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화. 작은 함정
몇 차례 교대를 거친 후, 끄떡도 하지 않을 듯한 밤하늘 가장자리가 조금씩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장목화는 창밖을 주시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날이 밝아오네.”
꿈에서 깨어난 용여홍도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암살자는 오지 않았네요. 저희 기억도 조작되지 않았고요.”
방금 막 전에 기록한 중요 기억을 살폈지만 아무 문제도 없었다.
뒤이어 백새벽이 덧붙였다.
“몽유를 한 사람도, 실제적인 꿈에 빠진 사람도 없었어.”
이는 구조팀이 어떠한 후속 공격도 받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탁!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던 성건우가 오른 주먹으로 왼손바닥을 쳤다.
“알겠다!”
“또 뭘 알았는데?”
장목화의 목소리엔 무기력함도, 기묘한 기대감이 반씩 어려있었다.
성건우는 곧 뿌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녀석들이 우리한테 놀라 도망친 거예요!”
장목화가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닌 것 같은데. 어쩌면 암살자는 이미 왔었다가 우리의 삼엄한 경계를, 지친 기색 없이 멀쩡한 상태를 보고 몰래 물러난 건지도 몰라.”
“제일 비대칭인 작은 빨강이를 공격하지는 않았네요.”
성건우는 혀를 쯧쯧 차며 중얼거렸다. 대칭 강박증이 있는 사람답지 않은 적의 모습에 실망한 기색이었다.
한쪽이 기계 팔인 용여홍은 겉보기엔 구조팀 중 가장 비대칭적이었다.
그리고 가장 대칭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건 지능 로봇 게네바였다.
물론 그 역시 완전한 대칭은 아니었다. 게네바의 양팔에 장착된 무기 모듈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는 상황이라도 양쪽 외관이 완벽하게 일치하진 않았으며 무게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태산이 무너져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게 된 용여홍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적은 아직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이런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할 수는 없었다.
용여홍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장목화는 진지한 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지내는 것도 방법은 아냐. 도적질이야 천 일 동안이라도 할 수 있다지만, 어떻게 천 일 동안 방비를 할 수 있겠어?”
구조팀은 처음엔 단서의 실마리를 따라 적을 찾아내고 그들을 포착하기를, 어둠에 숨어 빛 아래 드러난 적을 지켜보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제의 상황은 완전 그 반대였다.
이 진아교의 거점으로 오는 동안 장목화는 상응하는 방안을 세우고 적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계획을 마련했었다. 그러나 상대는 예상외로 지나치게 신중했고, 처음부터 악몽의 힘을 사용했다.
이로 인해 게네바를 제외한 모두가 전멸당할 뻔했던 데다 이제는 목표를 찾기도 힘들어서 더 이상 이후의 작전은 이어나갈 수도 없었다.
“맞아요.”
용여홍이 장목화의 말에 동조하는 걸 보고, 성건우는 놀랍다는 듯 그를 위아래로 몇 번 훑어보았다.
“너답지 않은데.”
용여홍이 본능적으로 반문했다.
“왜?”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넌 늘 걱정이 한 아름이잖아. 위험한 건 무서워하고, 안정을 좋아하고.”
멍한 표정을 드러낸 용여홍은 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다 바르르 몸서리를 친 그가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어쩌죠? 계속 여기서 경계만 하며 힘을 빼요? 결국은 집중력이 떨어질 때가 올 텐데요. 우리는 음, 지능인이 아니라 탄소 기반인이니까요.”
백새벽이 제안했다.
“적들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볼까요?”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이번 작전은 이쯤에서 끝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최대한 빨리 악몽의 수족들을 따돌리고 13호 유적으로 가자.
우린 전에 방문한 불가 성지 두 군데 모두에서 이상 현상을 발견했고, 일정한 수확을 얻었어. 그러니 호움 난임 센터에서도 뭔가 얻을 수 있을 거야. 그 수확이 작지 않다면 우리 실력은 더 강해지겠지.
뭐 예를 들면 육식주의 예지 능력이 더 높아진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럼 우린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추격자를 찌르는 창법으로 악몽과 그의 수족들한테 대항할 수 있어.”
잠시 침묵하던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악몽과 수족을 다시 찾긴 엄청 힘들어질 거예요.”
장목화는 이에 대해 미리 생각해둔 듯 조금 더 진지한 얼굴을 했다.
“우리는 구세계 파괴 원인과 무심병의 기원을 조사하고 있어. 그리고 악몽은 이 둘과 어느 정도 관련돼 있을 가능성이 커. 이런 목표를 갖고 계속해서 나아가다 보면 우리는 언젠가 그들과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재차 침묵하던 성건우는 1, 2분 후 아래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우딕이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장목화도 그 마음을 이해했다. 최대한 빨리 진아교와 연합해 악몽을 공격하면 우딕이 강탈당한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미래를 기약하기엔 모든 게 다 늦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모든 이유를 곱씹던 장목화는 결국 한마디 말로만 대신했다.
“이게 바로 애쉬랜드니까.”
“이 빌어먹을 세상!”
성건우는 소리 내 표현했고, 용여홍은 같은 말을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이내 게네바는 금세 다른 주제로 관심을 옮겼다.
“몰래 숨은 적한테서는 어떻게 벗어나지? 우리를 미끼로 써서 함정을 만들어야 하나?”
장목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은 아주 신중해. 내 생각에 그들은 우리가 한계에 봉착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하는 것 같아. 그때가 되면 어떤 대책이라도 소용없을 거야. 뭐, 벗어나는 방법이야 간단해.”
뒤이어 그녀가 바닥을 가리켰다.
“진아교에 도움을 청하는 거야. 그 정도 도움이야 줄 수 있겠지.”
* * *
장목화는 표정이 각기 다른 팀원들을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 빠르지 않게 목적지에 도착한 그녀는 꿈 파괴자 클리프를 만나, 자신들의 곤경을 한 차례 간단히 설명했다.
“저희 종적을 감추는 데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클리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악몽을 쫓으려는 자네들 정신과 악몽에 대항하는 우리 전통은 일치하네. 이런 작은 일에 도움을 아낄 이유가 없지.”
뒤이어 그가 옆에 있던 진아교 교도에게 분부했다.
“스무 명을 데려와.”
부름을 받은 스무 명을 기다리는 동안 클리프가 다시금 설명했다.
“그들을 넷씩 한 팀으로 묶어 각기 다른 곳으로 보내겠네. 그럼 멀리서 인간 의식을 감지하는 각성자는 어느 팀이 자네들인지 구분하기 힘들 거야.”
‘좋은 생각이네!’
용여홍이 감탄했다.
그는 성건우에게 각성자라도 눈으로 보지 않는 상황에선 특징이 그리 또렷하지 않다면 어느 의식이 어느 사람에게 대응하는지 구분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인간 의식이 굉장히 미약한,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에 이른 사람 정도만 구별될 뿐이라고 했었다.
감탄하던 그는 잠시 망설이다 직접 물었다.
“그 암살자가 부근에 숨어 우리를 따라온다면요?”
그러자 장목화가 자신 있게 반박했다.
“그럴 리는 없어. 대칭 강박증을 그렇게 오래 억누를 순 없을 테니.”
클리프는 대칭 강박증이란 이야기에 약간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다음 순간, 백새벽이 또 하나의 허점을 지적했다.
“적 중에 한 명은 기억을 열람해 우리를 찾아낼 수 있어요.”
그 말에 장목화가 소리 내 웃었다.
“나한테 나름의 묘책이 있어. 그자는 올 순 있어도 돌아가진 못할 거야.”
용여홍은 조건반사적으로 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공성계를 쓰려는 건가?’
이때 꿈 파괴자 클리프가 감정이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정보를 찾아내다니, 정말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성건우가 겸손하게 대꾸했다.
이내 장목화는 팀원들을 한쪽으로 불러 기억 열람에 대항할 묘책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잔뜩 낮춰 속삭였다.
“이 순간부터 경계 교회당에서 에이돌른의 주시를 받던 그 상황과 그때의 느낌을 계속 떠올려. 한 마디로 그 방면 기억을 가장 열람하기 쉬운 상태로 만드는 거야. 기억을 열람한 상대가 그 상황을 체험할 수 있게.
에이돌른은 두려움을 관장하는 달지기고, 그자는 겁이 많은 사람이야. 그 둘이 합쳐지면 아주 굉장한 효과가 발생할지도 몰라.”
장목화가 씩 미소를 지었다.
이는 성건우가 수종이의 기운, 그러니까 그 틈에 관련한 기억을 바탕으로 말인 영역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인 상대를 놀라 달아나게 한 일에서 영감을 얻은 아이디어였다.
구조팀에겐 그 기억만 있을 뿐 에이돌른의 기운은 없지만, 상대는 틀림없는 진짜 달지기이니 나쁘지 않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었다.
용여홍은 감탄 어린 얼굴로 장목화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소리 없이 빙그레 웃고 있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잔인해⋯⋯.’
* * *
근처 블록, 소형 트럭.
벨프는 반쯤 감고 있던 눈을 떠 옆에 있는 허란을 바라보였다.
“저들이 저들 존재를 대체할 이들을 찾았어. 그들 기억을 다 뒤져볼 엄두는 안 나고. 란, 이런 식으로 우리를 따돌리고 도망치게 내버려 둘 거야?”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인 허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상관없어. 도망치라고 해.”
* * *
북안 뭇 산, 흰 늑대가 숨어있던 동굴 안.
지프에 경보기를 달아 숲 어딘가에 잘 숨겨놓은 구조팀은 각자 나무 상자를 하나씩 멘 채 손전등을 들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세 나무 상자엔 군용 외골격 장치가 하나씩 들어있었고, 하나엔 인공지능 갑옷 두 대를, 나머지 하나엔 예비용 무기와 탄약, 일부 식량을 담아두었다.
“정말로 안타깝군. 난 너희를 따라 호움 난임 센터를 탐색할 수 없으니.”
게네바는 눈으로 붉은빛을 번득이며 말했다. 그 말투에는 찰떡같이 흉내 낸 아쉬움이 어려 있었다.
그가 호움 난임 센터를 탐색할 수 없는 건 13호 유적에 봉인된 오하명이라는 괴물 때문이었다. 전자파를 조종할 수 있는 그는 원거리에서 각종 전자 기기를 통제할 수 있었다. 게네바 같은 지능인에게는 천적과 같았다.
게네바가 계속 말을 이었다.
“군용 외골격 장치와 인공지능 갑옷, 정말로 들고 가려고? 이건 어느 정도는 칩에 의지해서 일종의 전자 기기에 속해. 설마 야의 전자파 간섭 능력으로 오하명의 영향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현재 전자파에 대한 성건우의 영향력은 오하명에 훨씬 못 미쳤다. 성건우는 방해만 가능했지만 오하명은 조종도 가능했다. 그 격차는 매우 컸다.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 아냐?”
그 말을 들은 용여홍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광경이 떠올랐다. 조종자가 없는 세 군용 외골격 장치와 두 인공지능 갑옷이 살아나 유령처럼 우뚝 서서 구조팀을 향해 공격을 퍼붓는 광경이었다.
오하명이라면 정말로 그럴 수도 있었다.
이때 장목화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겐, 걱정하지 마. 우리가 주로 가지고 들어갈 건 인공지능 갑옷이니까. 인공지능 갑옷엔 뭘 지지할 골격이 없어. 착용자가 없는 한 스스로 일어나서 움직이진 못할 거야.
또 하나는 방어에 강하고, 하나는 주위 환경에 스스로를 감추는 게 능해. 둘 다 공격 수단도, 소리를 낼 수 있는 수단도 없고. 그러니 오하명에게 영향을 받더라도 우리에게 별 위해를 끼치지는 못해. 그보다는 작은 빨강이 기계 팔이 더 걱정되는데.”
용여홍의 기계 팔엔 보조 칩이 장착돼 있고 각종 세포나 조직과 격리돼 있어 오하명의 영향을 최저로 낮출 수 있는 생체 공학 의수와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