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97화 (597/649)

597화. 기억

그린올리브 구역을 우회해 레드울프 구역에 이른 구조팀은 다시 또 그린올리브 구역으로 우회하여 돌아갔다.

성건우는 장목화의 지시에 따라 한 평범한 5층짜리 아파트 앞에 차를 세웠다. 바로 진아교의 거점이었다.

그들을 따라온 지프 안의 용여홍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크게 떴다.

이때 차 문을 열고 내린 장목화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오늘 밤에는 여기 방을 빌려서 지내자.”

‘하, 역시 팀장님이시네⋯⋯.’

용여홍은 그제야 장목화의 의도를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진아교의 이 거점을 아는 사람은 소수의 몇몇뿐이었다. 이곳은 대외적으로는 방을 빌려주는 아파트로 위장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방을 빌리는 것은 매우 그럴듯해 보였다.

때가 되어 구조팀이 정말로 우위를 잡고 진아교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분명 이 일에 가담하려 할 것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진아교가 구조팀의 행위를 묵인하고 이곳의 방을 빌려주어야만 했다.

먼저 아파트로 향한 장목화와 성건우는 아니나 다를까 경비로 위장하고 있는 진아교 구성원에게 저지당했다.

“방을 빌리려고 하는데요.”

장목화는 매우 직접적으로 말했다.

흠칫 놀란 경비가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아파트 주인분께 여쭤보겠습니다.”

이내 돌아선 그는 황급히 주인 역할을 할만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대략 7, 8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입구로 돌아온 그는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구조팀원들에게 말했다.

“들어가시죠. 꼭대기 층에 있는 방 하나가 막 비었네요.”

그는 방세가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장목화가 웃었다.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감사합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구조팀은 꼭대기 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성건우는 전술 배낭을 앞으로 돌려 메더니, 안에서 생명 천사 목걸이를 꺼냈다.

이로 인해 그는 어쩔 수 없이 한쪽 발로만 서 있어야 했다.

성건우는 곧장 그 은제 목걸이를 장목화에게 던져보냈다.

“엥?”

반사적으로 왼손을 뻗은 장목화가 그걸 받자마자 동시에 그녀의 오른쪽 팔이 무기력하게 축 처졌다.

이건 회사에서 위험에 대적할 때 쓰라고 알려준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팀에서 가장 강한 자가 가졌을 때 최대 효능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장목화가 의아한 얼굴로 성건우를 보자, 그가 환하게 웃었다.

“목표와 동료가 악몽에서 빌린 힘을 사용할까 걱정돼서요. 그 목걸이가 있으면 그런 위험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을 거예요.”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장목화가 물었다.

“그럼 너는?”

성건우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다시 전술 배낭에서 육식주를 꺼냈다. 그러고는 용여홍에게 그걸 던졌다.

“받아.”

“난 그거 쓰지도 못해.”

육식주를 받아 든 용여홍의 눈동자가 순간 붉게 변했다. 일반인인 그는 부작용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엔 불가 성지의 기이한 기운이 담겨 있어. 악몽의 영향을 어느 정도 낮춰줄 거야. 그러니까 그걸 꼭 쥐고 있어야 해. 쉬는 시간에도.”

매우 진지하게 말하던 성건우는 또 다른 인격의 얼굴로 씩 웃었다.

“때가 되면 네 꿈은 뒤죽박죽 어지러워질 거야. 악몽이라도 분명히 그걸 직시하지 않고는 못 견딜걸.”

머뭇거리던 용여홍이 응했다.

“알겠어⋯⋯.”

이때 솔직한 게네바가 걱정을 드러냈다.

“허혈성괴사가 초래되지는 않겠지?”

순간 방 안의 분위기는 매우 어색해졌다.

다행히 보통 사람이 아닌 성건우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유지한 채 주머니에서 옥부처를 꺼내 이번엔 백새벽에게 던져주었다.

“거기도 나름의 특징이 있어.”

잠시 고민하던 백새벽이 말했다.

“작은 빨강이 거랑 바꾸면 안 돼? 육식주의 부작용으로 인한 고통, 난 전에 그런 고통을 견뎌본 적이 있어서 익숙해. 참을 수 있을 거야.”

전과 달리 과거 일을 얘기하는 백새벽은 차분하고 침착해보였다.

“그래도 되겠다.”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백새벽과 용여홍이 물건을 교환하자, 장목화는 의혹과 걱정이 반씩 어린 눈으로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특성을 가진 물건을 전부 우리한테 나눠줘 버리면 너는 어쩌려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던 성건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는 이두형 선생님과 수종이가 있잖아요.”

‘수종’을 언급하는 그 목소리에는 유난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자 장목화는 성건우의 진짜 의도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맞아, 건우의 기원의 바다에 정말로 수종이의 기운이 남아있었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장목화를 보고 성건우는 다시 게네바를 쳐다봤다.

“겐, 네 것도 있어.”

성건우는 곧 새로 마련한 핸드폰을 꺼내 게네바에게 던졌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받아든 게네바가 입을 열었다.

“난 필요 없어, 난 악몽에 영향받지 않을 테니까.”

“아니, 우리 팀원은 다 똑같이 보호받아야 해.”

성건우는 불공평한 처사를 절대 용납할 수는 없다는 듯 말했다.

그에 게네바는 붉은 눈빛을 한동안 번득이다가 결국 뜻을 꺾었다.

다시 성건우가 덧붙였다.

“그건 우리 마지막 희망이야.”

성건우의 말을 정확히 알아차린 장목화가 그를 대신해 설명에 나섰다.

“겐, 넌 프로그램을 만들어 아비아한테 얻어온 그 번호를 시뮬레이션하고 그걸 핸드폰에 입력할 방법을 찾아줘. 우리가 극단적인 위험에 빠지면 망설이지 말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하는 거야.”

아비아에게 얻어온 그 신비로운 번호는 엄청난 비밀에 연루돼 있었다. 일찍이 퍼스트 시티의 황제였던 오레이도 그것을 이상하리만치 무시무시하고 위험하다고 평가한 바 있었다.

또한 그 번호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핸드폰에 입력할 수 없었다. 상응하는 부호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구조팀에는 게네바가 있고, 그는 이러한 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핸드폰 조작 시스템을 만들 수도 있었다. 거기에 지능 로봇은 꿈을 꿀 수 없으니 악몽에 영향을 받지도 않았다.

게네바라면 곁에서 팀원들 상태를 지켜보면서 알맞은 대응을 할 수 있었다. 혹시 뭔가 느껴진다 싶으면 동료들을 흔들어 깨우고, 전기 충격을 주고, 경보음을 울리고, 신비로운 번호를 입력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장목화는 지능인에게 감탄해 마지 않았다.

한편 모든 팀원이 나눠 받은 특이한 물건을 본 용여홍은 이 팀이 든든한 기반을 갖췄음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자신들이 이것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든 없든, 안 갖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터였다.

물론 성건우의 손은 비었지만 그의 기원의 바다에도 특별한 데가 있었다.

장목화가 손뼉을 치며 팀원들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좋아, 이제부터 할 일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거야.”

백새벽은 입술을 오므리며 침묵했다. 꼭 뭔가를 참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오직 행동으로만 팀장의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나도 준비를 좀 해야겠다.”

성건우 역시 누구보다 먼저 남루한 천 소파 위에 드러누우며 웃었다. 그런 뒤 오른손을 들어 양쪽 관자놀이를 눌렀다.

* * *

심령의 복도.

성건우는 이번엔 그의 방, 131호 안에 나타났다.

전과 달리 밖으로 나서는 대신 뒤돌아선 그는 복도를 따라 그 협소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을 에워싼 어느 벽 위엔 액정 TV가 고정돼있고, TV에서는 옅은 안개에 휩싸인 바다와 위에 보일 듯 말 듯 자리한 섬들이 방영되고 있었다.

성건우의 기원의 바다가 구현된 결과였다.

이내 성건우는 오른손을 뻗어 액정 TV 표면에 얹었다.

그 순간, 그가 돌연 흐릿해지면서 그 안에 녹아들었다.

사라진 성건우의 인영은 곧 기원의 바다 허공에서 나타났다.

고개를 든 성건우는 상공을 가로지르는 큼지막한 틈에 시선을 고정했다.

틈은 이 세상의 아물지 않는 상처처럼 보였다.

그 틈 너머론 대량의 빛이 미약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거기다 수많은 그림자가 층층이 겹쳐 있기도 했다.

곧이어 흰색과 파란색이 어우러진 확성기를 구현한 성건우는 그 틈을 향해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수종아! 수종아!”

열정과 기대를 안은 그의 외침은 장장 3분이나 이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틈 너머에서 돌아오는 호응은 없었다.

“방음 효과가 그렇게나 좋은가?”

성건우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후 성실한 성건우와 성급한 성건우를 분리해낸 그는 둘을 자신의 등에서 뻗어 나오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성건우는 날개 한 쌍이 돋아났다.

성실한 성건우와 성급한 성건우를 퍼덕이는 성건우는 그대로 틈을 향해 날아가 그 표면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감정을 중시하는, 어렸을 적 옷차림의 성건우가 아득하고 어두운 틈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수종아! 수종아!”

목소리는 맞은편을 향해 퍼졌지만 바다에 던져진 돌처럼 별다른 기척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이렇다 할 변화는 하나도 없었다.

결국 성건우는 방법을 바꿨다.

“이두형 선생님이 왔다! 이두형 선생님이 왔어!”

틈 너머 어둠은 여전히 적막했다.

“소용없잖아!”

성급한 성건우가 곧장 감정을 중시하는 성건우와 자리를 바꿨다.

그는 양손에 힘을 주어 틈을 더 벌리려 애썼다. 수종이가 안 오면 직접 그 안으로 파고들어 수종이를 만날 작정이었다.

다음 순간 그 성건우의 몸에서 여러 성건우가 돋아났다.

나머지 일곱 성건우는 그의 허벅지를 끌어안거나, 팔을 움켜쥐거나, 허리를 감싸 안거나, 머리를 잡아당기며 전력을 다해 이 성급한 녀석을 저지했다.

틈 맞은편의 상황이 어떤지, 심령 세계 속의 수종은 또 어떤지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무심자의 왕으로서의 풍채를 드러낸다면 성급한 성건우는 아홉 성건우를 끌고 곧장 무심자가 될지도 몰랐다.

“알겠⋯⋯, 어⋯⋯. 포기하면⋯⋯, 되잖⋯⋯.”

입까지 틀어막힌 성급한 성건우는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나머지 성건우들은 다시 빠르게 그와 하나로 합쳐졌다. 이제는 등에서 날개처럼 돋아난 두 성건우만 남은 상황이었다.

틈은 전보다 더 벌어져 있었다. 이를 확인한 성건우는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했다.

“사실 조금 더 벌려봐도 될 것 같은데. 이곳은 내 심령 세계잖아. 내 기억 창고 같은 곳이라고.”

성건우 민주협의회의 공정한 투표 결과, 결국 그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성건우들은 합심해 허공의 틈을 거의 두 배로 늘렸다.

틈 건너에서는 수많은 그림자가 몰려들어 출구를 막았고, 번득이는 미약한 빛은 짙은 어둠이 되어선 성건우의 기원의 바다에까지 쳐들어왔다.

틈 주위의 하늘이 짙은 그림자에 뒤덮인 것 같았다.

성건우는 곧 성실한 성건우와 성급한 성건우를 퍼덕여 뒤로 약간 물러난 채 틈이 보이는 갖가지 변화를 주시했다.

이내 상황은 안정되었으며, 어둠은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다.

성건우는 출구를 막은 중첩된 그림자를 향해 다시 돌진하며 외쳤다.

“수종아! 수종아!”

돌아오는 답도, 기이한 변화도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성건우가 탄식을 내뱉었다.

“수종이 상황만 제대로 알아낸다면 지금보다 더 과감한 시도도 할 수 있을 텐데. 하……, 안타깝게도 숙명통이 없으니 직접 힘을 써야지.”

아래쪽에서 미약한 빛을 번득이는 허상의 바다로 시선을 돌리던 성건우는 자신과 수종이 함께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만약 숙명통이 있다면 이제는 떠오르지도 않는 기억까지 포함된, 수종이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즉각 소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능력이 없으니, 기억을 일일이 떠올리며 동원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성건우가 기억을 떠올림에 따라 허상의 바다에서는 하나하나의 미약한 빛이 날아올라 틈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한 빛들에는 전부 수종이와 관련된 광경이 담겨 있었다.

미약한 빛들이 어느 정도 모이자 성건우는 두 손을 모으곤 그것들이 사방팔방에서 틈을 뒤덮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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