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9화. 이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 정도 조사가 진행됐을 무렵, 성건우가 직설적으로 말했다.
“전부 유명인의 전기, 관리 경험, 마장 상식, 와인 평가 등등이네요. 유전자나 생식과 관련된 과학 서적도 몇 권밖에 안 돼요.”
용여홍이 동조했다.
“맞아요, 진열장 안에도 호움 난임 센터가 탄 상장들이랑 무슨 골프 대회 트로피, 경마 경기 우승자 메달뿐이에요.”
“접대 구역도 깨끗하네요.”
백새벽 역시 수색 결과를 보고했다.
팀원들 보고에 막 대답하려는데, 장목화는 곁눈으로 문득 서랍에 든 한 문서를 발견했다. ‘유전자 연구 최첨단 분야 세미나 스케줄’이란 제목이었다.
장목화는 한번 천천히 훑어보다가 문서에 표시된 날짜를 확인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세미나는 북방 회사 대표단이 호움 난임 센터를 방문한 날로부터 이틀 뒤에 열린 것이었다.
정신을 집중한 장목화는 이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었다.
그 사이 할 일을 마친 성건우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왔다.
「제1강, 유전자 개조의 가능성 연구⋯⋯
강연자, 리처드 알루아(북방 회사 고급 연구원)」
장목화는 전반부 내용만 확인했는데도 이 문서의 가치가 어마어마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는 북방 회사의 사람이 호움 난임 센터를 방문한 뒤 곧장 파흐 지구를 떠나지 않고 이 도시로 돌아와 며칠 더 머무르면서 연합 세미나를 개최했다는 뜻이었다.
장목화가 바로 고개를 들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계 태세를 높여.”
백새벽, 용여홍, 성건우는 동시에 고도의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그중 성건우는 수시로 고개를 빼서 장목화 쪽을 내다보며 문서의 내용을 훔쳐보려고 했다.
하나하나 일상적인 스케줄을 모조리 살피고 해당 세미나에 참여했던 연구원들의 이름을 기억에 새긴 장목화는 이 사무실의 주인이 치코프라는 남자임을 확인했다.
문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10명이 넘는 특별 게스트가 적혀 있었다. 옆에 달린 주석에 따르면 그들은 여러 영역을 아우르는 학제적 과학자이거나, 유전자 사업을 하는 회사의 대표들, 정권을 등에 업은 인사였다.
그들의 이름 역시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던 장목화는 그중에 애쉬랜드인도 몇 명 포함돼 있는 걸 발견했다.
레드리버어 이름 뒤에 쳐진 괄호 안에는 음역된 애쉬랜드어 이름과 그들의 신분, 직책이 적혀 있었다.
장목화는 습관적으로 첫 번째 애쉬랜드인 게스트의 이름을 읽었다.
“케틀린. 수용, 린⋯⋯.”
애쉬랜드인의 성과 이름순은 레드리버인과 달라서 거꾸로 읽어야 했다.
즉, 케틀린의 정확한 이름은 린수용이었다.
그때, 옆에서 성건우가 다시 그 이름을 정정했다.
“아니에요, 수영, 린이네요……. 인수영?”
순간 장목화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인수영?”
‘피플지에 나왔던 그 천재 과학자? 건우가 그 아이언마운틴 시티 트라우마에서 봤다던 그 이름?’
“그런 것 같은데요.”
성건우가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목화는 황급히 인수영으로 의심되는 그 게스트의 신분을 확인했다.
「북방 회사 청년 과학자, 중대 프로젝트 위원회 회원.」
전에 장목화는 북방 회사의 부총재 오크 역시 특별 게스트의 일원임을 파악했었다. 그는 중대 프로젝트 위원회 부회장이라는 직책도 맡고 있었다.
“인수영이 북방 회사 직원이었다고?”
그녀는 혼잣말을 하며 그 뒤로 이어지는 이름들도 마저 확인했다.
그중 맨 마지막에 자리한 사람은 레드리버어 이름이 없었다. 애쉬랜드어 음역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장목화는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읽다가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표정은 점점 이상하리만치 굳어가다가 잠시 후에야 겨우 목소리를 냈다.
“이두형, 리⋯⋯. 이두형⋯⋯.”
장목화가 읊은 이름에 마법의 주문이라도 깃든 듯, 구조팀 전체가 짙은 적막에 잠겼다. 누구 하나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네 사람 모두 폐허 도시에 자리한 이 불가 성지에서 이두형의 이름을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야 옳았다.
십여 초가 흐른 뒤, 성건우는 깊은 감정이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이두형 선생님은 역시 구세계 때부터 여태까지 살아온 사람이었어!”
상대를 정말로 자신의 선생님으로 여기는 것인지 성건우의 얼굴에는 자부심과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용여홍이 중얼거렸다.
겉보기에 이두형은 기껏 해봐야 40대였으며, 구세계가 파괴된 지는 벌써 70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가 호움 난임 센터와 북방 회사가 손잡고 거행한 유전자 연구 합작 세미나에 특별 게스트로 참석한 신동이었다 한들 최소 여든 살은 넘었어야 했다.
할 말을 정리하던 백새벽이 말했다.
“동명이인인 건 아닐까요? 아니면 음역은 비슷하지만 애쉬랜드어 이름은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요?”
장목화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강력하고 특별한 이두형 선생님이면 충분히 나이를 먹지 않을 수 있을 거야. 그만한 인물이 구세계에서 유명세를 날린 것도 그럴듯하고.”
이두형은 무심자의 왕으로 의심되는 수종이를 도망치게 했던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런 그가 구세계의 파괴를 겪었다는 건 논리적인 추측이었다. 게다가 그는 수정의식교의 부처의 응신과 같은 오래된 친구들도 아주 많았다.
용여홍이 곧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그게 정말로 이두형 선생님이면 구세계 파괴 원인과 무심병의 기원을 물어볼 걸 그랬네요.”
성실한 성건우가 콧방귀를 뀌었다.
“잊었어? 이두형 선생님은 아주 많은 기억을 잃었다고 말했었잖아.”
장목화도 그의 말에 동조했다.
“이두형 선생이 골동품 학자가 되기를 선택한 건, 그런 것들을 통해 일부 기억을 되돌리고 싶어서였는지도 몰라.”
이때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린 백새벽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르는 뜻밖의 상황을 경계하며 캐물었다.
“이두형 선생님은 그 세미나에 어떤 신분으로 참석하셨나요?”
장목화가 고개를 느릿하게 내저었다.
“모르겠어. 레드리버어 이름도 없고, 표기된 신분이나 직책도 없는 유일한 특별 게스트야.”
정권을 등에 업은 이도 표면적으론 그럴듯한 직함 하나씩은 있었다.
성건우는 깊은 부러움을 드러냈다.
“진짜 신비롭네!”
이내 용여홍이 장목화에게 물었다.
“뒤에 다른 내용은 더 없나요?”
그는 현재 이두형의 내력과 이 유전자 연구 최첨단 분야 세미나에 참석한 이유를 토론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효한 단서가 충분치 않기 때문이기도 했고, 지금 이 불모지 13호 유적에 있는 동안 목숨과 같은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장목화는 문서의 맨 마지막 장을 넘겨보았다.
“특별 게스트 다음으론 세미나가 열린 장소가 나와 있어. 이 건물 4층, 3번 회의실이야. 다른 건 없고. 하……. 거기 가서 조사해봐야 할 것 같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세미나가 끝난 뒤 그 회의실은 깨끗하게 정리되고 다음 일정을 위한 준비를 갖췄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미나가 열린 시기는 구세계가 파괴되기 단 며칠 전이었다.
장목화는 부디 호움 난임 센터의 직원들이 그곳을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했기를, 모종의 단서나 흔적을 남겨뒀기를 바랐다.
말을 마친 그녀가 사무용 책상 서랍을 가리켰다.
“이리 와서 나머지 문서들 훑어보자, 속전속결로 끝내게.”
성건우, 백새벽, 용여홍은 이미 그들의 임무를 끝냈으니 남아도는 노동력을 동원해 귀중한 시간을 아끼는 편이 나았다.
십여 분 동안 조사와 열람을 거친 끝에 구조팀은 이 센터장 사무실에 조사 가치가 있는 자료는 더 이상 없다는 걸 확인했다.
그래도 장목화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이 문서에서 인수영과 이두형 선생의 이름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이곳에 온 보람은 있었던 거야.”
오랜 세월 폐허 도시를 탐색하고도 효과적인 단서라고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팀에 비하면 구조팀은 훨씬 운이 좋은 편이었다.
장목화가 그 문서를 자신의 전술 배낭에 쑤셔 넣고 바닥에 내려둔 개인용 바주카포를 집어 들자, 용여홍은 즉각 창밖으로 훌쩍 넘어가 안쪽을 들여다보려는 자세를 취했다.
제도 선사 성건우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육식주를 돌리는 한편 철강공장 폐허에서 찾은 병력의 내용을 읊었다. 그 의식을 마친 뒤에는 옥부처도 꺼냈다.
그러나 변화는 없었다.
“연이 아닌가 봅니다⋯⋯.”
제도 선사의 말은 언제나 이상야릇했다.
한탄을 마친 뒤 옥부처와 병력 복원본을 거둬 넣은 성건우는 팀원들을 따라 방에서 천천히 빠져나간 뒤 같은 층의 다른 곳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 * *
한층, 한층 꼭대기 4층까지 이르렀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물론 이는 구조팀의 눈에 차는 것이 없다는 말이었다. 일반적인 유적 사냥꾼 팀이었다면 돈이 되는 무엇이라도 뜯어갔을 터였다.
잠시 방향을 판별하던 백새벽이 비스듬히 떨어진 전방을 가리켰다.
“저쪽이 3번 회의실이네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 위에 그려진 9개 도안이 각각 다른 달지기에 대응했다. 달지기 상징 모음집이었다.
성건우는 그 종이를 앞으로 내밀며 고개를 숙인 채 침묵에 빠졌다.
그로부터 몇 초 후,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모든 달지기의 가호가 있기를.”
장목화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기도할 때는 육식주는 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럼 9월의 달지기 만다라만 널 기특해할걸. 넌 만다라의 상징을 그리지도 않았지만.’
곧 성건우가 달지기 그림 모음집을 챙겨 넣자 용여홍이 호기심을 표했다.
“왜 각 달지기에 대응하는 기도문은 안 읊는 거야?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 없다, 경계하는 마음은 영구히 존재하고, 새 생명은 태양과 같고, 생명은 가장 귀중하고. 뭐 많잖아?”
성건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굉장히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누굴 먼저 말하고 누굴 나중에 말하겠어?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야. 난 이 순서 때문에 신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날까 봐 겁이 난다고.”
그러자 백새벽이 제안했다.
“달의 순서에 맞추면 되잖아?”
순간 성건우의 눈이 확 밝아졌다.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럼 다시 해야지!”
다시 또 달지기 상징 모음집을 꺼내려고 부스럭거리는 그를 보고, 결국 장목화가 나섰다.
“그만, 그만!”
그 후 백새벽과 용여홍을 지나친 그녀는 먼저 3번 회의실로 향했다.
성건우는 목을 죽 늘여 빼고 그녀를 지켜보다가, 잘못된 방으로 들어가지 않는 모습에 상당히 실망스러워했다.
몹시 큰 3번 회의실에서는 여전히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는 듯 보였다.
전면에는 거대한 빔프로젝터 스크린과 그 측면에 놓인 연단이, 아래쪽으로는 의자들과 빔프로젝터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곳에 남은 종이는 하나도 없었고 심지어 검게 변한 혈흔도 보이지 않았다. 구세계 파괴 이후 무심자들의 발길도 닿지 않았던 듯했다.
장목화는 몰래 한숨을 토하면서도 절차에 따라 명령했다.
“각자 한 구역씩 맡아 수색하자.”
성건우는 곧장 회의실 맨 앞으로 다가가 빔프로젝터 스크린을 가볍게 두드리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 시간 고생 많았어.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그 세미나에 어떤 대단한 인물이라도 초청했던 거야?”
꼭 오래된 친구에게 묻는 듯한 말투였다.
당연하게도 스크린은 말이 없었다. 만약 스크린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아마 그 첫마디는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미친놈!’
장목화는 자신이 다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싶었지만 왼손은 개인용 바주카포를 들고 있는 데다가 오른손이 마비된 까닭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창밖에 스미는 오후의 햇살 아래 구석과 문 뒤, 일부 의자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