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604화 (604/649)

604화. 다른 블록 (2)

두 차례나 기이한 상황을 겪은 용여홍은 인공지능 갑옷의 훌륭함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보호의 역할로만 따져도 군용 외골격 장치보다 훨씬 나았다. 거기다 인공지능 갑옷은 온몸을 다 덮어주는 데도 전혀 무겁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조팀은 여태껏 여러 번 총을 쐈는데도 어떤 위험한 생물을 자극하거나 끌어내지는 않았다.

덕분에 구조팀은 호움 난임 센터가 있는 구역에 순조롭게 이르렀다.

백새벽이 알기론 탐색자들의 발길이 몇 차례 닿지 않은 이런 폐허 도시에는 적잖은 위험이 잠재돼 있었다.

위험 요소는 규모가 어느 정도 줄어든 무심자, 변이 생물, 야생 동물, 예비용 배터리와 소형 발전기에 의지해 유랑하는 로봇 등에 국한되지 않았다.

특정 장소에서 총성이 울려 퍼진 순간, 일단 그들은 많건 적건 그쪽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불모지 13호 유적은 완전히 죽어버린 듯, 소수의 몇몇 괴물만 존재할 뿐이었다.

걸음을 이어가던 그때, 구조팀의 시야에 오래된 양식의 4층짜리 건물 한 채가 들어왔다.

따뜻한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기는 하지만 얼룩덜룩한 외벽에는 녹색 덩굴 식물이 잔뜩 붙어있었다.

식물들은 외벽에 세로로 걸린 조명 간판 표면까지 뒤덮은 채 지배자의 위용을 마음껏 드러내는 중이었다.

용여홍은 자세한 판별을 거친 끝에 노란 외벽 꼭대기 부분에 아직 덩굴 식물로 뒤덮이지 않은 암적색 단어를 발견했다.

“난임⋯⋯, 센터⋯⋯.”

“여긴가?”

더는 공간 지각 능력에 자신이 없는 장목화가 동료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백새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예요. 호움 난임 센터.”

* * *

한 건물 옥상.

잡초와 새똥으로 가득한 이 옥상은 바로 호움 난임 센터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이곳에 선글라스를 끼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오늘도 정갈한 가운데 가르마를 자랑하는 벨프가 있었다.

벨프는 곧 망원경을 내려놓고 옆에 있는 허란을 돌아보았다.

“목표가 거의 다 도착했어.”

눈에 초점이 없는 허란이 가볍게 웃었다.

“그럼 나설 준비 해. 저들은 그 여관 사장이 일찍이 자기들 목적지를 팔아넘겼다는 걸, 퍼스트 시티 도시 방위군 주둔 정보를 우리가 일부러 남겨둔 거란 건 꿈에도 모를 거야.”

벨프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차피 우리 목적지도 이곳이었잖아.”

이야기를 하는 사이 그는 허란이 쥐고 있는 태블릿 PC를 보았다.

허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난 제한을 풀고 두 번이나 저들 곁을 따라다니면서 여러 사실을 파악해 냈지. 먼저 그 장목화라는 여자, 그 사람은 네 말대로 생물 전기 신호를 감지해. 범위는 지형에 따라 다른데, 40~70미터 사이야.

훌륭해, 네가 저번에 기억을 열람할 때 잊지 않고 유용한 정보를 수집해준 덕분이야. 이제 난 은신으로 그 여자를 속일 수 있어. 내 첫 번째 공격 목표가 바로 그 여자야.

너는 그 기회를 틈타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범위에 진입해서 인공지능 갑옷을 입은 두 사람을 네 편으로 만들어.

그때 성건우라는 각성자는 이미 나한테 정신이 팔려있을 거야. 장목화를 구하려고 하거나 그 여자 복수를 하려고 하겠지. 우리의 새로운 두 동료가 그 남자를 배신하고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하기 더없이 좋은 타이밍이야.

아무튼 박사님이 집중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야 해. 여기서 가장 위험한 건 그 오하명이잖아. 박사님의 주시가 없는 한 너나 나나 영문도 모르고 죽음을 맞을 수도 있어.

아……. 이제 더는 날 억누를 수가 없어. 두 번이나 추적하는 동안 너무 많은 비대칭을 봐왔다고. 정말 이젠 그 모든 걸 다 부숴버리고 싶어!”

허란이 깊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 * *

외벽이 덩굴 식물로 뒤덮인 호움 난임 센터를 바라보던 장목화는 기관단총을 미끄러뜨려 앞쪽으로 늘어뜨렸다.

그런 뒤 오른손을 들어 검지를 세웠다.

구조팀 작전, ‘2’를 가리키는 수신호였다.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지만 백새벽, 용여홍, 성건우는 척척 호응했다. 그들은 일단 원거리에서 날아든 일격에 몰살당하는 상황을 피하려는 듯 서로 간의 거리를 벌리며 약간씩 조정을 거쳤다.

용여홍은 검은 늪 철갑뱀 인공지능 갑옷 오른손 부분에 난 틈으로 T1형 기계 팔을 내밀었다. 그 팔을 좀 더 잘 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검은 늪 철갑뱀 인공지능 갑옷은 이름대로 유연성이 상당했다. 어느 정도 위로 말아 올릴 수도 있어서 다기능 기계 팔을 드러내기도 쉬웠다.

뒤이어 백새벽의 모습은 환경에 녹아들 듯 스르륵 사라졌다. 그래도 장목화, 성건우는 인간 의식 감지로 그녀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 중이었다.

성건우는 춤이라도 추려는 듯 허리를 이리저리 스트레칭하더니 전술 배낭에서 육식주와 생명 천사 목걸이, 옥부처를 꺼냈다. 그는 수정의식교 승려처럼 즉각 왼손에 염주를 쥐더니 생명 천사 목걸이는 장목화에게 던져줬다.

날렵하게 목걸이를 받아 든 장목화는 두어 차례 조정 끝에 오른쪽 팔이 마비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성건우는 2초간 옥부처를 진지하게 보다 조용히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작은 빨강이는 불자가 아니니 제가 가지고 있는 게 낫겠습니다.”

용여홍은 살짝 인상을 쓰며 한숨을 토했다.

‘와, 너는 진짜…….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을 쳐야겠어? 어차피 옥부처는 바라지도 않았어! 내가 그걸 뭐에 써? 전에 악몽에도 아무 효과 없었잖아!’

용여홍은 이번엔 애써 친구를 무시하고 장단을 맞추지 않았다. 언제 뜻밖의 상황이 일어날지 모를 위험천만한 상황에 장난을 칠 때는 아니었다.

다시 전투 대형을 이룬 구조팀은 호움 난임 센터로 나아갔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심지어는 약간 느리기까지 했다. 이 불가 성지에서 갑자기 무슨 괴물이 튀어나오면 어쩌나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육안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는 길을 잃을 리 없지만 장목화는 무려 7, 8분을 들인 끝에야 목적지의 대문 밖에 다다랐다. 자동 감응 장치가 달린 유리문엔 오후 햇살이 달라붙어 금빛을 뿌리고 있었다.

장목화는 깨끗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더럽지도 않은 그 유리 너머로 안쪽 상황을 살폈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 채 2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측후방에 돌연 한 여성의 인영이 나타났다.

25, 6살 정도 돼 보이는 외관에 성숙한 분위기, 달걀형 얼굴, 버들잎 같은 눈썹의 여자는 흰 셔츠에 청재킷,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 챙이 넓고 높은 펠트 모자까지, 그녀의 구석구석이 완벽한 대칭을 이룬 상태였다.

허란! 아주 오랫동안 스스로를 억눌러 온 이 제8 연구원 특파원이 드디어 공격에 나선 것이었다.

황금 저울 영역에 속한, 심령의 복도 깊은 곳까지 탐색한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암살자 중 한 명이었다. 어느 신세계 강자가 돌아오지 않는 한, 그녀는 이 칭호를 가지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이는 그녀가 은신이라는 능력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가리고 의식을 숨기면서 목표의 청력과 시력을 방해하고 그들의 예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허란은 그렇게 아무 기척도 없이 목표 근처에 이를 수 있었다.

이 능력은 뭇별 홀과 기원의 바다 레벨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대칭 강박이라는 대가로 청력 방해와 시각 은닉이라는 두 능력을 얻고 심령의 복도에 진입할 때 감각 둔화를 선택해야만, 그 세 가지 조건이 하나로 합쳐져야 만이 이처럼 엄청난 능력을 얻을 수 있었다.

제8 연구원의 실험에 따르면 대칭 강박을 대가로 지불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능력은 고정돼있진 않았다. 그래도 청력 방해와 시각 은닉, 감각 둔화 중 두 개는 확실했다.

이후 황금 엘리베이터를 타고 심령의 복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나머지 하나를 채우면 은신 능력을 갖게 되는 셈이었다.

물론 은신의 사용에도 나름의 제한이 존재했다.

그 영향력이 가장 큰 제한은 두 가지였다.

첫째, 타인의 기운이 어린 도구나 일정한 무게를 초월하는 물건을 휴대할 수 없다는 것.

둘째, 목표에게 바짝 따라붙으려고 하면 의식을 사용할 때든, 눈이나 귀를 사용할 때든 그 효과가 감퇴된다는 것.

즉, 목표를 공격하기 직전엔 본인 존재를 숨길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허란이 알기론 신세계에 진입하면 이 두 가지 제한은 효과적으로 개선된다고 알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허란의 양손엔 연합202 두 자루가 쥐여져 있었다.

총은 오직 장목화만을 겨냥한 채 격발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이 이러한 과정에 익숙해진 허란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전조와 공격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데다 거리도 무척 가까웠다. 허란은 총알이 잘못된 곳으로 향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목표의 몸에서 붉은 꽃처럼 피어나는 선혈과 대구경 총알이 피부를 찢고 들어가는 모습이 선명했다.

게다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그녀는 총을 두 자루나 사용하고 있었다. 하나가 잘못될 경우 나머지 하나로라도 목적을 완수하려는 것이었다.

본디 그녀와 비슷한 각성자들은 대부분 이런 선택을 했다. 이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진 무기는 무게 제한 때문에 가지고 다닐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심각한 대칭 강박증 때문이기도 하지만.

총성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자신의 의식을 숨기고 장목화의 생물 전기 신호 감지 범위에서 벗어나 있던 벨프도 건물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다.

등에 거대한 박쥐 날개 같은 글라이더를 멘 그는 상공에서 구조팀원들을 향해 돌진해왔다.

눈 깜짝할 사이 그는 기억 조작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로 진입했다.

하지만 성건우, 백새벽, 용여홍은 총성이 들려온 쪽에만 정신을 집중하여 하늘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벨프의 눈동자가 순간 이상해졌다. 흰자가 많아지고 검은자는 수축하며 눈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촉수 두 갈래가 체내에서 뻗어 나와 백새벽과 용여홍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그야말로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벌어진 일이었다.

벨프는 두 사람의 기억을 읽으며 조작을 위해 적합한 장소를 찾았다.

그런데 돌연 그의 눈앞에 한 광경이 떠올랐다.

어둑하고 고요한 교회당 안, 어느 벽에 흰 대문이 그려져 있고, 반쯤 열린 그 문 뒤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과 보일 듯 말 듯 한 여자의 인영이 보였다. 여자는 기억의 주인을 주시하는 듯했다.

그 위엄있으면서도 무관심한 모습에 벨프는 딱딱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부딪히기 시작했다. 온몸에서도 식은땀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솟았다. 손발은 차가워졌고 고개는 아래로 떨어졌다.

이는 가장 원시적이고 강렬한 공포였다.

웅-

벨프의 머릿속에 묵직한 소리가 퍼지며 또렷한 한 단어를 새겼다.

‘에이돌른!’

“아악!”

그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활공 중이라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던 몸은 결국 묵직한 자루처럼 땅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허란의 모습이 막 드러났을 때 이미 반쯤 몸을 튼 장목화는 왼팔을 들어 올렸다. 그 팔과 개인용 바주카포로 함께 몸을 막으려는 것 같았다.

물론 허란은 끄떡도 하지 않고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장목화가 그 동작을 완수하기도 전에 총알이 먼저 당도하리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탕! 탕!

연합202의 반동에 허란의 팔이 뒤쪽으로 살짝 밀렸다.

뒤이어 그녀의 시야에 상상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비쳤다.

두 발의 총알은 그녀가 노린 곳이 아닌 치우쳐진 쪽으로 향했다.

한 발은 개인용 바주카포 표면에 맞았고, 나머지 한 발은 장목화의 왼팔에 적중하면서 크지 않은 상처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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