨둔 기운과 동귀어진했어요. 아니, 함께 조용해졌어요.”
여유롭게 답하는 성건우를 보며 장목화가 미간을 구겼다.
“다른 문제는 없지?”
그녀는 잠재된 위험이 있을지는 묻지 않았다. 그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성건우가 웃었다.
“일단은요. 정 안 되겠으면 생명 천사 목걸이 안의 기운이나 육식주 안의 기운을 전이시키죠, 뭐.”
‘아니, 기원의 바다에 자꾸 다른 것들 넣지 말라고!’
장목화는 속으로만 포효하며 동시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액체질소 용기에는 번호가 없는 것 같아.”
정상적인 용기는 해당 생식 재료의 원천에 대응하는 번호가 있어야 했다.
“원래는 있었겠죠. 구세계 파괴 이후 누군가 없애버린 걸까요? 다른 액체질소 용기에도 번호는 없네요.”
성건우가 옆쪽을 가리켰다.
장목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신중하네. 다른 액체질소 용기의 번호를 기억해뒀다가, 센터장 사무실에서 얻은 하드디스크 안의 데이터와 대비하면서 사라진 번호가 뭔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구조팀은 센터장 사무실의 컴퓨터에서 하드디스크를 분리해 챙겼었다. 그건 돌아가 게네바에게 데이터 복원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것도 전자 제품이라 오하명의 영향을 받을 수 있겠지만, 무전기처럼 구체적인 공격력을 갖지는 못했다. 게다가 장목화가 무슨 문제라도 발견되면 곧장 깨부술 생각으로 엄격하게 감시 중이기도 했다.
성건우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 그녀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큰 문제는 아니야. 재고 자료만 순조롭게 복원되면 이름들을 하나씩 조사해보면서 의심스러운 대상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빠르게 수색을 마친 성건우, 장목화는 냉동 창고에서 빠져나왔다.
뒤이어 용여홍, 백새벽과도 합류한 뒤 홀로 올라가 호움 난임 센터를 떠날 준비를 했다.
* * *
구조팀 네 사람이 계단을 걸어 1층에 다다른 그때였다.
모두의 시야에 갑자기 나타난 한 인영이 있었다.
홀 안의 파란 소파에 앉은 인영은 스물일고여덟 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였다. 머리는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회색 정장 차림의 남자는 알이 동그랗고 조그만 안경을 끼고서 홍보물 하나를 진지하게 읽고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용여홍의 머릿속에는 이름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오하명!
장목화, 성건우, 백새벽 역시도 같은 이름을 떠올렸다.
오하명…….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국 주인 오하명!
물론 네 사람은 오하명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전에 사망한 유적 사냥꾼 패링턴에게 이 유적 안에서 저 남자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당시 그 남자 곁에는 눈이 붉은 구렁이와 흰 늑대가 있었다고 했다.
그 두 변이 생물은 오하명이 만들어낸, 그의 애완동물이었다.
다른 설명 없이도 모두가 자연히 이 남자가 오하명임을 알아보았다.
장목화는 심장이 졸아드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머리를 굴렸다.
‘영원한 세월 교파의 늙은 천사가 스스로를 희생해 이 무시무시한 괴물을 억지로 봉인했다고 했는데, 녀석은 드디어 그 봉인에서 벗어난 건가?’
그녀는 이곳에서 어떤 전자 기기의 작동도, 다른 인간 의식의 존재도 감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 이 호움 난임 센터 1층 홀 안의 전자파 환경이 굉장히 혼란스럽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지난번에도 오하명은 봉인돼 있음에도 패링턴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의 도움을 받아 당시 불모지 13호 유적을 탐색하던 구조팀과 독행 사냥꾼들에게 ‘파흐 포스트’를 전달한 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