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605화 (605/649)

605화. 시각

투둑……. 투둑…….

아무런 색도 없는 액체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피는 아니었다. 액체는 전기뱀장어 형 생체 공학 의수에서 흘러나왔다.

장목화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 전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위를 살피던 그녀는 근처에 나타난 인간 의식과 생물 전기 신호가 감지되자마자 목표를 상대로 공간 환각 능력을 발휘했었다.

장목화는 적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라는 걸, 그러니 자신의 환각에 별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녀는 상대의 공격을 허공으로 돌리겠다는 사치스러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가 목표로 했던 위치에서 약간만 벗어나 자신의 왼팔을 노리기만 바랐다.

과연, 그 효과는 그녀의 바람대로였다.

‘우리 멤버들과 내 기억이 노출됐단 걸 뻔히 아는데 우리가 그냥 가만히 있었을까. 우리 최종 목적지까지 파악한 너희들인데 여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 하나 생각하지 못했을까?

2번 계획은 정확히 이 점을 노린 계획이었어. 혹시 당하게 될지 모르는 암살을 경계하고, 머릿속으론 계속 에이돌른의 주시를 회상하는 거.

작은 빨강이가 기계 팔을 밖으로 드러낸 건 강한 비대칭을 만들어 네 공격을 끌어내기 위한 거였지. 거기다 여홍인 검은 늪 철갑뱀 인공지능 갑옷까지 입고 있었고.

물론 네가 여태까지 참을 수 있을 줄은, 자발적으로 목표를 찾아 공격하려 할 줄은 몰랐지만.’

장목화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혀 후속 공격을 피했다.

그 사이 그녀의 시야로 과하게 번득이는 대량의 아크가 나타났다.

거의 동시에 성건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수십 미터 밖, 글라이더를 멘 적이 추락하며 부연 먼지를 피워올렸다.

백새벽과 용여홍은 당연히 그 기척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일단 두 사람은 장목화가 무사한지부터 확인한 뒤, 거의 동시에 트렌치코트가 이미 흙투성이가 된 벨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뒤이어 총기를 쳐든 두 사람이 목표를 겨냥했다.

방아쇠를 당기기 전,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혀끝을 깨물었다. 그 통증으로 자신이 몽유 상태인지, 동료를 다치게 하지 않을 상황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인공지능 갑옷으로 온몸을 감쌌으니 당연히 자신의 뺨을 때리거나 배를 가격하는 등의 방식으론 몸에 고통을 가할 수 없었다.

혀끝을 가볍게 깨무는 자극에 두 사람 모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앞엔 아무 변화도 없었고, 비로소 안심한 그들은 대담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오렌지 소총과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이 동시에 불을 내뿜었다.

한편, 암살에 실패한 허란은 놀라기는 했지만 넋을 놓지는 않았다.

경험이 풍부한 그녀는 측면을 향해 몸을 날리면서 허공에서 자신의 인영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이는 강력한 은신 능력표현 중 하나였다. 이 능력의 사용자는 양측이 이미 접촉해 더 이상 의식을 숨길 수 없게 된 상황에서도 꽤 높은 확률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다시 존재를 감출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확실히 허란의 수준은 성건우보다 위였다. 아주 순조롭게 위기를 넘긴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 장목화와 성건우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바로 그때였다. 몸을 날린 허란의 목표 지점, 보기에는 아무도 없는 구역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지 동작 불능!

허란은 억지로나마 성건우 시야에서 사라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미 부여된 영향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암살에 실패한 순간 사지 동작 불능 능력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안정적인 착지는 불가능했다. 적이 전의 궤도로 짐작할 수 있을 만한 곳을 벗어나려 했지만 그대로 데구루루 구르며 상당히 볼썽사나운 자태로 자빠져버렸다.

쿵!

그녀의 인영도 곧 드러나려 했다.

이때, 몸을 굽히고 있던 장목화는 앞쪽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그 길로 은백색 아크 줄기가 쏘아지며 세밀한 그물망을 형성했고, 그대로 허란이 몸을 날렸던 구역을 뒤덮었다.

이젠 인간 의식과 생물 전기 신호에 근거해 적을 감지할 수도, 눈, 귀, 코 등의 감각기관에 의지해 찾아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장목화가 한 선택은 수학 능력을 바탕으로 궤적을 계산한 뒤 해당 범위를 뒤덮는 무차별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파지직!

허란은 그대로 감전되었다. 챙이 넓고 높은 펠트 모자는 옆으로 떨어져 버렸고 검은 머리카락 중 일부는 타들어 가면서 위로 오그라들었다.

그녀는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뇌와 온몸이 마비되어버려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성건우, 장목화가 각자 허란을 포착하고 육식주와 생명 천사 목걸이를 쓰려고 할 때였다.

그 순간, 두 사람은 곁눈으로 너무도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인공지능 갑옷을 착용한 용여홍과 백새벽이 총을 들어 올리더니 같은 식구인 성건우, 장목화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몽중몽과 몽유가 더해진 결과였다.

조금 전, 겁에 질린 벨프가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을 때, 그와 허란이 건물 옥상에 놓아둔 태블릿 PC에 모종의 변화가 일어났다.

화면엔 어느덧 주위를 노이즈로 흐린 인영이 하나 떠올라 있었다.

이미 신세계에 진입한 강자, 제8 연구원의 박사였다.

모습을 드러낸 그는 태블릿 PC를 중계기로 삼아 백새벽과 용여홍을 대상으로 영향을 발휘했다.

이미 한 차례 몽유를 경험한 목표가 이미 단단히 경계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박사는 제일 먼저 몽중몽을 택했다.

즉, 백새벽과 용여홍이 혀끝을 가볍게 깨물었던 건 꿈에서의 일일 뿐, 실제로는 아예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그 고통으로 깨어났을 때 두 사람은 가장 안쪽의 꿈에 머물러 있었다.

여전히 꿈에 사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몽유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꿈에서 본 적은, 장목화와 성건우가 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성건우, 장목화는 방탄복만 입었을 뿐 아무런 보호 장치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둘은 일단 본능적으로 허란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피신부터 했다.

성건우와 장목화 모두 다리에 힘을 주어 펄쩍 뛰어오르거나 몸을 날려 슬라이딩으로 위기를 피했다.

탕! 탕! 탕!

다다다-

그들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곳에선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돌조각이 갈라지는 등 난리가 났다.

이 기회를 틈타 마비된 뇌가 풀린 허란은 습관대로 모습을 숨겼다.

다음 순간, 장목화와 성건우가 멈췄다.

땅에 붙어 있던 장목화는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버렸고 길가의 버려진 자동차 옆으로 몸을 날렸던 성건우는 두 다리가 풀려버렸다. 더러운 차 문에 기대 주저앉은 그는 스르륵 눈이 감겼다.

용여홍과 백새벽도 같은 영향 아래 비틀거리다가 빠르지도, 그리 느리지도 않게 풀썩 쓰러졌다.

검은 늪 철갑뱀과 카멜레온 인공지능 갑옷에 달린 비늘까지 땅과 부딪히며 묵직한 충돌음을 냈다. 하지만 그 소리에도 두 주인은 깨는 법이 없었다.

박사가 이번에는 태블릿 PC로 구조팀에게 수면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신세계에 진입한 후 그는 이미 꿈 영역의 모든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회귀한 게 아닌 데다가 육신은 이곳에서 아주 먼 제8 연구원에 있는지라 능력이 적잖게 깎인 상태였다. 그래서 수많은 능력의 심층적인 효과를 실현할 수는 없었다.

그와 동시에 오하명을 경계하기도 해야 했다.

그것만 아니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수면으로 구조팀원들을 영원히 잠재우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깨어날 수 없는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사실 박사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수면만 써도 충분했다. 네 목표만 통제해두면 곧 기운을 차릴 허란이 그들을 하나씩 다 처리할 것이었다.

호움 난임 센터 문 앞은 갑자기 극도로 고요해졌다.

폐허 도시를 관통하는 바람 소리만 가볍게 퍼지고 있었다.

허란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도, 공격을 발휘하지도 않았다. 전기 충격의 영향으로 손발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눈 앞에 펼쳐진 비대칭투성이에 그녀는 분노가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당장 회복해 이 모든 것을 쳐부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장목화의 왼손바닥에서 한 덩어리 아크가 다시 뿜어져 나와 장목화의 몸으로 떨어졌다.

파지직-!

소리와 함께 장목화가 벌떡 일어났다.

장목화의 전기 뱀장어 형 생체 공학 의수 속 보조 칩이 수면 상태에 진입한 것을 파악하고 자극을 주어 깨운 것이었다.

전기 충격으로 인한 가벼운 마비 속, 장목화는 수십 번 연습했을 때처럼 능숙하게 의식을 왼 손목에 둘러놓은 생명 천사 목걸이로 가라앉혔다.

그녀는 위험한 상황에서는 이 도구에 의지해도 좋다고 했던 회사의 지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포착할 수 있는 건 극도의 겁에 질린 말인 영역의 적뿐이었다. 악몽의 뿌리를 찾거나 해결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또한 장목화는 황금 저울 영역의 암살자를 감지하고 이어질 습격을 저지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 심장 마비는 아무 효과도 못 내. 설마 회사 힌트에 다른 의미가 있었던 걸까?’

장목화는 고민 끝에 시도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성건우가 맹목의 고리를 이용했을 때처럼 생명 천사 목걸이를 이용해 자신의 인간 의식 감지 범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 장목화의 시야가 확 트였다. 마치 근시인 사람이 알맞은 도수의 안경을 쓴 듯, 원거리의 감시 카메라 여러 대를 통제하기라도 한 듯 원래는 볼 수 없거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훤히 보였다.

허상의 어둠이 이곳을 뒤덮은 채 성건우, 백새벽, 용여홍을 감싸고 있었다. 그 기운의 시작점을 쫓아가니 먼 곳의 한 고층 빌딩 꼭대기가 있었다.

‘역시, 회사에서 개조한 생명 천사 목걸이에 특이한 데가 있었네!’

장목화는 기뻐하며 이 도구를 통해 자신의 의식으로 허상의 어둠을 건드려봐야겠다고 즉단했다.

그렇게 양측이 접촉한 순간, 장목화는 상대가 극도로 먼 곳에 자리해 있고 모종의 방식으로 이곳과 중첩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꼭 두 세계가 교차된 것만 같았다.

장목화는 이 정도 거리라면 저 허상의 어둠을 상대로 심장 마비 능력을 사용해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급한 상황이니만큼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그 은제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활성화했다.

미약한 빛이 번득인 순간, 허상의 어둠 끄트머리, 극도로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두려움을 뛰어넘는 충격이 어린 소리였다.

그렇게 허상의 어둠이 물러나자 성건우가 즉각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수십 미터 정도 떨어진 벨프를 목격했다. 선글라스에 트렌치코트를 걸친 남자는 아직 에이돌른의 주시로 인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성건우는 곧장 그를 상대로 청록빛이 번득이는 육식주를 사용했다.

의식 박탈!

벨프는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더는 두려울 필요가 없어졌다.

뒤이어 백새벽과 용여홍도 깨어나며, 구조팀은 동시에 이 구역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황금 저울 영역 암살자는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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