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98화 (598/649)

598화. 하마터면

저녁 무렵, 그린올리브는 재차 시끌벅적하고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진아교 거점 근처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거리의 길가에 평범한 소형 트럭이 멈췄다.

트럭 운전석에는 벨프가, 그 옆자리 조수석은 텅 비어있었다.

벨프는 곧 콘솔에 걸쳐진 태블릿 PC를 보고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거의 동시에 그의 의식은 보이지 않는 한 갈래의 촉수가 된 듯 짧지 않은 거리를 뛰어넘어 목표들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진입한 후, 벨프는 느껴지는 인간 의식을 따라 촉수를 넷으로 가른 뒤 그것들로 각기 다른 목표를 노렸다.

그중 한 명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에 대응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촉수 하나는 일단 멈춘 채 기다렸다.

그 사이 나머지 세 촉수는 각 목표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열람하는 한편, 정식적인 공격에 나서기 전 이들에게 무슨 수가 있을지 알아내려고 했다.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벨프는 이번에도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의 기억을 조작하면서 후에 있을 전투에서 그들이 서로를 배반하지 않도록 했다.

그는 성건우란 이름의 그 남자가 자신에게 공연히 겁을 준 게 아니라, 정말로 동료의 기억이 조작됐는지 확인하는 방법을 안다고 추정했다.

반고 바이오가 위험에 대항할 수 있을 거라 평가한 생명 천사 목걸이?

불가 성지의 이상한 기운이 녹아든 육식주?

불가 성지에서 찾아낸 옥부처?

굉장히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신비로운 번호?

수종이와 이두형 선생님의 도움?

벨프는 빠른 속도로 구조팀의 믿는 구석이 무엇인지 알아냈지만, 대체 수종이와 이두형에게 어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여러 차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 두 사람은 현재 퍼스트 시티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벨프는 정확한 답을 알기 위해서는 성건우의 기억을 확인할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조금 전 멈춘 촉수를 움직여 관련 기억을 조금씩 찾기 시작했다.

곧 벨프는 뭔가를 찾아냈다.

“이게 이 사람과 수종이의 평소 상호 작용인가?”

계속해서 기억을 열람하던 그때였다.

벨프의 눈앞에 돌연 활짝 벌어진 틈 하나가 나타났다.

틈 맞은편에서는 중첩된 수많은 그림자가 틈을 비집고 나오려는 것 같았다. 장막을 관통해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하는 듯했다. 또한 그것들의 사이사이에서는 대량의 미약한 빛이 어둠을 방출하고 있었다.

벨프의 보이지 않는 촉수는 그것을 목격하자마자 천적을 마주한 생물처럼, 총으로 관자놀이를 겨눠진 인간처럼 굳어버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내 보이지 않는 촉수가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수십 미터 떨어진 소형 트럭 안 벨프의 안색도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렸다. 이도 덜덜 떨리면서 딱딱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짧은 침묵 이후,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외쳤다.

“안돼! 날 내버려 둬!”

벨프는 뻗었던 네 개의 촉수를 황급히 거뒀다. 그 비정상적이고 무시무시한 틈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너무도 크고 격렬한 그 반응에 성건우의 기억을 열람하던 그의 기척 또한 낱낱이 드러났다.

* * *

진아교 거점 안에서 귀리빵을 씹던 성건우가 우뚝 멈췄다. 머릿속이 누군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처럼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었다.

각성자들은 서로 간에 어느 정도 실질적인 상호 작용이 있었던 순간부터 상대에게 더는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 성건우는 이 이상 현상의 근원을 포착했다.

그건 이곳으로부터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한 인간 의식이었다.

성건우는 귀리빵을 테이블에 내려놓음과 동시에 백새벽을 돌아보았다.

“육식주 좀 줘!”

동시에 그는 해당 인간 의식을 겨냥해 문학청년을 사용했다.

성건우는 기본적으로 상대가 그 겁 많고 유약한 말인 영역의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임을 알아차렸다.

* * *

소형 트럭 안.

진정하자마자 차에 시동을 걸고 떠나려던 벨프는 순간 우울해졌다. 자신이 실패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중얼중얼 새어나왔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미안합니다⋯⋯.”

* * *

벨프가 자괴감에 빠진 그때, 성건우의 외침을 듣고 백새벽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육식주를 던져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불쾌한 기분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함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성건우가 생명 천사 목걸이가 아닌 육식주를 찾은 건 거리 때문이었다.

생명 천사 목걸이는 목표의 심장을 바로 멎어버리게 해 그의 목숨을 거둘 수 있지만 영향 범위가 40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육식주의 영향 범위는 무려 120미터에 달했다.

지금 성건우가 포착한 목표와의 거리는 60~80미터 사이였다.

육식주의 직접적인 의식 박탈도 심장 마비보다 결코 약하지 않았다. 일격에 적의 전투 능력을 와해시킬 힘이 있었다.

다만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육식주를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3번뿐이라는 것이었는데, 성건우는 그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왼손에 육식주를 쥔 그는 곧바로 그 염주를 굴리기 시작했다.

전에는 상응하는 능력의 이름을 외쳐야만 해당 능력이 발휘됐지만, 지금의 육식주엔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란 불가 성지의 기이한 기운이 녹아있었다. 참 간편하게도 이제는 생각만으로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 중요한 순간, 어느 성건우일지 모를 성건우가 한 생각을 떠올렸다.

‘성건우들이 각자 시각 박탈, 청각 박탈, 후각 박탈, 촉각 박탈, 미각 박탈, 의식 박탈을 떠올리면서 빠르게 염주를 굴리면 어떤 능력이 발휘될까?’

그 순간, 냉정하고 이성적인 성건우가 얼른 이 쓸데없는 생각을 억누르고 마음속으로 의식 박탈을 외칠 준비를 했다.

바로 그때였다. 그는 육식주가 갑자기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꼭 나무 구슬을 엮어 만든 염주가 아닌 유리구슬로 만든 염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리고 성건우의 눈앞에는 청록색 빛이 나타났다. 떠오른 빛 속엔 하나하나의 광경들이 담겨 있었다.

그 광경 속에서, 성건우는 육식주로 목표의 의식 박탈에 성공했다.

이후 장목화에게 생명 천사 목걸이도 건네받은 그가 바로 창문을 통해 뛰어내린 뒤 적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말인 영역의 각성자가 혼수상태에 빠진 까닭에 그곳에는 약간의 혼란이 일어나 있었다. 모습을 숨기는 데 능한 황금 저울 영역의 각성자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로부터 40미터 이내에 진입한 성건우는 그 여자에 정신을 집중한 채 즉각 생명 천사 목걸이의 능력을 발휘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심장이 멎어버린 목표는 그대로 쓰러졌다.

성건우는 미소를 지으며 권총을 뽑아 들고는 악몽의 수족인 그 두 각성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총소리가 울려 퍼지는 사이 적들은 차례대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 광경들 모두가 눈 깜짝할 사이 분분히 흩어졌다가 새로운 화면으로 응집되었다.

그 화면 속에서 성건우는 눈을 번쩍 떴다.

순간 그의 시야를 꽉 채우는 끔찍한 광경이 있었다.

장목화는 심장 마비로 죽어 있었고, 의식을 박탈당한 용여홍 역시 난사 당해 사망했으며, 곳곳에 총상을 입은 백새벽의 생명도 꺼져가고 있었다. 또 게네바는 무엇도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한 채 붉은 눈만 빛내고 있었다.

‘이건⋯⋯.’

냉정하고 이성적인 성건우는 오른손을 들어 제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짝!

뺨이 타는 듯한 엄청난 고통에 몇 초간 현기증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내 성건우는 손에 육식주가 있긴 하지만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인간 의식은 수십 미터 밖에 자리한 적이 아닌 지척에 있는 용여홍임을 알아차렸다.

용여홍도, 장목화, 백새벽도 반쯤 눈이 감긴 채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또한 그들은 어느새 각자가 휴대하고 있던 연합202를 뽑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건대 겨냥하는 목표는 성건우인 것 같았다.

몽유(夢遊)!

몽유였다.

성건우는 이제야 휴고의 진정한 사인을 깨달았다. 악몽의 영향으로 몽유가 되어 비닐봉지로 스스로를 질식해 죽게 만든 것이었다.

지금 게네바의 붉은 눈빛도 멎어있었다. 그는 마치 다른 세상으로 떠나기라도 한 것처럼 주위 이변에 대한 전자파 신호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탕! 탕! 탕!

성건우는 일단 몸을 낮춰 동료들의 총격을 피했다.

총구에서 쏘아져 나간 몇 발의 총알은 탁자에 가 박히거나, 관통해 바닥을 꿰뚫거나, 잘못 튀어 하마터면 방 안에 있는 사람을 다치게 할 뻔했다.

그래도 소음기가 장착되지 않은 총소리에 구조팀원들 전체가 겨우 정신은 차렸다. 다만 그 표정들은 여전히 멍했다.

현재는 뭐라 길게 설명할 틈도 없어서 성건우가 냅다 큰소리로 외쳤다.

“몽유!”

그 사이 성건우의 정신은 수십 미터 이상 떨어진 구역으로 뻗어나갔다. 다시 말인 영역의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에게 집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이동해 그의 의식을 새롭게 가리고 있었다.

‘몽유?’

눈동자를 살짝 굴리던 장목화는 휴고에게 있었던 일을 떠올린 뒤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를 파악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악몽의 영향을 받아, 잠들어버린 자신들의 꿈이 이끄는 대로 동료를 공격한 것이었다.

만약 성건우가 때맞춰 깨어나지 않았다면, 게네바를 제외한 구조팀의 나머지 팀원 중 누구도 무사하지 못했을 터였다.

무엇보다 장목화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건 자신이 계속 보조 칩으로 몸 상태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잠이 든 순간 생체 공학 의수가 고압 전류를 흘려 강제로 깨어나게 해둔 상태였는데도 효과는 없었다.

몽유할 때의 몸 상태는 정상적일 때와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깊이 잠들어 있을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래서 기능이 뛰어나지 않은 보조 칩은 몽유 상태에서의 활동과 정상적인 활동을 구분하지 못했다.

장목화는 곧 머신 헤븐에서 고급 보조 칩을 구해 생체 공학 의수를 업그레이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도 계속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각자 다 대칭적이지 않게 만들어! 그리고 각자 주위 동정도 감시하고!”

이야기하는 사이 오른쪽 팔이 마비된 장목화는 왼손으로 총을 쥔 채 전방을 조준하는 자세를 취했다.

대칭 강박증을 앓고 있는 적을 자극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러지 않는다면 모습을 숨기는 데 능한 적은 충분한 인내심만 발휘해도 기회를 봐서 가볍게 그들을 암살할 수 있었다.

그런 각성자와 맞서본 적은 없으니, 장목화도 상대가 생물 전기 신호까지 숨길 수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용여홍도 그 말을 듣자마자 오른 소매를 당겨 시커먼 기계 팔을 드러냈다. 이편이 기계 팔의 여러 기능을 사용하기에 더 도움이 되기도 했다.

백새벽 역시 소매를 걷고 몰래 어인형 생체 공학 의수를 사용하면서 문가와 창가를 향해 저주파를 발산했다.

이는 저주파를 음파 탐지기로 삼아 숨은 적을 찾는 동시에, 창문이나 문을 통해 잠입할지 모르는 상대에게 저주파로 타격을 가하기 위함이었다.

총성을 듣고 마찬가지로 정신을 차린 게네바도 각종 방법으로 주위 상황을 살피며 중저음 합성음을 냈다.

“저들은 악몽의 힘을 빌려 환경 속 전자파 신호를 왜곡할 수도 있어!”

그들이 왜곡할 수 있는 신호에는 광선도 포함돼 있었다.

“정말 신중하네. 처음부터 전력을 다 발휘하다니. 육식주의 숨겨진 특성이 좋지 않은 미래를 보여줘서 참 다행이네.”

자리에서 일어난 성건우는 한 손에 염주를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하얀 붕대를 꺼내 들었다.

그는 아직 전에 포착한 인간 의식은 찾지 못했지만, 현재 왼쪽 머리를 붕대로 감는 데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렇게 구조팀 식구들 전체가 대칭 강박증 환자에게 절대 용서받지 못할 모습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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