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602화 (602/649)

602화. 무시

그렇게 사흘을 보내도 아무 일이 없자, 구조팀은 그제야 제대로 마음을 놓고 며칠에 걸쳐 필요한 물자를 구하며 갖가지 사소한 문제를 해결했었다.

조용히 생각을 밝힌 장목화는 그게 정상적인 생각은 아니라는 걸, 성건우의 생각에 더 가까워져 있다는 걸 깨닫고 얼른 덧붙였다.

“아무리 좋은 기억력도 낡은 펜만 못하지. 잘했어.”

성건우는 장목화의 칭찬에 신경 쓰지 않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맞아요, 제 달지기 상징 모음집은 좀 급한 상황에서 그려진 탓에 지나치게 조악하긴 해요. 확실히 다시 그려야 하긴 할 것 같아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장목화는 손전등 빛이 흔들리지 않도록 오른손을 꽉 쥐었다.

뒤이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말했다.

“그럼 이럴 가능성은? 첫째 날 밤에 있던 혼란 이후,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그 광경을 목격했던 522호 방 주인은 겁이 난 거야. 그래서 여객선 어딘가에 숨어서 본인 인간 의식까지 가린 채 배를 채워야 할 때만 나오는 거지. 마침 공교롭게도 네가 첫째 날에 물어본 3분의 1에 해당하는 승객 중 그는 포함되지 않았던 거고, 그 이후론 낮 동안 그를 찾을 수 없었던 거야.”

성건우의 눈빛이 확 밝아졌다.

“오늘 밤에 다시 시도해봐야겠네요!”

그는 여객선의 첫날로 다시 돌아가서 나머지 3분의 2에 해당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질문을 할 작정이었다.

구조팀은 오늘 만약 상응하는 구역을 다 탐색하지 못한다면 날이 어두워지기 전 불모지 13호 유적을 떠나 북안 뭇 산에서 밤을 보낼 예정이었다. 구조팀 역시 위험을 무릅써가며 그 폐허에서 밤까지 지낼 생각은 없었다.

* * *

구조팀은 이제 통로의 끝, 그러니까 금속 대문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네 사람은 다시금 잡초가 무성한 공원과 나쁘지 않은 경치를 자랑하는 인공 호수, 저 멀리의 높은 빌딩 한 채를 보았다.

정오의 햇빛 아래 잠긴 이 광경은 참 고요하면서도 찬란했다.

“멋대로 곳곳을 들쑤시고 돌아다니면 안 돼. 여기 존재하는 위험은 오하명 하나만이 아니니까.”

장목화가 지시를 내렸다. 그녀는 현재 왼손에는 개인용 바주카포를, 오른손에 쥔 손전등은 기관단총으로 고쳐 쥔 상태였다.

뒤이어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우린 호움 난임 센터가 어딨는지 모르니 조금씩 탐색해가며 천천히 찾는 수밖에 없지 않나요?”

퍼스트 시티에 봉쇄된 관계로 불모지 13호 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지도를 찾아야지!”

성건우의 기분은 상당히 좋아 보였다.

“어디서 찾아?”

언제나처럼 용여홍도 지지 않고 되물었다.

그때, 잠시 머뭇거리던 백새벽이 말했다.

“이 근처에서 한번 찾아볼까? 오하명이 봉인된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면 괜찮을 거야.”

장목화는 기억을 한번 더듬어 보았다.

“내가 본 자료에, 구세계 파괴 전 레드리버 유역에 자리한 몇몇 나라에서 큰 서점에 도시 지도도 팔았었대.”

“그거면 찾기 더 쉽겠네요.”

용여홍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큰 도시의 서점은 한두 개가 아닐 테니 분점이 없는 호움 난임 센터보다야 찾기 쉬울 터였다.

그렇게 구조팀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전투 대형으로 오하명이 봉인된 곳의 반대편을 향해 공원을 떠났다.

거리에 진입하니 곳곳에 흩어진 시체, 산화된 피, 한데 충돌한 자동차들, 죽음처럼 적막한 광경이 적나라하게 나타났지만, 구조팀은 조금도 놀라는 일 없이, 금빛을 번득이는 물건에 유혹되는 일도 없이 수색에만 집중했다.

이동 중 장목화, 성건우는 주위의 전자파 파동과 전류 변화에 온 힘을 기울였다. 동료들을 오하명의 영향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두 거리를 가로질렀을 무렵, 백새벽이 눈을 빛내며 턱짓으로 비스듬히 떨어진 전방을 가리켰다.

“저기 서점이 있네요.”

더러운 유리창 너머로 안쪽에 남아있는 책들이 보였다.

이는 불모지 13호 유적에 발을 들인 이가 매우 적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들은 곧 멋대로 자라난 거리 복판 화단을 우회해, 길가 서점에 이르렀다.

서점 규모는 절대로 작지 않았다. 입구에 서 있는 용여홍은 안으로 뻗은 서점 끝을 아예 볼 수 없었다.

먼저 안에 아무것도 없음을 감지한 장목화는 선두로 나섰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들어 카운터 위쪽을 살피더니 비교적 온전한 액정 모니터를 보고 중얼거렸다.

“서점에 왜 저런 게 설치돼 있지?”

막 구조팀원들도 시선을 돌려 책장들을 살피려 했던 그때였다.

팟!

치지직-

카운터 위의 모니터가 갑자기 켜지더니, 모니터 화면에 왜곡돼 흐릿한, 노이즈가 낀 인영이 하나 떠올랐다.

-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뒤이어 울려 퍼진 오하명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어려 있었다.

다다다-

장목화는 총을 쏴 그 액정 모니터를 박살 냈다.

화면에 떠오른 인영은 사라졌고, 울려 퍼지던 목소리도 그대로 끊겼다.

대체로 오하명에 대한 구조팀 생각은 거의 비슷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말 것!

장목화의 총성이 사그라들 무렵, 다시 서점 내 방송 장비가 작동했다.

- 뛰어난 선비는⋯⋯.

탕!

- 신세계의 비밀을 알고 싶지 않⋯⋯.

탕!

- 무심병에 대해서는⋯⋯.

탕!

- 내가 백효를 변이 생물로 전환한 것은⋯⋯.

다다다!

오하명의 모든 말이 번번이 끊겼다. 백새벽, 성건우, 용여홍, 장목화 모두가 그에게 말을 맺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뛰어난 사격 실력을 자랑하는 구조팀은 결국 서점 내 모든 전자기기를 다 박살 내버렸다. 장내도 그제야 고요해졌다.

용여홍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하명은 많은 것들을 알고 있나 보네요.”

성건우는 그를 홱 돌아보며 눈을 밝게 번득였다.

“너, 녀석한테 영향받은 거 아냐?”

용여홍이 발끈했다.

“이건 정상적인 생각이라고!”

이번엔 장목화도 두 친구의 언쟁을 저지하는 대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하명은 일반적인 생물을 변이 생물로 전환할 수 있는 건가?”

그게 사실이면 그의 능력으로는 인간을 각성시킬 수 있는지도 몰랐다.

과연 오하명은 이 세상의 독창 같은 존재였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장목화가 신경 쓰고 있는 부분에 주목한 듯했다.

백새벽이 먼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

“독창에게는 인간, 혹은 동물을 각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까요?”

그녀가 보기에 백효는 그 흰 늑대의 이름인 것 같았다.

작년 북안 뭇 산에 나타난 흰 늑대는 대량의 유적 사냥꾼을 데려가 불모지 13호 유적에서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자살하도록 만들었었다. 그러나 그전까지 그런 기이한 형상의 생물을 본 사람은 없었다.

구조팀은 원래 그 흰 늑대가 주로 불모지 13호 유적 안에서 활약했었기 때문에 외부에선 존재를 몰랐을 거라고, 오하명이 녀석에게 특정한 임무를 맡겨 북안 뭇 산으로 보낸 후에야 사람들 눈앞에 나타났으리라 추측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녀석은 오하명에 의해 변이 생물이 되기 전까지, 그러니까 작년 이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동물에 불과했고, 그랬기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평범한 동물이 변이로 인해 특이한 능력을 갖게 되는 케이스는 인간이 각성할 확률보다 더 낮았다. 적어도 각성자는 흔히 볼 수 있는 편이었지만 그런 쪽으로 변이가 된 생물을 찾기는 절대로 쉽지 않았다.

그러니 평범한 동물에 변이를 일으킬 수 있는 오하명이라면 인간도 각성시킬 수 있을 가능성이 컸다.

장목화가 또 머뭇거리다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게 그가 독창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인지도 모르지.”

다음 순간, 성건우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팀장님도 오하명에게 영향받은 거예요?”

장목화는 성건우를 노려보는 대신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 사람을 완전히 믿는 게 아니라.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말하는 거야.”

방금 오하명의 말은 전부 다 제대로 끝맺지 못했지만 구조팀은 저도 모르는 사이 모종의 사유가 이식됐을 가능성에 주의해야 했다.

당시 그 세 유적 사냥꾼의 자살은 구조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때문에 성건우가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질 때마다 반복적으로 질문을 하는 건, 평소처럼 장난이라기보단 막중한 책임감의 표현이라 봐야 옳았다.

물론 성건우를 잘 아는 장목화는 그의 질문에 농담도 살짝 어려있단 걸 알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일리 있네요.”

성실한 성건우도 곧 장목화의 말에 동조했다.

검은 늪 철갑뱀 타입 인공지능 갑옷을 착용한 용여홍 역시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뜻밖의 상황을 경계하는 한편 토론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그 독창이 동물, 심지어는 인간을 각성시킬 수 있는 이유는 뭘까요?”

성실한 성건우가 외쳤다.

“표현이 좀 잘못된 거 아냐? 인간보다는 동물이 더 각성시키기 어려워.”

용여홍이 맞섰다.

“오하명은 평범한 동물을 대상으로 변이시키는 능력을 썼을 뿐이라, 아직 인간에게까지 그 능력을 확대할 수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잖아.”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 말을 믿어?”

“그만, 그만!”

장목화가 얼른 두 사람의 의미 없는 대화를 저지했다.

이때 백새벽이 용여홍의 질문에 답변해주었다.

“독창은 신세계와 관련돼 있을지도 몰라. 각성도 그렇고.”

각성자는 심령의 복도 안에서 신세계로 통하는 대문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 기반한 추측이었다.

구조팀은 한동안 침묵에 빠져있었다.

그러다 장목화가 먼저 책장들을 보며 침묵을 깼다.

“난 오하명이 평범한 동물을 변이시키고 인간을 각성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봐. 근데 이건 그가 이식한 사유가 아니야. 몇 가지 사실에서 연상한 거지.”

웃음을 거둔 성건우가 총을 들지 않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수종이요?”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맞아. 수종이 옆엔 가위 말, 수면 고양이, 여러 고등 무심자가 있잖아.”

전자는 변이 동물에 대응했고, 후자는 각성자에 가까웠다.

뒤이어 백새벽이 장목화의 말을 보완해주었다.

“그리고 이두형 선생님이 했던 말을 보면 수종이 역시 이 세상의 독창과 썩은 살이라고 생각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이는 오하명이란 독창의 곁에 흰 늑대가 있다는 점과 딱 맞아떨어졌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수종이는 봉인되지 않은 상태이며 부하도 더 많다는 것이었다.

용여홍도 이젠 모종의 깨달음을 얻은 듯 말을 받았다.

“어쩐지, 늪 1호 유적 안의 고등 무심자와 변이 생물의 수가 무서울 정도로 많더라니⋯⋯.”

그것도 어쩌면 수종이가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전환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뒤이어 그가 감정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게 차으뜸이 파괴한 그 비밀 실험실과 관련된 상황인 줄 알았는데.”

성건우는 그를 힐긋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거랑 관련도 없지만은 않을 거야. 이 유적에도 비밀 실험실이 있는 거 기억하지?”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목화가 한숨을 내뱉었다.

“고등 무심자, 변이 생물, 비밀 실험실의 관계는 간접적일지도⋯⋯.”

이 대목에서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독창은 그 두 비밀 실험실에서 초래됐을 가능성이 커.”

‘헉.’

용여홍은 순간 말을 잃었다. 정말로 장목화의 추측이 정답일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비밀 실험실 정도는 되어야 독창 같은 높은 수준의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을 터였다.

그때, 백새벽이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 두 비밀 실험실은 어느 연구원에도 대응하지 않는데⋯⋯.”

적어도 여태까지 늪 1호 유적과 불모지 13호 유적 안의 비밀 실험실이 구세계 9대 연구원 중 한 곳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구조팀이 지금까지 발견한 갖가지 문제는 9대 연구원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혐의가 가장 큰 것은 제8 연구원이었다.

장목화가 웃었다.

“가설은 대담하게, 실증은 조심스럽게. 좋아, 이야기는 여기까지하고 최대한 빨리 도시 지도를 찾자. 호움 난임 센터가 어딨는지 알아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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