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6화. 추적
그렇게 한 차례 확인을 거친 장목화와 성건우는 용여홍과 백새벽의 기억이 조작되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물론 상대에게 노출이 되었는지까지는 알 길이 없었다.
용여홍이 의혹을 표했다.
“설마 목표는 말인 영역의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억을 열람하고 조작할 수 없었던 걸까? 층을 잘못 찾아온 그 사람은 정말로 단순한 실수를 한 것뿐일까?”
반면 백새벽은 비교적 굳건했다.
“그렇게 공교롭지는 않을 거야.”
장목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난 오히려 목표가 말인 영역의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일 거라는 가설에 더 믿음이 가.”
“왜요?”
용여홍이 내뱉듯 묻다가, 뒤이어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혹시 우리 기억이 조작당하지 않은 건 네 방법이 통했기 때문일까?”
성건우가 뿌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그런 것 같네.”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건데?”
용여홍이 호기심을 표했다.
그러자 성건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공성계.”
용여홍은 한동안 반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니까, 통화 창을 숨기는 건 사실 아무 의미도 없던 거였어?”
성건우의 웃음은 전보다 더 찬란해졌다.
“의미야 있지. 그 녀석을 놀라게 했잖아!”
여전히 멍한 표정을 거두지 못한 백새벽과 용여홍의 모습에 장목화가 설명에 나섰다.
“건우는 그저 그 사람에게 충분한 방법이 있는 척만 한 거야. 다른 사람에게는 별 효과도 없는 수였겠지만, 그자에게는 직방이었어.
겁 많고 유약한 사람은 의심이 많고 신중할 수밖에 없거든. 건우의 말을 곱씹어보니까 정말 건우한테 무슨 수가 있는 줄 알고 기회를 놓칠지언정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린 거야.”
잠시 고민하던 백새벽이 반문했다.
“겁 많고 유약하다고요?”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과 성건우가 우딕의 집에서 얻은 수확과 그를 기반으로 한 추측을 전했다. 그러고는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구세계에서의 말인은 비천하고, 순진하고, 평범하고, 노예근성으로 가득 찬 자를 일컫는 말이었잖아? 그중 비천함과 노예근성은 모종의 의미에서 보자면 겁과 유약함을 가리켜. 그러니까 그런 소심증을 대가로 치른 상대는 말인 영역에 속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그런 부정적인 영향에 감염된 우딕은 거칠고 험악해 보이면서도 감히 다른 사람에게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 거야.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게 아니라, 그럴 수 없었던 거지.”
이 설명은 장목화가 정신병원에서 우딕의 병세를 듣고 느꼈던 첫 번째 의혹을 해소해주었다.
상황을 천천히 되새겨보던 용여홍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니까 모든 일이 연결되네요. 합리적인 설명이에요.”
장목화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최대한 빨리 이동하고 어떤 함정을 설치할지 고민해야 해.”
“왜요?”
용여홍이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이에 성건우가 웃으며 반문했다.
“소심증이 있는 사람이 목표에게 문제가 있단 걸 알면 뭘 할 것 같아?”
용여홍이 막 입을 열려던 그때, 백새벽이 답을 내놓았다.
“도우미를, 동료를 찾겠지!”
* * *
어느 오래된 건물 안.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문을 열었다.
방 안의 상황을 제대로 관찰하기도 전, 동료의 냉랭한 목소리가 울렸다.
“가서 머리부터 정리해. 대칭이 아니잖아. 내가 바라는 게 많지 않다는 거 너도 잘 알 텐데. 못하겠다면 얼마든 네 머리 박박 밀어버릴 수도 있어.”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왼쪽에 자리한 전신거울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목표를 찾았어.”
그의 뒤쪽에도 똑같이 생긴 전신거울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없는 듯 보이는 이 방에, 재차 여자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지금 바로 박사님께 알리지.”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순간 의혹을 표했다.
“뭐?”
그의 동료는 부유하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잖아.”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금갈색 짧은 머리를 정리한 후에야 방에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투덜거렸다.
“란, 애쉬랜드를 통틀어 나처럼 머리를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데 공을 들이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 아, 너 빼고. 아직도 비대칭이 그렇게 싫어?”
재차 울려 퍼진 여자의 목소리는 전처럼 냉랭하지는 않았다.
“벨프,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러지 않으면 내가 그것들을 다 파내버릴 거니까. 정말이지, 유전자 개량의 효과가 그렇게나 형편없다니. 믿기 힘들다니까. 너는 말 그대로 불량품이야.”
이야기를 하는 사이 거실 안, 그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자는 흰 셔츠에 청재킷, 같은 스타일의 청바지 차림에 챙도 넓고 높기도 한 펠트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든 게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달걀형 얼굴, 버들잎 같은 눈썹, 검고 긴 머리와 빛나는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인간의 얼굴과 신체는 완벽한 대칭을 이룰 수 없었다. 약간의 차이는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 허란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예술가의 작품처럼, 중앙에 수직선을 긋고 접으면 꼭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느낌보단 인공적인 느낌이 훨씬 강했다.
벨프는 불량품이라는 평가에 화가 났다. 하지만 감히 그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엄두는 내지 못하고 조용히 투덜거리기만 했다.
“란, 사실 난 잘 모르겠어. 왜 끊임없이 네 몸에 손을 대는 거야? 넌 어차피 네 모습을 못 보니 그 빌어먹을 대칭 강박증에 통제당하진 않잖아.”
“영원히 거울을 보지 말고 살라고? 그것만큼 잔인한 일이 또 어딨어.”
허란이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도 수많은 정련을 거친 듯, 양쪽 입꼬리가 올라간 정도는 그야말로 똑같았다.
벨프는 반박하는 대신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도 옷과 머리를 정리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 있어? 밖을 한 바퀴 돌거나 한번 전투만 해도 어차피 전부 다 흐트러질 텐데.”
허란이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논리네. 그럼 어차피 밖으로 배출될 음식을 뭐 하러 매일 꼬박꼬박 챙겨 먹어?”
동시에 그녀의 눈빛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유리 티 테이블로 향했다.
티 테이블 위 좌우 양쪽에는 똑같이 생긴 물컵과 붉은색 보석함이 하나씩 배치되어 있었고 가운데에는 받침대에 놓인 태블릿 PC가 놓여 있었다.
그 태블릿 PC 카메라에서 아래로 늘어진 암적색 선 하나가 또 테이블을 균등하게 나누고 있었다.
벨프는 치미는 짜증을 참으며 다음 임무에는 절대 이 빌어먹을 강박증 환자와 함께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속으로 저주를 내뱉는 사이 그는 다른 동료를 떠올렸다. 다른 동료들 역시 전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밉살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유약하고 겁 많은 사람은 늘 주위에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다.
다시 심신을 가다듬은 벨프는 허란을 쳐다보았다.
대칭을 매우 중요시하는 여자는 태블릿 PC 화면을 밝히고 잠금을 켠 다음 전보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실행한 뒤 일련의 숫자를 입력했다.
곧이어 태블릿 PC 화면에 네트워크에 연결돼 있지 않다는 알림이 뜨자 허란은 곧장 연결을 선택했다.
액정 화면이 순간 어두워졌다. 배터리가 바닥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런데 또 얼마 가지 않아 화면이 밝혀지고 흐릿한 인영 하나가 보였다.
인영은 통창 앞에 서 있었는데 창밖은 은하수가 지표면에 내려앉은 듯 훤하게 밝았다. 더불어 그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구름을 찌를 것만 같은 높은 탑 하나도 어렴풋이 보였다.
주위에 노이즈가 낀 그 화면 속에서 인영이 물었다.
- 목표를 발견했나?
허란은 고개를 숙이며 매우 공손하게 답했다.
“예, 박사님.”
고개를 숙이는 행동은 그녀의 경외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피를 거꾸로 솟게 하는 화면을 보지 않으려는 것이기도 했다.
박사는 통창 정중앙이 아닌 왼쪽으로 살짝 치우쳐진 곳에 서 있었다.
이어 벨프는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공손하게 말했다.
“목표의 은신처를 찾았습니다. 근데 그들도 이 사실을 눈치챈 듯합니다.”
- 그래서 또 물러났나?
화면 속 흐릿한 인영은 벨프의 행동 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다.
이후 그의 말투가 엄숙해졌다.
- 란, 넌 당장 이 태블릿 PC를 가지고 벨프와 함께 목표의 은신처로 가라. 반드시 그들을 잡아야 한다!
“예, 박사님!”
허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치지직-
잡음이 울려 퍼지는 사이 그녀는 티 테이블 한쪽에 놓여 있던 붉은색 보석함을 열었다. 안에는 굉장히 고루한 디자인의 금반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 * *
성건우는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을 이끌고 게네바가 있는 방으로 갔다.
“발견된 거라도 있어?”
장목화의 말투는 평소보다 약간 빨랐다.
게네바는 금속 목을 좌우로 움직였다.
“아니. 모든 건 다 정상이다.”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럼 그쪽은 확실히 함정인가 봐. 우리가 얻은 정보는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기억에서 기인한 거야.”
게네바가 무슨 답을 하기 전, 그녀는 바로 지시를 내렸다.
“목표랑 동료는 이미 우리 위치를 파악했어. 지금 당장 철수해야 해. 자세한 상황은 차에서 이야기해줄게.”
구조팀은 매우 빠르게 일부 카메라를 회수한 뒤 지프와 빌린 소형 승용차에 나뉘어 탑승했다.
이번에 장목화, 성건우가 탄 차에 오른 게네바는 두 사람에게 우딕의 집에서 얻은 수확과 그에 따른 추측, 백새벽과 용여홍에게 있었던 일을 들었다.
“한 명은 말인 영역에 속한 각성자로 소심증을 대가로 치렀고 대대적인 기억 열람, 조작이 가능하며, 다른 한 명은 황금 저울 영역 각성자로 대칭 강박증이 대가고 능력은 아직 파악된 바 없다⋯⋯.”
게네바는 눈에 붉은빛을 몇 차례 번득이는 동안 모든 디테일을 상응하는 모델에 입력한 뒤 분석을 진행했다.
“여태까지 우리 행적은 이미 폭로됐어. 적들이 언제 닥쳐올지, 언제 기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일단 이동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위험한 적을 마주한 상황에선 반드시 주도권을 쥐고 있어야 했다.
장목화는 곧 방향을 꺾고 접어든 골목길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따라 최대한 돌아가야 해.”
그래야 목격자의 기억을 통해 그들을 추적하기가 힘들어졌다.
게네바가 붉은 눈빛을 번득였다.
“사실 그런 거리와 골목길 출구는 고정돼있다. 몇 개밖에 안 돼. 만약 상대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범위를 확대해 모든 출구 부근 주민들의 기억을 한 번씩 열람한다면 우리를 추적할 수 있다.
그러니 아무도 없는 곳에서 차와 우리도 다 위장하고 인간 의식을 감지하면서 목격자가 없는 틈을 타 나오는 게 좋아.
야의 사유 유도는 논리적 능력과 사고방식만 방해할 수 있을 뿐, 기억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는 게 참 안타까울 따름이군.”
게네바가 보기에 지금의 방안은 적을 한동안 지체시켜 더 많은 준비 시간을 버는 데 그칠 뿐이었다.
장목화는 성건우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렇게까지 힘 들일 필요는 없어.”
게네바는 붉은 눈빛을 몇 번 더 번득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